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의태자
경순왕 왕자(敬順王 王子)
마의태자(麻衣太子)
마의태자(麻衣太子, 912년? ~ ?)는 신라 하대의 왕족이다.
신라 경순왕(敬順王)과 죽방부인(竹方夫人) 소생의 첫째 왕자(王子)로 이름은 사서(史書)에 전하지 않는다.
그는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첫째 왕자로 이름은 사서(史書)에 전하지 않는다. 후대에 태자(太子) 또는 마의 태자(麻衣 太子)라 부른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935년(경순왕 9) 10월 부왕 경순왕이 고려 왕건(王建)과 후백제 견훤(甄萱)의 세력에 눌려 더이상 나라 존망이 위태롭게 되자 군신회의를 소집하여 고려에 항복을 논하는 자리에서 왕자(王子)가 불가함을 극력 간(諫)하였다. 그의 동생 덕지(德摯) 및 이순유(李純由) 등도 이에 함께 하였다고 한다.
"나라의 존속과 멸망은 반드시 하늘의 운명에 달려 있으니, 다만 충신 의사들과 함께 민심을 수습하여, 우리 자신을 공고히 하고 힘이 다한 뒤에 망할지언정, 어찌 1천년의 역사를 가진 사직을 하루아침에 경솔히 남에게 주겠습니까?"라고 하였다.(國之存亡必有天命只合與忠臣義士收合民心自固力盡而後已豈冝以一千年社㮨一旦輕以與人)-《삼국사기》
그러나 경순왕이 눈물을 흘리며 그의 손을 잡고 아래와 같이 말을 하며, 항복을 청하는 글을 지어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로 하여금 고려 태조에게 편지를 보내 항복을 청했다.
“고립되고 위태로운 것이 이와 같으니 형세가 보전될 수 없다. 이미 강해질 수 없고 또 이 이상 더 약해질 수도 없으니, 무고한 백성들만 길에서 참혹하게 죽게 할 뿐이다. 이러한 일은 나는 차마 할 수 없구나.” 하였다.(孤危若此 勢不能全 旣不能强 又不能弱 至使無辜之民 肝腦塗地 吾所不能忍也)-《삼국사기》
이에 그는 통곡(痛哭)을 하며 왕에게 하직 인사를 올리고 처자(妻子)를 죽이고, 개골산(皆骨山)에 들어갔다. 이후 바위 아래에 집을 짓고 마의(麻衣)를 입고 풀을 캐어 먹다가 여생을 마쳤다고 한다. 그리하여 후세 사람들이 마의(麻衣)를 입고 살았다 하여 마의 태자(麻衣 太子)라 부른다.
그의 동생 김덕지(金德摯)도 개골산(皆骨山)에 들어갔다 이후 화엄종(華嚴宗)에 귀의(歸依)하여 중이 되었는데 법수사(法水寺)와 해인사(海印寺)에 머물면서 도(道)를 닦으며 나라 잃은 서러움을 달랬다고 하는데, 승명이 범공(梵空)이라 한다.
그러나 정사 《삼국사기》에는 경순왕에게 '왕자(王子)가 있었다'고 할 뿐, 그가 세칭 '마의 태자(麻衣 太子)'라는 기록은 없다. 또 《동국여지승람》에도 사서에 이름이 전하지 않는 '왕자(王子)'가 있었는데, 그도 왕에게 항복하지 말것을 극력 간(諫)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으매 처자(妻子)를 버리고 형과 함께 금강산으로 들어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이 사서(史書)에 이름은 전하지 않고 다만 왕자(王子)라 하며, 처자(妻子)를 죽이고 개골산(皆骨山)에 들어갔다고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왕자 이름 대두[편집]
그런데 1784년(정조 8)에 개성 어느 산 기슭에서 발견되었다는 《김은열 묘지석》을 바탕으로 김노규(金魯奎)가 근기한 《김은열 묘지문》과 이를 원용하여 1785년 김사목(金思穆)이 경주김씨 족보를 수보(修普) 하면서 추기한 《고려평장사 보국대안군 김은열 묘지명》에 제1자의 이름이 '김일'(金鎰)이라 한다.[1] [2]
이후부터 일부 신라계 김씨에서는 경순왕 '태자'(太子)와 제1자 '김일'(金鎰)이 동일인이라 주장한다. 또 작금에 와서는 신라계 어느 김씨 문중에서는 자신들을 마의 태자(麻衣 太子) 직계 후손이라 하며, 그들의 족보에다 마의 태자(麻衣 太子)를 시조로 표기해 놓고 슬하에 두명의 아들을 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적자가 세칭 마의태자이신 분이고 둘째(막내)가 범공이다(-국사편찬위원회).
