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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22:54-62
이 사람
눅 22:54, 개역) 『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눅 22:55, 개역) 『사람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는지라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더니』
(눅 22:56, 개역) 『한 비자가 베드로의 불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보고 주목하여 가로되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니』
(눅 22:57, 개역) 『베드로가 부인하여 가로되 이 여자여 내가 저를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눅 22:58, 개역) 『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보고 가로되 너도 그 당이라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 하더라』
(눅 22:59, 개역) 『한 시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가로되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눅 22:60, 개역)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아 나는 너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방금 말할 때에 닭이 곧 울더라』
(눅 22:61, 개역)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눅 22:62, 개역)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눅 22:63, 개역) 『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
(눅 22:64, 개역) 『그의 눈을 가리우고 물어 가로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
(눅 22:65, 개역) 『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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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기적을 원합니다.
천국은 기적이 있어야만 들어간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다 들어간다고 하면
천국과 지옥이 구분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 기적이 뭔가 하는 겁니다.
본문에서 기적이란
닭소리 듣고 베드로가 운다는 점입니다.
외부인이 이 상황을 분석한다면
특이한 상황은
울 일도 아닌데 난데없이
베드로가 운다는 것이
이상하다는 겁니다.
평소 사람들이
베드로가 예수님과 함께 다닌다는 것을 보았고
그것을 언급하는 것은
전혀 기적적인 일이 아닙니다.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닭이 우는 것도
전혀 기적인 일이 아닙니다.
울어야할 닭이 울지 아니하면
그게 닭이겠습니까?
그런데 베드로는 통곡을 합니다.
그것은 저 앞에 잡혀있는 예수님에게
전에 들었던 말씀이 기억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비록 잡혀도
말씀은 그 어느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은 겁니다.
베드로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베드로는 압니다.
자기 주변에 포진되어 있는 모든 사람들과
심지어 닭 한 마리까지 전부
저 잡혀있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세상이 돌아가기 위해
각자 순간들을
할당 맡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베드로가 울기 전에는
타인을 향하여,
‘이 사람, 저 사람’이라고 언급했습니다.
즉 내가 남을 향하여
‘이 사람, 저 사람’ 언급할 수 있는 입장에
있다는 겁니다.
과연 그럴까요?
베드로는 자기 안에 타인이 들어오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치 거리에서 퍼레이드를 벌리는데
군중 속에 섞여서
머리 빼꼼히 내밀고
구경하는 입장에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일에 베드로는
구경꾼의 입장에서 구경하고 있습니다.
저 예수로 인하여
자기 것이 다치지 않기를 원한 겁니다,
베드로는 말입니다.
“나는 저 예수라는 분과 상관없다”고
말입니다.
그것은 평소에 자신이 원했던 예수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기 세계와
자신의 포부와 희망에 합치된
그런 메시아를 기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극렬하게 내부에서 저항합니다.
바로 이 저항심을 들추어내시면서
예수님은 베드로를 구원하십니다.
이 말은 곧 예수님은
자기 백성의 죄를 통해
그 인간을 건져낸다는 말입니다.
즉 퍼레이드를 관람만 하지 말고
퍼레이드 대열에 합류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의 구경꺼리로 전락한 것처럼
천국 백성도
그런 식의 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사람들로부터 기피 대상이 되는
그런 삶 말입니다.
인간은 자신을 두고서
‘한 사람’이라고 칭할 자격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존재에 입각해서
자기와 다른 사람에 대해서
‘이 사람, 저 사람’이라고 호칭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막상 베드로는
닭 울음 소리를 듣고서는
진정한 ‘이 사람’은
오직 예수님에게만 해당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마치 욥이 재를 뒤집어 쓰고
입을 막고 할 말을 잃은 것처럼
베드로는 닭 울음 뒤에서 울기만 합니다.
베드로 자신은
예수님을 자기 밖에 세워넣은
‘저 사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세상 모든 배치가 다
예수님을 위하여 정해진 위치를 갖고서
거기서 예수님이 담아두시는 소리를
외치는 입장에 있습니다.
예수님보고 “너도 한패지?”라고
다꾸치는 자들은
어떤 의미에서 모두
예수님 행동을 대행하는 자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만큼 베드로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를 밝혀내는데
이 방법이 동원된 겁니다.
