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욘 1: 8 재앙이 임하는 이유
욘 1: 8 재앙이 임하는 이유 -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이 재앙이 누구 때문에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말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네가 네가 어디서 왔으며 네 나라가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하니 (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컨대 이 재앙이 무슨 연고로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고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어디서 왔으며 고국이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
요나는 제비에 뽑혔다.
이 재앙이 요나로 인하여 온 것이라는 원인을 밝혀주시므로,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시며, 요나의 신분을 통해서 신앙의 근거를 심어주는 것이다.
요나가 그 풍랑의 원인이 자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함이라고 그들에게 고하자, 무리는 알고 심히 두려워했다.
1]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이 재앙이 누구 때문에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말하라.
(1)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무리가 요나의 신분을 묻는 말로 요나가 어떤 사람이며, 현재 요나 자신이 어떠한 상태에 있는가를 깨우쳐서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무리의 물음에 대한 요나의 답변을 통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지금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우리 주위에는 많은 사람이 살면서 기독교를 향해서 많은 말들을 하고 있다.
이들의 말은 정확하지 않고 때론 근거도 없이 억울한 말을 하는 때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없는 말을 하는 것은 아니어서 그 근거를 한 번쯤 알아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누구 말이든 어떤 말을 하는 데는 반드시 이유가 있으므로 귀를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우리의 단점은, 특수한 사람의 말 이외는 다 무시하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스스로 옳다고 생각한 것이 틀릴 수도 있으므로 주위의 여론을 보고, 군중의 말도 듣고 그에 따라 자신을 발견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대개는 자기밖에 모르고 자기만 잘난 줄로 생각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은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때로는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므로 하나님께서 손을 대기 전에 문제를 해결해야 하며, 오늘 한 행동의 결과가 하나님 앞에 영원히 남게 되는 것이므로 무리의 소리를 잘 들어 자신을 바르게 고쳐가야 한다.
그런데 무리의 소리를 들을 때 주의할 점은 자기 자신을 합리화하지 말아야 한다. 이단들은 의인이 고난을 당한다는 말을 이용하여 자신을 합리화시키지만, 이는 결국 자신을 망치는 일이다.
우리가 세상에 온 목적은 세상에 있을 동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거울삼아 하나님의 나라에 가서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한 시험대이다.
그러므로 무리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하며, 자기 밖의 사람들의 말을 귀담아들을 수 있어야 한다.
한문에 듣기 싫어하는 소리를 해 주는 사람이 스승이라 하였는데, 가까운 사람일수록 솔직하게 잘못을 지적해 주어야 한다.
무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지만, 그렇다고 누가 말한다고 그의 말에 즉시 넘어가면 안된다. 그들의 여러 가지 의사 표현을 다 듣고, 결정은 적당한 때에 포괄하여 신중히 내려야 한다.
그러므로 자기에게 쓴 말이건 단 말이건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자기 뜻에 안 맞는다고, 나와는 반대라고, 배척하는 좁은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해서는 안 된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자기를 살펴서 자신의 잘못된 점을 고쳐 가는 세밀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 대해 다 알고 계시기에 세밀한 사람에게는 더욱 세밀하게 간섭하신다.
간혹 적당히 넘기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의 세밀한 간섭을 받는 자가 복된 사람이다.
시편 73편에 의인이 자신을 살피고 세상을 살피다 보니 신앙을 실족할 뻔했다고 하였다.
* 시 73: 1-3 – 1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2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3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은 불의를 일삼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살아도 생각보다 소득도 많고, 육신적으로 살기가 편해서 좋아 보이는데, 자신은 항상 매를 맞고 징계를 받는 등 하나님께서 너무나 세밀히 간섭을 하시는가 하였더니, 그 사람은 절벽으로 내려가며, 망하는 길을 가고 있었다.
이처럼 복 받은 사람은 아침마다 책망을 받는다고 하였다.
* 시 73: 12-14 – 12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 13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14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
그리고 우리는 적당히 생각하기를 자신에게 커다란 잘못이 없고, 하루 동안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잘못한 것 없이 의인처럼 모두 잘하고 살았다고 하는데, 세밀히 살펴보면 잘못한 것들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자신에 대해 좀 더 엄격하고 세밀한 관찰이 필요하며 세밀하게 자기를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미리 알고 고치게 된다.
