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2025. 1. 4. 토요일
날씨가 맑고 밝고 환하니 덜 추운 것 같다.
내일(1. 5.)은 소한(小寒)인데도 하루 전인 오늘은 그다지 춥지 않아서 다행이다.
서울 최고온도 영상 3도, 최저온도 영하 5도.
* 소한(小寒) : 일 년 중 날씨가 가장 춥다는 날(24절기 가운데 23번째)
<한국국보문학>카페 '등단 시인방'에 무봉 김도성 시인의 시가 올랐다.
내가 퍼서 '세상사는 이야기 방'에 올리고는 내 글감으로 삼는다.
첫 선 본 여자
무봉 김도성
얼굴 사진 한번 보고
두 번 만나 살아보자
약속했던 그 여자
세 딸 짝지어 보내고
알맹이 빠진 껍데기로
바람에 흔들린다
2025. 1. 3.
내가 댓글 달았다.
내 댓글 1
글 고맙습니다.
위 시가 주는 '첫선'의 뜻을 이해합니다.
이미지 사진 속의 콩깍지.
익은 콩이 다 쏟아지면 빈 깍지만 남겠지요.
자식을 낳아 키우고, 짝지어 내보내는 부모 특히나 어머니의 삶은 다 엇비슷하겠지요.
엄지 척! 합니다.
김도성님 늘 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내 댓글 2
마음고생 많으시겠군요.
김도성 님도 나이가 많아서 힘들게 사시는데도 또 아내까지 뇌경색으로 행동이 불안정하기에 이를 보살펴야 하시고,
사모님이 낙상으로 팔목골절, 수술, 요양병원, 폐렴 등으로 종합병원에 입원했으니 김 선생님은 직간접으로 힘이 더 드시겠군요.
빈 껍데기의 의미를 저는 알 것 같습니다.
저도 위와 비슷한 경험을 했지요.
제 어머니도 뇌경색, 제가 보는 앞에서 퍽 쓰러져서 머릿통 깨고, 병원 응급실로 실려가고, 요양병원을 거쳐서 최종에는 뇌사상태로 오랫동안.... 종합병원에서 돌아가셨지요.
김 선생님이 더욱 건강하셔야 사모님 환자를 돌볼 수 있습니다.
무봉 김도성 시인의 회신
뇌경색 아내 11년 지병으로 함께 살다가
지난 11월 낙상으로 팔목 골절로 수술후
요양병원에서 지내다가 폐렴으로
종합병원에 입원한 아내를 보니
바람에 흔들리는 껍데기 같습니다.
새해에 만수무강하세요.
나는 충남 보령시 웅천읍 구룡리 화망마을의 산골 태생이다.
어린시절에는 머슴(일꾼)이 소 목에 멍에를 씌운 쟁기로 밭 흙을 갈고 콩씨(흰콩, 방콩, 서리태, 팥) 등을 뿌렸다.
콩밭에서 콩줄기 자라면서 꼬투리가 매달리고, 익으면 일꾼들은 낫으로 콩대를 베어 한 다발씩 묶어 지게로 져서 바깥마당 한 구석에 세워서 가을볕에 콩대를 더 말렸다.
어지간하게 마르면 너른 마당에 짚으로 엮어서 만든 멍석 여러 개를 펼치고 그 위에 콩대를 헤쳐 펼친 뒤에 도리캐로 후려치며 콩알을 털어냈다. 콩바슴을 했다. 해콩을 몇 가마니씩 담았다.
나중에 메주콩으로 사용하거나 두부콩으로 활용했다.
콩껍질(콩껍데기, 콩깍지) 쇠죽 솥안에 넣고는 물 부어서 뜨겁게 삶아서 일소한테 퍼 부었다.
콩알이 빠져나간 콩껍데기일 망정 촌가에서는 아주 요긴하게 사용하였다.
소가 없는 가난한 집에서는 콩껍대기를 부엌 아궁이에 넣어서 불 땠다.
무봉 김도성 시인의 시에서 나오는 '껍데기'는 많은 것을 말하고 있다.
젊은날 싱싱했을 때에는 콩껍질 속에는 알맹이가 잔뜩 들어있었으나 가을이 되어 콩알이 익으면 그 콩알은 다 빠져나가고 빈 껍질만 남게 된다.
위 시에서도 늙고 병든 아내가 마치 빈 껍질(껍데기)이 되어서, 갱신도 하지 못한 채 종합병원에서 힘겹게 치료받는 모습을 그려냈다. 희망이 거의 다 사라진 아픈 아내. 아픈 몸이라도 그저 오래 살았으면 하는 소원을 간접적으로 표현했다.
젊은날 예쁘고 희망이 가득 찼던 연인이었건만 많은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로 늙고 아파서 이제는 영원히 헤어져야 할 이별의 시간, 운명의 시간이 자꾸만 다가온다는 사실에 독자인 내 가슴도 절절하게 아파온다.
나한테도 이별의 아픔이 있었다.
아내가 아닌 늙은 어머니와의 이별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에 어머니와 헤어져서 객지인 대전으로 전학갔고, 대전에서 초·중·고교를 졸업했고, 서울에서 대학교에 다녔고, 직장생활도 서울에서 끝을 마쳤다. 정년퇴직한 뒤에서야 고향에 내려갔더니만 어머니는 시골에서 혼자 사시다가 집나이 아흔살이 되어서야 아들인 나와 함께 둘이서 살기 시작했다.
아쉽게도 어머니는 치매기가 진행 중이었고, 팔 한 쪽도 병신이 되어 전혀 쓰지 못한 채 비쩍비쩍 쓰릿쓰릿하면서 걷는 세월에 와 있었다. 아들이 하나뿐인 내 앞에서 어이없이 펑 넘어져서 머릿통을 깨뜨리고, 차에 실려서 병원 응급실에 입원하고, 뇌경색으로 음식을 자시다가 목에 걸려서 또 병원응급실로, 요양원, 노인병원, 종합병원 등으로 전전긍긍하다가는 보령종합병원에서 눈을 감으셨다. 섣달그믐이 생일인 어머니. 집나이 아흔일곱살인 음력설을 맞이한 지 며칠 뒤에 눈을 감으셨다.
고향 앞산 아버지 무덤 한 자락을 파서 합장해 드리는 날에는 왜그리 날씨가 사납고 춥던지. ...
상여꾼도 벌벌 떠는 눈발이 휘몰아쳤다.
남자 상주는 나 혼자. 속으로 울음을 삼키면서 매장 현장을 지켜보았다.
무봉 김도성 시인의 위 시는 나한테는 많은 생각을 떠올리게 한다.
어머니를 장사 지낸 뒤 나 혼자서 시골집에서 살기가 뭐해서 나는 그참 서울로 되올라와서 아내와 합류해서 지금껏 산다.
이제 한달 반 뒤에는 어머니 돌아가신 지 만10년째인 제사날이 돌아온다.
2월 25일.
그날 초저녁에 나와 아내, 내 자식(손녀 손자)과 며느리, 둘째사위(외손주)가 제삿상 앞에서 큰절을 올릴 것이다.
사진은 인터넷으로 검색했다.
용서해 주실 것이다.
사진에 마우스를 대고 누르면 사진이 크게 보인다.
2025. 1. 4. 토요일.
나중에 보탠다.
잠깐이라도 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