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시복식 때 1시간 동안 광화문에 걸린 한글현판
2014년 8월 15일 광복절 새벽 서울 광화문에 1시간 동안 한글현판이 걸린 일이 있었다. 한글세계화추진본부 이판정 이사가 거행한 일이었다. 그날은 프란체스코 교황이 서울에 와서 광화문 앞 광장에서 시복식을 하게 되어있었다. 그 행사 며칠 전에 우리 모임 사무총장으로 있는 나에게 이판정(한글인터넷주소 넷피아 대표) 광화문 앞에서 교황 방문 시복식을 할 때에 광화문에 한자현판이 걸린 모습이 중계방송을 통해 세계로 보이게 되면 나라 망신이고 그때 한글현판을 걸면 엄청난 한글세계화 효과를 얻을 수 있겠다는 의견을 냈다.
그러면 세계인들이 우리가 아직도 중국 한자를 쓰는 나라로 보일 수 있으니 우리는 세계 으뜸 글자인 한글을 가직 문화국임을 알리는 길이 되니 그렇게 해보자고 했다. 그래서 나는 한글을 세계에 알리는 참 좋은 기회라고 보고 문화재청에 “비용도 우리가 내고 우리가 천으로 훈민정음체로 한글현판을 만들어 한자현판을 가릴 터이니 허락해 달라.”고 한글세계화추진본부 이름으로 급히 건의문을 보냈다. 그리고 시간이 없기 때문에 문화재청장실에 전화로도 말했다. 그런데 시복식 전날까지 회답이 없었다.
그때 이판정 이사는 그 전에 광화문 현판 크기와 훈민정음체 한글현판 문안을 알려주면 만들겠다고 했다. 그래서 알려주고 모든 준비를 끝낸 뒤 문화재청 회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 전 날 밤까지 문화재청에서는 답이 없고 시복식 날 새벽 통이 트기 전에 이판정 이사로부터 “대표님, 해냈습니다. 빨리 와 보십시오.”라고 전화가 왔다. 그렇게 하겠다고 했지만 진짜 해낼 수 있을까 믿지 않았다. 광화문은 기와 하나도 순대지 않고 감쪽같이 해낼 줄은 몰랐다. 급히 택시를 타고 광화문 앞에 와보니 진짜 광화문에 한글현판이 떡하니 걸려있었다.
2014년 8월 15일 새벽 교황이 서울을 방문해 광화문 앞에서 시복식을 하는 날 광화문에 1시간 동안 걸렸던 한글현판 모습. 그날 새벽 삼엄한 경비를 뚫고 기중기로 건 한글 펼침막이다.
기뻤다. 놀라웠다. 그래서 나는 만세를 부르고 전화기로 그 모습을 찍었다. 그리고 움직그림도 찍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가던 외국인도 그 모습을 찍었다. 그런데 조금 뒤 경복궁 관리소 직원들이 그 한글현판 글씨가 쓰인 천을 떼어 내고 있었다. 그래서 그 아쉬움도 움직그림으로 찍었다. 아쉽고 안타까웠다. 시복식을 할 때까지만 몇 시간이라도 그대로 두면 돈으로 따질 수 없을 광고효과도 있고 한글을 세계에 알리고 우리 자존심과 자긍심을 살릴 수 있는데 안타까웠다. 그런데 이판정 이사는 그 펼침막을 만들어 기중기를 빌려서 새벽에 경비가 삼엄한 데도 걸었다. 기적이었다. 아니 하늘이 도운 것이었다.
그런데 그 뒤 문화재청이 그렇게 한 이판정 이사를 고발해서 경찰서에 가서 조사를 받았다. 그 일을 꾸민 나도 오라고 하면 “나는 문화재청에 정식으로 건의를 했다. 우리는 광화문 기와 하나도 파괴하지 않았다. 이 바보 같은 문화재청 놈들! 엄청난 광고 효과를 볼 좋은 기회를 놓치고 오히려 우리를 고발하다니!”라고 큰소리를 치고 처벌할 테면 처벌하라고 혼내주려고 했다. 그런데 그 일을 꾸민 나는 부르지도 않고 실행한 이판정 이사만 조사를 하고 그대로 끝냈다. 나는 그때 한 시간이라도 한글현판이 걸렸던 것은 하늘 뜻이라고 보았다.
[신동립 잡기노트]1시간 한글천하, 교황 시복식 ‘광화문’사건
【서울=뉴시스】‘광화문’. 8월15일 오전 한때의 모습이다. 2014-08-27
【서울=뉴시스】신동립의 ‘잡기노트’ <451>
프란치스코 교황의 시복식 하루 전인 광복절 이른 아침, 행사 준비가 한창이던 광화문에서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한글문화세계화추진본부는 지난 13, 14일 문화재청 등에 민원을 넣었다. 시복식 당일, 하루 만이라도 한자 현판 ‘門化光’을 훈민정음 해례본체로 천에 쓴 ‘광화문’으로 가리자고 건의했다. 한자로 된 현판이 십자가와 함께 150여개국으로 방송돼 수억명이 지켜보게 되리라는 걱정에서 비롯된 청원이다.
“그렇지 않아도 많은 세계인들이 우리나라를 중국이나 일본의 속국으로 알고 있는데, 그 장면을 보는 외국인들은 아직도 우리나라를 중국의 한자를 쓰는 나라로 여기거나 우리 글자가 없는 미개한 나라로 볼 수 있다”는 견해였다.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글자인 한글을 가진 자주문화국가로서 체면이 서지 않는 일이며 부끄러운 일이다. 또 한글을 사랑하는 국민의 자긍심과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일”이라는 판단이기도 했다. 옳은 소리다.
