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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승전이 끝나고 리뷰를 쓸 기운이 없었다. 김진수가 안전하게 공을 차냈다면, 김진현이 공을 더 안전한 쪽으로 차냈다면, 김진현이 막아낸 공을 우리 수비 앞에 떨어졌다면, 끝없는 가정을 하게 되었다. 우승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지만, 대한민국의 우승을 간절히 바랐기에 아쉬움이 컸던 까닭이다. 그렇게 하루 밤을 자고 나서야 결승전의 리뷰를 쓸 여력이 생겼다. 아직도 허무하고 아쉬운 건 매한가지이지만, 그래도 지금은 27년 만의 아시안컵 결승전을 복기해 볼 수 있게 되었다. 경기에서 패한 팀이긴 하지만 우리는 준우승 팀이다. 어려웠던 과정을 생각해보면 충분히 자랑스러워 해도 된다.
(△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의 귀국.)
1. 이번 대회 최고의 경기력을 보여준 결승전
호주와의 결승전은 사실 상 우리가 아시안컵에서 제대로 된 상대를 만났던 첫 경기다. 우즈벡이나 이라크는 사실 우리보다 한 수 아래라고 봐야 한다. 호주와 예선에서 만나기는 했으나, 호주 역시도 주전이 많이 빠져있었고, 우리 역시도 쿠웨이트 전에서 큰 선수 변화를 겪은 후 제대로 된 주전 선수들을 기용한 첫 경기였다. 이후로 호주를 제외하고는 딱히 강한 팀을 만나지 않았으니 대진에 운이 따랐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우리와 비등한 수준의 상대와 경기를 치르지 못한 채 결승전을 치른 것은 아쉬움이 남는다.
우리가 보여준 경기력은 아시안컵 전 대회 중 가장 훌륭했다. 특히, 전반전은 수비적으로 거의 완벽했다. 호주가 제대로 된 공격을 거의 하지 못했다. 수비와 미드필더 사이의 간격은 매우 긴밀하게 조정되었고, 공격진의 수비 가담으로 수비적 안정감을 더했다. 공격 시에는 수비라인 역시 함께 끌어올리면서 경기를 잘 풀어나갔다. 호주는 전반전 내내 제대로 된 공격작업을 할 수 없었고 긴 볼에 의존한 공격을 해야 했다. 특히 이정협의 전방압박은 천천히 공을 돌릴 수 없도록 만들어 주면서 수비에 큰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전반전 말미 수비와 미드필더 사이의 위협적인 공간에서 한 차례 선수를 놓쳤는데 그것이 실점과 연결되었다. 루옹고의 플레이가 훌륭했다. 우리의 실수가 원인이 되었지만, 그것을 잘 살려 골로 연결한 것은 상대의 역량 때문이었다.
공격에는 보완할 점이 많다. 받는 선수들의 움직임이 주도적이지 못해 템포가 빠른 공격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박주호가 김진수의 오버래핑에 원터치 패스를 넣어주지 못한 것, 역습 시에 손흥민 등이 좌우 측면의 선수들이 수비수와 골키퍼 사이로 크로스를 시도하지 않은 것 등이 특히 아쉬웠다. 지나치게 안정지향적인 공격으로 템포를 죽인 것이 문제였다. 우리가 안정적으로 공을 잡고 돌린다는 것은 상대 역시 자리를 잡고 안정적인 수비 위치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격은 상대의 예상을 벗어날 만큼 도전적이고 빠르고 창의적이어야 한다. 공격을 하는 것은 앞으로 바뀌어야 할 점이다. 지난 코스타리카, 파라과이 전 등 평가전에서는 훨씬 나은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아쉬움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주의 탄탄한 수비를 상대로 준수한 공격을 펼친 것은 좋았다.
이번 결승전에서 가장 돋보인 점은 선수들의 정신력이었다. 비록 그 정신력이 독이 되어 연장전에서는 체력적 열세에 시달려야 했지만, 바로 그 투혼 때문에 우리는 후반 말미 동점골을 넣고 승부를 연장으로 끌고 갈 수 있었다. 그것이 국가를 대표한다는 마음에서든, 차두리라는 위대한 선배의 마지막을 위한 몸부림이었든 우리는 땀 냄새가 풀풀 나는 열정을 목도했고 그 열정에 뜨겁게도 응해줄 수 있었다.
(△ 끝내는 동점골을 넣었던 손흥민. 새로운 에이스임을 몸소 증명했다.)
2. 부상 악재
이번 아시안컵에서는 우리 대표팀에는 부상으로 인해 많은 전력 누수가 있었다. 특히 결승전에서 선발 출전한 선수를 생각해보면 구자철, 이청용의 빈자리가 너무도 크게 느껴졌다. 측면의 박주호와 남태희는 공격적으로 별다른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으며, 그들의 뒤를 받쳐줄 만한 후보 선수들 역시 마땅치 않았다. 김민우, 이명주, 한교원 등 대체 자원으로 뽑아놓은 선수들은 있었으나 슈틸리케 감독에게는 부상이나 체력 안배를 위한 목적이 더 컸고, 경기를 바꿀만한 '조커'의 목적은 아니었다고 봐야겠다.