즉 베드로가 자신을 지키려고 한다면
주변에 “너는 예수님과 엮였어”라고
고발하는 자들로
둘러싸이게 합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홀로된 존재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과 엮인 존재”일 때만
베드로 다운 것입니다.
베드로는 스스로 자신을
‘있게 할 수 있는 존재’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잘못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이 말씀의 구조 안에서
자동적으로 한 자리 차지하면서 놓이게될
자격이 없습니다.
베드로는 ‘자기 자리’를 찾아서
그 자리를 자신이 고수하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참된 다른 예수님을 거부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 점을 지적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세 사람을 낯선 사람으로
주변에 배치시킨 겁니다.
모닥불 타는 밤에 말입니다.
이처럼 이 세상은 말씀의 구조 밖으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안개라면
필히 안개가 되어야 합니다.
안개처럼 안되려고 하면 안됩니다.
우리 인간은 자신을 자신답게
유지할 자격이 없습니다.
마태복음 11:2-6에 보면,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고 되어 있습니다.
즉 자신이 문둥병자가 되고
앉은뱅이가 되고
귀머거리가 되고
죽은 자가 될 경우에만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본다는 겁니다.
심지어 자신의 자리를
선지자 자리를 확보했다고 여기는 그것이
도리어 다른 메시아를 고대하게 만듭니다.
이 모든 이유가
다 ‘여기 나가 있음’에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욥은 모든 것이 다 빼앗기고
마지막 욥 자기 자신의 마지막 터전마저
상실 될 때,
비로 세상이란 나를 위하여 있는 세상이
아님을 압니다.
그는 한 덩어리로 재로 만족하고
하나님 앞에서 아뭇 소리도 못하게 됩니다.
사도행전 3:6에서,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행 3:6)
즉 “앉은뱅이가
네가 심중에 생각하고 있는
‘나의 나됨’을 위한 것은
내게 없다”는 겁니다.
그 대신 “내가 지금의 내가 되게 한
바로 그 나사렛 예수님을 전하겠다”고
합니다.
여기 있다고 우기는 우리에게
마치 고속도로에서
큰 컨테이너 화물차가 달려와서
정면 충돌시키듯이
우리의 갈 길을
예수님은 큰 충돌로서 막아섭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나는 네가 원하는 길을 막겠다.
왜냐하면 너라는 존재는
애초부터 없던 존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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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강-눅22장 54-62(이 사람)120708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22장 54절에서 62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136페이지입니다.
누가복음 22:54-62
“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쌔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사람들이 뜰 가운데 부을 피우고 함께 앉았는지라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더니 한 비자가 베드로의 불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보고 주목하여 가로되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니 베드로가 부인하여 가로되 이 여자여 내가 저를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보고 가로되 너도 그 당이라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 하더라 한 시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가로되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아 나는 너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방금 말할 때에 닭이 곧 울더라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베드로가 울었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베드로가 울게 된 이유가 세 사람이 등장해서 베드로에게 질문 세 개를 던졌습니다. 무슨 질문이냐, ‘잡혀 있는 예수하고 당신하고 한 패지? 같이 있는 것을 봤다.’ 하니까 베드로가 ‘나는 저 사람을 모른다.’ ‘같은 편이잖아?’ 이렇게 하니까 ‘나는 저 사람을 모른다.’ ‘에이, 같은 편이편서?’ ‘나는 저 사람을 모른다.’ 이렇게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다른 사람이 볼 때에 하등 신기한 일이 아니에요. 그리고 얼마 있다가 닭이 또 울었다는 말이지요. 닭은 울어야 닭이지 안 울면 그것은 닭이 아니지요.
닭이 울고 주변 사람들이 ‘베드로 당신이 저 잡혀 있는 범죄인하고 같이 있었다는 것을 안다.’라고 한 이것은 사람이 눈이 있으면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뭐냐, 닭이 울었고 어떤 사람이 ‘저 사람과 한 패지.’라고 한 그것은 신기한 것이 아닌데 닭이 울 때 베드로가 그만 울어버립니다. 이게 뭐냐, 이게 구원받은 사람, 천국 가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기적이에요. 닭이야 아침마다 시간되면 우는 것인데 신기할 것이 뭐가 있습니까? 제가 하는 말은, 사람들이 파악할 수 있고 설명할 수 있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그런 것은 구원받은 기적에 속하지 않는데 천국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그런 상식으로서는 천국 가는 능력이 될 수 없습니다.
