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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에 관한 교훈 10:1~12
1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유대 지경과 요단강 건너편으로 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다시 전례대로 가르치시더니
2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3 대답하여 이르시되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4 이르되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 주어 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5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6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7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8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9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10 집에서 제자들이 다시 이 일을 물으니
11 이르시되 누구든지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에 장가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12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
어린아이와 하나님 나라10:13~16
13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14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16 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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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바리새인들이 이혼에 대해 묻자, 예수님이 부부는 한 몸이기에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고 답하십니다. 또한 배우자를 버리고 재혼하는 것은 간음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하나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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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에 관한 교훈 10:1~12
예수님은 부부의 연합을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은지’ 묻습니다. 이는 헤로디아와 결혼하기 위해 아내와 이혼한 헤롯 안티파스를 책망했다가 죽임당한 세례 요한처럼 예수님을 몰아가려는 계략입니다. 이혼 증서를 써 주고 아내와 헤어지도록 한 ‘모세의 율법’은 이혼을 정당화하는 법이 아닙니다(신 24:1~2). 예수님은 이 규정이 이기적인 목적으로 아내를 버리는 완악한 남편에게서 아내를 보호하기 위한 법적 장치임을 밝히십니다. 이혼은 창조 질서를 깨뜨리는 행위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6~9절; 창 2:24). 하나 되고 연합하는 부부 관계는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결혼 제도와 가정은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신성한 제도입니다.
● 더 깊은 묵상
예수님은 결혼과 이혼에 대해 어떤 교훈을 주셨나요?
결혼과 이혼에 대한 나의 생각에서 바로잡을 부분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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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와 하나님 나라10:13~16
예수님은 약자인 어린아이들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옵니다. 예수님이 자기 자녀를 어루만져 주시길 바란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들을 냉대합니다. 바쁘신 예수님께 어린아이들이 방해가 된다고 여긴 것입니다. 이를 본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분노하시며 어린아이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가르치십니다. 약자인 어린아이는 부모를 전적으로 의지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어린아이처럼 낮은 마음으로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믿음입니다. 성도는 주님의 시선으로 어린아이들을 바라보아야 하고, 어린아이같이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해야 합니다.
●더 깊은 묵상
하나님 나라가 어린아이 같은 자의 것이란 말씀은 무슨 의미인가요?
어린아이처럼 주님을 의지하기 위해 내가 내려놓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요?
오늘의 기도
주님, 사람의 완악한 마음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살기 원합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창조 질서에 순응하며 평안과 기쁨과 만족을 누리게 하소서. 어린아이 같은 신앙의 순수함을 잃어버리지 않고,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천국을 소망하게 하소서.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2-9절 예수님을 시험할 목적으로 ‘이혼 문제’를 질문하는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결혼 제도의 참된 의미를 알려주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따라 이혼을 허용해야 한다고 가르쳤고,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사람의 완악함 때문에 허용된 ‘이혼 규정’이 다시 사람의 ‘완악함’ 때문에 악용되고 있었습니다. 모세의 때 ‘이혼 증서’를 써 보내는 것이 버림받은 여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처였다면, 예수님이 이혼을 금하는 결혼의 본뜻을 강조하시는 것은 이혼 제도를 이용하여 아내를 버리는 남편들의 악행을 막기 위한 조처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규범 준수를 넘어서, 그 규범이 지향하는 본래 정신을 구현할 것을 촉구하십니다.
11-12절 완악한 동기에서 비롯된 이혼과 재혼을 ‘간음’으로 규정하십니다. 어쩔 수 없는 형편 때문에 갈라서는 일이 있을 수 있지만, 단지 자기 욕망 때문에 첫 언약을 깨뜨리고 아내나 남편을 버리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일이며, 그들을 짝 지어 주신 하나님을 기만하는 행위입니다.
내게주시는교훈은무엇입니까?
2절 아무리 선한 율법이어도
어떤 마음으로 접근하는지에 따라 욕망을 이루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유익한 지식도 타인을 공격하는 무기가 될 수 있고,
상호 간의 소통을 위한 질문과 대화도 상대를 넘어뜨릴 덫이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우리 마음의 태도입니다.
나는 어떤 의도로 신앙의 규범들을 지키고 가르치고 있습니까?
13-16절 어린아이처럼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 준수를 내세워 선민의 지위를 자랑하고,
제자들은 자기 공적을 내세워 하나님 나라에서 누가 더 큰 지 다퉜습니다.
