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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천장암(서산 연암산)
11월 13일(목) 수능일에 나는 하루 휴가를 내어 서산 천장암을 다녀왔다. 천장암은 경허스님과 수월스님의 족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전 날은 지역엔젤매칭펀드 결성 관련 중소기업청(대전) 출장을 다녀왔고, 수능일 다음날은 ‘중소기업 금융 지원 기관 협의회(한국은행 광주전남본부 주관)’ 출장이 계획되어 있어 샌드위치 데이 목요일에 올해 처음으로 휴가(1일)를 내기로 한 것이다.
휴가 계획을 세우고, 아내에게 ‘함께 쉬자’고 하니 ‘바빠서 안된단다’. 아내도 올해 휴가를 단 하루도 해 본적이 없다. 바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바쁘기로서니 남편과 함께 휴가를 내서 하루도 쉴 여유가 없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고향 친구 M에게 연락을 하니까 ‘12일 까지 연락을 주겠다’더니 끝내 연락이 없어서 퇴근 시간 무렵에 내가 전화를 했더니 ‘바빠서 안된다. 미안하다’고 했다.
두어 달 전 서울 출장 다녀오면서 알게 된 L에게 제안했더니 ‘서울에서 친구들이 광주에 와서 목요일, 금요일 함께 해야 하므로 안된다’고 했다.
서울 도반에게도 제안했더니 ‘안된다’였다. 갑작스런 제안에 ‘OK’하기가 어려웠겠지. 나보살에게 전화했더니 ‘그 날 따라 제일 바쁘네’하며 마다했다. 5명 지인(공교롭게도 여인들이다) 모두에게 퇴짜를 맞은 셈이다. 3명은 일을 하고 있고, 2명은 전업 주부다.
오늘 수능시험을 치르는 셋째 아이의 시험장은 집 근처인 문성고다. 집 앞에 있는 학교를 놔두고, 멀리 화정동에 있는 S학교를 다니는 녀석은 시험이라도 집 부근에서 보라고 하늘이 배려한 것일까. 아내랑, 아이 셋이서 학교까지 함께 간 다음 아이가 시험장 안으로 들어가자 부부는 집으로 돌아와 아내는 출근하고, 나는 9시 30분에 천장암으로 향했다.
12시 30분경 절 입구인 서산시 고북면 사무소 지역에 도착, 식당에서 된장찌개를 먹고 천장암 행. 절아래 마을에서 절로 올라가는 길은 울창한 소나무 숲인 데 시멘트길이다. 예전에는 스님들이 이 길을 오갈 때, 철 따라 동박새, 직박구리, 참새, 제비, 까치, 때까치, 멧새들이 반가이 맞이해 주었고, 다람쥐, 산토끼, 청설모, 오소리, 너구리, 심지어 호랑이까지도 마중과 배웅을 했다는 이 길은 현대 문명 혜택(?)으로 편안하게 자동차를 타고 을라갔지만 세속의 때가 덕지덕지 붙은 나에겐 새 한 마리, 산짐승 한 마리도 가까이 하지 않았다. 주차장에 이르니 ‘암자 90m'란 소박한 표지판이 보였다.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천장암이다. 13시 30분이다.
천장암(天藏庵)! 하늘이 감춘 암자다. 연암산(燕巖山)은 제비가 바위에 둥지를 튼 산이란다. 633년 백제 때 담화스님이 창건한 암자로 뒤에는 연암산(460m), 앞에는 삼준산이 병풍처럼 둘러 서 있고, 서해바다가 가까우며, 해미읍, 고북농공단지가 지척에 있지만 천장암은 꼭꼭 숨어있는 셈이다. 가람배치는 남향인 천장암을 중심으로 우측에 선원, 좌측에 설법당이 있다. 천장암 편액이 걸린 집의 기둥의 주련은 경허스님의 오도송이다.
홀연 코뚜레를 꿸 콧구멍이 없는 소(牛)라는 말을 듣고
삼천 대천 세계가 내 집임을 알았네
유월 연암산 아랫길에
나는 일없이 태평가를 부르네
천장암은 해제기간이어서 인적이 없고, 어린 검정색 강아지가 인기척을 듣고 쫄랑 쫄랑 내 뒤를 따랐다. 사람이 그리워서일까? 설법당앞엔 흰 고양이가 졸고 있다.
