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너무 일찍 인생의 쓰라림을 알아버린, 그래서 오직 일과 공부에만 매달리다 허망하게 숨져야 했던 한 여성의 짧은 삶에 대한 이야기다.
하혜영. 사고 당시 스물 여섯 살.
그녀는 지난 2004년 10월 30일 새벽 0시 8분, 자신이 몰던 비스토 승용차가 창원시 천선동 대우주유소 앞 인도의 전신주를 들이받은 후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과다출혈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법은 이 사고의 업무 관련성을 가리는 데 4년의 긴 세월을 요구했다.
그러는 사이 그녀를 매일 밤늦게까지 부려먹었던 회사는 부도로 사라져 버렸고, 이미 신경통으로 노동력을 잃은 그녀의 어머니는 딸을 잃은 고통에 몸부림치다 후두암이라는 새로운 병을 얻었다. 정신적·물질적 지주와 같았던 누나를 잃은 남동생은 방황 끝에 몸담고 있던 군부대 하사관직에서 옷을 벗었다.
4년이 넘는 지루한 법정 투쟁 끝에 국가는 그녀의 '업무상 재해'를 인정했지만, 남은 가족은 여전히 혜영씨와 이별하지 못한 채 방 안 곳곳에 놓인 딸의 사진과 함께 잠들고 눈을 뜬다.
혜영씨가 떠난지 4년이 지났지만, 혜영씨의 사진들은 아직 엄마의 방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최종 원고승소 판결 소식이 전해진 날, 저녁에 만난 혜영씨의 어머니 오씨(59)는 귀까지 덮이는 둥근 모자를 쓰고 있었다. 항암 치료로 머리가 다 빠졌기 때문이었다. 딸이 죽은 후 걸핏하면 울다 보니 지난 5월부터 밥이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아 병원에 가봤더니 후두암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혜영이가 왜 죽어야 했는지 그 책임이 가려졌으니, 이젠 같은 또래에 숨진 좋은 총각을 찾아 영혼결혼이라도 시켜줘야 겠어요. 그래야 에미 마음이 좀 편해지겠네요. 누나를 먼저 보내야 동생 장가도 들 수 있을테고…."
혜영씨의 시신은 사고 직후 화장돼 남동생(28)에 의해 진해 명동 앞바다에 한줌의 재로 뿌려졌다.
"누나가 다니던 회사(파비뉴21) 측 사람들이 영안실에 찾아와 모든 걸 잘해주겠다고 했어요. 하지만, 막상 화장을 하고 나니 회사에서 우리를 철저히 피하고 따돌렸어요. 찾아가도 사장이 없으니 다음에 오라고 하고, 다음에 또 찾아가면 또 없다고 하고…."
당시 그의 가족이 회사로부터 받은 것은 혜영씨가 다닌 20일간의 월급 100만 원 정도가 전부였다. 심지어 장례비나 조의금조차 받지 못했다.
혜영씨가 그 회사에 출근하기 시작한 것은 10월 10일. 입사 당시 혜영씨의 자기소개서 끝부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1초 1초를 밀도있게 사용할 그런 일을 기다렸습니다. 철저한 상권 분석을 통해 쇼핑뿐 아니라 지역의 문화까지 주도할 거라는 귀사의 야망을 보는 순간, 저는 전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대망에 찬 귀사의 도전에는 제가 꼭 필요할 것입니다. 사업체의 특성상 밤 늦은 근무, 휴일근무 기꺼이 하고 싶습니다. 개장에 앞서 홍보, 점검 및 관리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정말 환영입니다. 2004년, 그 신선한 역사에 제가 함께 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고대합니다."
회사는 그런 혜영씨를 채용했고, 실제로 10일부터 29일까지 휴일도 없이 일을 시켰다. 일요일과 토요일에도 출근해 밤 11시가 넘어서야 퇴근했다. 가장 빨리 퇴근한 날이 저녁 9시 정도였다고 한다. 무려 하루 14시간 30분 이상을 근무했으며, 출퇴근 시간까지 빼면 집에서 수면을 취할 수 있는 시간은 5~6시간에 불과했다.
사고가 난 날은 개업식(28일) 다음날이었다. 회사는 개업식을 무사히 마친 것을 자축한다며 회사 부근 고깃집에서 관리실 직원들에 대한 회식을 열었다. 혜영씨도 회식에 참석했으나 원래 술을 못하는데다, 남은 일이 많아 술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은 채 밤 10시쯤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다. 혜영씨뿐 아니라 다른 직원 3명도 함께였다. 밤 11시 30분 잔무를 마치고 통상 그랬던대로 비스토 승용차를 몰고 퇴근길에 나섰다.
