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용과는 무관한)
1) 조선시대 갑옷 1벌 제작비용이 조총 1자루 제작비용의 10배
조선 후기의 각종 기록을 보면 갑옷은 왠만한 무기체계보다 제작비용이 훨씬 높습니다. 모든 수군 병졸, 하다못해 전투요원들만 입힌다고해도 갑옷 조달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보다 간단한 형태의 갑옷은 모르되, 조선역해전도의 그림처럼 모조리 두정갑을 입힌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조선 후기를 근거로 1부 제작단가가 16석 내외이며, 궁궐로 올라가는 별조색 갑옷의 경우 40석 이상까지 올라갑니다.
조총 1자루의 제작단가가 당시 3석5두에 비한다면 갑옷 하나가 조총 열자루의 제작비용이 든다는 이야기입니다. 임란 중기 이후 총통도 제작하지 못해 골머리를 앓던 조선 수군이 갑옷에 먼저 투자한다?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2) 임란 직후 시기 비변사등록에 나오는 수군 갑옷 관련 논쟁들
사실 그림 작성 경위를 떠나서 문헌기록만으로 고증해봐도 조선역해전도에는 의심스러운 구석이 많습니다.
-1649년 3월19일
전 집의(執義) 김홍욱(金弘郁)의 계사에 이르기를 (중략) 지난번 통제사의 장계에 따라 전선(戰船)의 군졸에게 모두 갑옷과 투구를 입히게 하였으며, 지금 또 거듭 밟혀 제조하도록 하였습니다. 배 1척에 90 사람이 승선하는 것이 예이니, 철갑(鐵甲) 90벌이 제조되어야 합니다. 비록 해마다 점진적으로 제조하더라도, 한 읍의 공역(工役)으로는 치러낼 방법이 없습니다. 할 수 없는 일을 강요하다가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찌 나라의 체면이 손상되지 않겠습니까?
또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수군과 육군은 모두 적을 막는 군병입니다. 전선(판옥선)에는 그래도 참나무으로 된 방패가 있어 한 배의 사람들을 보위하고 있으므로, 육군의 경우처럼 막아줄 수단 없이 직접 화살과 돌을 맞는 일은 없습니다.
만약 수군과 육군의 병사로 하여금 모두 견고한 갑옷과 투구를 입게 한다면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 국가의 물력이 부족하여 고르게 입히기는 어려운 형편입니다. 만약 이 두 가지 군병 가운데에서 하나를 선택하라면 육군이 마땅히 먼저여야 하고 수군은 뒤에 해야 합니다. 모두들 이 일을 말할 때 마땅히 변통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단지 선상의 장령(將領)이라 칭호하는 자에게만 갑옷과 투구를 입히도록 하면, 마련하는데 어려운 일이 없을 것이고 거행하는 실효도 있을 것입니다.
(중략)
-1650년 4월17일조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갑주는 말 위에서 필요로 하는 것으로써, 배위에 방패를 벌려놓고 몸을 가린 병졸로 하여금 모두 갑주를 입게 하면, 실로 제승(制勝)을 위한 급무가 아니며 단지 수군에게 유지하기 어려운 폐단만을 줄 뿐입니다.
더구나 전선은 덩치가 크고 위에 누로(樓櫓)를 설치하므로 그 바탕이 무거워 움직이기 어려움이 걱정인데, 이에 또 갑주를 입힌 군졸을 태우면 곱이나 되는 무게를 더하는 것입니다. 해상에서 군졸을 연습시켜 본 자는 대부분 불편함을 말합니다.
옛날 수군을 용병하는 지혜와 기계 제조의 정밀함은 고 통제사 신 이순신 만한 사람이 없어 그 바다를 횡행한 공렬(功烈)은 지금까지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그 때에도 갑주를 입고 배에 오른 제도가 없었으니, 어찌 그 지혜가 지금의 사람들에 미치지 못해서 그러했겠습니까?
갑주를 입도록 한 뒤부터 크고 부유한 주읍(州邑)에서도 관에서 자력으로 준비하지 못하고 민결에까지 침범하니 그 폐단이 적지 않으며 연해의 주현에서는 하나의 크나큰 역으로 되어 있습니다. (중략) 상이 답하기를 “알았다. 대체로 이 일은 어떤 사람의 건의로 설립한 것인가? 그 전말을 알지 못하니 본래의 문서를 찾아 들이라.”
정리하면 임진왜란 발생후 반세기 정도가 경과한 시점에서 처음으로 통제사의 장계에 의해 갑옷을 입히게 되었는데, 실효성이 없다는 반박(1649년 기록)과 이순신 시대에도 수군에서는 갑옷을 입지 않았다는 반박(1650년)입니다. 또한 재정적으로 거의 감당하기 불가능하다는 하소연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3) 당포전양승첩지도에도 갑옷 없어
현재 우리나라 수군관련 그림으로 연대가 가장 올라가는 것은 당포전양승첩지도입니다. 노씨본과 신씨본의 최초 제작시기는 분명하지 않지만 사건자체가 1604년에 일어났고, 원본은 이와 멀지 않는 시기에 그려진 것은 분명합니다. 이 그림에도 갑옷이 전혀 식별되지 않고 있습니다.
당포전양승첩은 1604년 조선 수군이 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캄보디아로 보낸 일본인을 포함한 다국적 사절단을 태운 서양식 선박을 조선 남해안에서 공격해서 포획한 사건입니다.
4) 두정갑의 출현 시기 문제
현재의 실물 갑옷과 각종 문헌기록을 대조해보면 우리나라가 조선 전기형 찰갑에서 두정갑 위주의 면오갑이 주류가 된 조선후기형으로 완전 전환한 시점은 병자호란 무렵인 것 같습니다. 물론 이건 앞으로 좀 더 연구가 보강돼야 하지만 두정갑이 이미 조선 초기에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갑옷의 절대다수가 두정갑이 된 시점은 빨라야 조선 중기라는 이야기입니다.
임란 당시 유성룡의 갑옷이 찰갑계열이라는 점, 신립이 임금에게 하사받은 갑옷이 두정갑이 아니라 찰갑계열인 수은갑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조선역해전도처럼 임진왜란 당시 갑옷이 모조리 두정갑으로 나오는 것은 아무리 봐도 이상합니다. 참모본부 조선역자료편이나 일본고대갑주연구 같은 일본측 연구서에 조선 갑옷으로 두정갑만 나오는 것과 무관하지 않는 현상이라고 보여집니다. 아무리 봐도 조선역 해전도에 두정갑 일색으로만 나오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조선역해전도 자체가 조선 수군의 갑옷 착용 빈도를 보여주는 자료로 가치가 없을 뿐더러 과연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이 어느 정도 비율로 갑옷을 입었는지도 신중하게 봐야할 겁니다. 물론 조선 후기로 가면 갑옷 착용 비율이 상당히 높아지고 있음을 여러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지만 그러한 현상을 임진왜란까지 소급할 수 있는 증거는 아직 없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출처: http://cafe.naver.com/booheong/5600
(원출처지는 아마추어 군사전문가 신재호님의 블로그 兵者國之大事, 不可不察也 - http://lyuen.egloos.com/ 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