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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망국적이고 굴욕적 협상은 없다
[쟁점] 불가사의한 한미FTA 진행과정, 누가 대한민국의 弔鐘을 울리나?
한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요즈음, 언론계의 어른이었던 송건호 선생의 말이 유난히도 귓가에서 떠나지 않는다. "언행이 일치 않고 식언을 일삼으며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 정치인이라면, 김구는 그런 점에서는 정치인이 아니고 이승만은 탁월한 정치인이었다." 이른바 이승만류의 '탁월한 정치인'들이 덕지덕지 쌓여 있는 우리네 현실. 예나 지금이나 뒤웅박 차고 바람 잡는 정치꾼들의 '꼼수'가 횡행해 왔다.
참여정부가 집권한지도 3년을 넘기고 있다. 민심 흐름에 모르쇠로 일관해 온 노 대통령의 품새가 워낙 사나워서 3년 내내 나라 판은 절름발이가 되었다. 민생에 손 사레를 친 진보 콤플렉스가 오히려 개혁에 빗장을 쳤고, 정권은 손아귀에 넣었지만 사회를 장악하지 못한 탓에 '개혁피곤 증후군'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실용파가 똬리를 튼다. 어지러운 세상일수록 흐트러진 행보로 뭇 사람을 견디기 어렵도록 볶아치는 사람들이 많게 마련.
우리의 경우 예나 지금이나 친인척과 가신들이 크고 작은 이권에 연루되어 문제를 덧나게 했고, 지역쏠림인사 때문에 동서의 골이 깊어져 왔고, 패거리 정치가 政-經-言과 관료의 유착관계와 어울러져서 수십 년 동안 우리네 정신문명을 크게 오염시켰다. "마음의 혁명 없이 제도만을 바꾼들, 사상적 기초 없이 독재자만을 제거한들, 부정에 계속 항거하는 단결된 국민의 역량이 없다면 또 다른 형태의 독재나 또 다른 모양의 부패를 어떠한 방법으로 막겠는가? 지금 이 나라의 사태를 관찰하건대 전에는 너희가 해먹었으니 오늘은 우리가 좀 해먹을 차례라는 식으로 되어가는 것 같아 가슴 아프다." 장준하 선생의 말이다. 요즈음 우리네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이런 와중에서 참여정부가 최악수를 두었다. 한-미자유무역협정(FTA)이다. 이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끌벅적하고, 저마다 목청을 돋우며 다툼의 날을 세우고 있다. 그런데 이 협정의 전신인 한-미투자협정(BIT)의 경과과정을 살펴보면, 많은 시사점과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7년 전 김대중 대통령은 한-미투자협정에 온 힘을 쏟았다. 그 당시에 미국은 한국의 어려운 처지를 이용해서 포괄적 국익을 관철시키기 위해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그리고 ‘줄기차게’ 통상압력을 가해 왔다.
미국은 우리나라 쇠고기 수입제도가 불공정하게 운영되고 있다는 이유를 내세워 WTO에 제소했다. 또한 영종도 신공항에 설치할 엘리베이터 입찰과 관련해서도 역시 WTO에 제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오지랖 넓은 미국은 우리 정부가 한보철강을 매각하고, 포항제철의 가격결정에서도 개입한다고 투정부렸다. 뿐만이 아니다. 의약품에 대해서도 외국제품을 한국제품과 동등하게 대우하도록 밀어붙였다.
그런데 외환을 확보하고 국가 신인도를 올리는 게 최우선 과제였던 김 대통령은, 1998년 6월 미국을 방문해 클린턴 대통령에게 BIT체결을 ‘제안’했다. 외자유치의 명분과 필요성이 절박했던 탓에 이 협정이 안고 있는 문제점이 많았으나 그대로 추진됐다. 게다가 김 대통령이 ‘직접’ 미국에 협정체결을 제안했기 때문에 협상과 관련된 정부부처들은 반대의견을 공식적으로 내놓지 못했다. 그런데 1994년 미국이 이 협정의 협상을 제안했을 때,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던 한국이 이번에 협상체결을 먼저 제안한 꼴이 된 셈.
그런데 ‘이미’ 외국인이 자유롭게 마음껏 투자할 수 있기 때문에 협정을 맺는다고 투자가 더 늘어날 소지가 적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게 제기되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의 조사에 따르면, 90년대 초반 미국과 투자협정을 맺은 13개 국가 가운데 협정을 발표한 다음 3년 동안 외국인 투자가 늘어난 나라는 고작 3곳에 불과했다. 또한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의 연구결과에 기대어 보면, 양자간 투자협정에 따른 투자유치의 효과가 신통치 않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양자간 투자협정은 다른 국가와의 주권행사에 운신의 폭을 좁게 해서 오히려 국제무대에서의 협상력을 떨어뜨릴 가능성마저 있다는 지적이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미국은 스크린쿼터제 폐지, 외환위기 때 외환거래를 일시적으로 제한하는 세이프가드 불인정(다자간 투자협정에서조차 세이프가드를 인정하고 있다), 공기업에 대한 외국인 지분제한 철폐, 국산 잎담배 사용의무철회, 연근해어업 외국인 참여제한 철폐, 저작권 소급보호, 미국의 주법에 의해 한국기업을 차별대우할 수 있는 권한 인정 등 불평등한 사안을 수용하도록 끈질기게 요구했다. 특히 외국자본이 국내기업을 인수한 경우 외국기업은 고용승계 의무, 현지인 일정비율 고용의무, 노동기본권 보장 등의 의무를 지킬 필요가 없도록 강요했다. 또한 이들에게 일정한 환경기준조차 요구하기조차 어려워서 우리 국토의 황폐화가 우려됐다.