천장암은 정면 6칸, 측면 4칸의 합각 집이다. 천장암 방안에 들어가니 관세음보살을 모셔놓고, 양 옆엔 경허스님과 만공스님 초상화가 걸려 있다. 禮를 다하고 밖으로 나왔다. 천장암 마당에는 7층 석탑이 서 있는 데 고려시대 양식이지만 작고 조잡하다.
경허스님(1849~1912)이 공부하던 방은 반 평(가로 1.3×세로2.3.m)도 안되는 좁은 방인 데, 원성문(圓成門)이란 편액이 걸려 있는 건 이 방에서 1년 동안 참선하여 깨달음을 얻었기에 유래한 이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방안에는 경허스님 사진, 주장자 1개와 짚신 한 켤레와 좌복이 있어서 예를 올렸는데, 스님은 이 방에서 득도하셨던 것이다.
옆방은 경허스님의 제자들인 혜월, 만공, 수월스님 3명이 함께 거처한 방인 데 조금 더 컸다. 이 방에도 들어가 고승들의 향내를 맡으려 애를 썼다. 시봉 스님들의 방에선 좌대에 앉으니 산속에 어울리지 않는 조립식 콘테이너로 만든 지장암이 정면에 있다.
방을 나와 부엌을 살펴보고 있노라니 행자가 다가와 가마솥을 가리키며, ‘수월스님(1854~1928)이 이 곳 부엌에서 방광(放光)한 곳입니다.’라며 설명해 주었다. 이 곳 천장암에 템플스테이에 참가했다가 발심을 일으켜 행자가 되었다는 젊은 청년은 이 암자가 그렇게 유명(경허를 비롯한 세 스님이 모두 高德해서)한 곳인 줄 몰랐다며 웃는 데, 차가운 날씨에 얼굴이 푸르뎅뎅하다. 속가의 성은 李씨이니 이행자인 셈이다.
『달을 듣는 강물(김진태)』에 의하면 어느 날, 밤중에 천장암이 있는 연암산에 큰 불이 나서 마을 사람들이 불을 끄려 절에 올라 왔는 데, 산불이 아니라 부엌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더라는 것. 사람들이 부엌문을 열어보니 수월스님이 군불을 때는 데, 온 산에 불이 난 듯 환했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사람들은 수월스님이 득도한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현재 천장암 주지스님의 할머니도 직접 경험한 일이라고 이(李)행자가 거듭 확인해 주었다. 이미 수월스님은 토굴에서 짚신을 삼으면서 망치를 내리칠 때, 문득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위 책에 의하면, 수월스님이 행자생활 하던 시절, 낮에 땔감을 하고, 밤엔 물레방아로 방아를 찧을 때 얼마나 피곤했던지 절구통에 머리를 박고 잠들었는 데, 신기하게도 물레방아는 돌고 있는 데 공이가 멈추어 수월행자를 보호한 기적이 있었다. 지금은 물레방아는 어디에도 없다.
또한, 천수경으로 득도한 수월스님은 득도한 후에는 3가지 不忘念智를 얻어 잠을 자지 않았고, 한 번 들으면(聞) 절대로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고, 아픈 사람을 만져 주기만 하면 환자의 병이 순간 나아버렸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가 소문나자 아픈 사람들이 구름처럼 찾아와 병 낫기를 직접 체험했던 것으로 유마거사의 ‘네가 아프면 나도 아프다’는 동병상련을 넘어서 직접 치료해 준 보살행이야말로 환자들에겐 구세주였던 셈이다.
그 후 스님은 일제 강점기에 나라를 잃고, 고향을 잃은 백성들이 쫓기고 쫓겨서 흘러 들어간 간도로 가서 허름한 토굴에서 상처입고 지친 사람들에게 따뜻한 물과 밥 한술을 먹이고, 짚신을 만들어 주었는 데 특히, 고군분투하는 독립투사들을 위해 헌신한 보살이시다.