뭔가 특이해야 돼요. 그런데 우리는 그 특이한 것을 너무 세상 적으로 부자 되고 가정 잘되고 교회 부흥되는 쪽으로 자기 욕심을 채우는 것을 가지고 특이성이라 하는데 막상 구원받은 베드로에게 특이성이라 하는 것은 울었다는 거예요. 예수님은 부인할 수 있어도 자기 머릿속에 있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떨쳐버릴 수가 없는 겁니다. 자기에게 말씀을 외치던 예수님은 지금 체포되어서 수갑 채워져 잡혀 있으면서 곧 사형당할 입장이라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던져준 그 말씀은 우리 안에 생생히 살아 있는 겁니다.
살아 있는 그 말씀이 하나의 이론이 아니고 그저 하나의 교훈이 아니라 지금 온 우주를 움직이는 하나의 구조가 되어 있습니다. 전체적인 구조, 하나의 배치가 되어 있지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닭이 있어야 되고 그리고 자기한테 예수님과 연계시켜서 이야기 하는 세 사람이 배치되어 있어야 되고 그들은 예수님 잡힐 때 ……, 그 불빛이 문제였어요. 누가 불을 피웠는지 몰라요. 불빛에 얼굴이 환하게 비추이니까 ‘어, 안면 있는데 맞아, 당신이 예수와 함께 있던 한패네.’ 그 불빛이 문제였어요. 세상 불빛을 다 죽여야 되나,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렇게 불빛에 얼굴이 비추인 그 상황조차도 ‘너는 닭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라는 그 말씀 하나 이루기 위해서 모든 것이 적절하게 배당되고 할당이 되어 있는 자리에요.
그것을 눈치 챈다는 그것이 바로 기적이잖아요. 옆에 있는 남편과 아내, 내 자식들, 주변의 새로 이사 온 이웃, 그 모든 자리가 할당 된 것이 이미 우리 곁을 떠났지만 아직도 남아 있는 예수님의 말씀이 진실이라는 것을 기억나게 하기 위해서 전부 다 배치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그것을 발견하면서 베드로는 웁니다. 울어야 돼요. 우는 것이 기적일 줄은 미처 몰랐지요. 얻어 챙기는 것이 기적인줄 우리는 알고 있잖아요. 절에 가다가 교회 오고 난 뒤에 갑자기 부동산 값 오르고 애들 공부 잘하고, 이렇게 소유, 뭔가 얻어 챙겨야 기적인 줄 알잖아요.
그런데 내가 우는 것, 그것도 부모가 죽었다고 우는 것이 아니고 나라 잃어서 우는 것이 아니고 태어날 때 우는 그것 말고. 남자가 세 번만 운다고 하는데 그것은 거짓말이지요. 세 번 만 웁니까, 연속극 보고도 우는데 그것 말고 주의 말씀 앞에서 ‘너는 죄인이야’라고 지목받으면서 우는 기적, ‘너는 다른 사람 앞에서는 죄인 아니야. 하지만 내 앞에서, 이 십자가 지게 된 내 앞에서, 네가 죄인이기에 나는 십자가 피를 흘린 거야.’라고 피와 죄의 만남, 그 만남 속에 엮여 들어갈 때 그것이 기적인 겁니다. 그럴 때 베드로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어떤 것도 말씀에서 누락되는 법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그야말로 합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말이 나 좋으라고 합력해서 선을 이루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말씀이 말씀되게 드러나는데 나도 거기에 하나의 쓰레기처럼 동원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뻐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야고보서에 보면 ‘인생이란 안개다. 있다가도 없어진다.’ 그러면 우리는 있다가도 없어져야 됩니다. 있다가도 계속 있으면 안돼요. 우리는 있다가도 계속 있기 위해서 얼마나 아침부터 노력하고 있습니까? 남은 죽어도 나는 안 죽어야 된다는 것 때문에 얼마나 노력하고 있습니까? 평생 우리가 그렇게 살아 왔잖아요, 평생을!
