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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16일 대림 제3주간 목요일
제1독서 : 이사 54,1-10
복 음 : 루카 7,24-30
24 요한의 심부름꾼들이 돌아가자
예수님께서 요한을 두고 군중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25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화려한 옷을 입고 호화롭게 사는 자들은 왕궁에 있다.
26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다.
27 그는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사람이다.
‘보라, 네 앞에 나의 사자를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2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29 요한의 설교를 듣고 그의 세례를 받은 백성은 세리들까지 포함하여
모두 하느님께서 의로우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30 그러나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지 않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은
자기들을 위한 하느님의 뜻을 물리쳤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기도 중에 너무 많은 분심으로 힘들다는 사람을 자주 만납니다.
그때 제가 주로 하는 조언은
“주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그 분심 안에서도 주님께서는 계십니다.
그 안에서 주님을 찾아보십시오.”입니다.
실제로 이렇게 주님을 찾다 보면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분심에서 빠져나온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마음의 감기’라는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어떤 이는 “네가 의지가 약해서 그래!”라면서
의지가 없어서 우울의 감정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다고 정신의학자들은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두움에서 빠져나오려 애쓰지 말고, 오히려 어두움 속에서 빛을 찾아 꿋꿋이 전진하십시오.”
분심에서 벗어나는 방법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세상 어디에나 계시는 주님을 보려는 노력이 자기 변화의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보지 않고 어둠 속에만 머물려는 유혹은 생각보다 큽니다.
그 유혹 안에서도 우리와 함께하시려는 주님이 계십니다.
따라서 어떻게든 주님을 보려고 노력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대로 실행하는 자신을 자랑스러워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 같은 이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이들이 그들보다 훌륭하며 율법을 따르는 이들의 영광은
복음에 따라 사는 이들의 영광보다 훨씬 못하다는 사실을 입증하십니다.
그래서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가장 큰 인물인 세례자 요한을 예로 드셨던 것입니다.
그분은 요한을 예언자로, 예언자보다 위에 있는 인물로 잘라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율법에 따른 의로움에서 그보다 큰 사람이 없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요한보다 더 크다고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믿음으로 그 크기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은총이며, 바로 그 믿음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온갖 축복과 선물을 받을 자격을 인정받습니다.
믿음은 우리를 모든 죄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성령을 나누고 하늘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합니다.
믿음의 크기를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 믿음의 크기를 키우기 위해서는 주님을 계속해서 봐야 합니다.
어디에나 계시는 주님이시기에 우리의 의지를 세워서 보려고 한다면
그만큼 우리의 믿음도 커질 것입니다.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이 보낸 제자들의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루카 7,19)라는 질문에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의 성취를 통해 당신의 메시아이심을 증거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들이 돌아가자 예수님께서 군중들에게 세례자 요한에 대해 증언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 예언자냐?
그렇다.” (루카 7,24-26)
이는 그는 “예언자”라는 증언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해서 밝히십니다.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이다.
‘보라, 네 앞에 나의 사자를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그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루카 7,26-27)
이는 그가 단순한 예언자가 아니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선지자라는 말씀입니다.
곧 메시아에 앞서 와서 길을 닦으러 온 사자임을 밝히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거룩한 변모’를 이루신 후에 산에서 내려왔을 때
제자들이 “율법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마태 17,10)라고 묻자,
예수님께서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 잡을 것이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마태 17,11-12)라고 하신
말씀을 떠올려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이렇게 평가하십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루카 7,28)
이는 구속사의 흐름에서 요한이 차지하는 위치를 주지시켜주는 동시에
그가 구약의 한계에 속한 인물임을 드러내십니다.
곧 ‘그가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서는 가장 큰 이’나,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의 백성들에 비한다면 상대적으로 ‘작은 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이 쌀쌀한 찬 겨울, 우리는 대림을 지내면서 어디에 나와 있는지를 들여다 볼 일입니다.
광야에 나와 있는지, 왕궁에 나와 있는지, 그리고 무엇을 보러 나와 있는지,
누구를 만나러 나와 있는지 말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무엇을 만나고 누구를 만났는지, 아니 무엇을 찾고 누구를 보았는지 말입니다.
화려한 옷을 입은 왕인지, 헐벗은 옷을 걸친 예언자인지,
혹은 세상에서 큰 자인지, 하느님 나라의 작은 자인지 말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루카 7,24)
주님!
기다리다가 기다림에 끌려 나아갑니다.
오시기에, 오시는 임에 끌려 나아갑니다.
떠나야 당신을 만날 수 있기에, 힘껏 저 자신을 박차고 떠나갑니다.
의심도 흔들림도 화려함도 껍데기도 벗어버리고~ 아멘.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송영진 모세 신부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화려한 옷을 입고
호화롭게 사는 자들은 왕궁에 있다.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사람이다. ‘보라, 네 앞에 나의 사자를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루카 7,24-27)
여기서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는 세속 풍조에 쉽게 휩쓸리는 사람,
또는 세속의 처세술에 능한 사람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라는 말씀은,
“처세술 같은 것이나 배우기를 바란다면 세례자 요한을 만나러 광야에 갈 필요가 없다.”,
즉 “하느님 말씀은 세속의 처세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말씀이다.