(2) 재앙이 무슨 연고로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재앙이"[라으](evil) 는 {형} 나쁜, 사악한, 불행한, 부정한, 애처로운, 비참한, 괴로운, 화, 재해, 악심, 걱정이란 뜻이다.
이는 재앙이 오게 된 원인을 고백하라는 것으로, 요나의 잘못을 깊이 생각하게 하여 회개를 촉구하는 말이다. 비단 요나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어떤 사건이 생겼을 때도 반드시 원인이 있는 것이므로 먼저 원인부터 알아서 처리해 나가야 한다.
그런데 원인을 아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① 자신의 처지에서 ‘이런 일이 왜 생겼을까 하며 자기를 돌아보고 그 사건과 관련한 자기의 잘못을 깨달아서 해결하는 방법이다.
②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께서는 왜 내게 이런 환경과 사건을 주셨을까’하고 생각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내게 가장 요긴한 것을 주시기 위해서 그 사건을 주신 것이므로 하나님 처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나의 입장에서는 나의 회개를 위해서, 하나님 처지에서는 나에게 새로운 것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 사건을 주신다.
그런데 여기에서 회개한다는 말은 습관적으로 잘못했다고 고백하며, 또다시 같은 잘못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고, 다시는 그런 잘못을 하지 않도록 바르게 고쳐나가고 발전하며 성장해 가야 한다.
우리들은 풍랑 만난 것을 재앙으로 보고, 풍랑이 우리를 해하러 왔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을 재앙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큰 선물로 보는 사람은 믿음으로 통과할 수 있지만, 재앙으로 보는 사람은 거기서 넘어질 수밖에 없다.
이렇듯 직면한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믿음의 정도가 다르다. 그러므로 자기에게 부닥친 일을 좋은 기회로 보면 쉽게 해결할 수 있지만, 나쁜 일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고통과 고난만 될 뿐이다.
또한 좀 더 잘 믿기 위해서, 혹은 바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진리를 깨닫기 위해 온 사건으로 보면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다.
이같이 자기에게 부닥친 그 사건을 누구의 잘못이냐를 따지기 전에 복으로 받는 태도를 가진다면 해결이 안 되고 어려움이 왔을지라도 신앙은 자라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도가 회개하고 은혜를 받으면서 사는 것이 바른 생활로 사건이 발생할 때 회개하고 은혜를 받으면 손해가 없다.
칼뱅은 은혜에 대해 하나님의 뜻에 더욱 크게 작용하는 불가항력적 은혜라고 말했다.
'말하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기다'(*)는 '말하다'는 의미를 가진 '나가드'(*)의 히필 명령형으로 매우 강력한 요구임을 보여 준다.
그만큼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2] 네 생업이 무엇이며, 네가 네가 어디서 왔으며, 네 나라가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하니
몇몇 구약 사본과 70인 역에서는 이 질문이 생략되었다.
그러나 이 질문 내용이 없다면 내용 전개가 어색하게 된다.
(1) 네 생업이 무엇이며
"네 생업이"[믈라-카](thine occupation)는 {여}{단}[명] 일, 짐승, 시무, 물품, 노동, 역사, 공역, 행사, 사무, 사업, 제조란 뜻으로 요나가 무슨 일을 하였느냐 묻는 말이다.
생업이 무엇이냐고 물은 것은 요나 신분을 묻는 것으로써, 요나 자신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알아서 자신의 현재 상태를 깨닫고 자기 신분에 맞도록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요나의 본분은 선지자로서의 사명이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말이다.
또한 선지자로서 지금 하는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 말인데, 이같이 성도도 자기가 하는 일을 통해서 자신의 신분을 바로 인식하라는 말로서, 지금 하는 일이 자기 신분에 맞는지 바로 알라는 것이다.
그러나 요나는 자신의 신분과 전혀 맞지 않는 일을 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목사라는 신분을 가진 하나님의 종은 자기 뜻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하는데, 때때로 그의 행동을 보면 신분에 맞지 않게 행동함으로써 과연 목사로서 어떻게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종이라는 신분을 가진 그가 하나님을 바로 믿는지, 혹은 천국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누구나 이 세상에서는 오래 살지 못하고 죽는다는 것을 생각하는지, 죽으면 천국이나 지옥에 간다는 것을 아는지, 그의 생활을 보면 천국 생활에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고 오히려 지옥 생활에 걸맞은 사람 같았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신앙적이요 양심적임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세계와 그가 살고 있는 현실과는 너무나 다른 것이며, 지식이 많고 하나님 종의 위치에 있더라도 그 마음에 하나님이 계시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계신 세계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행위를 반성하여 점검할 필요가 있다. 요나에게 물은 것은 비단 요나에게만 물은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 묻는 것이라고 생각하여야 한다.
