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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이사야서의 말씀 55,10-11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0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11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6,7-15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7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8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10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11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12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13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14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15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우리는 '재의 수요일'에, 자선과 기도와 단식을 통해 타인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숨어계신 아버지 하느님 앞에 의로움을 드러내라는 말씀을 들으면서 사순절을 시작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그 말씀에 이어지는 장면입니다.
곧 기도를 통한 의로움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기도할 때 ~빈말을 되풀이 하지 마라”(마태 6,7)고 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고 말씀하시면서 말입니다.
그러니 기도는 아버지께 대한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무엇보다도 '아빠, 아버지' 면전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아빠, 아버지'를 향하는 벌어지는 일입니다.
'아빠, 아버지' 라 부르는 자녀로서 말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심으로써 당신의 영광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곧 인간인 저희를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고귀한 지위에 들어 올리십니다.
아버지의 아들인 당신의 반열에 들게 하십니다.
곧 우리를 하느님 되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너희는 신이며, 모두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다.”(시편 82,2)라는 시편 작가의 노래를 실현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특전을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을 통하여 받았습니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는 이 엄청난 영예를 선사받음으로써, 동시에 자녀로서의 삶이 소명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리하여 아들로서의 삶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이 빛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바라는 나라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바라시는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일이 됩니다.
그 일은 다름 아닌, 아버지께서 생명의 빵으로 선사하신 당신 아드님 그리스도를 '일용할 양식'으로 삼아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일이신 '용서'하는 일을 저희도 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어떤 시련이나 '유혹'이나 '악'에서도 자신이 스스로 구원자가 되려 하지 않고 아버지께 의탁하여,
자신의 힘으로 그것을 벗어나려 하는 것이 아니라 빛이신 아버지께 신뢰를 두며,
그것을 제거해 달라거나 없애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이 ‘아버지’를 향하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우리가 가야 하는 길은 오로지 ‘자녀’로서, ‘아버지의 뜻’을 따라 ‘아들의 길’을 가는 일입니다.
주님!
길이신 주님을 찬미하며, 아빠 아버지를 찬양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마태 6,8)
아빠, 아버지!
무엇을 청해야 할지를 알게 하소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소서.
진정 바라야 할 것을 바라게 하소서.
알아야 할 바를 알게 하시고,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하게 하소서.
어떤 상황에서나, 무슨 일에서나, 아버지를 향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잘 하는 기도>
“너희는 기도할 때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전에 몇 차례 얘기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제가 환갑이 되고, 사제 서품 30주년이 되던 해에 저의 삶을 돌아보게 되었지요.
그때 저는 제가 열심히 살았지만 잘 산 것은 아니라는 뼈아픈 성찰을 하였습니다.
엉뚱한 방향 또는 가야 할 방향과 정반대의 방향으로 열심히 간 것 같은, 그래서 오랫동안 그리고 멀리 잘못된 방향으로 간 것 같은 느낌이었지요.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기도하지 말라는 오늘 주님의 말씀도 같은 맥락처럼 제게는 느껴졌는데,
기도를 많이 한다고 잘하는 것은 아니라는 면에서 말입니다.
기도한다고 오래 앉아 있었는데 기도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단호하고 엄밀하게 얘기할 때, 빈말은 기도가 아닙니다.
말일 뿐이고 그것도 빈말이며 말 잔치일 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잘하는 기도입니까?
어쩌면 기도하지 않는 것이 잘하는 기도이고, 우리가 흔히 하는 기도를 하지 않는 것이 잘하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자기 말을 하느님께 막 쏟아놓습니다.
이것은 하느님과의 대화에서 내가 대화를 주도하는 것이며, 심한 경우는 내 말만 하고는 대화를 끝내는 겁니다.
이것은 또 이렇게 비유할 수도 있습니다.
걸어오는 전화는 받지 않고, 내가 필요한 경우에만 전화 걸고서는 내 말만 하고 끊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는 하지 않는 것이 잘하는 것이고,
하느님 말씀을 잘 듣는 것이 잘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독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과 비를 맞듯이 하느님 말씀을 그저 듣는 것입니다.