하느님 말씀은 구원을 위한 말씀이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세례자 요한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아니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헤로데를 정면으로 비판했던
세례자 요한의 행동을 칭찬하시는 말씀이 됩니다.)
‘고운 옷을 입은 사람, 화려한 옷을 입고 호화롭게 사는 자들’은
세속적으로 성공해서 권력과 부귀영화를 누리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화려한 옷을 입고 호화롭게 사는 자들은 왕궁에 있다.”라는 말씀은,
“세속에서 출세하고 성공하기를 바란다면 세례자 요한을 만나러 광야에
갈 필요가 없다. 왕궁으로 가면 된다.”,
즉 “세속의 부귀영화는 신앙생활의 목적이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영혼 구원은 외면하고 세속의 부귀영화만 추구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심판을 받고 멸망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을 “너희가 세례자 요한을 만나러 광야에 간 것은
하느님의 심판을 피하기 위해서였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예언자’는 미래의 일을 미리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해 주는 사람을 뜻합니다.
(단순히 말씀을 전해 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회개시키고, 하느님 말씀을 실천하도록 깨우쳐 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가리켜서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라고 표현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은 ‘위대한’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다른 예언자들이 한 일들을 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예언자들이 하지 못했던 일까지 했습니다.
그것은 곧 메시아의 일과 메시아 시대를 직접 준비한 일입니다.
바로 그 일 때문에 세례자 요한은
다른 예언자들보다 더 중요하고 위대한 인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라키서 3장 1절을 인용하시면서 세례자 요한이
다른 예언자들보다 더 중요하고 위대한 인물이라는 것을 강조하시는데,
이 말씀은 당신이 곧 메시아라는 것을 암시하신 말씀이기도 하고,
당신의 신성을 암시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요한의 설교를 듣고 그의 세례를 받은 백성은 세리들까지 포함하여
모두 하느님께서 의로우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지 않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은
자기들을 위한 하느님의 뜻을 물리쳤다.”(루카 7,28-30)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 라는 말씀은,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 시대를 직접 준비한 사람이기 때문에
구약시대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다.”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들이(신앙인들이) 세례자 요한보다 더 훌륭하다는 뜻이 아니라,
메시아 시대 사람들은 구약시대 사람들보다 훨씬 더 큰 은총을 받고 있다는 뜻입니다.
구약시대는 메시아를 기다리는 시대였지만,
신약시대는 메시아와 함께 살고 있는 시대이기 때문에,
구약시대보다 훨씬 더 큰 은총을 받고 있는 시대입니다.
“요한의 설교를 듣고 그의 세례를 받은 백성”의 수는 많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마르 1,5).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 몇이나 ‘참된 회개’를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떻든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를 받아들여서 ‘참된 회개’를 한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구원하려고 당신의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셨다는 것도(요한 3,17) 믿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의로우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라는 말씀은 바로 그것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하느님께서 의로우시다는 사실’이라는 말은,
‘하느님은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받아들였다.’는 ‘믿었다.’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를 받아들여서 ‘참된 회개’를 한 사람들은,
요한의 증언과 인도를 통해서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받아들였고,
예수님의 신앙인이 되어서 ‘구원’을 향해서 나아갔습니다.
‘세리들까지 포함하여 모두’라는 말은,
하느님의 구원은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한 은총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어떤 이유로든지 간에 차별 당하는 사람도 없고, 소외당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지 않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은
자기들을 위한 하느님의 뜻을 물리쳤다.” 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인데,
위선자들은 자기들을 구원하려는 하느님의 자비를 거부했다.”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은
“나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이다.” 라고 자처하는 위선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자기들은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자처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를 무시했고, 요한의 세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회개하기를 거부한 것이고, 회개하면 받게 될 구원도 거부한 것입니다.)
회개를 억지로 시킬 수는 없습니다.
(강압에 의해서 억지로 하는 회개는 회개가 아니라 회개하는 척 하는 것입니다.)
또 구원받지 않겠다는 사람을 억지로 구원할 수도 없습니다.
(받지 않겠다는 사람에게 억지로 주는 것이 은총일 수는 없습니다.
은총이 아니라면, 그것은 구원이 아닙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파란 감이 가을이 깊어 빨갛게 되면 늙어간다고 하지 않고 익어간다고 합니다.
잘 익은 감은 보기에도 좋고, 맛도 좋습니다.
사람도 나이를 먹으면 늙어간다고 말하기보다는 익어간다고 하면 좋겠습니다.
세례를 받아 신앙인이 되는 것도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했던 시메온과 한나는 신앙인으로 잘 익어갔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대사제들과 헤로데는 추하게 늙어갔습니다.
예전에 선배 사제들과 모임을 가질 때입니다.
젊은 사제였던 저는 늦은 시간까지 시간을 보냈고, 다음날 무척이나 힘들어했습니다.
그런데 선배 사제들은 일찍 잠자리에 들고, 다음 날 아침이면
미사를 봉헌하기 위해서 성당으로 갔습니다. 사제로서 잘 익어가셨습니다.
