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기행 3 – 대지는 죽음의 잿빛으로 물들고
비행기가 이집트에 가까워질수록 나일강 삼각주가 크게 보이군요. 이곳이 바로 풍요의 땅입니다. 나일 삼각주는 남북이 170㎞, 동서 너비 200㎞, 면적 2만 2천㎢의 대평원이자 대형 오아시스입니다. 이집트를 동지중해 지역의 곡창이자 창고로 만든 곳입니다. 로마인들은 이집트를 ‘로마의 빵 바구니(bread basket of Rome)’라고 불렀죠. (이 이야기는 다음에 다루어 보려 합니다.) 그러나 나일 삼각주를 지나 카이로 공항에 닿으면서 대지는 회색 잿빛으로 물던 죽음의 땅으로 변합니다. 활주로 밖의 지역은 보통 잔디로 깔아두지요. 활주로가 뚜렷이 보이기 위함입니다. 추위에는 강하고 더위에는 약한 서양 잔디가 열사의 땅인 이집트에 맞지 않을 것이니 더위에 강한 한국 잔디를 수출하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스치네요. (사진 1, 나일 삼각주)
카이로 공항은 온통 잿빛입니다. 아스팔트를 깔아 둔 활주로가 희미하게 보이군요. 모래 먼지에 덮여 활주로 밖의 지역과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정확하게 찾아 내릴 수 있을까 걱정이 되군요. 활주로 밖의 지역엔, 보통 잔디가 깔려 있을 지역엔 덤불이라고도 할 수도 없는 조그만 풀 더미가 띄엄띄엄 보입니다. 공항 전체가, 아니 공항을 포함해 천지가 온통 회색 잿빛입니다. 국가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수도의 공항 정도는 나일강의 물을 끌어와서라도 공항답게 만들 수 있을 테인데.... 대지는 온통 죽음으로 물들고 있군요. 이런 곳에 뭐가 있다고, 뭘 보려고 왔나 라는 생각조차 들군요.
이집트에 대한 나의 음울한 첫 인상이 현실로 나타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밖으로 나가니 자동차 매연인지 모래 바람인지 대기는 뿌옇습니다. 첫 날(3월 10일) 카이로 타워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서남쪽 기자의 피라미드가 있는 방향에 신기루인지 산인지 모를 정도로 희미한 산등성이가 보입니다. 다음날 가이드의 말로는 이곳이 풍요로운 나일강 유역과 사막의 경계라고 하군요. 이 산을 넘으면 사막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사막이 카이로 턱밑까지 닥쳐 곧 이 나라 수도를 삼킬 기세입니다. 카이로 시민들은 어디로 갈 건가요? 이 산은 또 기자의 피라미드를 만든 돌들을 캐는 채석장(quarry)이라고 하네요. 피라미드 돌들은 남쪽 먼 곳에서 캐 왔다던데? 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믿기로 했습니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을 지은 돌들도 그곳에서 보이는 산에서 캐왔으며 지금도 신전 수리를 위해 이 채석장을 이용하고 있다는 설명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가이드 하젬은 이집트는 사하라 사막이 일부라는 말을 반복해서 말합니다. 지도를 보면 그렇지는 않은데..... 하면서도 눈앞에 나타나는 전경을 믿지 않을 수 없군요. 이집트는 국토 면적이 남한의 10에 해당하는 100만㎢라면 정사각형은 아니지만 남북이 1,000km, 동서가 1,000km인 셈입니다.(시나이 반도 6만㎢가 붙어 있지만.) 동서는 우리 휴전선이 156마일(약 250km)이니 4배이고 남북은 신의주-부산이 680km이니 약 1.7배입니다. 이런 땅덩이의 95%가 사막이라니 쉽게 믿기지 않지요.
사실 사하라 사막은 수천 년 전엔 초목이 무성하여 동물들이 살았습니다. 사하라 사막에서 발견된 벽화들이 이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지구 축의 기울기가 변하여 사막이 점점 확대되고 있습니다. 아마도 지중해 연안까지, 그리고 이집트를 모두 삼킬 때까지 진행되겠죠. 몽고 고비사막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과도한 산림벌채 등 인위적 요소도 있지만 지축의 변화라는 자연현상 앞에 인간이 얼마나 무력한 것인가를 느끼게 합니다.