사서(史書)에 신라가 망할 때 태자(太子)가 몇 살이었고, 부인과 자식이 누구인가 하는 것등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만약 그때 처자(妻子)를 죽이지 않았다면 부인과 어린 자식이 있었을 것이고, 함께 개골산으로 들어가 망국(亡國)의 한(恨)을 품고 고려를 등지고 살았을 것이다. 그 자식들은 자라서 후손을 두었을 것이고 그 후손들은 본관 제도가 등장한 고려에서 어느 김씨 성을 가진 시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내력의 기록은 그들 족보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3]
김은열 묘지문 진위 여부[편집]
《김은열 묘지문》에 등장하는 경순왕 제1자 '김일'(金鎰)'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 등의 문헌(文獻)은 물론이고, 그 어떤 금석문(金石文) 자료에도 찾아볼 수가 없다. 현재 묘지명도 경주 김씨 일문 족보류에만 수록되어 있을 뿐이며, 족보에 옮기는 과정에 일부 내용도 왜곡되어 있다.
또 배위(配位) 관계 및 생애 등도 누락되어 있고, 단지 죽은 해와 장례일, 형제와 아들에 대해서만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을 뿐 묘지명 형태도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모친(母親) 관계도 언급하지 않고 단지 제2자 '김황'과 제4자 '김은열'은 고려 태조의 외손인 낙랑공주 소생으로, 평장사(平章事)를 지내고 유공지신(有功之臣)이어서 특사장지(特賜葬地)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887년 경주 김씨 후손 대제학 김창희(金昌熙)가 '숭혜전' 건립 때 각 성씨 문중에서 제출한 수단(收單)을 바탕으로 경주 김씨 분파(分派) 시말을 기록한 《김씨 분관록》에, 그의 증조부 좌의정 김사목(金思穆) 및 아버지 개성유수 김정집(金鼎集)이 근기(謹記)한 《김은열 묘지명》을 모두 배척하고 있으며, 여기에도 '김일'(金鎰)'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또 조선조 말 간행된 《증보문헌비고》 및 《조선씨족통보》에도 《김은열 묘지문》을 원용하여 추기하면서 경순왕 '태자'(太子)와 제1자 '김일'(金鎰)'을 별도 인물인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후세 평가[편집]
왕자(王子)의 이름은 역사서에 전하지 않고 있으며, 그는 태자(太子)의 신분으로 나라를 들어 항복하려는 부왕 경순왕과 고려에 맞서 결사 항전을 주장했는데 이러한 그의 행동은 조선의 유교적 대의 명분론에 비추어 재조명되고 칭찬받았다.
고려 후기 문신이자 학자인 김자수(金自粹)의 《상촌집(桑村集)》과 조선 중기 문인들인 신흠(申欽)· 윤증(尹拯)등은 그의 행적에 대해 읊었던 한시 작품에서 '초의(草衣)' 또는 '신라 왕자'로만 서술하고 칭찬하였을 뿐, '마의 태자'(麻衣 太子) 라는 이름은 사용하지 않았다.
오운(吳澐)은 《동사찬요(東史纂要)》에서 왕자(王子)에 대해 후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1778년(정조 2) 조선 후기 실학자 안정복(安鼎福)은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태자(太子)가 없었더라면 천년의 군자 나라가 마침내 남의 비웃음이 되었을 것”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마의 태자(麻衣 太子)」라는 이름이 본격적으로 대중에 알려지게 된 것은 일제 강점기 1926년 5월부터 1927년 1월까지 이광수가 『동아일보』지면에 연재했던 신문소설을 통해서였다. 이후 극작가 유치진(柳致眞)이 '마의 태자'(麻衣 太子)를 주제로 한 동명의 희곡을 발표하면서 이후 '마의 태자'(麻衣 太子)의 비극적인 이미지가 대중들 머리 속에 자리잡게 되었다.