엎친데 겹친 격으로, 미국은 외국기업과 우리 정부 사이에 분쟁이 발생할 경우 뉴욕의 ‘국제분쟁조정센터’의 결정을 국내법원의 결정에 ‘우선’하도록 요구했다. 이 센터는 주로 미국기업이 FTA나 BIT를 근거로 개도국 정부를 제소하는 곳이다. 2006년 4월말 현재 이 센터에 계류 중인 사건은 103건이다. 제소자는 모두 다국적 기업이다. 제소당한 국가는 아르헨티나(35건), 멕시코(7건), 에콰도르(5건), 루마니아(5건), 이집트(5건) 등 38개국으로 하나같이 개발도상국이다. 특히 투자와 관련된 국제중재는 삼심제가 아닌 ‘단심제’이며 ‘비공개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더욱 위험하다. 미국자본의 투자에 대해 ‘특혜성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이 같은 내용의 모양새가 워낙 사나워서 협정체결의 필요성 그 자체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더군다나 이 한-미BIT는 한-미FTA의 전단계이다. 그런데도 부처끼리 의견을 조율하지 않고 협상에 나섰다. 외교통상부는 양보하더라도 협정을 부랴부랴 서둘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정경제부-농림부-법무부-문화관광부 등은 양보할 수 없거나 유예기간을 둬야 한다고 버텼고, 일방적으로 양보하면서까지 협정을 맺을 경우 심각한 불이익이 우려된다는 견해를 제기했다. 결국 김 대통령이 심혈을 기울였던 한-미BIT는 국민들의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그런데 지난 2월3일 참여정부는 뜸금없이(?) 한-미FTA 협상을 시작한다고 발표했다. 3월과 4월에 각각 한 번씩 예비회담을 거친 후에, 일정에 따라 5월3일부터 본협상을 시작하고, 내년 3월말에 협상을 마무리하고, 이어서 양국의 의회로부터 비준을 받아낸다는 것이다. 이처럼 빠듯하게 일정을 잡는 이유는, 2007년 7월1일에 무역촉진권(=Trade Promotion Authority)의 시한이 끝나기 때문이다. 미국의 전략적 거점 역할을 해온 국가(=Stake state)들과 군사안보를 강화하는 포괄적 FTA를 밀어붙이기 위해, 2002년 부시정권은 미국의회가 국제협정에 관한 모든 권한을 행정부에 위임하는 ‘TPA’ 법안을 통과시켰다. TPA는 다른 나라와의 FTA 체결을 빠르게 진행하기 위해, 의회가 정부에 포괄적인 협상권한을 보장해 주는 것을 말한다.
일단 TPA가 주어지면 의회는 정부가 제출한 협정안에 수정작업을 할 수 없고, 찬반 표결만 가능하다. 따라서 지난 5월19일 지금은 백악관 예산국장을 맡고 있는 로버트 포트먼(전 미국 무역대표부 대표)이 시카고 외교협회 초청연설에서 TPA 시한을 반드시 연장해야 한다고 의회에 촉구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지난 7월 24일 파스칼 라미 WTO 사무총장은 도하라운드 협상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따라서 TPA의 연장 가능성은 거의 어렵고, 한-미FTA 협상일정이 빠듯하게 진행될 수밖에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그런데 한-칠레 FTA는 2년이 걸렸다. 한-싱가포르 FTA는 협상에 앞서 얼추 1년에 걸쳐 산-학-관 합동으로 연구절차를 거쳤다. 전문가들조차 FTA의 손익대차표가 지닐 불투명-불평등-불확실성에 대해 의견이 크게 갈리고 있다. 따라서 국익과 이해단체의 득실에 대한 차가운 평가와 국민적 공감을 이루어 내기에는 턱없이 짧은 시간이다. 뿐만이 아니다. 국책연구원인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이 한-미FTA의 경제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 통계수치를 조작했다는 의혹이 터져 나왔다.
지난 4월11일 권영길 민주노동당 의원은 대정부 질의를 통해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이 지난 3월3일 한-미FTA 협정의 효과와 관련한 보고서를 내면서 대미 무역수지 흑자 감소폭이 72억7천만 달러로 추정되자 47억 달러로 대체해서 보고서에 끼워 넣었다”고 주장했다. 그 근거로 권 의원은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이 통상교섭본부에 보낸 보고서의 원본을 공개했다.
게다가 협상을 시작하기도 전에 미국이 요구한 4가지 핵심쟁점, 즉 약값 재평가제도 개정안을 취소하고, 스크린쿼터를 146일에서 73일로 축소하며, 광우병 파동 때 금지된 쇠고기의 수입을 재개할 것이며, 자동차배출가스의 기준강화방침을 취소해 달라는 요구를 정부가 깡그리 수용했다. 더욱 심각한 것은 한-미FTA를 체결한 이후 3년까지 협상과정에서 발생한 모든 문서를 공개하지 않기로 미국과 합의한 사실이다. 개가 웃고 소가 짖을 일이다. 국가간의 협정에서 있을 수 없는 희한한 진기록을 세운 셈이다. 오죽했으면 찰스 달라라 미 국제금융연구소(IIF) 소장이 “한국의 협상 의지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말했을까.