다음날 11일 일요일 기자의 피라미드에 가면서 사막의 분위기를 더욱 강열하게 다가오더군요. 다큐 등에서 보는 부드러운 모래로 덮인 낭만적인 풍경이 아니라 카이로 공항에서 본 것과 같이 딱딱한 맨 땅에 돌멩이들만 뒹굴어 발에 차이고 뜨거운 태양아래 노출되어 생명이 자랄 수 없는 불모지 말입니다. 여기저기 낙타와 말들이 살이라곤 붙어있지 않은 빈약한 몸뚱이로 누워 쉬고 있었습니다. 달이나 화성 표면이 연상 되군요. 이집트가 얼마나 지나면 그렇게 될까요? 생명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는 인간적 정감을 느낄 수 없지요.
이집트는 사막을 제외한 나머지 5%에 1억 인구가 몰려 산다고 합니다. 이 땅에 도시를 건설하고 농사짓고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5%라면 약 5만㎢, 남한의 절반 정도에 해당합니다. 다른 자료를 찾아보니 이용 면적인 3%인 3만㎢라 하군요. 경상남북도를 합치면 이 정도인데 모든 조건이 갖추어졌다고 해도 경상도의 인구가 1억이라 상상하면 끔찍한 일이지요. 이것도 몇몇 도시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카이로가 2400만, 알렉산드리아가 800만, 제3의 도시이자 신전으로 유명한 룩소르가 80만이라 합니다. 나일강을 따라 남북으로 형성된 푸른 띠 밖의 지역은 죽음의 땅이라는 말이지요.
여행 내내 이게 머리를 짓눌렀습니다. 아마도 사막 기후의 영향을 직접 받았기 때문일 겁니다. 여행 이틀째 쯤 되어 입천장이 부은 것을 느꼈지요. 감기가 심하면 보통 아침에 일어나 입천장이 부은 것을 아는데 더구나 여행 중 피로하여 잠에 녹아 떨어졌을 것인데 밤중에 깬 것을 보면 증상이 제법 심했던 것 같습니다. 다행이 가져간 소금을 물에 타서 목과 코를 씻었지요. 그러나 여행 중 계속 기침을 했습니다. 여행에 대비해서 온갖 약을 준비했지만 가장 유용하게 쓴 것은 소금이었습니다. 집사람이 이집트 여행을 마치고 미국에서 온 동생과 이스라엘-요르단 성지 순례에 갈 때도 소금만 챙겨가더군요.
이스라엘이라면 이 땅을 그대로 두었겠는가라는 생각도 떠오르더군요. 이스라엘은 면적이 겨우 2만㎢입니다. 1967년 6일 전쟁에서 요르단으로부터 빼앗은 요단강 서안 지역과 시리아로부터 뺏은 골란 언덕을 포함하면 2만 8천㎢입니다. 이 역시 사막인데 이스라엘인들은 옥토로 바꾼다고 합니다. 2만㎢라면 이집트의 50분의 1 입니다. 땅이 넓다보니 이집트인들에게 이런 절박함이 없는가요? 아니면 5%의 땅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인가요?
카다피 시절 한국의 동아, 대우 등 기업들이 리비아에서 대수로 건설을 했습니다. 아프리카는 대륙 밑에는 엄청난 양의 물이 저장되어 있다고 하죠. 동아프리카 지구대(Great Rift Valley)와 같이 대륙이 갈라지면서 지하에 틈이 생기고 지하에 호수가 형성된다는 겁니다. 사하라 사막 아래에도 이런 지하수가 넘친다고 합니다. 나일강도 수백만 년 전 있던 여러 호수들의 물이 합치면서 물줄기가 만들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리비아와 같은 공사가 아니더라도 나일강 물만으로 관개시설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괜히 남의 나라 걱정을 한 건가요?