신라부흥 운동설[편집]
신라가 멸망한 뒤 금강산에 들어가서 은거하였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 이외에는, 마의 태자(麻衣 太子)에 대한 어떤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
다만 마의 태자(麻衣 太子)가 은거했던 금강산 주변을 중심으로 마의 태자와 관련한 민간 전승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비로봉 바로 아래에는 마의 태자의 무덤이라 전하는 '신라마의태자릉(新羅麻衣太子陵)'이라는 비석이 새겨진 무덤이 있고, 바로 옆에 그가 타고 다니던 용마(龍馬)가 변해 돌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는 용마석(龍馬石)도 있다. 무덤은 둘레 약 10미터, 높이 1.5미터로 보통 무덤보다 조금 크다. 강원도 인제군에는 상남면 옥새바위(마의태자가 옥새를 숨겼다고 전하는 바위), 김부리(金富大王洞) 어귀의 수거너머(마의태자가 수레를 타고 넘었다는 고개) 등 마의태자와 관련된 지명들이 많이 남아 있다. 김부리라는 지명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신라 경순왕(김부대왕)이 살았던 데서 유래한다고 소개되어 있지만, 김부리의 대왕각(大王閣)에는 경순왕의 태자라는 인물이 신으로 모셔지고 있으며, 대왕각 안의 위패에는 「신라경순대왕태자김공일지신위(新羅敬順大王太子金公鎰之神位)」라고 새겨져 있는데, '김일'(金鎰)이라는 이름은 1940년대 이후에 위패에 새로 추가한 것이다.
그 가운데 흥미로운 것은 마의태자(麻衣太子)가 단지 은거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고려에 의해 멸망한(실은 스스로 항복한) 조국 신라의 부활을 위해 부흥운동을 준비했다는 전승이다. 현지 전승에 따르면 마의 태자는 혼자 수도를 떠난 것이 아니라 일군의 무리를 이끌고 있었고[4]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맹장군이라는 사람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맹개골이라는 마을이름이나 신라 부흥 운동을 위해 군량미를 모아 저장하였다는 '군량리'라는 마을 지명도 남아 있다고 한다. 또한 인제에 유난히 많은 '다무리'라는 지명은 '국권 회복'을 뜻하는 것으로(《삼국사기》에서 이미 '도로 되찾은 땅'이라는 뜻의 '다물'이라는 말이 언급된 예가 있다) 이를 근거로 마의태자가 신라부흥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설이 있다.
강원도 인제와 더불어 마의 태자(麻衣 太子)와 관련된 전설이 많이 남아있는 곳은 충주시로, 마의 태자(麻衣 太子)와 그 누이동생 덕주 공주(德主 公主)가 각각 조성했다는 월악산 자락의 미륵대원 터와 덕주사(德住寺)가 있다. 양평군의 용문사에는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가는 길에 절에 들러서 짚고 있던 지팡이를 땅에 꽂은 데서 유래했다는 은행나무가 있으며, 홍천에서 마의 태자 전승이 남아있는 인제로 넘어가는 길목에 지왕동(왕이 지나간 마을)과 왕터(왕이 넘어간 자리)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이들 마의 태자 관련 전승 지역을 지난 2000년 답사 취재하고 마의 태자의 북행(北行) 루트를 추정한 KBS 역사스페셜 제작팀에서는 2000년 4월 15일에 「신라 최후의 미스테리―마의태자」라는 부제로 방영되었던 『역사스페셜』 방송분에서 금강산으로 갔다는 마의 태자의 전승이 남아있는 지역이 굳이 경주에서 금강산으로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동해안 교통로가 아닌 내륙에 남아있는 것에서, 경주에서 계립령으로 가서 충주를 지나 물길로 양평으로, 홍천을 거쳐 인제와 한계령을 지나는 마의 태자의 북행 루트를 상정한 뒤, 해당 도시들이 신라 시대에는 제2의 수도로 불렸다는 점(충주의 경우), 그리고 외부 세력과 철저하게 차단된 곳(미륵대원 터나 덕주사의 경우)이라는 점을 들어 마의 태자가 신라의 주요 거점 가운데서도 천혜의 요새들만을 택해 거치면서 자신과 뜻을 함께할 사람을 규합하려 했던 것이라는 추론을 제기했다.
