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작품이고, 작가입니다. 일찍이 독서모임에서 이 소설을 독파한 일도 있습닏니다. 작가부터 소개하겠습니다.
<프루스트>
파리 교외의 오퇴유(현재 파리 16구에 속함)에서 출생하였다. 부친 아실아드리앵 프루스트(프랑스어: Achille Adrien Proust)는 전염병 예방의학의 권위자이며 모친 잔클레망스 베유(프랑스어: Jeanne Clémence Weil)는 유대계의 부유한 집안 딸이었다. 9세의 천식 발작을 시작으로 평생 동안 고통을 받게 된다. 1882년 콩도르세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일찍부터 문학작품을 가까이하여 학교에서 작문과 논문으로 상을 받기도 하며 재능을 발휘했다. 졸업 후에 군대에 지원 입대하여 1년간의 복무를 마치고 파리 대학 법학부에 들어가 1893년 법학사가 되었으며 이때부터 문학 살롱과 사교계에 자주 드나드는 한편 직업은 갖지 않고 문학에 열중했다.
최초의 저작 《즐거움과 나날(Les plaisirs et les jours , 1896)》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동인지나 그 밖에 발표했던 소품과 단편을 모은 것이다. 1895년부터 1899년에 걸쳐서 3인칭 형식의 자서전적인 장편소설 《장 상퇴유(Jean Santeuil, 1952)》를 시도하였으나 미완으로 그쳤다. 존 러스킨의 <아미앵의 성서>와 <참깨와 백합>을 번역하였다(1904, 1906). 후에 《모작과 잡록(Pastiches et mélanges, 1919)》과 《시평집(1927)》에 수록될 평론을 신문이나 잡지에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문학활동은 모두 '유일하고 참다운 글'을 쓰기 위한 준비라 할 수 있다.
1906년 양친을 여읜 정신적 타격을 넘어서 《생트뵈브에 반대한다(Contre Sainte-Beuve, 1954)》을 쓰기 시작하며, 이것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 집필로까지 이어진다. 이후 프루스트는 죽을 때까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몰두하였고, 총 일곱 권으로 구성된 이 방대한 분량의 작품은 1913년부터 1927년에 걸쳐 출판된다. 대전 이후 출간된 제2권 《꽃피는 아가씨들 그늘에 (À l'ombre des jeunes filles en fleurs)》로 1919년 공쿠르상을 받아 일약 유명해졌을 뿐만 아니라, 이 걸작으로 20세기 최대 작가의 한 사람이 되어 널리, 그리고 깊이 영향을 끼쳤다.
1912년에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원고 출판에 프랑스 출판사가 퇴짜를 놓았다. 세번째 출판사가 출판에 동의하긴 했지만 프루스트가 자비로 출판을 한다는 조건을 달았었다. 초기의 독자가 언급한데로 “이 712페이지 짜리 원고를 읽고 난 이후에도 여전히 이 책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를 알길이 없었다.” 도대체 이 책의 주제는 무엇인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가? 결론이 무엇인가? 작가 앙드레 지드는 프루스트가 고상한 체하는 사교계의 속물로 잘 알려진 인물이라는 이유로 이 책의 원고를 읽는 것조차 거부했다고 알려져 있다. 프루스트처럼 부유하고 까다로운 속물이 무슨 할말이 있었던 것일까?
결론적으로 보면 그의 작품은 이보다 더 단순할 수 없을 정도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연령 미상의 젊은 주인공(마르쉘) 남성은 독서애호가이고 수줍음을 타며 내향적인 인물이지만 기괴하거나 반사회적이지는 않다. 그는 자신의 모친을 사랑하며 베니스로 여행을 가고 싶어하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나중까지 여행을 미룬다. 프루스트의 자전적인 이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 마르셀은 자연과 음악, 레스토랑, 호텔, 해변, 성당, 예술, 극장, 파리를 사랑한다. 그는 또 우정과 소녀들에 대한 공상에 빠지기도 하고 자신을 탐구할 때와 마찬가지로 가차 없는 아이러니와 예리한 시각으로 자신의 주변에 있는 성인들을 분석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삶의 아름다운 부분들을 예찬하면서 언젠가 인간과 예술가로 성숙된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창조해볼 수 있기를 꿈꾸고 있다.
모든 위대한 작가들은 작품을 통해 독자를 반사경으로 비추고 있다. 프루스트의 경우는 돋보기를 들고 병적으로 기이한 자신의 성격을 보여주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언제나 인식하고 있을 수도 있지만 더 자세히 알고 싶어하지 않을 수도 있는 바로 우리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프루스트의 작품을 읽고 모든 문단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의 작품을 잘못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작품을 읽으면서 얻는 깨달음은 우리가 결코 자기성찰적이거나 솔직하지도 않고, 솔직함과 관련해 우리가 원하는 것은 고사하고 느끼는 것을 인정할만한 대담함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갈망하는 사랑에 대한 그의 시각을 논하자면, 사랑이 많은 굴곡과 불가사의를 내포하고 있어서 그것이 우리에게 다가왔을때 너무나도 왜곡된 면모를 보여주기 때문에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질투, 앙심, 학대로 불리우는 사랑의 다른 이름이 아니라면 그것을 거의 알길이 없을 것이다.
외부 세계에 있어 마르셀 프루스트는 핸섬하고 매력적이고, 재치있고 친절하고 박식하며 매혹적이고 놀라운 천재성을 갖고 있으며 영특한 인물이었다. 그는 또한 매우 부유한 부르조아 출신으로 프랑스의 일부 최상류 집단에서 일원으로 모시기를 갈구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쯤에서 해볼만한 질문은 그가 더 이상 바랄 것이 무엇이었겠는가, 무엇이 잘못됐는가, 매우 쾌할한 그가 왜 철저하게 고독했으며 슬픈 정서를 지니고 있었는가가 아니라 작가로서 천부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었던 그가 펜을 들기까지 왜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렸는가 하는 점이다.
그에 대한 대답은 그의 작품에 있지 않다. 그 대답은 바로 그의 작품 그 자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