여러분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본업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세상에 보내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섬기러 세상에 왔다.
그러나 예수 믿는 일을 하기 위해 세상에 와서 본업은 멀리하고 있지 않는지, 혹은 일은 하되 자기 신분에 맞게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런데 예수를 믿음에는 도리가 있는데, 예수 믿는 도리란 예수님과 관계 맺는 것을 말한다. 처음에는 예수님이 명한 것은 하고, 하지 말라 금한 것은 하지 않는 것으로서, 이는 법적인 관계에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이때 하나님은 명령자이고 우리는 순종하는 사람이므로 우리의 노력이 필요하며, 우리가 노력해서 예수를 믿어야 하기에 힘이 드는 신앙이다.
그렇지만 법적 관계에서 예수님을 잘 믿게 되면 한 단계 올라가 도덕적 관계에서 예수님을 믿게 된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기가 해야 할 의무를 완수하는 것으로서, 이때에도 누가 도와주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열심으로 섬겨야 한다.
자기 스스로가 노력해서 하나님께 칭찬받고 자기가 잘한 줄 알지만, 실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와 같은 일을 감당하며 예수 믿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진리의 말씀을 따라 자유로이 믿어야 한다. 이는 진리 안에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으로써, ‘나’는 없어지고, 내가 하는 일도 없고, 다만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일해주시고, 은혜 입혀주시는 것을 보게 된다. 즉 자기 자랑은 없고 주님만 따르며 감사할 뿐이다.
오늘날 기독교 신자는 많지만, 성도의 도에 들어간 사람들은 많지 않다. 그러나 교인들 마음에는 하늘의 도가 가득 차 있어야 하며, 하늘 세계를 바라보고 잘 믿어야 한다.
교인들의 주된 일은 예수 믿는 일인데, 믿음의 도를 따라서 예수를 믿어야 한다. 그리고 신령한 세계는 영안으로 보고 믿는 세계이므로 신령한 눈을 떠야 한다. 하나님께서 종과 교회를 통해서 교인들에게 길을 열어주고 신령한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뜨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종의 영안이 열리지 않았으면 그의 지도를 받는 교인들도 영안이 열리지 않는다. 교인 수가 많지 않고 교회 발전이 잘 안되는 것이 교회 타락이 아니고, 교회가 발전하고 교인 수가 많아도 세상을 닮아 가는 것이 교회 타락이다.
요한계시록 1장 20절에서도 주님의 오른손에 붙잡힌 별들은 하늘의 세계를 보여 주고, 땅에 떨어진 별들은 땅의 세계를 보여 준다고 하였다.
(2) 어디서 왔으며
"어디서"[아-인](and whence)는 [부] 어디로부터, 어디로서, 거기서부터란 뜻이며, "왔으며"[보] (comest thou)는 {자} 오다, 임하다, 이르다, {타} 데려오다, 가져오다란 뜻으로 어느 곳에서 왔느냐 하는 말이다.
이는 네가 어느 곳에서 살다가 왔느냐고 묻는 말로서 요나의 고향을 묻는 말이다. 요나는 스불론 지파에 속한 가드헤벨에서 살다가 다시스로 가는 길이었다.
이 물음에서 자기가 살던 고향을 생각해 보고, 자신이 가려는 곳도 다시 한번 생각하여 가는 길을 바로 선택하라는 말이다.
즉 성도의 본향은 영원한 천국인데, 지금 가고 있는 길이 고향길인지 아니면 다른 길인지 생각하여 보라는 말이다.
(3) 고국이 어디며
"고국이"[에-레쯔](thy country)는 {통}{단}[명] 땅, 들, 세상, 세계, 나라, 천하, 토지, 육지란 뜻이며, "어디며"[메](what is)는 [불] 왜, 무엇이, 어찌하여 란 뜻으로 요나의 고국은 이스라엘 나라이다.
고국이 어디냐고 묻는 것은 요나가 살던 나라가 어디인지 묻는 말로서 이는 나라의 특성을 일깨워주는 말인데, 요나의 고국이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나라임을 인식 시켜주는 말이다.