둘 다 자기 공로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리라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어린아이처럼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어 순전히 선물로 받아들이는 자들의 것입니다. 세상은 자신을 드러내야 대접받을 수 있지만,
하나님 나라는 어린아이처럼 낮아져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 공동체는 어린아이와 같이 작고 힘없는 이들이 주인공으로 대접받는 곳입니까,
아니면 세상의 유력한 자들이 대접받는 곳입니까?
기도
자신을 낮추고 타인을 존중하며, 어린아이처럼 순전한 마음으로 주를 찾게 하소서.
오늘 본문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이혼에 대하여 묻자, 주님께서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와 원칙을 말씀하심으로 그들의 오해와 편견을 지적하시며 책망하시는 내용입니다. 또한 자신에게 다가오는 어린아이들을 제자들이 꾸짖자, 그들처럼 하나님나라를 받들지 않는 자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다고 하십니다. 본문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곧 바리새인들의 함정, 모세의 이혼증서에 대한 해설, 결혼과 이혼에 대한 가르침, 하나님나라에 합당한 자들 등입니다.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어 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 이혼에 대한 근거를 묻는 예수님의 질문에 바리새인들이 답한 말입니다. 이는 신명기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 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증서를 써서....’라는 내용입니다. 특별히 ‘수치 되는 일’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유대인 학자들 사이에서도 그 해석을 놓고 많은 논쟁이 있었습니다. 우선, 율법의 엄격파인 샴마이 학파에서는 그것을 간음으로 보고 간음한 것을 제외하고는 이혼을 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율법 해석에 대해 매우 자율적인 힐레파는 어떤 조건이든 이혼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심지어 아내가 밥을 태웠을 경우라도 말입니다. 그렇게 된 까닭은 당시 여성들은 경제권은 물론 인권이 없었고, 아내를 소유물로 보았던 사회문화적인 악습 때문입니다. 더 좋지 않은 점은 그것이 그들의 합법적인 이혼 관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즉, 신명기의 말을 문자적으로 받아 들여 이혼 증서를 써 주면, 얼마든지 그리고 언제든지 이혼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실은 그들 마음에는 다른 것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조강지처를 버리고 또 다른 여자를 택하기 위한 악한 정욕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간음이라고 통렬하게 지적하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주님에게 질문한 것은, 그러한 폐단에 대해 바른 해석을 하여 악법을 고치자고 한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한 것을 빌미로 예수님을 논쟁에 끌어 내 흠집을 내고, 동시에 책잡기 위한 방편인 것입니다. 더 나아가 정치적인 의도도 깔려 있습니다. 그 당시 헤롯이 공공연하게 이혼하고 그것을 비판하다가 세례 요한이 죽었으므로, 그리스도도 그런 전철을 밟게 하자는 속셈입니다. 그러한 복안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요한보다 더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를 취하면 간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결혼제도로 일축하시니, 바리새인들은 침묵하고 맙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 이는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자칫 구원의 조건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나라 시민의 자질을 말하는 것으로, 스스로 연약한 존재임을 깨닫고 주님만을 의지하는 자를 말합니다.
해설과 묵상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 예수그리스도께서 정의해 주신 결혼관입니다. 이에 따르면 결혼은 하나님의 한 몸 프로젝트입니다. 아담이 홀로 독처 하는 것이 좋지 않아서 하나님께서 하와를 함께 살게 해 주신 것이라 그렇습니다. 그래서 둘은 한 몸이 됩니다. 비록 몸은 따로 지만, 결혼의 테두리 안에서 한 몸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둘은 분리 될 수 없습니다. 부부가 되는 순간 육신적으로도 하나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예수님은 부부는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스스로 나눌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결혼에 대한 정의요 대원칙입니다.
하지만 이 법은 차츰 남자의 손 안에서 편리한 도구가 되고 악법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더구나 예수님 당시에는 율법이 허용한 ‘수치 되는 일’을 가부장적인 남자들이 멋대로 해석해 남편을 불편해하거나 심기를 건드린다고 해서 아내를 버리는 일이 잦습니다. 결국 이혼도 못된 마음에서 나온 것이지요. 그런 이유로 급기야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아내로 하여금 간음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간음이 마음에서 비롯되듯이 이혼도 그런 마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어디까지나 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지, 이혼 절대불가는 아닌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의 긴장관계가 있습니다. 만약 구약의 것에 충실하면 예수님께서는 ‘음행한 이유 외에’라는 말을 빼야 합니다. 왜냐하면 음행을 했을 지라도 하나님이 짝지어 준 자이기에 결코 사람이 나눌 수 없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주님은 조건이 맞으면 사람이 나눌 수도 있다고 하십니다. 이혼에 대해 주님께서 폭 넓은 시각을 보여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조건적으로 ‘불가’가 아니라 조건을 다신 ‘불가’인 것입니다.