우선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그러고는 ‘주님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나이다.’ 하는 것이고,
듣고 나서는 그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이며,
아무 말도 들리지 않을 때도 그 침묵을 못 견뎌 하지 말고 가만히 주님의 현존 앞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자세는 또한 오늘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앞부분과 같은 자세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되어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길 빌고,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어 아버지의 뜻이 자기 안에서 이루어지길 비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청할 것이 있으면 청하는데, 일용할 양식만 청할 것이 아니라 용서의 은총도 청하고, 궁극적으로 구원을 주십사고 청합니다.
말을 많이 하는 기도가 잘하는 기도가 아니라 말을 잘 듣는 기도가 잘하는 기도임을 묵상한 오늘 우리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기도한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누군가가 기도해 준다고 하면 마음의 위로를 받습니다.
본인은 기도에 소홀히 하면서도 남에게는 기도해 준다고 말하고 또 기도해 달라고 청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기왕 기도할 바에야 효과 있는 기도, 올바른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저 입으로 하는 기도가 아니라 되는 기도, 열매를 맺는 기도를 하길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7-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청하기도 전에 알고 계신다니 청하는 바가 하느님 마음에 드는 것인지를 먼저 살펴야 합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기도의 본질적 요소는 많이 생각하는 데에 있지 않고, 많이 사랑하는 데 있다. 기도란 사랑의 행위 외에 다른 아무 것도 아니다.”고 하였습니다.
더 많이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 마음을 잘 살아가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고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사랑함으로써 사랑 자체인 하느님과 잘 통할 수 있습니다.
많은 분이 묵주기도, 9일 기도, 15기도, 33일 봉헌기도,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 등등 성인 성녀들이 즐겨 봉헌하였던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 기도에 따르는 삶의 쇄신과 실천 없이 목표한 바를 채우기에 급급해하면서 꼭 들어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을수록 그만큼 더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나의 뜻을 관철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봉헌하는 일이요, 그분의 뜻을 알고 행하는 것입니다.
루이 에블린은 <사람에게 비는 하느님>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고 열심히 공덕을 쌓고 많은 것을 청하지만, 실제로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구원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기를 빌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먼저, 더 많이, 더 깊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한상봉).
그러므로 구하기도 전에 우리의 뱃속까지 환히 꿰뚫어 보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때때로 기도가 들어주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 이사야서 말씀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시온은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고 말하였지.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이사 49,15)
들어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직 때가 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요한 14,14
“결코 의심하는 일 없이 믿음을 가지고 청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주님에게서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야고 1,6-7)
나보다 나를 더 환히 아시고 필요한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채워주시는 하느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원하는 때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주시지 않고 더 좋은 것을 당신께서 주시고자 하는 때 당신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주심을 믿습니다.
그때를 인내로 기다립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모든 청원을 주님의 기도로 해야 하는 이유>
우리가 기도할 때 가장 분심이 드는 것 중의 하나는 ‘내가 청하는 것이 하느님 뜻에 맞는 것일까?’ 입니다.
그래서 조금 기도하다가 들어주시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거였구나!’ 하고 포기해버립니다.
하지만 꾸준함이 부족하여 들어주시지 않을 것일 수 있습니다.
이미 들어주셨다고 믿고 기도하면 주님께서는 다 들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청하는 것이 어떻게 주님께서 들어주실 것이었음을 믿을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청하시기도 전에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생각하기보다는 ‘주님의 기도’를 바치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청하는 모든 것이 주님의 기도에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 모든 청원을 포함합니다.
내가 청하는 것이 주님의 기도 안에 싸일 수 있다면 그것은 계속 청해도 됩니다.
그러나 내가 청하는 것을 주님의 기도를 통해 청할 때 왠지 어색하면 그것은 주님 뜻에 맞는 게 아닙니다.
셰익스피어의 <말괄량이 길들이기>를 모티브로 한 <내가 너를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란 영화가 있습니다.
카메론이란 친구가 한 고등학교에 전학을 옵니다.
그리고 학교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비앙카에게 첫눈에 반합니다.
비앙카는 캣이란 언니가 있었는데 캣은 성격이 유별나서 어떤 남자도 접근하지 못합니다.
카메론은 돈 많은 친구를 이용하기로 합니다.
위태로운 재정 상황에 있는 매력적이지만 문제가 많은 남자 잭을 선택합니다.
잭에게 많은 돈을 걸며 캣을 꼬셔보라고 합니다.