사고 시간은 38분 뒤인 0시 8분, 장소는 창원시 천선동 성수원 부근에서 안민터널 방향 도로였다. 그동안의 피로가 누적된 탓일까? 가족들은 순간 졸음운전을 했던 걸로 추측한다. 인도를 넘어 돌진한 승용차는 전신주를 들이받았고, 그녀는 장 파열에 따른 과다출혈로 끝내 소생하지 못한 채 허망하게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문제는 회사와 근로복지공단의 태도였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과 판례를 들이대며 혜영씨의 재해는 업무와 전혀 관련이 없다고 통보해온 것이다. 산재보험법 시행규칙에는 아래의 딱 두 가지 경우에만 업무상 재해로 인정한다고 돼 있다.
1. 사업주가 소속 근로자들의 출퇴근용으로 제공한 교통수단의 이용 중에 발생한 사고일 것. 2. 사업주가 제공한 교통수단에 대한 관리 이용권이 사상한 근로자에게 전담되어 있지 아니할 것.
하지만, 똑같은 출퇴근 사고라 하더라도 공무원의 경우 공무원연금법상 통상적인 경로와 방법에 의한 출퇴근 중 발생한 모든 재해를 '공무상 재해'로 인정해주고 있다. 법은 '만인에게 평등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처럼 죽음마저 평등하지 못했던 혜영씨는 그 짧았던 삶 역시 평탄하지 못했다.
혜영씨는 여고 3학년이던 1996년 아버지를 잃었다. 수험생 시절을 무사히 보내고 대학 입학을 앞두고 있던 시기였다. 그녀가 회사에 제출한 자기소개서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사회를 경험해본 뒤 대학에 진학하였다는 것은 약간의 독특한 경험이 될 수 있습니다. 가장을 잃는다는 것은 정신적 지주를 상실케 함은 물론 상처와 어려움을 가족에게 남기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 때에 저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고, 정신적으로도 꽤 성숙해 있었기 때문에,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하지만 일을 하리라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가장을 잃은 충격은 컸다. 아버지가 남겨준 것이라곤 18평 시영아파트 한 채가 전부였다. 어머니가 간간이 식당에 허드렛일을 나갔지만 신경통으로 일을 오래 할 수 없었고, 고등학생인 남동생은 너무 어렸다.
그녀는 대학 등록금조차 내주지 못한 엄마를 원망하기도 했다. 어머니 역시 "우리 팔자가 이러니 우짜겠노"하며 함께 울 수밖에 없었다.
◇대학 캠퍼스 대신 공장으로 = 결국 대학 대신 마산 수출자유지역의 한 전자제품 생산공장에 들어갔다. 그 때부터 혜영씨는 스무 살 가장이 됐다. 잔업에다 특근·야근도 마다하지 않으며 남동생의 학비와 생활비를 댔다. 그렇게 4년이 지나갔다.
새천년을 몇 개월 앞둔 어느날, 혜영씨는 대학 진학의 꿈을 포기할 수 없었다. 어머니 오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공장장에게 무릎을 꿇고 애원을 했다네요. 회사에 다니면서 야간대학에 진학하는 걸 허락해달라고…. 그런데 그 공장장이 '우리 회사는 대학 나온 인재가 필요한 게 아니라 열심히 일하는 직원이 필요하다'며 일언지하에 거절하더라는 겁니다. 그 때문에 공장을 그만뒀어요."
그 후 어느날 아침 어머니가 눈을 떴는데, 딸이 보이지 않았다.
"알고 보니 그 날이 수능 시험일이었던 겁니다. 학비를 어떻게 할 지 걱정했는데, 4년 내내 특대장학금을 받았어요. 은행에 등록금을 내러 가서 학생회비 8000원 만 내면 은행 직원들이 다들 부러워했죠."
실제 혜영씨의 전 학년 성적표는 딱 한 과목 B플러스를 받은 걸 빼고는 올A였다. 평점은 4.362.
혜영씨의 성적증명서.
◇힘들었지만 신났던 대학 시절 = 하지만 장학금을 받아도 가장의 역할은 벗어날 순 없었다.
백화점 판매사원에서부터 화장품회사의 사장실 비서, 대기업의 문서번역 및 통역, 호프집이나 레스토랑 서빙에 이르기까지 대학시절 내내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었다.
남동생은 고등학교 졸업 후 군대에 지원해 직업군인이 됐다.
"제가 군 생활하던 시절, 새벽 두 시나 세 시쯤 되어서 오면 그 때까지 누나는 공부를 하고 있었어요. 그런 모습을 여러 번 봤어요. 낮에는 학교수업 마치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밤에 그렇게 공부를 했죠."
이렇게 힘들었던 대학시절이었지만, 혜영씨에게는 그 때가 가장 행복했던 것 같다. 자기소개서에서 그녀는 '하늘을 날던 대학시절'이라는 소제목 아래 이렇게 썼다.