이혼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라 할 수 있으니, 그것이 성경의 2차 시각입니다. 그 시대보다 현대는 더욱더 사연이 많아진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상대적인 시각으로 보다 폭 넓은 이해와 판단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럴지라도 한 몸 프로젝트는 절대적인 시각입니다. 절대적인 가치를 무제한 초월하는 상대적인 가치는 없기 때문입니다.
결혼과 이혼, 재혼과 또 이혼, 이 모든 문제의 근원을 우리는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결혼은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마련하여 주신 제도이니, 결혼관계의 기초는 무엇보다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존재이므로 당연히 그 관계의 기초는 사랑이지요. 문제는 그 사랑이 변하거나 식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의 차원으로 본다면 변하지 말아야 하는데, 인간의 사랑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비와 눈이 내려도 일단 비행기가 지상을 벗어나면 안전운항을 할 수 있습니다. 구름 위에는 푸른 하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올라가야 합니다. 적어도 구름층을 통과해야 합니다. 같은 선상에서 상대방을 이해하거나, 동일한 시각에서 배우자나 상황을 바라보면 미움뿐입니다. 적어도 그 수준을 뛰어 넘어야 잃어버렸던 사랑을 돼 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은 부메랑입니다. 하는 것만큼 돌아오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랑도 노력해야 한다고 봅니다.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깨닫고 배우고 연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한 몸 프로젝트를 기어이 완수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가 바라 볼 이상적인 모델이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특별히 그분의 사랑입니다.
호산나 외치다가 돌연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동족 유대인을 주님은 사랑하십니다. 더 나아가 운명하시면서도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십니다. 그 사랑이 우리 마음에 있으면, 용서하지 못할 사람이 없고 사랑하지 못 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 사랑으로 잃어버렸던 사랑을 회복하는 우리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 사랑으로 배우자뿐만 아니라 자녀들과 직장동료들 상사들 더 나아가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들까지도 품는 우리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가능합니다. 십자가에서 주님이 그 완전하신 사랑을 완성하시고는 우리에게 유업으로 넘겨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 이루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 불가능한 사랑을 꾸준히 시도하여 원수도 사랑하는 그 사랑을, 배우자는 물론 세상에 분명히 보이는 우리들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이혼과 재혼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시험하는 것을 아시고, 오히려 되물으셨습니다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막10:3)
이렇게 모세의 이름으로 물으신 것은 이혼을 허락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모세가 어쩔 수 없이 허락한 것임을 그들의 입으로 대답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의 마음이 완악하여 이혼하고 재혼하며 자기들 뜻대로 하여 하나님의 뜻을 버립니다 그래서 이혼율은 치솟고 재혼도 흔한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면 교회에서만큼은 분명하게 가르쳐야 하는데, 그런 설교 주제는 금기시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막10:6~9)
따라서 이혼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범죄고, 재혼은 하나님 앞에 간음하는 범죄입니다
"누구든지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에 장가 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 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막10:11~12)
물론 이 말씀이 이미 이혼했거나 이미 재혼한 사람들에게 정죄감을 안겨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셨다는 점에서 하나님 앞에 겸손히 회개할 문제이지 정죄에 빠질 일도 아니고, 더더군다나 진리를 벗어나 적당히 합리화할 문제는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예민한 문제에 대해 명확하게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그들의 행위를 본받아 우리의 영혼이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시기 때문입니다
"그의 행위를 본받아 네 영혼을 올무에 빠뜨릴까 두려움이니라"(잠22:25)
따라서 우리 앞에 올무를 놓으려 하심이 아니라, 우리로 이치에 합당하게 흐트러짐 없이 믿음으로 살게 하셔서 우리로 유익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당하게 하여 흐트러짐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함이라"(고전7:35)
오늘의 말씀요약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아내를 버리는 게 옳은지 묻습니다.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 주라고 허락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고 하십니다. 또한 어린아이들이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시며, 하나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라고 하십니다.
오늘의 말씀해설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10:1~12)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아내를 버리는 문제에 대해 묻습니다.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 주면
이혼할 수 있다고 했지만(신 24:1), 예수님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는 그렇지 않다고 답하십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인간이 나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내든 남편이든 상대를 버리고
재혼하면 간음죄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모세 율법도 이혼을 장려하거나 적극적으로 허락한 것은 아닙니다.