잭은 돈도 벌 겸 캣을 꼬셔보기로 합니다.
처음엔 여러 번 차이지만 잭의 매력에 캣도 빠져듭니다.
결정적으로 첫 키스 하려고 캣이 시도하자 잭의 양심이 발동합니다.
순진무구한 캣의 첫 키스를 돈 받고 장난으로 해버리는 사람은 되기 싫은 것입니다.
이에 캣은 자존심이 상합니다.
잭이 그런 일은 더는 하지 않겠다고 해도 카메론은 친구들을 선동하여 더 많은 돈을 겁니다.
잭은 진정한 마음으로 다시 캣에게 다가가고 그녀의 마음을 되돌려놓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이 돈을 받고 접근했다는 말은 하지 못합니다.
양심이 그를 계속 괴롭히고 결국 모든 것이 밝혀지고 맙니다.
커다란 상처를 입은 캣은 다시는 안 볼 것처럼 잭을 떠납니다.
그러나 잭은 자신이 모은 돈으로 캣이 소원하던 기타를 선물하며 용서를 청합니다.
이제 그는 돈을 받고 접근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캣은 다시 잭을 받아주고 둘의 진짜 사랑이 시작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도 우리 양심이 우리를 가로막습니다.
그 양심을 먼저 정화하지 않으면 내가 청하는 것이 이뤄질 수 없습니다.
이 양심을 정화하는 역할을 주님의 기도가 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보통 기도가 아닙니다.
하느님 자녀만이 가져야 하는 양심을 선물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니 내가 청하는 내용이 아니라 주님의 기도에 집중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기도 앞부분은 내가 청하는 것이 주님 뜻에 맞는지 알아볼 수 있는 것들입니다.
내가 청하는 것이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해드리는 것인지, 또 내가 하느님 나라에 머물게 하는 것인지, 혹은 아버지의 하늘의 뜻이 땅으로 내려오게 하는 것인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뒷부분은 내가 청하는 것들을 내가 청할 자격이 있는지를 알려줍니다.
내가 하늘의 양식을 매일 먹고 있는지, 이웃을 용서했는지, 유혹 거리를 멀리하는지, 또 악에서 돌아섰는지를 살피게 합니다.
따라서 나 스스로 주님의 기도를 바치며 기도하면 내가 청하는 것이 주님께 청하기에 합당한 것인지 분별이 되고 또 합당하다고 여겨지면 이미 받았다고 믿어집니다.
그러면 반드시 이뤄집니다.
모든 청원을 주님의 기도로 해야 하는 이유는 주님의 기도가 청하는 이의 양심을 정화하고 결국 하느님 자녀의 양심이 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의 기도를 보다 정성껏 바치면서 우리 기도의 부족함을 수정하고 보완합시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근동 이방 국가 사람들이 바치던 장황하고 요란스러운 기도의 문제점에 대해 정확히 지적하시며, 오늘 우리가 드리고 있는 기도 생활에 대한 성찰에로 초대하십니다.
그들이 바치던 기도는 엄청 요란스럽고 장황했습니다.
너무나 길고 정신 사나워 견딜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어찌 보면 우리 전통 안의 무속 신앙과 꼭 빼닮았습니다.
기도 주관자는 우선 자신의 청을 들어줄 이 신, 저 신, 있는 대로 신들을 불러냅니다.
신들이 협조하지 않으면 길길이 뛰고 구르고 소리를 지르며, 협박합니다.
기도란 것이 자연스럽고 조용한 분위기에서 이루어져야 마땅한데, 그들 기도의 분위기는 음산하고 기괴했습니다.
부자연스럽고 끔찍했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신들과의 한바탕 전쟁과도 같았습니다.
그런 해괴망칙한 기도는 자연스럽게 유다인들의 기도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는데, 그런 모습을 보신 예수님께서 정곡을 찌르는 말씀을 건네십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 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들의 기도는 진정한 의미에서 기도가 아니며 신들을 협박하고 강요하는 행위라고 하시면서, 우리에게 기도의 모델로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주님의 기도 한 구절 한 구절을 짚어가며 묵상해보니 참으로 균형 잡힌 기도요, 우리 기도 생활의 이정표가 되는 바람직한 기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바치면서 내 이름이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내랍니다.