사정이 이러한데도 정부쪽은 “한-미FTA는 정부가 오랜 기간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정이며, 누구의 압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주도적으로 여건을 조성하고 제안해서 성사시킨 것”이라고 설명한다. 결국 이는 미국의 ‘압력’때문이 아니라 한국 정부가 ‘주도’해서 4대 핵심쟁점 모두를 몇몇 관료들의 밀실 조율을 통해 내 준 꼴이 된다. 따라서 협상다운 협상을 기대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으로 셈 쳐진다. 협상은 영어로 할 터이고, 더군다나 미국 쪽은 오랜 기간에 걸쳐 획득한 협상 노하우를 축적하고 있다.
미국과 견주어 볼 때, 한-미FTA 협상에 130여명의 협상단이 필요한 것으로 셈 쳐진다. 그런데 외교통상부에 이미 설치된 60여명의 협상단은 아세안과 3월6~10일, 인도와 3월23~24일, 멕시코와 4월 중순, 캐나다와 4월24~27일에 걸쳐 동시다발로 진행 중인 협상에 투입되어 있다. 따라서 정부는 이 인력에서 일부를, 나머지는 신규 채용해야 할 형편이다. 하지만 시간적으로 2달이 걸릴 뿐 아니라, 전문 인력을 확보하기가 만만치 않을 터. 특히 중간 관리자(3~5급) 수십 명을 구하는 일이 문제이다. 김종훈 수석대표는 사법연수원생중에서 뽑아 2~3개월 훈련시켜 보강할 계획이라고 한다.
그런데 미국무역대표부의 협상단은 139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모두가 한 분야를 5~10년씩이나 다룬 전문가들이다. 더군다나 지난 89년 미 무역대표부 피터 알가이어 부대표가 <세계은행 연차보고서>에서 미국은 한국과 FTA를 체결할 필요성이 있다고 제안한 적이 있었다. 게다가 수전 슈워브 미국 무역대표부 대표 지명자는 지난 5월16일 상원 재정위원회의 인준청문회에서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우리 무기고에 있는 모든 수단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 며 선전포고를 했다. 도하 라운드와 한-미 FTA의 목표를 달성하는데 최고 적임자라고 평가받는 이 여전사는, “나는 임무를 완수하길 좋아한다. 나는 문제 해결사다”라고 전의를 달구었다. 이어서 슈워브는 “우리의 과제는 양자간 또는 지역간에 FTA를 맺는 것”이며, “이런 협정을 통해 자유롭고 공정한 무역 혜택을 이해하는 동지적인 나라들과 함께 긍정적인 선례를 세우고 새 시장을 개척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저쪽은 이렇게 만반의 준비를 해 왔다. 그런데 3월6일 예비협상이 시작되어 협정문 초안을 만들고, 90일에 걸쳐 미국의회의 검토가 끝나는 5월 둘째 주에 이를 교환하여 1차 본 협상을 시작할 계획이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예비협상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기존 협상단의 일부만이 참여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이럴 경우 다른 나라와의 협상에도 차질이 빚어질 가능성이 높다. 기존 협상단이 차출되면 조직이 느슨해지기 마련이고, 신뢰도가 손상될 수도 있다. 경제정책과 마찬가지로 협상도 나라의 능력에 따라 다른 결과를 낳는 법. 작두날 위를 걷는 것보다 더 위험한 꼴이다.
더군다나 얼마 전 대외경제정책연구원과 국민경제자문회의 등 정부 측 기관들이 정부가 통상협상을 추진하는 방식에 문제가 많다며 개선을 촉구했다. 이 기관들은 ‘세계화와 개방정책-평가와 과제’와 ‘동반성장을 위한 새로운 비전과 전략’이라는 보고서를 발간했다. 이 보고서를 통해 정부는 개방정책에 대한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사전에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체제를 구축할 필요성이 있으며, 협상과정에서 이해관계자의 참여와 의견수렴을 확대할 것을 촉구했다. 또한 국회 및 지방자치단체와의 대화와 타협을 위한 창구를 만들 것을 주문했다. 특히 부처이기주의를 지양하고, 정책조정능력의 강화 등 개방을 위한 국내 협상력을 높이는 게 우선 되어야 하며, 특히 비판의 목소리를 사전에 청취하고 이를 설득할만한 증거제시에 정부가 노력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협상 시작이 발표된 직후부터 재정경제부 관료들은 조율이 된 듯 한 막말을 연거푸 쏟아내고 있다. 곁방망이질에 이골이 난 이들은 “이번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며 생떼를 쓰고, 심지어 대원군까지 거론하며 “쇄국 망국론”을 거들먹거린다. 특히 권태신 재경부 2차관은 지난 2월16일 한 방송국과의 인터뷰에서 “FTA 협상과 상관없이 스크린쿼터는 축소돼야 하고, FTA 협상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고 물러설 수 없는 일”이라고 헌신짝만도 못한 혀놀림을 했다.
노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같은 날 청와대에서 “국내 이해단체의 저항 때문에 못가는 일은 절대 없도록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대통령은 “그동안 여러 가지 전략적 고려에 대해 보고를 받은 뒤 심사숙고해서 내린 결정”이며, “한-미FTA는 우리의 자존심이 걸린 일로 압력 같은 것은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서 대통령은 “지금까지 개방한 나라가 성공도 하고 실패한 경우도 있었지만 쇄국을 하면서 성공한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면서 “FTA의 목표는 한마디로 경쟁력 강화이며, 개방과 경쟁을 통해 세계 일류로 가자는 의미”라고 일갈했다.