이혼 증서는 인간의 정욕 때문에 허용된, 한계를 둔 규정이었습니다(5절). 또한 아내를 소유물로 생각한
당시 문화에서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보다 훨씬 높은 차원의 법,
즉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따라 부부 관계와 가정을 소중히 지켜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 묵상 질문: 7~8절에서 예수님이 모세 율법(신 24:1)보다 창세기 말씀(창 2:24)으로
설명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 적용 질문: 가족 간에, 부부간에 더욱 하나 되기 위해 필요한 노력은 무엇인가요?
어린아이를 용납하라(10:13~16)
제자들은 어린아이를 데리고 예수님께 나아온 사람들을 꾸짖습니다.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는 말씀(9:37)을 들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그렇게 행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는 어린아이와 같은 낮은 자의 것이며, 어린아이처럼 겸손히 하나님 나라를 받들어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어린아이처럼 낮아져 자신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탁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를 깨닫지 못한 제자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낮은 자들에게 열려 있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큰 자가 되려고 애쓰는 것은 어리석은 태도입니다.
- 묵상 질문: 제자들은 어린아이들이 예수님께 오는 것을 왜 막았나요?
- 적용 질문: 어느새 마음이 높아지진 않았나요? 어린아이와 같은 태도를 회복해야 할 삶의 영역은 어디인가요?
오늘의 기도
세상은 자존심을 내세우며 더 높아지라고 소리치지만 주님은 더 겸손하고 낮아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에서 추구하는 욕망을 좇지 않고,
주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믿음을 끝까지 잃지 않게 하소서.
1.인간의 완악함(1-2절)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고자 하는 바리새인들의 또 하나의 음모가 오늘 성경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당시 헤롯의 결혼문제로 인하여 민감한 정치적인 사안과 나아가 이혼문제에 대하여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진 학파들간의 문제를 일으키자는 의도를 가지고 예수님께 이혼에 대하여 모세의 율법으로 질문하게 됩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어떻게든지 예수님을 믿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는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눈으로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것을 보면서도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들의 생각은 이미 굳어져서 예수님께서 그들 눈앞에서 어떤 기적을 베풀어도 그것을 믿으려고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가진 악한 본성의 한 모습입니다. 우리 역시 그들과 같은 완악한 인간 본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항상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간구하는 겸손한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묵상하기
내 안에 악한 본성에게 지배 당하고 있지 않은가?
2.말씀의 본질을 이해하라(3-12절)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한 그들의 질문에 대하여 그 말씀이 제정된 본질적인 부분을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이혼증서를 써 줘라고 한 것은 이혼증서를 써줌으로서 이혼을 정당화 한것이 아니라 인간의 완악함을 막기 위하여 자기 마음대로 행하는 이혼을 최소한으로 억제하고자 하는 조치였음을 지적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가장 바람은 가정을 이룬 이들이 이혼없이 서로가 사랑하며 이해하며 살아가는 것임을 깨닫게 합니다. 즉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어서 서로 헌신과 사랑의 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결혼제도의 근본임을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가꾸어주신 가정을 사랑과 헌신으로 부부가 함께 세워가는 아름다운 가정을 만들어야 할 책임이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묵상하기
하나님의 말씀의 참 뜻을 이해하며 행하는가?
3.어린아이 같은 순전한 믿음 (13-16절)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도 예수님의 뜻을 잘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회적 관습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예수님께 오는 것을 금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오히려 꾸짖어시면서 이 아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순전하게 받아 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천국에 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아이들 머리에 손을 얹으시고 축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선물 받은 성도는 날마다 영적인 순전함을 잃지 않도록 늘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순전한 마음으로 말씀 앞에 서고 그 말씀을 참된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묵상하기
나는 어린이이와 같은 순전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마가는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의 이혼에 대한 논쟁에 이어 어떤 의도로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어루만져 주시기를 원했던 것은 스스로는 그분 앞에 찾아오기 어려운 매우 어린아이들이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이야기에 대한 무지함, 그리고 그들 가운데 누가 더 큰지에 대한 논란과 세상의 권세들과 하나둘씩 계속 부딪히는 갈등 때문이었는지 그들 자의적으로 그 어른들을 꾸짖고 그 행위를 막아섰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행동에 대해 ’거룩한 분노‘로 대응하십니다. 율법을 빌미로 예수님을 시험하고 위험에 노출시키고 거짓된 가르침으로 그 백성들에게 거짓 선생이 되어버린 바리새인들이나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전적으로 받아야 할 아이들 사이에 걸림돌이 되는 제자들이 아직은 차이가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주님의 사랑과 구원의 은혜, 그 가르침을 겸손과 순종으로 받아내는 아이들과 같지 않은 이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없다는 선포를 하시며 그 아이들을 만져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껴안으시고 손을 얹어 축복해 주십니다.