"영어영문학부의 학생이 되어서 자유로운 학문의 분위기에 젖어 공부를 하는 짜릿함을 맛보았습니다. 캠퍼스의 구석구석을 누비면서 키츠의 시를 읽었고, 세익스피어의 희극 <한 여름 밤의 꿈>에서 퀸스역을 멋지게 해내었습니다. (…) 저의 무거운 책가방에 오히려 속상해하는 동기들에게 '청춘의 무게가 이쯤은 되어야지!'라고 말하면서 웃어주었습니다. (…) 공부하는 것이 재미있느냐는 말을 모든 사람들에게서 들을 정도로 즐기면서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나가는 아르바이트도 대충 하지 않았다. 혜영씨를 고용했던 호프집 주인은 "워낙 애살있게 일을 하는 바람에 손님들이 혜영이를 사장으로 생각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백화점에선 혜영씨가 판매한 핸드백의 매출이 급증하기도 했다고 한다.
혜영씨가 남긴 자기소개서에는 이런 마음가짐이 잘 나타나 있다.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면, 최소한 그 회사 직원이 아닌 사람들에게 '억지로 일을 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열광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일을 할 때 저 자신이 활기에 넘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혜영씨를 잃고 후두암으로 투병 중인 어머니는 4년 전 혜영씨가 받은 졸업우수상을 소중히 보관하고 있었다.
◇마침내 들어간 회사에서 커피 심부름만 = 이런 대학시절을 거쳐 2004년 2월 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졸업생 대표로 총장상도 받았다. 그러나 우수생에게도 취업의 문턱은 높았다. 그해 4월 창원의 한 중견제조업체에 취업했으나 비정규 계약직이었다. 혜영씨의 일은 커피를 나르거나 사무보조가 고작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창의력과 열정을 발휘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마침 창원의 유통회사 파비뉴21이 개점을 준비 중이었고, 홍보와 기획 파트에 지원했다. 기획 파트가 아닌 총무직으로 채용됐으나 정규직이라는데 신이 났다.
직장인이 자가용 승용차로 출퇴근 도중 교통사고로 사망했을 경우 산재보험에 의한 유족 보상과 장의비를 받을 수 있을까?
이 경우 공무원은 공무원연금법상 '공무상 재해'로 인정받을 수 있지만, 일반 직장인은 '출퇴근 과정이 사업주의 지배·관리 하에 있다고 볼 수 없다'는 이유로 산재 보상을 받지 못했던 게 지금까지의 판례였다. 즉, 공무원이 아닌 일반 직장인은 회사에서 제공한 통근버스 사고만 인정되고, 자가용이나 대중교통 사고는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다 밤늦은 퇴근길에 발생한 사고에 대해서는 산재보험에 의해 유족 보상 및 장의비를 지급해야 한다는 예외적인 판결이 나왔다.
최근 부산고법 제2행정부는 26세의 젊은 나이에 퇴근길 교통사고로 사망한 창원의 한 유통회사 여직원에 대해 업무상 재해를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지난 2004년 10월 30일 새벽 0시 8분께 창원의 (주)파비뉴21에서 총무부 대리로 일하던 하혜영 씨가 자신이 운전하던 비스토 승용차로 창원시 천선동 대우주유소 앞 전신주를 들이받고 숨진 지 만 4년 만에 나온 판결이다.
하씨의 유족인 어머니(당시 55세)와 남동생(당시 24세)은 회사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입사 후 20여 일동안 휴일에도 쉬지 못하고 거의 매일 밤 11시 30분이 넘어 퇴근하는 등 과로에 시달리다 퇴근길 재해를 당했다"며 유족 보상과 장의비를 청구했으나, 거절당하자 이듬해인 2005년 2월 소송을 냈다.
그러나 창원지법의 1심과 부산고법의 2심에서 모두 패소하자 자포자기 심정으로 대법원에 상고했고, 지난 9월 25일 대법원에서 기적적으로 원심과 항소심을 뒤집는 파기 환송 판결을 받았다.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만 26세의 미혼 여성이던 망인이 사고 당시 회사의 긴요한 업무상 필요 때문에 심야까지 근무를 계속한 후, 택시나 버스 등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기 어려웠던 까닭에 시외(진해시 풍호동)에 위치한 자택으로 퇴근하기 위해서는 잦은 야간근무에 대비한 것으로 보이는 승용차를 이용한 퇴근 이외에 다른 선택의 가능성이 없는 경우에 해당한다"는 원고의 주장은 '이유있다'고 판시했다.
이에 파기 환송된 사건을 다시 돌려받은 부산고법이 지난 7일 최종적으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림으로써 4년에 걸친 긴 법정투쟁이 종지부를 찍게 됐다.
항소심과 상고심 대리인을 맡았던 법무법인 미래로 도춘석 변호사는 "출퇴근 교통사고의 경우 공무원의 경우와 형평성 문제도 끊임없이 제기돼 왔던 데다, 영세사업장일수록 통근버스를 제공하지 않는 회사가 많은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약자에 불리한 법 적용이라는 비판이 많았다"면서 "아예 법을 개정해야 마땅하겠지만, 이번 판례로 직장인이 다른 교통수단을 선택할 여지가 없었을 땐 심야버스에서 사고가 났더라도 적용될 수 있다는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하씨의 어머니는 "비록 우리 혜영이는 갔지만, 이번 판결로 더 많은 사람들이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있게 된다면 그렇게 헛된 죽음은 아닐 것"이라며 울먹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