한-미 FTA를 잡도리해야 할 노대통령은, 중국의 위협을 뛰어넘으려면 첨단산업과 서비스산업의 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하지만 그게 진짜 문제라면, 한-미FTA보다는 선진서비스 기술을 유리한 조건에서 끌어들일 수 있는 DDA가 더 좋다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특히 스크린쿼터 축소 논란에 대해서 대통령은 “어린아이는 보호하되 어른이 되면 독립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선소리쳤고, “한국 영화가 어느 수준인지 스스로 판단해 볼 때가 됐다”고 으름장을 놓고 윽박지른다. 스크린 쿼터 유지를 선거공약으로 내건 대통령의 독선-독단-독주가 돋보이는 지점이다.
참여정부의 스크린 쿼터에 관한 어록을 챙겨보면 이 정권의 도덕적 파산을 단번에 간파할 수 있다. 이창동 장관은 초심을 버리고 장관 말기에 축소안을 슬그머니 내놓았다. 정동채 장관도 취임 초기는 물론 지난해 11월 국회에서 “스크린쿼터를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 협상에 연계하지 않는다는 게 문화부의 입장이며 대통령과 총리의 생각도 같다”고 발언했다. 그런데 이 희대의 거짓말쟁이는 4000억 원을 지원하는 후속책을 내놓으면서 “정부가 1년 전부터 문화부의 축소안을 가지고 미국과 협상을 해왔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덤터기 씌우기에 일가견이 있는 이 정치장관은 “스크린쿼터 조정은 이미 전임 장관이 이야기했던 것”이며 “국제 경쟁력 강화를 위해 스크린쿼터에 안주해 왔던 영화제작 체질을 개선하고 영화산업 구조를 개편하겠다”고 말했다.
7년 전 한-미BIT의 협상본부장을 맡은 장본인이기도 한덕수 부총리는, 지난해 8월 ‘스크린쿼터 지키기’ 영화인대책위 대표들에게 “스크린쿼터가 국제규범에 부합하며, 한국영화의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면서, “통상문제 등을 고려해 스크린 쿼터제를 대체할 다른 제도가 있는지 함께 연구하고 검토하자”고 약속했다. 미국의 힘을 태생적으로 간파해 온 그가 약속을 지킬 리가 없다. 한-미FTA의 실질적 대부인 그는 스크린쿼터를 미국의 요구대로 줄여버렸다.
청맹과니들의 합창은 계속된다. 얼마 전 외교통상부의 김종훈 한-미FTA 협상 수석대표는 한 신문과 단독인터뷰를 했다. 김 수석대표는 스크린쿼터 축소 등 미국이 요구해 온 4대 선결조건을 모두 승낙한 이유에 대해 “연예인들은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크고 선거지원 유세 등을 통해 정치인들과도 밀착돼 있으며” 따라서 “스크린쿼터 문제를 본협상에서 논의하면 협정이 깨질 것으로 봤기 때문”이고 밝혔다. 그러면서 미국의 요구를 들어주면서 반대급부를 챙기지 못한 이유에 대해서 “우리 기업들이 한-미FTA에 관련해서 정부한테 사전에 요청한 것이 없어서 그렇게 됐다”고 그악스레 말했다.
뿐만이 아니다. 김 수석대표는 지난 5월25일 한국경영자총협회 포럼에서 초강대국 미국을 파트너로 고른 이유를 설명했다. “일부에서 미국보다는 가까운 중국이나 일본과의 FTA 협상이 우선 되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지만, 최근 한-중-일간에 불거지고 있는 민족주의와 국수주의 바람 때문에 마음을 열어놓고 경제개방을 논할 분위기가 아니다”며, “세계적 경쟁력의 시험장 역할(테스트 베드)을 해온 미국이 오히려 전략적으로 최적의 파트너가 될 수 있다”고 너스레를 쳤다. 상식을 크게 벗어난다. 얼토당토 않는 말의 내용이 사납다.
블랙 코미디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2005년 2월부터 4월까지 3차례의 미국과 사전 점검회의가 끝난 뒤, 김현종 통상협상본부장은 로버트 포트먼 미국 무역대표부 대표로부터 “핵심쟁점이 풀리기 전에 본협상에 들어가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통보를 받았다. 이어서 김 본부장은 2005년 7월과 9월 두 차례에 걸쳐 미국을 방문해서 물밑 이야기를 했다. 그 해 9월 대통령에게 보고해서 결심을 끌어낸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한-미FTA의 핵심을 꿰차고 있는 김 본부장은 “한-미FTA를 한국과 미국 사이에 태평양을 가로질러 경제 고속도로를 만드는 것”에 견주었다.
뿐만이 아니다. 김 본부장은 지난 2월 워싱턴에서 있었던 한-미FTA 협상을 시작하는 선언에서 미국과 바레인의 협상을 한-미FTA의 모델로 삼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미국과 바레인은 두 차례 협상을 한 뒤 협정에 조인했다. 한-미 비대칭성을 깡그리 무시하고 있는 한국판 람보는 “한-미FTA를 무조건 반대하려면 북한, 리비아, 쿠바, 이란 등 폐쇄를 택한 국가들이 성공했다는 증거를 보여야 한다”고 대갈했다.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다. 게다가 김 본부장은 얼마 전 브리핑을 통해 ‘정부가 스크린쿼터를 축소키로 했다’는 일부 신문 보도에 대해 “명백한 오보”라고 했다. 이어 “한·미간 FTA 협상 개시설에 대한 정확한 정보도 없으며 잠정적 합의도 이뤄진 바가 없다”고 딴청을 부렸다. 얼토당토아니한 거짓말을 입에 침도 안 바르고 했다. 개꼬리 삼년 묵어도 황모 되지 않는 이런 부류의 인간들이 국운을 좌지우지할 협상을 맡고 있다.