일단 김부대왕, 즉 경순왕과 연관지어 설명하는 강원도 각지의 전승에 대해, 고려에 항복한 뒤의 경순왕의 행적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의 문헌에 남아있는데, 휘하 백관과 함께 서라벌을 떠나 개경으로 가서 왕건을 만났고 왕건은 경순왕을 정승으로 삼고 대궐 동쪽에 있는 신란궁(新鸞宮)을 저택으로 내려주는 한편 경순왕을 경주의 사심관으로 임명하였다고 적고 있다. 해당 지역의 연고자에게 그 지역의 행정을 책임지게 함으로써 지방 출신의 고급 관리를 우대하고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치를 원활하게 하는 것이 사심관 제도의 취지이지만, 이 경우 지방에서 올라온 연고자에게 자신의 연고지 행정을 맡겼다고 해서 지방에 그대로 머무르게 한 것은 아니었다.
경순왕이 개경으로 간 뒤 경주로 돌아왔다는 어떤 기록도 찾을 수 없으며, 경순왕의 무덤도 경주가 아닌 지금의 경기도 연천군에 마련되었다. 또한 개경으로 향하는 경순왕의 행렬이 잠시 인제에 머물렀을 가능성을 추정한다고 해도 그 루트에 강원도 내륙인 인제는 포함되지 않는다는[5] 점을 보더라도 경순왕이 인제에 왔을 가능성은 희박하며 김부대왕동이나 대왕각, 그리고 인근의 관련 지명들은 김부대왕이라 불린 경순왕 자체를 가리킨다기 보다 경순왕과 관련된 주변인물을 가리킨다고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것이다(경순왕이란 명칭은 사후에 붙여진 것이고 생전에는 경순왕의 이름인 '김부대왕'으로 불렸다는 점에서는 실제 경순왕을 가리키는 명칭일 수도 있다).
강릉 김씨 문중에는 명주의 호장(戶長)으로 김부(金富)라는 인물이 전쟁으로 피폐해진 그 지방의 민심을 보살폈다는 내용의 전승이 있는데 마의 태자의 유적으로 알려진 갑둔리 5층 석탑은 김부라는 사람의 제자인 구(仇)라는 사람이 「김부의 수가 오래고 또 (구의) 집안이 길이 보전되기를(金富壽命長存家)」바라는 염원으로 세웠다는 내용을 전하는 탑의 비명(碑銘)이 확인되었고, 여기서 말하는 '김부'도 실은 신라의 김부(즉 김부의 아들인 마의태자)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김부의 부(富)와 김부대왕각에 모셔진 일(鎰)에 쓰인 한자는 똑같이 '넉넉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므로 김부를 김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마의태자의 진짜 이름이 무엇인지 대왕각에 모셔진 위패의 이름이 정말 마의태자의 본명 인지를 말해줄 수 있는 어떤 자료도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추측의 영역을 벗어나지는 못한다. 갑둔리 5층 석탑도, 요 성종의 연호인 「태평(太平) 16년 병자(1036년)」라는 연호가 탑에서 확인되었고 이것이 탑의 조성시기로 여겨지는데 태평 16년 즉 정종 2년은 마의태자가 살았던 시대보다 100년이나 뒤의 것으로 연대가 서로 맞지 않다. 이러한 지명들은 실제 마의 태자라 불린 신라의 왕자와 관련된 유적이라기보다는 거란, 또는 몽골과의 항쟁 과정에서 생겨난 지명이라는 해석이 제기되기도 한다.
마의태자가 등장한 작품
이광수, 「마의태자」(193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