그런데 성경 말씀에 보면 너는 있다고 없어져야 된다면 그것 각오해야 되고 그것 준비해야 됩니다. 있다는 것을 붙잡지 말고 없어지는 것을 기쁘게 대비하고 예상해야 돼요. 내가 없어진다는 것.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빠가 죽었습니다. 사람들 보기에 없어졌어요. 나사로는 죽어서 주님과 함께 있을 때에 누가 분을 내고 누가 예수님 앞에 저항했는가 하면 살아 있는 마리아와 마르다가 아주 강력하게 저항했습니다. 예수님 그동안 섬겼는데 돌아온 것이 오빠의 죽음밖에 없다면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살라고 이렇게 모진 시련을 겪게 하십니까, 하고 예수님에게 막 달려들었지요.
바로 그것이 평소에 자기가 예수 믿는다고 자부했지만 막상 예수 있음을 믿는 것이 아니고 내가 여기 있음을 그 동안 믿어온 거예요. 예수라는 존재는 다만 있는 나를 더 있게 할 경우에만 내가 당신 믿어줄 용의가 되어 있다는 식, 시장 통에서 흥정하듯이 그렇게 거래와 흥정으로서 살아온 겁니다. 그것이 들통 나면 구원이고 들통 안 나면 지옥입니다. 그것을 들통 내게 해주시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줄 몰라요. 그것이 얼마나 기적입니까? 예수님만 있으면 되지 내가 왜 있어야 되느냐, 하는 그런 생각을 갖고 있어야 돼요.
그게 말씀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좀 얕잡아 보고 시시하게 보는 경우가 있는데 성경이 얕잡아 볼 문장들이 아니거든요.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이런 말씀들이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 이렇게 시작되면서 4절에 보면 “그 안에 생명이 있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다.’ 이 말은 우리 안에는 생명이 없다는 거예요. 생명 없는 것을 더 붙잡고 더 살려고 하면 안돼요.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할 때 생명이라 하는 그 말은 뭐냐, 네 안에 있는 목숨은 생명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이미 질이 떨어진 죽어가는 생명이고 진짜 생명은 예수님 안에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살아 계시면 그것은 생명이 살아 있다는 것이고 생명 안에 우리가 생명을 받게 되면 이 땅에서 죽고 사는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니지요. 이것은 주의 생명 됨을 훼방하는 수단으로 우리가 살아 있는 셈이 되는 겁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짧게 결론 내리면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의 영생을 주면서 그냥 바깥에 영생을 주는 것이 아니고 우리 내부에 우리를 경유해서 생명이 통과하는 식으로 우리를 데리고 간다는 겁니다. 보통 유럽의 축제를 할 때 거리 퍼레이드를 하거든요. 예쁜 옷 입고 북치고 장구 치면서 악대로 동원되어서 가는 사람이 있고 그 거리를 베란다 문 열고 꽃 뿌리고 박수치면서 관람하는 관람객들과 수많은 군중들이 있어요.
우리는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느냐 하면, 군중들 속의 한 사람으로 섞여서 그저 고개 내밀고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 구경하는 식으로 살아온 거예요. 그렇게 되면 자기 죄를 몰라요. 구경하는 것이 무슨 죄가 되겠습니까? 이것은 한때의 퍼레이드 구경으로 끝나버려요. 주일날 교회 와서 설교 들으면 그것으로 일종의 퍼레이드처럼 끝나버린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삭개오를 불러내듯이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어이, 거기서 구경하지 말고 이리로 들어와’ 해서 아예 주님 가신 그 퍼레이드에 합류를 시켜 버립니다.