박주호가 측면 수비수로 훌륭한 모습을 보여준 것은 사실이지만, 측면 공격수로서의 역량이 뛰어나다고는 볼 수 없다. 박주호의 기용은 사실 상 한교원, 김민우 등 측면 공격수들이 부진한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근호가 괜찮은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슈틸리케는 스피드와 활동량이 좋은 이근호를 상대가 지친 후반에 투입할 조커로 생각한 듯하다. 그렇기에 이청용이라는 다재다능하고 빠른 측면 공격수의 부재가 아쉬웠다.
게다가 대형 중앙공격수의 부재도 느껴졌다. 이정협의 발탁은 이번 대회에서 우리가 준우승을 하게 된 주요 이유가 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정협의 장점이 딱히 눈에 띄는 것은 아니다. 부지런한 움직임과 활동량이 장점이지만 공격수로서 상대 수비수를 누를 만한 특정한 강점이 없다. 제공권이 준수하지만 호주의 장신 수비 상대로는 공중볼 싸움에서 번번히 밀렸고, 중거리슛이 강한 것도, 배후 공간 침투가 빠르고 활발한 것도 아니다. 김신욱이나 이동국의 제공권과 연계 플레이가 있었다면 더욱 좋은 경기를 했을 것이다.
대형 스트라이커와 이청용, 구자철의 공백은 고스란히 손흥민에 대한 부담으로 이어졌다. 이정협, 남태희, 박주호가 괜찮은 옵션이지만 무게감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결국 손흥민에 대한 집중 견제로 이어졌다. 손흥민이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재능을 지닌 선수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이제 막 약관을 넘긴 어린 공격수이다. 박지성처럼 능수능란하게 상대의 압박을 받아 넘기고 동료를 이용할 정도로 성숙한 선수는 아니다. 결국 한 골을 성공시키면서 자신의 진가를 발휘하긴 했지만, 어린 에이스에 의존하는, 위험 요소가 많지 않은 팀은 수비하기에 어렵지 않다.
수비적 차원에서 구자철의 빈자리가 특히 크게 느껴졌다. 남태희란 선수가 기본적으로 수비력을 갖춘 선수는 아니다. 활동량이 딱히 적다는 생각을 하진 않지만, 수비 상황에 도움을 주는 움직임이 많은 선수는 아니다. 경기 초반 상대의 핵심 미드필더인 예디낙에게 몇 차례 압박을 가하면서 상대의 공격 예봉을 무디게 했지만, 일시적인 효과를 보았을 뿐 지속적인 수비로는 이어지지 못했다. 반면 구자철은 수비적으로 무척 헌신적인 선수이다. 지난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도 활발한 전방 압박과 태클로 팀의 수비에 큰 도움을 주었다. '구글거린다'는 평을 받긴 하지만 그가 가지는 특유의 의욕 분출도 팀에게 묘한 힘을 더해주곤 했다. 게다가 공격적으로도 남태희가 번뜩이는 장면은 거의 나오지 않았는데 오히려 볼 키핑을 안정적으로 할 수 있는 구자철이 있었다면 좋은 경기를 풀었을 수 있다.
(△ 선수들의 체력저하로 수비수, 미드필더, 공격수를 오가야 했던 곽태휘.)
3. 오버페이스
경기 초반 강한 압박을 선보이며 좋은 출발을 보였지만, 그것은 오히려 독이 되고 말았다. 이정협은 평소처럼 수비수와 골키퍼에 대한 압박으로 상대의 공격 작업을 불편하게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특이했던 점은 전반 초반 예디낙에 대한 남태희의 압박, 손흥민의 수비가담이었다. 분명 수비 가담도 부지런히 할 수 있는 젊은 선수들이긴 하나 전반 초반부터 너무 저돌적인 수비를 펼치면서 체력에 대한 걱정이 된 것이 사실이다. 전반에 강한 수비를 바탕으로 경기를 안정적으로 이끌려는 의도였다고 해석할 수 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호주가 만만한 팀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너무 저돌적으로 달려든 것은 아쉬운 선택이었다. 선제골을 허용하지 않았다면 경기가 어떻게 흘러갔을지는 전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우리는 선제골을 상대에게 내줬다. 적극적인 수비 덕분에 전반을 0:0으로 마치는 듯했으나, 실점을 허용하면서 전반에 펼쳤던 강한 압박과 수비의 여파가 이후 경기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체력적인 문제는 후반전부터 드러나기 시작했고 연장전에선 마침내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능수능란한 팀은 팀의 페이스를 빠르게 또 느리게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팀이다. 이런 측면에선 호주가 경기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다고 볼 수 있다.
전반의 적극적인 수비는 결국 후반전에 그 반동을 가져왔다. 공격수들의 체력저하로 공격적인 활기도 점차 떨어졌고 후반전부터는 수비라인과 미드필더 라인의 거리가 점점 벌어지기 시작했다. 중계화면을 통해 관전한 입장에서 미드필더의 복귀가 늦은 건지, 수비가 라인을 올리는 게 늦은 것인지 정확히 판단할 수 없지만 결국 그 원인이 체력 저하에 있다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선제골을 넣고 안정적으로 경기를 운영한 호주, 동점골을 위해 모든 걸 버리고 달려든 대한민국. 그 차이가 연장에서는 더욱 극심히 벌어졌다고 봐야할 것이다. 결승골이 된 두 번째 실점 역시 체력 저하와 함께 오는 집중력 저하 때문이었다.