내 나라를 청하지 말고 아버지의 나라를 청하랍니다.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추구하랍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바치면서 자신을 자랑하거나 내세우지 말 것이며, 자신의 한계나 부족함을 솔직히 인정하며, 전지전능하신 아버지께 자신의 필요를 있는 그대로 청하랍니다.
매일 매일 일용한 양식도 청하지만, 우리 힘으로 불가능한 용서의 힘과 유혹을 극복할 힘을 청하랍니다.
매일 하루에도 수십번씩 바치는 주님의 기도를 보다 정성껏 바치면서 우리 기도의 부족함을 수정하고 보완해나가는 사순시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기도>
1) 빈말
- 우상을 숭배하거나 미신을 믿는 사람들도 ‘간절하게’ 기도합니다.
그 ‘간절함’은 신앙인들의 간절함 못지않고, 많은 경우에 더 정성스럽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 현세적인 복과 물질적인 복을 비는 것으로 그칩니다.
생명력이 없는 것들과 신이 아닌 것들에게 소원을 빈다는 점에서 그 기도는 빈말이지만,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복만
빈다는 점에서도 그 기도는 빈말입니다.
2) 하늘에 계신
- 하느님은 온 세상 만물의 주님이신 분이고, 내 인생의 주님이신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에, 또 우리와 함께 ‘살아계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생명력을 받아서 존재하고, 하느님의 사랑과 보호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께 모든 것을, 즉 내 인생과 내 목숨을 모두 맡길 수 있습니다.
3) 우리
- 주님의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우리’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 모두’가 ‘우리 모두를 위해서’ 바치는 기도입니다.
만일에 입술로는 ‘우리’ 라고 하면서 속마음으로는 ‘나’만을 위해서 기도한다면, 즉 남은 어찌 되든 나 하나만을 위한 복을 빌기 위해서 기도한다면, 그것은 ‘주님의 기도’를 ‘악마의 기도’로 변질시키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하느님 앞에서 ‘그들’은 없습니다.
오직 ‘우리’만 있습니다.
우리는 인류 전체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 인간 세상을 보면 여기저기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고, 자기 나라만의 이익을 위해서 이웃 나라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그런 자들도 전쟁에서 이기게 해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것을 기도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4) 아버지
- 하느님은 사랑이신 분입니다(1요한 4,8.16).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사랑’을 잘 나타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사정을 우리보다 더 잘 알고 계시고,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도 알고 계시고,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그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좋은 때’에 우리에게 주십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사랑 말고는 없습니다.
“청하기도 전에 주신다면 기도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기도는 달라고 떼쓰는 일이 아니라, 주시는 것을 잘 받기 위한 준비입니다.
“하느님을 믿는다.” 라는 말은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다는 뜻이기도 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만일에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을 믿으면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못한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5) 희망
- 신앙인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함께 원하는 사람입니다.
성모님은 그 점에서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 되시는 분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카 1,38)
이 응답의 말씀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저도 원합니다. 그래서 마치 종이 주인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처럼 주님의 뜻에 순종하겠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어쩔 수 없어서 복종한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원하신 일이기 때문에 기쁨으로 순종하셨습니다.
‘주님의 기도’에 들어 있는 청원들은 모두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일들이고, 동시에 우리가 희망하는 일들입니다.
6) 실천
- ‘주님의 기도’를 말로만 바치고 삶으로 실천하지않으면, 그 기도는 빈말이 되어버립니다.
7) 기도에 관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
(필리 4,6-7)
어떤 간절한 소원이 있어서 그것을 하느님께 청할 때, 응답을 아직 얻기 전이라도, 즉 소원이 아직 이루어지기 전이라도, ‘기도하는 동안에’, 또 ‘기도를 통해서’ 용기와 힘을 얻고 평화를 얻게 되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체험합니다.
누구든지 그 용기와 힘과 평화를 얻게 되면, 어떤 시련과 고난도 잘 극복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기도의 힘’이고,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물론 하느님께 간절하게 비는 그 소원은 ‘하느님 뜻’에 합당한 것이어야 합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의 기도 “기도와 회개, 그리고 사랑” - 기도가 궁극의 답이다>
“내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
내 입에 찬미가 항상 있으리라.”
(시편 34,2)
역시 만세육창 기도로 시작하는 하루입니다.