우리 인생에 유일한 길이 되시고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허락하신 성령으로 충만하여 제자 된 삶을 넉넉히 감당하는 복된 하루의 시간이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며 사는 삶❞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고 단순하고 겸손하게 믿고, 신뢰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는 사람입니다.
✔ 하나님 나라를 이해한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 자의적으로 해석하지 않는 것입니다(1~8절).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이혼 문제를 가지고 다가왔습니다. 그들은 이혼에 관한 질문을 통해 예수님께 죄를 덮어씌울 수 있는 근거를 찾고자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교묘한 질문에 대하여 모세가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는지 물으시면서 모세의 율법에 이혼을 허락한 것은 인간들의 완악함(5절)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이혼의 당위성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악함을 인하여 발생하게 될지도 모를 사회적 질서의 파괴를 방지하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주신 율법의 목적을 망각하고 율법을 왜곡하고 오해하여 이혼 제도를 악용해서 아내를 버리는 것을 정당화 했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세우신 창조 원리를 무시하고, 사회의 질서를 무너뜨렸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혼인의 목적에 대해 보충하는 법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외적 문구에 매달려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했고,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결혼 제도는 인간들의 욕망을 채워가기 위해 그리고 이기적인 유익과 만족을 얻도록 하기 위해 인간들이 자의적으로 만든 제도가 아닙니다. 분명 하나님의 창조 섭리가 담긴 하나님이 친히 정하시고, 세우신 제도임을 깨닫고,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또한 결혼은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모형이 됩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이혼을 합리화 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불신앙적인 모습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결혼을 한 사람이든, 아직 미혼이든 결혼 제도가 하나님이 친히 만드신 거룩한 제도라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이해는 자의적인 해석에 의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결정되어지는 것입니다.
➲ 임의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것입니다(9~12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9절,새번역).. 하나님은 이 땅에 질서를 주시고, 타락한 인간은 무질서를 추구합니다. 하나님은 평화와 하나 됨을 주시지만, 인간은 다툼과 분열을 가져옵니다. 결국 결혼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속한 것이고, 그로 인하여 무분별한 이혼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죄악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당시에는 남자와 여자가 간음했을 경우 여자에게만 간음죄를 적용하는 나쁜 관습이 있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남편이든 아내이든 서로 버리고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것 모두 간음죄라고 말씀하십니다(10~12절).. 어떤 경우에라도 가정을 파괴하는 죄를 범하지 않기를 바라시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오늘날 이혼이 하나의 문화적인 요소를 띄고 있음에 참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대중문화들 속에 비춰진 외도를 사랑으로 미화하고, 결혼한 사람일지라도 다른 이성과 사랑에 빠질 수 있으며, 이혼하고 재혼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식으로 보여 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육적 간음뿐만 아니라 영적인 간음 또한 철저하게 경계해야 하겠습니다. 누구도 이러한 간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늘 깨어 기도하면서 내 자신의 눈과 마음을 지켜나가야 하겠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이해는 지극히 세상적인 시선에 의해 임의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시선을 두어 그에 맞게 행동함으로 결정되어지는 것입니다.
➲ 주관적으로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13~16절).
사람들이 어린 아이들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와서 만져 주시기를 바랬지만, 제자들은 그들을 꾸짖으며 막았습니다. 그런 제자들을 예수님은 노하시며,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아라. 하나님 나라는 이런 사람들의 것이다...누구든지 어린 아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거기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14~15절,새번역)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겸손히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시금석이 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내 자신의 가치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 아이들처럼 순수하고 깨끗하고 순종한 마음으로 이해하고, 받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결혼 제도에 대해서도, 간음에 대해서도 철저히 순종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가라 하시면 가고, 멈추라 하시면 멈출 수 있는 그런 신앙의 순수함이 나에게 남아 있는지 돌아봅니다. 철저하게 내 자신의 견해나 관점 그리고 판단을 내려놓고, 성경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이해는 주관적인 판단이 아닌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고 깨달아 어린아이처럼 순종함으로 결정되어지는 것입니다.