해가림의 장난에 이골이 난 이들 관료들은, FTA를 실제적으로 쥐락펴락하고 있다. 한덕수 부총리, 김진표 부총리, 청와대 경제보좌진에 배치된 관료들은 재경부 텃새들이다. FTA 호시절을 맞은 이 마피아 텃새들은, ‘예외상태’라는 전가보도를 휘두르면서 자기들의 의견을 밀어붙여 왔다. 이들은 긴급 상황(=예외상태)을 거들먹거리면서, 협상 전에 우리네 전략을 노출해선 안 된다며 ‘비밀주의’(=예외상태)를 내세운다. 이들은 미국이 한-미FTA 내용을 공개하지 않는데 왜 우리만 내용을 공개해야 하느냐고 딴청을 부린다.
이것은 거짓이다. 우리와 사뭇 다르게 미국은 협상에 대한 정보를 의회와 통상정책협상 자문위원회한테 제공한다. 이들은 늘상 비밀장막 속에서 자기네들의 기득권을 확대-심화시켜 왔다. 전문성(?)을 내세워 오직 국익을 실증적으로만 연구-실천한다는 이 텃새들은, 이미 모든 영역을 자신들의 산하에 배치하고 있다. 정권은 철새여서 짧고, 국민은 어리석고, 국회는 우습고 무능하며, 관료체제는 영원하다는 사실을 자신들의 벼리로 삼고 있다.
한-미FTA에서도 그들의 전문적(?) 도덕성과 애국심이 유감없이 발휘될 것이다. “지킬 것은 지키고, 전략적 개방도 할 것”이라는 냄새나는 처방전을 내린다. 어정쩡한 수사학으로 대중들을 헷갈리게 하는 데 이골이 난 이 외눈박이들은, 자기들의 든든한 받침목이자 둥지는 ‘오직’ 미국이라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터득해 왔다. 또한 재계와 친미 성향이 높은 거대언론들을 후원자로 삼고, 학계-문화예술계-종교계와의 커넥션을 각별히 유지한다. 미국인보다 더 미국적인 이 무지렁이들은 일 년도 안 되는 기간 안에, 제대로 된 연구보고서와 국민의 동의도 없이, 한-미FTA를 부랴부랴 추진하고 있다. 꼬리가 개를 흔들고 있는 셈이다.
▲ 신라호텔 앞에서 열린 한미FTA 저지 집회중 경찰이 기자회견 방송차를 탈취하려 하자 범국본 회원들이 필사적으로 이를 막으려 하고 있다. © 대자보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노 대통령에게 내내 막말을 하고 연거푸 발목을 잡아왔던 일부 하이에나 언론들이 초기에 영화인과 농민들에게 ‘깜짝 관심’을 보이다가 한-미FTA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는 점이다. 처음으로 노 대통령과 ‘적과의 동침’을 하고 있다. 그리고 7년 전에는 외교통상부가 앞장을 서드니, 지금은 재정경제부가 총대를 메고 있는 점도 주목할 만한 일이다. 예전과는 달리 각 부처의 이익을 대변해서 세차게 반대한 관료들 대부분이 지금은 숨을 죽이고 관망으로 일관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한-미FTA가 관료사회의 역관계에도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사실을 동물적 후각으로 꿰차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동안 목에 힘을 주고 주요 사안마다 대갈을 내뱉은 이른바 잘 나가는 지식인들은 이 사안을 신통방통하게 나몰라하고 있다. ‘굿 뒤에 날장구’ 치려고 하는가. 미꾸라지 국 먹고 용트림하는 이들은 이따금 FTA가 “모두에게 ‘복음’이다”라고 설교한다. 일본의 끈질긴 견제와 중국의 치열한 추격을 따돌리고, 국민소득 ‘3만 달러’의 선진 통상국으로 발돋움하자고 목청을 높인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미국이라는 거대시장(최근 딘 베이커 미국 경제정책연구센터 공동의장은 미국시장이 지난 10년에 걸쳐 1조1천억 달러 이상 커졌으나 또한 막대한 경상적자에 시달리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서 미국시장은 10년에 걸쳐 3천억 달러 이상 축소될 것으로 예측했다.)과 연계하고, 미국의 기술과 자본을 한국경제가 성장하는데 촉진제로 사용하자고 꾸밈말로 일갈한다.