어제 2월19일은 본격적인 영농준비와 함께 봄에 들어선 우수였습니다.
찬미의 기쁨으로 살아가는 기도의 사람들이 참으로 멋지고 아름다운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입니다.
믿는 이들의 모두가 기도이며 기도가 모두의 답입니다.
부패나 변질되지 않은 한결같은 발효인생, 사랑의 삶도 기도를 통해 가능합니다.
끊임없는 기도, 끊임없는 회개와 더불어 늘 한결같은 향기로운 사랑입니다.
어제 수도원을 방문했던 형수님께 들은 “러브 스토리(love story)”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얼마전 방문했던 베리굿 피부과 병원에 관한 일화입니다.
의사분과 함께 일하던 친절한 자매 모두가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고 부부처럼 생각되었는데 어제 알게 된 두 분의 러브스토리에 감동했습니다.
두 분 다 20대 성당에서 교리교사로 함께 일하며 결혼까지 계획한 사이였는데 남자 의사분의 모친의 반대로 무산되어 둘다 헤어져 따로 혼자 살게 되었고, 반대하던 남자분의 모친이 세상을 떠나자 수소문하여 그때까지 혼자 살던 연인이었던 여자분을 찾아 둘다 나이 50에 결혼했다는 순애보(純愛譜) 일화였습니다.
“베리굿(Very good)” 병원 명칭 그대로 베리굿 사랑이요 베리굿 인생인 두 분께 축복하는 마음 가득했습니다.
한결같은 기도와 함께 가는 회개와 사랑입니다.
베리굿 인생, 베리굿 사랑을 원하십니까?
기도하십시오.
기도가 답입니다.
마침 방문하여 집무실을 정리해주던 형수님이 손잡이가 떨어져 불구가 된 자그맣고 예쁜 연푸른색 컵을 버릴까 하기에 만류했습니다.
“놔 두십시오.
20년 이상 강론집과 시집을 복사 제본하며 함께 해 오던 어느 자매가 선물한 컵인데 그 자매님은 지금 병고로 인해 이런 컵 상태와 흡사합니다.
애틋한 마음, 고마운 마음, 사랑하는 마음, 기도하는 마음으로 끝까지 간직하고 이용하려 합니다.”
사실 저는 평생 살아있는 동안 매일미사를 봉헌해드리기로 내심 결정하여 실행하고 있는 고마운 분들이 여러분 있습니다.
세월 흘러 나이들어가니 저를 포함해 주변에 온통 아픈 분들이고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분들 소식도 자주 듣습니다.
몸은 서서히 무너져도 정신은, 마음은, 영혼은, 끝까지 한결같이 초롱초롱 맑고 밝게 빛날 때 정말 건강한 삶이요 이렇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파도 아프지 않은 것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정신건강, 마음건강, 영혼건강이 으뜸이고 답은 기도와 사랑뿐입니다.
문득 제 창안의 팬티끈과 팬티천의 일화도 생각납니다.
“팬티끈이 영혼이라면 팬티천은 육신입니다.
팬티끈 영혼이 넘치는 사랑, 희망, 기쁨, 감사로 튼튼하면 팬티천 육신은 좀 낡고 떨어져도 끝까지 입을 수 있지만, 팬티끈 영혼이 늘어지거나 끊어지면 그 좋은 육신의 팬티천도 무용지물이 됩니다.
그러니 육신한테 끌려가지 말고 튼튼한 영혼이 주도하여 육신을 추스리고 다독이며 끌고 가도록 하십시오.”
튼튼한 팬티끈 영혼에는 기도와 사랑이 답입니다.
기도는 사랑입니다.
기도를 잘하는 유일한 방법은 사랑뿐입니다.
기도는 테크닉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기도는 삶입니다.
기도와 삶은 하나이며 함께 갑니다.
기도하는 대로 살고 사는 대로 기도합니다.
기도없는 삶은 상상이 안됩니다.
나중 남는 얼굴도 기도한 사랑의 얼굴인지 그렇지 않은 얼굴인지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주님도 나중에 우리 ‘마음의 얼굴’을 검사할 것입니다.
과연 끊임없이, 한결같이 기도한 당신을 닮은 ‘사랑의 얼굴’인지 말입니다.
오늘 말씀은 기도에 관한 귀한 가르침입니다.
기도는 짧고 순수해야 합니다.