합류를 시키게 되면 우리는 바로 베드로가 겪었던 그 기적, 다시 말해서 나라는 것은 없고 모든 것이 예수님의 말씀을 위해서 나는 이 땅에 태어나야 했다는 그 퍼레이드, 말씀의 퍼레이드에 우리는 죄인의 입장에서 행진을 같이 하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베드로보고 이야기했습니다. ‘네가 네 원대로는 인생 못살게 될 것이다. 원치 않는 길로 네가 띠 띠우면서 가게 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또 이 말씀까지 관중석에서 고개 내밀고 보듯이 하면서 이 말씀조차 나와 상관없는, 베드로와 예수님의 퍼레이드로만 간주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그것은 기적이 아닙니다. 관람이지요. 입장료 내고 관람하는 것, 헌금내고 관람하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그 속에 우리를 집어넣습니다. 매일같이 겪는 것은 모든 것이 내 원대로 안 되고 내 뜻대로 안 된다는 이것이 바로 기적인 것을 예전에 왜 이것을 몰랐습니까? 왜! 우리 조상들 성황당에서 빌고 불교신자들 갓 바위에서 빌듯이 교회 와서 새벽에 비는 것, 우리는 자신을 위해서 비는 것 밖에 몰라요. 비는 것 밖에 모르면서 부처되신 예수, 산신령 되신 예수 섬겼지 근본적으로 나를 경유하는 것이 없어요. 나에게 침투되는 주의 말씀이 없습니다.
오늘 말씀의 하이라이트는 그겁니다. 베드로보고 ‘너 예수와 한 편이지?’라고 손가락질 하면서 지적하는 여자 하나와 남자 둘, 그 세 명의 사람들이 사실은 예수님의 분신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잡혀 있지만 예수님의 지시에 의해서 세 사람은 베드로를 포위해서 계속 묻는 겁니다. 매일 같이 물을 거예요. 그것도 한 두 번이 아니고 계속 물을 거예요. ‘너 예수하고 한 편이지? 그지?’ 그럴 때 우리는 예수님이 하늘로 간다고 할 때는 가슴이 부풀어서 나도 그 자리에 같이 있게 해 달라고 했지만 막상 예수님이 체포되어서 세사의 막강한 권력 밑에 쭈그려 앉아서 아무소리도 못하고 있는 그런 예수를 내가 같이 호응하고 응원한다는 것, 그분 편에 선다는 것은 결국 나도 목 잘리는 신세가 되어 버리는 거예요. 그게 무서운 거예요. 그게 무서우면서도 우리는 예수 믿는다고 자부해 왔다 그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베드로를 주께서는 기어이 천국 보내기 위해서 예수님의 지시에 따라서, 본인들은 몰라요, 그런데 예수님의 지시에 따라서 그들은 베드로보고 ‘너 예수님과 한 편이지, 한편이지, 한 편이지?’ 한 거예요. 처음에 베드로는 그것을 예수님의 말씀으로 듣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에 할당된 역할인 것을 알지를 못하고 그냥 마귀가 와서 괴롭히는 줄로 알고 강력하고 극렬하게 저항하지요. 그 저항이 꼬깃꼬깃 숨겨놓은, 우리 힘으로 빼내지 못한 우리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요 죄였습니다. 그 저항심, ‘나 예수 모른다.’고 버틴 그 저항심, 그 버틴 이유가 뭐냐 그 말입니다.
안에 괴물이 들어 있는 것 같아요. 그 버틴 이유는 습관입니다. 평생 살면서 반복된 행위로 인한 습관입니다. 그 습관은 뭐냐, 사람이 자기 힘으로 살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겨버리면 더 이상 예수님을 찾지 않습니다. 내 힘으로 살 수 있다면. 그동안 자기 힘으로 못사니까 잠시 잠간 예수 힘을 빌려 보려고 교회 나오지만 다시 이 정도 하면 내 힘으로 살만 하다는 희망이 보인다면 더 이상 예수 찾지 않습니다. 희망이 문제지요. 꿈이 문제였어요. ‘BOYS BE MBTIOUS’가 문제였습니다. 그 꿈을, 가져서는 안 되는 꿈을 가지는 겁니다.
그 꿈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꿈이 아니고 내가 여기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나의 여기 있음을 사방팔방 자랑하고 싶어 하는 그 욕구와 욕망의 화신으로서 버텼던 그러한 자신감이었어요. 세상 아무도 없어도 나만 있으면 된다는 그 자신감, 그것 베드로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오늘 우리의 이야기라고 성경말씀은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 이야기였습니다. 그렇다면 흔히 교회에서 외치는 천국, 그것은 하나님께서 곱게 감추는 장소였습니다. 주님께서 작업하지 않고서는 누구나 갈 수 없는 곳이 천국입니다.