나는 경허, 수월, 만공, 혜월스님 등 큰 스님의 발자취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수월스님의 족적을 살피러 갔던 것이다. 수월스님은 경허스님이 득도한 2년 후에 천장암에 오셨는 데, 일설에는 30살이 너머 출가했다고도 하고, 어린 시절 출가했다고도 한다. 뒤이어 만공스님은 1880년 동학사에서, 혜월스님은 정혜사에서 이곳 천장암으로 오셨다고 했다.
천장암 왼쪽에는 경허스님 열반 100주년을 맞이하여 2012년에 세운 화강암 돌탑이 인상적이다. 둥그런 원을 그려놓고 ‘이 무슨 물건이고?’란 화두를 새겨놓았다. 돌탑엔 경허 성우스님의 열반송이 새겨 있다.
마음 달 홀로 둥글어 그 빛 만상을 삼켰구나
빛과 경계 다 하였거늘
다시 이 무슨 물건이고?
이렇게 말씀하시며 원상을 그려 놓은 뒤 붓을 던져 버리고 오른쪽으로 누워 암연히 열반하셨다. 임자년(1912년) 4월 25일이다. 혜월, 만공이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돌탑 뒤의 단풍이 곱게 물들어 가을 정취가 아름답다.
이 행자는 내게 ‘혜월스님이 공부하던 토굴은 모르지요?’라고 묻길래 ‘예’하고 대답했다. 경허스님에겐 뛰어난 3명의 제자 ‘3月’이 있다. 그들 이름이 달(月)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만공, 수월, 혜월이 그들이다.
토굴로 향하는 언덕길에 최근에 새로 만든 탑비가 있는 데 ‘수월스님에 관한 일화’를 기록해 놓았다. 위 책에서도 밝힌 바 있지만 글자를 몰랐던 수월스님은 오로지 은사스님이 말씀하신 ‘넌 천수경을 외우도록 하라’는 말씀을 믿고 땔나무를 할 때도, 밥을 지을 때도, 빨래를 할 때도, 방아를 찧을 때도, 공양을 올릴 때도 천수경을 외워 득도하게 된다.
탑비는 수월스님의 말씀을 새겨 놓았다.
도를 닦는 닦는 것이 무엇인고 허니 마음을 모으는 거여. 별거 아녀. 하늘천 따지를 하든지, 하나둘을 세든지, 주문을 외우든지 워쩌든 마음만 모으면 그만인겨. 나는 순전히 천수대비주로 달통한 사람이여. 천수대비주가 아니더라도 옴마니반메홈을 외우든 마음 모으기를 해야 하는 겨
수월선사는 평생동안 일을 하며 중생을 거두고, 40년 가까이 조실의 위치에서도 한 마디도 설법도, 한 줄의 글도 남기지 않했지만 주위엔 항상 선열이 넘치고, 법음이 가득차서 속인이든 심지어 동물들까지도 환희와 행복을 느끼게 해준 선사이다.(김진태)
수월선사 탑비에서 20m 올랐을까. 바위를 뚫어 만든 것 같은 토굴이 남쪽으로 향해있다. 토굴은 1명이 겨우 앉을 만한 곳으로, 네분의 선 지식들은 이 곳에서 치열하게 도를 닦았을 것이다. 지금도 돌로 만든 좌대가 놓여 있고, 천정은 불빛에 그을린 것처럼 시커멓다. 손으로 그을림이 묻어나는지 긁어 보았으나 손에 묻어나지는 않았다.
토굴에서 바라보는 서해바다는 뿌옇고, 점점이 떠있는 섬 가운데 제일 큰 게 안면도란다. 안면도는 고려 말 무학대사가 공부했다는 ‘간월암’이 있다. 무학스님이 밤에 달을 가리키며 ‘저 달을 보거라’ 하니 사람들이 달을 보는 게 아니라 달을 가리키는 자신의 손가락을 보고 있다며 ‘달을 보거라 하면 달을 보아야지 왜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느냐?’고 선문답을 했다는 간월암이 거기다. 안면도는 ‘안면(安眠)’이라 편안하게 잠자는 곳이다. 누구든 편안하게 잠 잘 거라면 안면도를 권한다. 나는 오래 전에 안면도 간월암에 다녀온 바 있다.