빈말을 되풀이하는 것은 하나도 도움이 안됩니다.
사실 삶이 진실하고 간절하면 기도도 말도 글도 행위도 군더더기가 없고 단순하고 순수하기 마련입니다.
사랑은 명사가 아니고 동사입니다.
형용사들은 점차 사라지고 동사들만 남습니다.
주님은 말을 많이해야 들어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보다 더 잘 우리를 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잘 아시는데 왜 기도하는가?
내가 아쉬워서 기도합니다.
기도할 때에 정말 무엇이 필요한지 알게 되고, 날로 주님을 닮아 참나가 되고 이런 참나를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참나의 발견이 참기쁨이요 참행복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필요한 것은 오직 “하느님” 한분 뿐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더불어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은 사랑의 기도뿐임을, 하느님 한분뿐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기도의 힘, 사랑의 힘, 말씀의 힘은 그대로 하느님의 힙입니다.
바로 제1독서 이사야서의 아름다운 말씀은 그대로 말씀의 힘, 하느님의 힘을 상징합니다.
어느 것 하나 생략할 수 없어 전문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
그대로 대지를 촉촉이 적시는 봄비같은 말씀이며, 이런 말씀의 힘은 그대로 하느님의 힘이 됩니다.
요즘 간혹 내리는 봄비를 보면 20여년 전 써놓은 '봄비'라는 자작 애송시도 생각납니다.
“마음을 촉촉이 적시는
봄비!
내 딸 아이 하나 있다면
이름은 무조건
‘봄비’로 하겠다”
-2005.3
기도 중의 기도가, 봄비같은 기도가, 말씀이 바로 오늘 복음의 주님의 기도입니다.
우리 삶의 본질적 요소가 그대로 담긴 예수님의 진실하고 단순하고 가난한 삶이 요약된 기도입니다.
이 기도대로 살면 예수님을 닮아 참사람이 됩니다.
참으로 우리의 가난을, 겸손을, 감사를 깨닫고 배우게 하는 기도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도, 참사람이 되는 답도 주님의 기도에 달렸습니다.
평생 기도해도 영원한 초보자임을 깨닫게 하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전반부 셋은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나라, 아버지의 뜻, 즉 하느님 중심의 청원기도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을 한 아버지로 둔 한 가족의 형제들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교회를 어머니로 둔 우리는 모두 한가족의 형제들입니다.
그래서 저는 “어머니 은혜” 동요를 부를 때 마다 어머니 교회를 생각하며 어머니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 감사하는 마음으로 부르곤 합니다.
전반부 셋의 하느님 중심의 삶에 대한 청원과 더불어 후반부 넷은 일상의 삶에서 본질적 필요한 넷의 청원입니다.
즉 일용할 양식을, 용서를, 유혹에 빠지지 않기를, 악에서 구함 받기를 청원하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간절하고 항구한 청원입니다.
모든 원하는 것을 청원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필요한 것들의 청원입니다.
100% 하느님 손에 달린 듯이 기도하고 100% 내 손에 달린 듯이 노력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은총과 노력의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일방적으로 일하도록 맡기는 무책임한 삶이 아니라 청원과 더불어 적극적인 협력의 삶이 절대적이라는 것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내일 세상의 종말이 와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는 삶의 자세입니다.
바로 일곱의 청원과 더불어 동시에 하루하루 목숨을 걸고 사랑의 협력을, 책임을 다하는 진인사대천명 믿음의 삶이, 응답의 삶이 참으로 아름답고 멋진 감동적인 삶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봄비같은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의 기도가 이뤄지는 아름답고 감동적인 하느님 나라의 삶을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주님을 바라보아라.
기쁨이 넘치고,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
(시편 34,6)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호사유피 인사유명(虎死留皮 人死留名)’이란 말이 있습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뜻입니다.
댈러스에 이름을 남긴 사람이 누군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J F K'로 기억되는 케네디 대통령입니다.
제가 있던 뉴욕의 허브 공항 이름도 ’J F K' 공항입니다.
케네디 대통령은 이곳 댈러스에서 1963년 11월 22일 리무진에 타고 있던 중 리 하비 오스월드에게 암살당하고 말았습니다.
47세의 나이였습니다.