내가 나한테 작업 걸고 종교생활 신앙생활 할 수 있는 곳이 천국이 아닙니다. 금요일에 울산에 가서 출애굽기 강의를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그 통하는 매개물, 쉽게 말하면 중보, 매개물이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준비해서 우리에게 준 매개물이 있는데 인간들은 하나님이 주신 매개물은 거부해 버리고 내가 나한테 닦달내서, 내가 나에게 작업 걸어서, 내가 나에게 성화작업 해서, 착한 나를 만들어서, 말씀가지고 훈련시켜서 훈련은 반복을 낳고 반복은 습관을 낳아서 내가 의인 만들어서 내가 나의 매개물이 되어서 가고자 하는 그 천국, 그거 지옥입니다.
교회에서 훈련하는 것, 위험한 짓입니다. 해서는 안 되는 짓을 교회가 심심하니까 다른 것 할 것이 없으니까 그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제자훈련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납득이 되는 훌륭한 나 만들기에 매진하고 있는 겁니다. 목사한테 월급까지 줘 가면서 부목사 월급 줘 가면서. ‘여러분은 할 수 있습니다. 착할 수 있습니다.’를 반복 훈련시키는 거예요. 그래서 스스로 자기 위선에 빠지는 거예요. 주님은 죄인을 부르러 왔는데 갈수록 죄인에서 멀어지고 의인에 가까운 거예요.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보고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너희가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낫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 했거든요. 우리가 가는 똥차 앞에 앞차가 있어요. 그게 뭐냐, 바리새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리새인에 의해서 십자가에 죽었어요. 그러면 우리는 지금 어느 길로 가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죽여서 환장한 그 길로 지금 들어서고 있는 겁니다. 교회라는 이름으로. 신자답게 산다는 이름으로. 말씀대로 실천에 옮기면서 산다는 이름으로. 믿음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그 구실로 우리는 바리새인 되어가고 있는 거예요.
믿음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믿음에 합당한 행함이 있어야 된다,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얼마나 자기에게 속아 왔습니까? 자기가 자기에게 최면을 거는 거예요, 최면을. 우는 것 대신 훈련하는 거예요, 우는 것 대신. 자기 부끄러운 것 대신 선한 일에, 교회 일에, 선교 일에 더 매진함으로써 자기가 부끄러운 존재라는 사실을 그것으로 대치하려는 겁니다. 헌금을 많이 하고 전도를 많이 함으로써 내가 인간도 아니라는 사실을 감추려고 그런 시도를 하고 있는 거예요.
세례요한도 한때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 훌륭한 세례요한인데. 분명히 자기 입으로 이야기했습니다. ‘주님은 흥해야 되고 나는 망해야 된다.’ 다른 말로 하면 ‘나는 망하는 것을 통해서 주님은 흥해야 된다.’ 그렇게 외쳤던 그 세례요한이 아직 십자가지기 이전이라서, 선지자인 구약계통이 사람이라서 예수님에 대해서 이런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세례요한이 옥에 갇히면서 예수님한테 편지를 보낸 적이 있어요. ‘당신이 메시아 맞습니까?’ 그런 내용입니다. 무슨 뜻이에요?
세례요한 나는 여기 있고, 내가 여기 있다는 뜻은 내가 그려낸 메시아 관, 세계관이 따로 있는데 왜 당신에게서 들려오는 소식은 내가 구성한 내 세계관에 왜 안 맞는가, 그 말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메시아는 이런 메시아인데 왜 당신은 내 메시아의 범위에 포함이 안 되느냐, 그런 소리입니다. 세례요한이 ‘내가 다른 분을 또 기다려야 됩니까, 아니면 당신으로서 종결된 것입니까?’ 그것을 물을 때에 예수께서 이렇게 세례요한에게 이야기해주라고 답변을 줬습니다. 마태복음 11장 5절에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라고 응답을 보내버렸습니다.