심지어 윤대희 대통령 경제정책수석은 지난 7월20일자 ‘나라신문’에 특별기고한 글에서 색깔론까지 들먹였다. “한미 FTA에 대해 이데올기적 비판으로 발목을 잡는 것이 가슴 아프다”며, “한미관계를 항상 종속과 불평등의 관계로 인식하고, 미국의 요구는 압력이고 한국의 결정은 굴욕이라는 19세기적 인식의 틀이 과연 올바른가”라고 묻고, “대통령은 손해 보는 장사는 하지 않겠다고 밝힌 바 있으며, 정부는 우리 경제에 득이 되는 내용이라야 미국과의 협상을 매듭지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처럼 뒷북치는 나팔소리만 있지, 날이 선 송곳비판은 눈을 씻고 봐도 찾기 어렵다. 더군다나 국민 참여에 큰 덕목을 둔 참여정부가 이 사안에서는 철저히 국민의 목소리을 배제하고 있다. 지난 7월 10일부터 서울에서 2차 협상이 열렸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정부가 반대쪽에 보여주었던 막가는 태도는 대화하고 설득하겠다는 방침과는 사뭇 달랐다. 협정을 반대하는 시위를 평화적으로 치르자는 양해각서까지 제안했던 경찰은, 공공질서 위협과 교통 혼잡 유발을 거들먹거리면서 도심 집회를 하겠다는 시민단체의 신고를 깡그리 무시했다. 심지어 1천여 명의 경찰을 동원해서 협정을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막았을 뿐만이 아니라, 1인 시위까지 못하도록 했다. 게다가 12일 오후 서울시청 앞에서 집회를 열겠다는 것도 허가하지 않았다. 2만여 명의 경찰이 광화문 행진까지도 원천봉쇄했다. 몇 달 전 평택 대추리 사태의 재판이다.
▲ 범국본은 청와대에 항의방문을 하려 하자 경찰이 제지하고 있다 © 대자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정부는 비판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대화의 장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부는 힘으로 밀어붙였고, 따라서 갈등과 분열의 골은 깊게 파였다. 정부의 신뢰도는 크게 떨어졌다. 민주주의의 기본근간을 흔드는 정부의 이 같은 이중적 태도는 지난 5월 미국 워싱턴에서 열렸던 1차 협상 때도 마찬가지였다. 관계 장관들은 원정 시위대가 국가 이미지를 훼손할 것이라며 미리 점치고 성명까지 발표하는 코미디를 펼쳤다. 집회와 시위를 ‘잠재적 폭력’으로 예단하는 설익은 행동은 거두어들여야 한다. 게도 구럭도 다 잃는 행동거지는 더 이상 안 된다.
최근 조순 서울대 명예교수는 한겨레신문의 칼럼에서 “자유무역협정은 윈-윈게임이라지만 그런 공허한 소리로 진실을 가릴 수 없다”며, “혼란시대의 미래와 변화하는 세계의 대국을 내다보는 안목”을 주문했다. 경제부총리를 역임한 조순 교수는 “한국사회는 지금 자유무역협정 신드롬에 걸려 있고”, “한국경제의 문제는 성장을 보장하는 기본이 서지 않다”고 진단했다. 기본의 원칙을 강조해 온 이 경제원로는 “앞으로 1년 반, 정부는 이 협정에 전력투구할 것이 아니라, 경제의 기본을 세울 것”을 요구했다. 이같이 올곧은 충고를 마다하고, 노 대통령은 국민과의 인터넷 대화에서 한-미FTA를 “경쟁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일종의 쇼크요법”이라는 이상야릇하고 쌩뚱 맞은 처방을 내놓았다. 독선-독단-독주의 三獨皇帝. 한-미FTA를 ‘특효약’이라며 일방적으로 호루라기를 불어대는 노 대통령은 자신만의 특유한 뚝심과 모험주의에서 비롯한 오기를 부리고 있다.
그런데 지난 3월24일까지 미국의회는 이 협정의 청문회를 위해 국내외 도처로부터 의견서를 접수했고, 90일 동안 이 협정을 검토한다. 뿐만이 아니다. 미의회조사국의 보고서는 한국에서 점증하고 있는 중국의 정치-경제적 영향에 대응-견제하는데 FTA가 기여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이 말은 동아시아지역에서의 협력과 연대가 물 건너가고, 경쟁과 대립이 격화되는 것을 뜻한다. 한-미FTA에 관련된 로드맵이 한-미 군사동맹의 ‘전략적 변화’와 맞물려서 진행되고 있음을 시사 하는 대목이다. ‘전략적 유연성’을 수용한 정부와 평택 대추리에 미군기지를 확장해서 이전하는 것을 반대하는 쪽. 정부가 그들을 군사작전까지 펼쳐 강경진압한 것과 FTA가 따로 노는 게 아니란 말이다.
저쪽 국회는 저렇게 뛰고 있는데, 우리네 국회는 무었을 했는가. 협상을 감시하고 이익단체를 보호해야할 국회는, 걸핏하면 특위를 만드는데 이골이 나 있는데 이번에는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가 되었다. FTA에 관한 통상절차법 하나 제대로 추스르고 있지 않았다. 무늬 금배지들은 총리의 골프공과 시장의 테니스공의 진실공방에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재활용이 불가능한 의원들은 중차대한 사안을 내팽개치고 지자체 선거에만 심혈을 기울였다. 작금의 데데한 행태를 보이는 여당답지 못한 열린 우리당, 이상비만증과 과대망상증에 걸려서 민생법안을 사학법 재개정에 연관시키는 야당답지 못한 한나라당, 이들이 나라를 수렁에 빠뜨리고 거들내고 있다.
애당초 참여정부는 2003년 FTA에 관한 일정표를 제대로 만들었다. 단기적으로 일본-싱가포르-아세안-멕시코-유럽자유무역연합(EFTA), 중장기적으로 중국-인도-유럽연합, 이어서 미국과는 마지막으로 협정을 맺는 것으로 짜여 있었다. 그런데 참여정부의 핵심정책인 동북아에서 우리의 역할과 남북문제를 뒤로 하고, 대통령을 비롯하여 몇몇 관료들이 사안의 중대성에 비해 왜 이렇게 조바심을 보일까. 위험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이 협정에 참여정부가 도리깨침을 흘리고 부랴부랴 서두르는 이유가 무엇일까.