어느덧 저도 다음 날 아침미사를 생각하며 일찍 들어가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후배들의 눈에 잘 익어가는 사제가 되면 좋겠습니다.
어릴 때의 기억입니다. 시골 고모부 댁으로 갔습니다.
고모부는 사촌들을 부를 때면 ‘세례명’을 부르셨습니다.
세상의 이름도 있지만 세례명이 ‘본명(本名)’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세례명으로 부른다고 하셨습니다.
친척 어르신들도 제게 ‘본명’이 무엇인지 물으셨고,
저는 늘 가브리엘이라는 세례명을 말씀드렸습니다.
미국에 오면 3가지 이름을 가지는 것을 봅니다.
한국에서 부르던 이름, 미국에서 정한 이름, 그리고 세례명이 있습니다.
이 중에 본명은 ‘세례명’이라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교회는 앞으로 2년 동안 ‘시노달리타스’를 준비합니다.
21세기의 교회는 많은 도전과 위기에 직면해 있기 때문입니다.
보편교회는 각 지역교회의 의견을 수렴하려고 합니다.
예전 공소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우리가 당면한 많은 문제들은 해결될 것 같습니다.
아침저녁이면 가족들이 모여서 기도를 하였습니다.
이름은 세례명인 본명을 불렀습니다.
주일에는 정갈한 옷으로 갈아입고 본당까지 묵주기도를 하면서 걸어갔습니다.
신앙의 단순함을 회복하는 것이 엉킨 실타래를 푸는 지름길 같습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면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이웃의 아픔과 슬픔을 함께하지 못한다면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어째서 광야로 나갔습니까?’ 재물과 권력 그리고 명예를 찾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 것들은 세상에 있다고 하십니다.
광야에서는 하느님의 뜻을 찾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광야에서는 예언자를 찾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이냐시오 성인의 영신수련 23항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사람은 하느님을 믿고 알아 구원받아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이제 세상 모든 것들을 하느님을 찬미하는데 유익하면 취할 것이고,
하느님을 찬미하는데 유익하지 않으면 버릴 것입니다.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귀함보다 가난함을 택할 수도 있고,
건강함 보다 아픈 것을 택할 수도 있고, 오래 사는 것 보다 단명함을 택할 수도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삶은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과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은 현재를 살면서도 영원한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많은 것을 소유했어도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고통 중에서도 희망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구름 뒤에 비추는 태양을 보지 못하고 쉽게 포기하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세상의 가치와 세상이 바라는 삶에서 벗어나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서입니다.
좀 더 낮은 자세로 주님의 성탄을 준비하고 기다렸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을 떠나보내신 다음에 요한을 높이 평가하시며 칭찬하신다.
사람들은 요한을 보고 그의 말을 들으려 광야로 몰려갔다.
예수님은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24절) 물으신다.
그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려고 광야에 나간 것은 아니었다.
주님은 세상을 불모지 광야로 비유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많은 사람의 무리가 흔히 볼 수 있는 것을 보러 나간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흔들리는 갈대란 변하기 쉬운 것이라는 뜻이 되기도 하기에
사람들은 변덕이 심하고 흔들리는 생각을 하는 인물을 보기 위하여
광야에 나간 것은 아니라는 말씀이다.
그들은 부드럽고 여자와 같은 사람, 비단옷을 입은 왕궁의 궁인들과 같은 사람을 보기 위하여
광야에 나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이 보러 건 사람은 바로 심지가 굳은 요한 세례자였다.
이 요한을 예수께서는 칭찬하신다.
“예언자보다도 더 중요한 인물”(26절),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28절) 하신다.
어떻게 요한은 모든 예언자보다 큰 인물일 수 있을까?
예수님도 예언자이심을 우리가 알고 있다.
주님은 모세가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 동족 가운데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주실 것”(신명 18, 15.18)이라 말하고
“누구든지 그 예언자의 말을 듣지 않는 자는 백성에게서 잘려나갈 것”(사도 3,23)이라고 한
그 예언자보다 위대하신 분이시다.
여기서 주님은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셨고 요한은 여자에게서 태어나신 분이시다.
자기와 태생 조건이 같은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본성이 다른 분과 인간을 비교할 수는 없다.
하느님과 인간을 비교할 수 없다는 말이다.
요한을 하느님과 견줄 수는 없지 않겠는가!
하여간 그들이 보러 나간 것은 예언자이며 성인이다.
예언자보다 더 위대한 분이다.
그는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다.”(요한 1,29)라고 한 분이다.
그분은 그리스도를 준비하기 위해 그분에 앞서 올 분이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28절)
어째서 그런가? 어떤 점에서 그런가?
세례자 요한은 그에 앞서 태어난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여자에게서 태어났지만,
믿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더는 여인의 자식으로 불리지 않고,
“하느님의 자녀”(요한 1,12)라 불리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자녀와 여인의 자식의 차이이다.
지금 내가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의 자녀로서
나의 위치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얼마나 나의 삶 속에 실천하느냐가 중요하다.
그리하여 나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드러나야 한다.
말씀을 실천하며 우리의 삶을 하느님께 봉헌하여야 하겠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