이번 여행은 카이로와 그 부근을 구경한 뒤 비행기로 남쪽으로 이동하고 그 다음 유람선으로 3일간 다시 카이로 부근으로 올라왔기 때문에 장거리 육로여행은 없었습니다. 가장 긴 여정이 이집트 제2의 도시 알렉산드리아 왕복이었습니다. 편도로 약 220 km로 3-4시간 여행이었지요. 버스에서 가이드 하젬은 롬멜과 엘 알라메인(El Alamein)을 몇 차례 언급하더군요. 2차 대전 중 독일의 아프리카 군단(Afrika Korps)을 이끈 어윈 롬멜(Erwin Rommel)장군 말입니다. 아프리카 군단은 튜니지아와 리비아를 지나 카이로로 진격하다가 알렉산드리아 서쪽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패배합니다. 그의 전투는 ‘토브룩(Tobruk) 요새’나 ‘엘 알라메인’ 등 영화로도 남아있습니다.
하젬은 버스에서 서남쪽을 가리키면서 저기 100마일 아래가 롬멜이 진격하다 퇴각한 길이며 엘 알라메인이 있다고 하군요. 귀가 뻔적 뜨이더군요. 알렉산드리아에서 엘 아라메인까지는 110km이고 1시간 20분 거리입니다. 그래서 한번 가 볼 수 있느냐고 물었죠. 물론 이번 여정에는 포함되어 있는 않습니다. 하젬은 위험해서 못 들어간다고 합니다. 롬멜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깔아둔 지뢰가 여전히 많으며 이제는 녹슬어 새가 앉아도 터진다고 합니다. 전쟁이 1942년이니 76년 전입니다. 원래 불모지를 인간의 지뢰로 더더욱 접근하기 조차 어렵게 만들었군요.
히틀러는 원래 아프리카 전선에 관심이 없었다는 점, 무소리니가 북아프리카를 탐냈지만 이탈리아군이 영국에게 패배하자 어쩔 수 없어 아프리카 군단의 창설하고 롬멜을 사령관으로 임명했다는 점, 전쟁 초기 롬멜은 휴식을 취할 것이라는 적의 예상을 뒤엎고 진격을 개시하여 영국군을 무찔렀다는 것, 처칠은 적장인 롬멜을 사막의 여우(Desert Fox)라 부르며 그의 전술적 승리를 칭찬한 것, 그러나 히틀러는 소련침공 작전을 위해 더 이상 롬멜을 지원하지 않은 것, 이로써 몽고메리 장군은 이집트에서 영국 8군을 증강하여 엘 알라메인(1942.11) 전투에서 승리하여 롬멜의 진격은 저지된다는 것, 이 전투는 영국군이 ‘단독’으로 독일을 이긴 최초의 전투이며 영국민의 사기가 크게 올랐다는 점 등은 몇 회가 될 것이라 이 정도로 접습니다.
여기서 이야기하고픈 것은 사막전투입니다. 웃통을 벗은 군인들이 차량 보닛을 닦고 달걀을 풀어 프라이 만들어 먹는 사진들을 보았을 겁니다. 보급이 충분치 못한 이 사막에서 롬멜은 탱크를 이끌고 카이로까지 진격할 수 있다고 믿었던가요? 그 다음 뭘 할 건가요? 수에즈 운하를 접수하고 팔레스타인을 거쳐 시리아로, 그리고 바쿠 유전지대에서 소련침공 나치 남부군과 합류할 수 있다고 믿었던가요? 이 죽음의 땅에서 왜 이기지 못할 전투를 막무가내 식으로 계속했던가요? 처연한 생각이 끊이지 않습니다.