문민정부는 실명제를 실시했고 하나회를 해체했다. 국민의 정부는 6.15 공동선언과 남북 정상회담에 물꼬를 텄다. 그런데 비해 내놓을만한 것이 없는 참여정부! 동북아 균형자론과 동아시아 지역의 협력강화를 내팽개치고, 따라서 무리수를 둘 수밖에 없는 참여정부는 그 어느 때 정권보다 역설적으로(?) 친미정권이 될 가능성이 있다. 장고 끝에 나온 악수의 내용은 “포괄적 대북문제에 대한 미국의 양해를 이끌어 내고, 그것을 통해 정권재창출의 분위기(남북정상회담도 포함되어 있다)를 조성하기 위한 ‘빅딜’(?)이다”라는 소문이 시중에 회자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양극화 위기를 맞게 된 이유 중 하나가 소갈머리 없는 세계화정책에서 비롯됐다. 세계화를 외치면서 시장을 ‘마구’ 열어젖히다가 오늘의 불행을 자초했다. 1998년부터 2002년까지 외국자본이 한국 증권시장에서 얻은 평가차익은 자그마치 89조5천억 원에 이른다. 더군다나 2004년 외국자본이 보유한 국내주식은 시가총액을 기준으로 해서 40.1%나 된다.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은행산업에 대한 외국자본 점유율도 총자산을 기준으로 할 때 30%에 이른다. 직접투자는 21%에 그치고 투기성이 강한 증권투자가 얼추 51%이다. 국민경제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수치임에 틀림없다. 한국이 국제투기자본의 ‘사냥터’가 된지 오래 되었다는 비판이 도처에서 터져 나온다.
‘트로이 목마’가 될 가능성이 큰 한-미FTA가 그러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협상대상이 거의 모든 분야(농업, 섬유, 자동차-의약품-의료기기 작업반을 포함한 상품무역, 원산지/통관, 동식물 검역, 기술장벽, 서비스, 금융서비스, 투자, 통신/전자상거래, 정부조달, 경쟁, 지적재산권, 노동, 환경, 분쟁해결/투명성, 무역규제)에 걸쳐 있다. 때문에 신자유주의적인 구조조정이 강도 있게 이뤄져서 양극화 현상이 극대화될 터. 따라서 사회통합은 송두리째 무너질 게 뻔하다.
시장이 국가를 무기력화해서 지배하도록 하는 FTA. 이 공룡은 기업의 과다한 이윤추구를 규제하는 공공제도를 무역장벽과 투자장벽으로 여긴다. 이 괴물은 사회복지의 핵심인 공공제도를 사유화하고 영리화시켜 파괴한다. 따라서 교육-의료의 공공성 강화, 핵심국영기업의 보호, 중소기업 지원을 위한 금융제도의 필요성, 구조조정에 따른 극심한 피해가 예상되는 농업에 대한 지원책 등 양극화를 해소하려는 조치는 물 건너간다. 또한 노동시장의 유연성은 위험수위에 이르고, 뉴욕타임스 기자인 루이스 우치텔리가 <일회용 미국인>에서 지적한 것처럼, 노동자 대부분은 “한번 쓰고 버려지는 크리넥스 노동자”로 전락할 터.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일회용품’이 된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 사회적 혼란이 임계점에 이를 것이고, 따라서 치러야 할 사회적 비용은 천문학적 액수일 게 불 보듯 뻔하다. 나라의 밑동이 송두리째 뽑힐 가능성이 높다.
누가 조종(弔鍾)을 울리는가. KORUS FTA! 최근 결정된 한미FTA의 공식 명칭이다. 두 나라의 이름(KOR+US)을 섞어서 기발하게 작명한 것인데, 코러스가 합창 또는 조화(chorus)라는 냄새까지도 풍긴다. 따라서 제대로 된 코러스FTA가 되기 위해선 지금이라도 여론을 폭 넓게 모아서 우리의 입장을 제대로 정리해야 한다. 팽두이숙(烹頭耳熟)의 순리를 따라야 하는 법. 우리와는 크게 다르게, 미국은 협상문제의 제기부터 협상전략을 수립하기까지 국회와 긴밀한 협조관계를 가지고, 민간 이해당사자들의 의견을 크게 고려하며, ‘공개적’으로 진행함으로써, 국내 협상력을 높이고 있다. 의회가 통상절차법을 만들어서 FTA 협상과정의 정보를 제공하도록 규정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지난 5월22일 웬디 커틀러 한-미FTA 수석대표는 “미국 업계의 의견 제출이 다른 협상 때에 비해 월등히 많은 100여건에 이른다”고 말했다. 미국 업계의 압력이 거셈을 내비쳤다. 이어서 “20여 국가와의 FTA 협상을 미루고, 한국에 온 힘을 다해서 막대한 미국의 무역수지적자를 메우겠다”고 천명했다. 또한 올 해 11월에 미국에선 중간 선거가 있다. 따라서 기업과 유권자들의 압박이 극심해질 게 뻔하다.
그리고 우리 쪽은 내년에 대선이 있다. 국제정세를 고려할 때, 미국-일본-한국으로 이어지는 보수 벨트가 강하게 형성될 게 뻔한 이치.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는 대선 후보자들이 좌충우돌하고 거친 샅바싸움이 예상된다. 십년 주기설도 마음에 걸린다. 1987년과 1997년의 경제위기와 나라 지형의 대변환, 2007년도 만만치 않을 것으로 점쳐진다. 꼬챙이는 태우고 고기는 설익는 꼴을 되풀이 할 가능성이 높을 터.