저는 1963년에 태어나서 가브리엘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은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그의 업적과 인생은 잘 모르지만 그가 남긴 취임 연설은 기억납니다.
영어 교재에 있었습니다.
“Ask not what your country can do for you. Ask what you can do for your country.
(조국이 당신을 위해서 무엇을 해 줄 것인가를 요구하지 말고, 당신이 조국을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시오.)”
예수님께서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라고 하셨던 것처럼 발상의 전환을 떠올리게 하는 문장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
비와 눈은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우리 신앙인들이 남겨야 할 것은 무엇인지 생각합니다.
저는 ‘자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비와 눈이 생명을 살리듯이, 우리는 가진 것을 나누면서 어려운 이웃을 도와야 합니다.
선을 베푸는 집안에는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긴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낯선 손님을 따뜻하게 환대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사악을 주셨습니다.
시렙다의 과부는 엘리야에게 구운 빵을 대접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시렙다 과부를 가뭄에서 구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선을 베푼 사람들은 마지막 날에 하느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어떻게 기도할 것인지 알려 주셨습니다.
교회는 그 기도를 ‘주님의 기도’라고 이야기합니다.
예루살렘의 올리브산에는 ‘주님의 기도’ 경당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각 나라의 언어로 기록된 ‘주님의 기도’가 있습니다.
물론 한국어로 기록된 주님의 기도도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몇 가지 청원이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빛나기를 청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기를 청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청합니다.
오늘 일용할 양식을 주시기를 청합니다.
우리가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유혹에 빠지지 말고, 악에서 구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청해야 할 것이 있다고 하시면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도 용서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용서는 분쟁과 갈등을 푸는 열쇠입니다.
용서는 화해와 일치로 향하는 내비게이션입니다.
용서는 평화와 사랑으로 넘어가는 다리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정말 아름다운 청원의 기도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이웃에 실천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거울을 보는 것처럼, 기도를 열심히 한다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더욱 많은 사랑을 주실 것입니다.
- 미국 댈러스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많은 회사에서 직원 교육을 합니다.
저 역시도 코로나 팬데믹 전에는 많은 회사에서 특강 부탁을 받았습니다.
솔직히 저는 돈을 굴리는 법도 모르고, 회사 구조도 잘 모릅니다.
따라서 제가 하는 강의가 과연 도움이 될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회사에서 인성 교육을 해 달라고 했고, 자기 회사에 꼭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금융, 회계, 인사, 마케팅, 가격 책정 등의 인지적 기량 훈련을 받은 회사가 있고, 주도력, 자제력, 결의 등의 품성 기량 훈련을 받은 회사가 있습니다.
이 두 회사 중에서 어느 회사의 교육 효과가 더 컸을까요?
이 교육은 똑같이 5일 정도에 걸쳐서 이루어졌는데, 그 후 2년에 걸쳐 회사 수익이 평균 30% 증가한 회사가 있었습니다.
업무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인지적 기량 훈련을 받은 회사가 아니라, 품성 기량 훈련을 받은 회사였습니다.
품성 기량 훈련을 통해 훨씬 많은 창의적 아이디어를 창출할 수 있었고, 더 많은 신제품을 선포였다고 합니다.
또한 어떤 어려움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문제의 해결을 향해 적극적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세상 것을 통해서만 이 세상 안에서 더 잘 살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세상에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은 사랑이지만, 이 사랑을 예수님께서 강조하셨고, 실제로 이 사랑에 집중하며 사는 사람이 더 행복하게 또 현명하게 지금을 살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은 하느님 나라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삶에서도 꼭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큰 사랑으로, 하느님의 계획에 잘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인간이 하느님과 맺어야 하는 단순하면서 친밀한 관계를 드러내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에서 실행하기 어려운 것이 하나 나옵니다.
바로 다른 사람을 먼저 용서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하느님의 용서를 받으려면 우리가 먼저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했습니다.
모욕받았음에도 용서해야 한다는 사실이 자존심도 상하고, 상대방이 나를 우습게 볼 것 같은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용서하지 않는 삶이 얼마나 지금을 힘들게 살 수밖에 없는지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과 함께 하고 굳게 믿기에 그분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용서라는 사랑 실천이 지금 삶을 더 충실하게 살 수 있는 기틀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더 힘차게 살 수 있게 됩니다.
행복이 멀리 있지 않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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