(△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감독이 나타났다. 울리 슈틸리케!)
4. 시작한지 고작 반년
앞서 언급한 이유들은 경기 내적으로 꼽은 직접적인 이유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팀이 가졌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우리가 슈틸리케 감독과 고작 반년을 함께 했다는 점이다. 우선 평가전에서 보여주었던 슈틸리케 식 축구가 아직은 팀에 잘 녹아들지 못했다. 점유율을 높이면서 패스로 경기를 풀어나가는 슈틸리케의 축구는 이번 대회에서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라크 전 정도가 그나마 괜찮았다고 평가할 만하다. 결국 슈틸리케의 색을 제대로 입힐 시간이 없었기에 우리는 ‘실리 축구’를 펼칠 수밖에 없었다.
선수들 간의 조직력도 당연히 호주에 비해선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평가전들에선 많은 선수들을 시험하는 기회로 삼았고 예선 경기에선 부상과 감기로 많은 변화를 겪어야 했다. 가뜩이나 시간이 부족한 상황에서 조별 예선 동안 일관된 멤버를 가동시키지 못했던 것은 좋지 않았다. 우리가 만들어진지 2,3년 정도 된 팀이라고 한다면 어느 정도의 변화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겠지만 새로운 감독 하에서 조직력을 발휘하기엔 부족했다. 토너먼트를 거듭하면서 조직력을 다져나가 결승전에서 가장 좋은 경기력을 보였지만, 우리와 비슷한 호주를 압도하기엔 조금 모자랐다.
대체 자원들의 역할 역시 확실하지 못했다. 기성용, 이청용 등 기존의 주전 선수들이 대표팀에서 갖는 역할은 확실한 편이다. 감독도 확실히 바라는 바가 있고 선수들 역시 자신이 무엇을 할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새롭게 대표팀에 합류한 선수들은 아직 자신들의 역할을 확고히 하지 못했다. 한교원의 예가 대표적인데 K리그에서의 한교원은 저돌적이고 빠른 돌파로 상대방의 측면을 지독히도 괴롭히는 공격적인 선수이다. 하지만 그가 이번 아시안컵에서는 헌신적인 수비를 보여준 것이 전부이다. 이명주 역시 역할이 모호했으며 김민우나 조영철도 확실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을 때 이에 능숙하게 대처할 수 있느냐는 무척 중요한 일이다. 서로의 믿음이 필수적이다. 그래서 시간을 두고 쌓은 호흡과 신뢰 관계가 중요하다. 우리의 삶에서도 그렇듯 이것이 하루 아침에 생겨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전반의 급작스러운 실점 이후에 주도권을 잡고 공격을 하였으나, 팀이 안정감을 가진 채 공격에 나섰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후반전 내내 각자가 급한 공격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은 새로 만들어진 팀이 가지는 한계점이었다. 선수들이 하나의 팀이 되기엔 시간적으로 부족했다.
이번 대회의 성공으로 마치 슈틸리케 호가 제 궤도에 오른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결코 완성된 팀이 아니고 나아질 점이 더욱 많은 팀이다. 물론 모든 원인을 시간의 부족으로 돌릴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번 대회에서 노출했던 많은 문제들은 단시간 내에 해결할 문제는 아니다. 시간을 두고 팀 전체에 새로운 색을 입혀야 된다. 아시안컵에서의 성공이 이후 벌어질 월드컵 예선과 각종 평가전에서의 성공을 보장하진 않는다. 앞으로 분명히 우여곡절이 있겠으나 슈틸리케 감독을 믿으면 된다. 이번 아시안컵에서 보여준 지도력은 확실했다. 그를 성공한 감독으로 우리 대표팀을 성공한 팀을 만들기 위해 필수적인 것은 '시간'이다.
(△ 귀국 후의 차두리. 수고하셨습니다. 형님...)
아시안컵 전체적으로 보자면 우린 분명히 작은 '성공'을 거뒀다고 보아야겠지만, 결승전에서만큼은 분명히 작은 '실패'를 거뒀다고 봐야 한다. 그러한 실패에 대한 아쉬움 때문에 안 좋은 얘기들만 늘어놓은 것 같다. 우리가 이겼더라면 얻었을 것들이 얼마나 많았을까라는 생각에 속이 상한다.(글을 적는 자신도 이렇게 하루 종일 우울하진 않았을텐데...) 하지만 고작 6개월이 된 팀에게 큰 성공을 거두라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일 것이다. 2015년 1월의 시점에서 우리가 준우승이란 작은 성공을 한 것 자체로도 충분히 멋진 일이다. 그리고 결승전에서의 작은 실패를 발판으로 2018년에는 2019년에는 더 큰 성공을 거둘 수도 있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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