그런데 미국과 FTA를 체결한 나라들은 15개국에 불과하다. 멕시코, 캐나다, 호주를 제외하면 모두가 중남미와 중동국가들이다. 정부는 한-미 FTA가 한국경제의 미래에 있어 유일한 선택이며, 미래의 번영을 약속하는 마법의 주문이자 열쇠라고 선전한다. 하지만 전국경제인연합조차 “한-중 FTA가 체결될 경우 사회후생효과는 22.99%, 산업생산효과는 27.78%에 이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런데 한-미 FTA는 사회후생효과가 4.73%, 산업생산효과가 -27.37%에 머룰 것”이라며 우려를 표명한 바 있다. 그리고 한-미 FTA에 관한 미국제무역위원회(USITC)의 발표에 따르면, 체결 4년 후 한국의 대미무역수지는 현재 98억 달러 흑자에서 9억 달러 흑자로 감소할 것이라며 한-미FTA가 미국에게 큰 이익을 가져올 것이라고 예측했다.
따라서 나라의 이로움을 위해서는 상호주의에 입각하는 유럽식과는 사뭇 다른, 세계은행조차 심각성을 지적한 일방주의적인 미국식 FTA의 자국중심주의에 대해 찬찬히 톺아 볼 일이다. 2005년 세계은행은 <글로벌 경제전망서>라는 연례보고서를 내놓았다. 이 보고서는 FTA 체결방식을 ‘미국식’, ‘유럽식’, 개발도상국끼리 체결하는 ‘남-남식’으로 구분했다. 특히 미국식과 유럽연합이 주도하는 유럽식과의 차이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협정문에 열거한 품목만 개방을 허용하는 유럽식과는 달리, 서비스시장의 경우 미국식은 모든 품목을 허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일부 품목만 예외를 인정한다. 미국식은 투자자한테 현지인 고용과 현지 부품 사용 등의 의무를 지우는 것을 금지시킨다. 더군다나 미국식은 투자자가 상대 정부에 대해 제소할 수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미국식에는 지속가능한 발전, 시민사회, 인권, 협력기금 같은 조항이나 개념이 없다.
그런데 2003년에 발효된 유럽연합과 칠레의 협정문을 보면, 112쪽 가운데 29쪽을 ‘정치적 대화’와 ‘협력’에까지 신경을 쓰고 있다. 정치적 대화에는 인권존중과 개인의 자유, 법치주의 등 민주적 가치를 보호-강화하기 위해 당사국간 정례 회담과 주기적 장관회담, 연례 고위급회담 등이 포함되어 있다. 협력 분야에는 중소기업발전을 위한 협력, 남녀평등을 위한 협력, 환경협력, NGO에 대한 협력 등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협력기금을 만들어 재정까지 지원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것들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만일 우리의 요구가 제대로 관철되지 않는다면, 시간적 여유를 두고 협상에 임해야 하는 법. ‘순서와 속도 맞추기’ 그리고 ‘낮은 수준의 제한적 협정’을 개방정책의 벼리로 삼으란 말이다. 종전에는 미국에 끌려 다니면서 미국의 일방적 요구에 굴복한 경우가 적지 않아서 낭패 보기가 일쑤였다. 만약 이번에도 힘의 논리와 당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은밀히’ 그리고 ‘불평등하게’ 협정이 체결된다면, 한-미FTA는 제2의 을사늑약이자 제2의 IMF 사태가 될 게 뻔하다. 여우볕에 콩 볶아 먹듯이, 나랏일을 엊빠르게 처리해서 국민들을 수렁으로 빠뜨려서는 안 된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정부는 조바심과 조급함을 털어버리고, 이 협정에 신중하게 접근해서 문제가 계속 덧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노적가리에 불지르고 싸라기 주워 먹어서야 되겠는가.
한-미FTA의 후폭풍을 마다하고, '자투리 대권정치'에 매달린다면 '참여정부'가 '나 홀로 정부'로, 노무현 대통령이 '三獨皇帝'가 되지 말라는 법이 없을 터. 따라서 노 대통령은 불행한 대통령으로 정치사에 남을 게 뻔하다.
<논어> 안연 편에서 자공이 공자에게 정치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물었다. 공자는 "양식과 군비를 버릴지라도 백성들이 정부에 대한 믿음을 저버린다면 국가는 제대로 설 수 없다"고 말했다. 또한 맹자는 능력이 아예 없는 것은 不能이고, 능력이 있으면서도 하지 않는 것을 不爲라고 했다.
'참여정부'는 과연 불능정권인가 아니면 불위정권인가. 얼마 전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은 “우리는 단기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세계화와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놓이게 됐다”고 말했다. ‘좌파 신자유주의자’이자 한-미FTA를 ‘만병통치약’으로 여기고 <한-미FTA 체결 지원위원회>를 대통령 직속기구로 둔 노 대통령. 그가 응답할 시점이다.
* 필자는 <교수신문> 편집인·중앙대 불문학 교수입니다.
* 본문은 한미FTA의 실상과 대책을 바로 알리기 위해 한미FTA저지교수학술단체공대위가 제공한 글입니다.
기사입력시간 : 2006-07-28
이 뉴스클리핑은 http://www.hwahap.org에서 발췌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