춥고 으스스한 독일에서 성장한 롬멜은 1942년 가을부터 보급품 부족으로 고전하면서 육체적으로 시들어갑니다. 간염과 저혈압 증세를 보여 결국 본국으로 돌아가죠. 그러나 그 후임자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사망하면서 롬멜은 전선으로 다시 투입되는데, 이것은 1942년 10월 25일입니다. 그러나 전세는 이미 기울어 롬멜은 아프리카 군단을 서쪽으로 철수시킬 것을 베를린에 건의하지만 히틀러는 ‘마지막 한 사람까지 전선을 사수하라’고 명령합니다. 롬멜은 이 미치광이의 명령을 받고 잠간 머뭇거리다가 독일군을 철수시키죠. 이 ‘잠간’으로 인하여 보병들은 구하지 못하는데, 후일 롬멜이 가장 아쉬워했다고 합니다. 다음 해 1월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 6군 사령관 파울루스 원수도 동일한 명령을 받고 버티다가 결국 항복하는 것과 비교되기도 합니다. 튜니지아로 후퇴한 롬멜은 전열을 재정비하여 다음 해 2월 미군 2군단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둡니다. 이것이 롬멜이 미군과 첫 교전이며 그의 마지막 승리라고 합니다. 그리곤 3월 독일로 돌아갑니다.
롬멜의 기록을 보면 사막전은 장애물이 없기 때문에 전형적인 탱크전이라 합니다. 보병도 있지만 열사의 사막에서 무슨 힘이 되겠습니까? 영국군은 탱크의 진격을 막기 위해 롬멜의 진격로에 지뢰를 뿌려 지뢰밭을 만든 겁니다. 이를 돌파하기 위해 온갖 장비들이 고안되고 실전에 투입되죠. 옛날 추수할 때 쓰던 도리깨 비슷한 장비를 탱크 앞에 달고 전진하면서 연신 도리깨질을 하는 사진도 있고 불도저 같은 장비로 밀고 나가기도 하더군요. 그러나 인간이 심어 둔 지뢰는 아직도 수거하지 못하고 가엾은 새들만 폭살하고 있다는 겁니다.
새 이야기로 끝내려합니다. 가이드 하젬은 알렉산드리아로 들어가는 길 양쪽에 봉화대 모습을 가리킵니다. 모양이 옛날 봉화대나 토종벌집 같은데 상당히 크군요. 비둘기 집이라 합니다. 길가에 듬성듬성 간헐적으로 나타나군요. 아랍인들이 비둘기를 먹는다는 이야기는 옛날 쓴 적이 있습니다. 서양인들은 한국인들의 보신탕과 함께 아랍인들이 비둘기를 먹는 관습을 싫어하죠. 런던에서 아랍인들이 베란다에 손에 먹이를 두어 비둘기를 잡는 사진을 싣고 비둘기 먹는 걸 비난하는 기사가 난 적이 있지요.
그런데 한번 생각해 봅시다. 사막 지역에선 가축들이 살이 찔 수가 없습니다. 먹을 것이 빈약하니 낙타도 소도 말라비틀어진 처량한 모습입니다. 이번 여행길에 여러 번 보았습니다. 이곳 주민들이 단백질을 보충하기 위한 손쉬운 방법 중 하나가 비둘기를 먹는 것이죠. 우리는 산에서 나는 야생 비둘기는 예로부터 먹었습니다. 집 부근에 토종벌집 같은 걸 만들고 구멍을 뚫어두면 비둘기들이 들어와 산다고 합니다. 그리곤 짝을 이루며 알을 낳아 번식하겠죠. 이걸 한 마리씩 잡아먹는다고 합니다. 동물들은 수를 셀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개가 새끼를 5마리 낳아 키우다가 주인이 한 마리 들고 나와 팔아버려도 알아채지 못합니다. 5마리 중 한 마리가 없어졌으니 네 마리만 남았다는 계산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몇 번 쿵쿵거리며 냄새를 맡아보고는 곧 잊어버립니다. 비둘기 역시 밤에 손을 넣어 한 마리 잡아가도 처음에 화들짝 놀라겠지만 이곳이 위험하니 집을 옮겨야겠다는 생각은 못할 겁니다. 죽음에 땅에서 생명을 이야기하는 것 같아 기분이 상쾌하군요. (사진 2, 비둘기 사육집)
(2018.4.9)
사진 1: 비행기에서 내려 본 나일 삼각주. 풍요로움이 잿빛에 묻혀있다.
사진 2: 비둘기 집. 비둘기 사육장으로 주요 단백질 공급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