【서울=뉴시스】위 ‘광화문’이 아래 ‘門化光’으로 되돌아오는 데는 1시간이면 충분했다. 2014-08-27
거꾸로 “아이디어는 좋으나 시간이 촉박하다”는 요지로 불허한 문화재청의 답변 또한 상식이었다.
문제는 이 한글운동가들이 덜컥 실천을 해버렸다는 사실이다. 15일 오전 7시께 기중기를 동원해 19m 가까이 올라가 현판 표면을 ‘광화문’이라는 한글로 덮었다. 한 시간 쯤 지나 ‘門化光’ 세 글자가 사라진 것을 알아챈 현장 관계자들에 의해 ‘광화문’ 스티커는 철거되고 말았다. 이후 TV화면과 뉴스사진에는 시복식 제단 뒤의 ‘門化光’이 담겼다.
한세본 이대로 사무총장은 “교황은 서울 광화문 앞 큰마당에서 시복식을 했다. 왜 하필 광화문 앞마당에서 그런 모임을 가졌을까? 그곳이 대한민국의 가운데이고 얼굴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경복궁의 문인 광화문은 서울 한가운데 있는 이 나라의 얼굴이다. 나라 안팎의 언론이 광화문을 비추고, 한자로 된 현판을 온 세계인들이 본 것을 생각하니 부끄럽다. 멀쩡하게 잘 걸려 있던 한글 현판을 떼고 한자 현판을 단 정부가 밉고 원망스럽다”고 개탄했다.
“한글은 광화문 안 경복궁에서 태어났고 광화문 한글 현판은 그 표시이며 우리가 문화민족임을 알리는 깃발이다. 그런데 중국의 한문 식민지였던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얼빠진 무리가 2010년 광복절에 그 한글 현판을 떼고 한자 현판으로 바꿔 단 것”이라고 지적했다.
【서울=뉴시스】‘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 미사’ 현장. 한글은 없다. 2014-08-27
“우리 글자가 없어서 조선시대까지 중국 한자를 썼으며 일본 식민지 때는 한자를 혼용하는 일본식 말글살이를 한 것이 분명한 역사이지만,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고 부끄러운 일”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門化光’이 ‘광화문’으로 정정된 60분 남짓, 이것은 한세본에게 쾌거였다. 하지만 당국에게는 명백한 불법행위일 따름이다.
문화재청은 “우리나라의 한글을 세계에 알려 국민의 자긍심을 고취하는 것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라면서도 “문화재보호법 규정에 따라 문화재의 보존, 관리 및 활용은 원형유지를 기본원칙으로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광화문 현판 불법 설치 사건에 대해서는 경복궁관리소가 관계법에 따라 조치할 예정이다.”
문화부장 reap@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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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일이 있은 뒤에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 때 수난을 당한 33인 가운데 한 분인 신현모 선생의 손자인 뉴시스 신동립 문화부장에서 그 이야기를 했더니 위처럼 글을 써주었다. 역사 증거라도 남기자는 것이었다. 신동립 문화부장이 고맙다.
2006년 한글날이 국경이ᇍ이 된 천 한글날큰잔치조직위원회 사무총장을 맡고 그 준비를 할 때에 서울로 오셔서 나보고 애썼다고 칭찬하면서 잘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2014년 연하장과 함께 교황 시복식을 했을 때에 광화문에 한글현판을 달았던 것을 칭찬하면서 중심을 잘 잡고 끝까지 잘하라고 편지를 하셨다. 나는 그 편지를 받고 더 잘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그 해 말 나 한글운동을 지지하고 격려해주시는 정의순 수녀님이 연하장과 함께 아래 편지를 주셔서 또 고맙고 힘이 났다. 한글운동을 하는 다른 분들은 무슨 일을 하면 자신이 했다고 떠들고 나를 괴롭히는데 그런 걸 다 아는 정의순 수녀님은 그때마다 주저앉지 말라고 격려하고 채찍질을 했다. 아래 편지는 92살이실 때에 보낸 편지다. 나도 아흔 살이 넘어서도 젊은이들을 채찍질하고 격려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머니같은 스승이신 정의순 수녀님을 고마워하고 하고 그리워하면서 그 이야기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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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에 문화관광부와 한글학회에서 주는 우리말글 지킴이 상을 받은 신문 기사다. 나와 함께 한글날 국경일 제정운동을 하는 신기남 의원과 함께 정의순 수녀님이 함께 받으셨다.
정의순 수녀님은 가끔 내게 힘내라고 편지를 하신다. 새벽에 전철을 타고 가면서 전철에서 수녀님이 보내주신 편지를 읽고 보던 책 뒤 빈 종이에 아래 글을 적었다. 그런데 그 뒤 봄부터 아프셔서 서울에 오지 못했지만 2014년 말에 위 편지를 보내주셨다. 그리고 몇 해 뒤에 수녀원에서 돌아가셨다. 어쩌면 위 편지가 내게 주신 유언과 같다. 나는 제자 노릇을 제대로 못했지만 수녀님의 사랑에 보답하는 길은 나도 죽는 날까지 가르침을 잊지 않고 힘차게 한글운동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수녀님 그리워하며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