오늘도 한 가정의 가장으로 그리고 남편으로 책임과 의무를 저버리는 삶을 살아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린 아이들처럼 순수하고, 겸손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고, 누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막 10:1~16 절)..
마가복음 10:1~16 허락하신 것과 금지하신 것
가이사랴 빌립에서 갈릴리로 갈릴리에서 유대 지경과 요단강 건너편으로
예수님이 움직이시고 계신다.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유대 지경과 요단 강 건너편으로 가시니(1)
무리가 다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다시 전례대로 가르치시더니(1)
예수님이 가시는 곳은 언제나 사람들이 많이 모여 드신다.
가르치시는데는 탁월하신 것 같다.
그런데 고약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한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는다.(2)
사람이 아내를 내어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2) 애매한 질문이다.
바리새인들은 가장 엄격한 율법주의자들이다.
당시 에세네파 사람들은 아예 금욕주의자들이였으니까 결혼 자체를 안하고
독신으로 살았던 사람들이였으니 별 문제가 없었는지 모르지만
당시에 이혼의 문제는 오늘날의 이혼의 문제보다 훨씬 심각한 사회 문제였다고 한다.
1세기에 유명한 랍비 힐렐(Hillel)은 만일 남자가 원하기만 하면 아무 때라도
이혼이 가능하다고 가르쳤다고 한다.
아침에 빵을 태웠거나, 불을 관리를 못해서 꺼뜨렸거나
심지어 강아지를 걷어찼다거나 자기 순서가 아닌데 말을 해도 이혼 사유가 된다고 한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이혼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이다.
이혼 절차 도한 매우 간단하다고 한다.
저는 내 아내가 아니요 나는 저의 남편이 아니라.(호2:2)라고 선언하고
이혼증서만 한 장 딸랑 써주면 끝이다.
문제는 몇 푼 되지 않는 지참금의 일부를 돌려 받고 아무런 생계 대책없이
쫓겨나는 여인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한다.
예수님은 모세가 무어라 명했는지 물어보신다.(3)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 주어 내어 버리기를 허락했다고 말한다.(4)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낼 것이요.(신24:1)
수치스러운 일이 있을 때에만 이혼 증서를 써서 이혼 할 수 있었다.
이 증서는 여자를 마음대로 내쫓을 수 있는 악습을 막기 위한
법적 수단으로서 인권존중의 사상이 깔려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율법에 대한 해석이 다르시다.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이 명령을 기록하였다고 하신다.(5)
신명기의 율법의 말씀이 이혼을 장려하는 말씀이 아니라
남자의 완악한 마음을 이르는 말씀이라고 지적하신다.
예수님은 결혼의 원래의 의미를 설명해 주신다.
창조 시로부터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으니(6)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7)
그 둘이 한 몸이 될찌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니(8)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9)
결혼이란? 하나님이 짝 지어주신 것이라 말씀 하신다.
결혼이란? 사람이 나누지 못하는 것이라 말씀 하신다.
결혼이란? 둘이 아니요 하나라고 말씀하신다.
결혼이란? 남자와 여자가 하는 것이라 하신다.
결혼이란? 그 부모를 떠나는 것이라 말씀하신다.
왜 그렇까?
하나님이 짝지어 주었다는 생각이 없다. 재수없이 너를 만났다는 것이다.
사람이 나누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가 아니라 너 스타킹는 너 스타킹이고 내 양말은 내 양말이라 생각한다.
남자가 남자와 여자와 여자가 결혼하겠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혼은 하나님에 대한 반역의 죄악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정하신 뜻을 반역함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법칙은 처음부터 일부일처 제도였고
인간의 율법이나 규례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창조 원리를 깨뜨릴 수는 없다
은혜와 진리의 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우리에게 말씀으로 인도하시고
그 거룩한 영으로 새롭게 하시니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주님의 가르침으로 믿음의 반석 위에 바로 서서
세상 가운데 빛으로 나아가며 영원한 생명을 전하는
주님의 자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에도 열방 가운데 주님의 복된 소식 전하시는
선교사님들의 삶과 사역 가운데 동행하여 주시고
그 모든 필요에 넘치도록 하늘의 창고를 열어 공급하여 주시옵소서.
질병과 전쟁, 기근과 핍박, 온갖 자연재해로 말미암아
고통받고 신음하는 이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회복과 치유의 역사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저 북녘땅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빛을 비춰주시고
이 나라와 백성이 지금까지 허락하신 놀라운 복을 누린 자로
열국을 향해 담대한 증인으로 거룩한 제사장 역할을 감당하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양을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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