이 말은 뭐냐, 소경이어야 하고 앉은뱅이여야 하고 문둥이어야 되고 귀머거리가 되어야 되고 이미 죽은 자가 될 경우에만 예수 그리스도가 비로소 메시아 맞습니다, 라고 믿어지게 된다는 겁니다. 우리는 소경 귀머거리, 그 자리에서 급히 빠져나오려고 애를 씁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부모가 교통사고가 나서 죽었고 어떤 사람은 교통사고로 인해서 장애자가 되었어요. 어떤 사람이 장애가 된다는 것, 한 번 장애는 영원한 장애에요. 인생 다 꼬여버리고 완전히 엉망진창이 되는 겁니다. 엉뚱한 길로 가고 있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자기라는 것, 자기 꿈이라는 것, 그것은 다 개꿈이고 헛꿈이라는 거예요.
세례요한조차도 일종의 헛꿈을 꾼 겁니다. 자기가 선지자라고 인정받은 그 순간부터 선지자 위에서 어떤 세계관을 시작을 한 거예요. 나는 당연히 소경이 아니어야 되고 나는 당연히 절뚝발이 아니어야 되고 나는 당연히 살아나야 되고, 라는 자의식 속에서 출발하니까, 첫 출발부터 꼬이니까 ‘그런데 당신이 메시아 맞기는 맞아요?’ 하는 식으로 자기 세계에 예수님이 담길 수 없었던 겁니다. 세례요한이 지옥 간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예수님이 보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예수님 십자가 앞에서 인간은 없는 존재고 죽은 존재고 내 세울 것이 없다는 것을, 습관과 교육과 학습으로서 정립될 문제가 아니고 매일 같이 매일 같이 주께서 닭 울음소리를 들려줘야 되고 나보고 ‘너 예수하고 한 편이지?’라는 소리로 주께서 준비한 사람들을 통해서 지적 받아야 되는 겁니다. 말씀대로 지적 받아야 돼요.
금요일에 제가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울산에 황 전도사님이 계신데 그 분이 손자를 키워요. 그 이름이 민준인데 만 두 살이 채 안되었어요. ‘민준아, 할머니가 이렇게 하면 예, 라고 해야 된다. 민준아, 너는 죄인이다. 예, 라고 해라.’ 스무 번을 이야기했답니다. 그러니까 예, 했답니다. 그 다음에 ‘민준아, 교회에서는 아멘, 이라 하는 것이니까 아멘, 이라고 해라.’ 하고 2십번 이야기 하니까 나중에 되더라 그 말입니다. TV에 나오는 동물농장 같아요. 자, 그렇다면 그 애는 어느 대목에서 아멘, 소리가 나와야 되느냐 하면 목사님 설교를 듣고 있다가 ‘우리는 죄인입니다.’ 할 때 아멘 소리가 나오도록 학습이 되어 있겠지요.
제가 노골적으로 전도사님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고 전도사님이 손자를 볼 때 그 세계관이 오직 말씀에 입각해 있다는 거예요. 할머니 본인이 주님 앞에 죄인이기 때문에 손자에게 이야기할 것이 그것밖에 없는 거예요. 손자한테 너 돈 쥘래, 실 쥘래, 칼 쥘래, 그런 식으로는 손자를 가르칠 수가 없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전도사님은 자기가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얘를 언제까지 자기가 데리고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제가 학습이라는 예를 이렇게 나쁘게 했지만 그것이 학습이 아니고 신앙적 표현이지요, 그저 신앙적 표현인겁니다. 두 살짜리 애가 뭘 알겠습니까? 하지만 그 손자 애를 보면서 그 손자 애를 보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분신을 보는 겁니다.
‘주여, 내가 당신에게 뭐라고 고백하면서 살 겁니까?’ 이것을 그냥 내 뱉는 거예요. ‘나는 죄인입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 대목을 좀 분명하게, 인간이 십자가 앞에서 어떤 존재냐를 보여주는 대목이 바로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나옵니다. 옛날에는 베드로와 요한이 같이 사도 일을 했어요. 요한이 앉은뱅이를 낫게 하는 그 대목에서 분명히 등장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앉은뱅이가 된 거지가 돈 달라고 손을 내밀 때에 베드로와 요한이 가서 이렇게 합니다.