즉 이스라엘은 선민 국가로서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말로서, 세상에 있는 성도가 자신의 고국인 하늘나라를 바라보게 하시는 계시이다.
우리는 어디에 속한 백성입니까? 천국 백성입니까? 지옥 백성입니까, 천국 백성이라면 천국 백성다운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생활을 볼 때 어디를 바라보고 사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로서 우리가 하는 일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4)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민족에 속하였느냐"[암](people) 는 무리, 백성, 거민, 자기 열조, 만민, 족속, 민족, 이란 뜻으로 민족성을 일깨우는 말이다.
각 민족에 따라 신앙이 다르고, 한 나라 안에도 여러 민족이 살고 있으므로, 세계 여러 나라 중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하는 물음이다.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하는 것은 히브리 민족이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보호를 받고 사는 민족이라는 것을 일깨우는 말이다.
모든 민족은 제각기 그 민족에 맞는 생활 풍속이 있어 그 풍속을 따라 살지만, 히브리 민족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사는 백성이므로 이방 풍속을 따라가지 말라는 것이다.
이와같이 성도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보호를 받고 사는 선민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을 깊이 인식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적국인 니느웨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시는 것을 보고, 하나님보다 자기가 이스라엘 민족을 더 사랑한다고 생각하며, 자기 민족을 위해 다시스로 도망하였지만, 실상은 요나보다 하나님께서 히브리 민족을 더 사랑하시고, 니느웨를 회개시키고자 하는 것까지도 니느웨가 이스라엘을 정복하고자 하는 야욕을 버리게 하기 위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생각과 방편이 요나와 달랐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구약의 히브리 민족은 혈통을 순수하게 지키기 위해서 근친결혼을 한 것 같이 신약에서도 신앙 계통을 중요시하였다.
창세기 6장 1절 이하를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대로 아내를 삼으니 그들이 육체가 되었다" 고 하였다.
이는 하나님 아들에 속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 사람의 딸에 속한 신앙을 가진 자와 결합하므로 성령님의 신령한 역사는 떠나고 육에 속한 신앙을 가진 자가 되었다는 말이다.
구약 선지자들의 계통을 보면 참 선지자 미가야가 있을 때, 그 시대를 대표하는 왕의 선지자가 약 400명이 있었고, 엘리야가 있을 때, 이방 선지로서 진리를 혼잡케 하는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 합 850명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숫자에 구애받지 않고 참 선지자를 기뻐하셨다. 이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이 같은 비율로 하나님의 참 종으로서의 신앙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런데 오늘의 신앙 상태를 살펴본다면 대개 몇 가지 신앙으로 분류할 수 있다.
①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믿는 신앙으로서,
모든 것을 자기에게 맞추므로 자기가 좋은 것은 좋은 것이고, 자기가 나쁜 것은 나쁜 것으로 생각하여, 자기 마음에 따라 제멋대로 믿는 신앙이다.
②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제멋대로 믿던 자가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을 생각하여 몇 가지 계명을 지킬 때가 오는데, 이는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으로서, 하나님과 법적 관계에서 맺어지므로, 하나님은 명령하고 자기는 복종하여 섬기는 신앙인 것입니다.
③ 하나님과 법적 관계를 맺던 사람이 신앙이 자람에 따라
하나님을 위해서 계명만 지키는 것이 아니고, 복 받기 위해서 좀 더 좋은 일을 하고 봉사하며, 충성함으로 자신의 행위를 앞세워 하나님을 가까이하게 되는데, 이는 의인의 신앙으로서 자신의 의로운 행위를 보고 믿는 도덕적인 신앙이다.
④ 도덕적 신앙에서 한 걸음 나아가면 신령한 신앙이 되는데,
진리의 깨우침을 받아 심령이 밝아짐으로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가지며, 자기 안에서 역사하시는 말씀에 이끌리어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신앙이다.
이처럼 여러 신앙 단계에서 볼 때 자신은 현재 어느 위치에서 신앙생활을 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그런데 법적인 신앙이나 도덕적인 신앙은 자신의 노력과 욕구에 따라 하는 것이므로 욕심이 없으면 못하게 된다. 즉, 일등이 되어 보려는 것이나, 전도를 많이 하여 큰 교회가 되려는 것 등 욕심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신령한 신앙은 자기가 죽어지고 욕심이 없어져야 하며 이때 비로소 신령한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