오늘은 대입을 위한 수능 시험일 이어서, 날씨가 차갑다. 이곳 연암산과 건너편 삼준산에는 싸락눈이 바람에 휘날리고, 새빨갛게 물든 밝나무 잎새가 훠워이 훠워이 새털처럼 사뿐이 날아갈 뿐인 데, 조선 말기 한국 불교의 중흥조인 경허스님과 선풍을 드날린 3명의 달들은 지금 어느 곳에 계신가?
스승을 비롯한 3개의 달들은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흙탕물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한 세상 멋스럽게 놀다 간 일상이 꿈인 듯 그리울 뿐이다.
천장사를 내려와 가까이에 있는 해미읍성에 갔다. 진남문을 지나 성안으로 들어가니 몇 개 건물만 있고 휑하니 비어 있다. 가까이에 있는 집으로 들어가니 감옥으로 조선 후기에 천주교 신자들을 감금하고, 사형장으로 쓰인 곳이라고 한다.
추워서 감옥만 구경하고 밖으로 나오는 데, 진남문 뒷 돌담에 ‘皇明 弘治 4年 辛亥 造’라고 새겨 놓았는 데, 이 때는 조선 성종 22년(1491년)에 지었다는 뜻인 데, 합천 해인사의 대적광전 건물도 이 때 지었다. 문제는 조선 성종 22년이 아니라 ‘명나라 홍치 4년’에 지었다는 것으로 自國의 연호조차 사용할 수 없는 식민지 약소국의 비애를 이곳에서도 발견해야 하니 답답했다.
500년을 뛰어 넘어 여전히 우리 한국은 자국의 연호를 사용하고 있지 않다. 한민족의 자긍심을 고취하기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우리 연호인 단기(檀紀) 4347년을 사용하자’고 정부에 건의했지만 묵살되고 말았다.
향교는 공자 탄생을 기념한 孔紀 2566년, 불교국가는 고타마 싯타르타 탄생을 기념한 佛紀 2557년을, 기독교 국가는 예수 탄생을 기념한 연호 西紀 2014년을, 이슬람 국가는 마호멧이 헤지라 단행을 기념한 헤지라 1,393년, 북한은 김일성 탄생을 기념한 주체 103년을, 일본은 평성 26년이라고 쓰고 있다.
한국은 즁국의 예속하에 있을 때는 중국 연호를, 일본 식민지 시절에는 일본 연호를, 미 군정시기에는 서기를 사용하다가 대한민국 건국 후 한 때는 檀紀(단군 기원)를 사용했으나 어느 때 부터서인지 기독교 국가가 사용하고 있는 연호를 다시 쓰고 있는 셈이다. 기독교 국가가 아닌 데도 西紀를 사용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고, 서글픈 일이다. 무거운 마음으로 광주로 향했다.
** 김진태(검사)는 충남 서산에서 만주에 이르기까지 수월스님의 족적을 따라 답사하여 『달을 듣는 강물』과 이를 보완한 『물속을 걸어가는 달』을 지었다. 김검사는 2014년 현재 검찰총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14.11.13
첫댓글 동진이 자네도 이제 나뭇잎이 단풍으로 물들듯 물들어가고 있음을 볼 수 있구먼! 눈가가 촉촉해지는건 왜일까?
친구의 여행기? 잘 읽었네. 긴 글이었지만 나도 그곳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만큼 몰입되었다네. 아...친구가 저기서는 저런 생각을 했고
여기서는 또 다른 생각을 했겠네 하면서.
특히나 종교며 역사를 잘 모르는 나같은 사람에게는 덕분에
배워가는 시간이 되기도 해서 새삼 고맙네.
솔직히는 이런 알찬 글이 카페에서만 묻혀버리는 것이
아깝다는 생각도 들고...
은희 친구! 반가워! 내가 대책없이 개인 일을 드러내는 게 마뜩찮지만 이렇게라도 친구들과 소통하고 싶어서라네 항상 소통하는 은희 친구 고마워
천정암에 얽힌 역사 잘 읽었네
시간이 나면 한 번 다녀와야 겠다는 생각이 드네 뜻 대로 될지 모르지만
그냥 가면 절 풍경하고 건축양식만 대충 보고 왔는데 이렇게 알고 가면 느낌이 다를 것 같네
나도 역사에 대해서 특히 절 역사에 대해서는 모르는게 많은데
친구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