뭐라고 하느냐,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은과 금은 내게 없다는 거예요. 없음부터 먼저 이야기해요. 다시 말해서 ‘네가 네 있음에 필요한 것은 이 사도에게는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런 것이 있어야 나는 나다워, 하는 것은 제가 당신에게 줄 것이 없습니다.’ 그 말은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대로 당신이 된다면 당신은 지옥 갑니다.’ 당신이 원하는 자아상 같으면 당신은 지옥가기 때문에 그런 것에는 협조할 수 없다는 뜻이에요. 뭐라고 하느냐,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 내가 나 된 것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으니까 예수 이름으로 걸어라, 라고 명령하니까 걷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변 많은 사람들이 개 코도 모르면서 아는 체 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경건으로’ 다른 말로 하면 ‘베드로와 요한의 영발, 기도발로, 베드로와요한의 아주 깊은 신앙심으로 저 사람을 걷게 했다.’ 이렇게 아는 척을 할 때에 베드로와 요한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저 사람과 나는 목격자로서 임무가 끝나고 지금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께서 앉은뱅이에게 믿음을 줬기 때문에 ‘당신에게 믿음이 있습니다.’라는 이야기밖에 한 적이 없다는 거예요. ‘예수에게서 난 믿음이 저 사람을 걷게 했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자기는 쏙 빠지는 거예요. 왜냐하면 베드로와 요한은 아주 쓸모 짝이 없는 인간이기 때문에 그래요. 주의 일에 아무 쓸모 짝이 없는 거예요. 쓸모 짝이 없기 때문에 그게 쓸모가 있는 거예요. 쓸모 짝이 있다고 생각할 때 그것은 쓸모가 없는 겁니다.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없다는 그 환경 속에서, 비로소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있는 것은 없고 없는 것 밖에 없는데 있는 것은 오직 말씀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겁니다. 하나님의 새 언약만 있는 거예요. 새 언약의 주인공 되는 예수님만 있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베드로가 닭이 울기 전에는 이 사실을 몰랐습니다. 뭐라고 하느냐, 오늘 설교 제목이 ‘이 사람’인데 상당히 어려운 제목입니다. ‘이 사람.’ ‘이’라는 것은 대명사입니다. 영어로 THIS. 대명사라는 것은 있다는 거예요. 어떤 사물, 물체, 실체가 있다는 겁니다. 저것은 뭐라고 하지? 아, 이 사람이라고 하자, 그래서 ‘이 사람’이라고 부른 거예요. 누구를 보고 이 사람, 저 사람 부르는 것은 내가 여기 있다는 증거를 말합니다. ‘당신이 여기 있는데 당신이 있는 것처럼 나도 여기 있어. 여기 내가 있다는 이것을 무시하지 말란 말이야.’ 나는 저 사람을 볼 때 저기 있는 이 사람이라고 부름으로써 나는 여기 내가 있다는 것을 그런 식으로 확인해 주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저 사람은 항상 나에게 ‘이 사람’이 됨으로써 이 사람은 나의 여기 있음에 끼어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파고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나는 그냥 나만으로 있는 거예요. 그리고 나에게 누가 들어오려면 나의 허락을 맡아야 돼요. 그게 누구를 보고 이 사람, 저 사람이라고 부를 때 하는 소리입니다. 베드로가 뭐라고 하느냐, ‘이 사람아, 나는 저기 잡혀 있는 저 사람을 모른다.’고 했어요. 그럴 때 아는 것은 뭡니까? ‘나는 나를 알거든.’ 그런 뜻이에요. 나는 나를 아니까 구태여 나는 울 필요도 없고 여기서 어떻게 처신해서 이 정치적 위기에서 벗어나는가, 이 정치적 탄압에서 벗어나서 내 몸 하나 간수하는가, 골똘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것 하나밖에 없는 거예요.
내 몸만 편하고 내 몸의 안정만 구한다면 그것으로 나는 이 상황에서 족하다는 겁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주장이 어찌 베드로만의 주장이겠습니까? 쉽게쉽게 살아가겠다는 이런 모습이 누구나 다 드러나요. 집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는 안 새겠습니까? 집에서 새는 바가지 교회와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보고 ‘이 사람’이라고 할 사람들이고 하나님 보고 ‘저 분’이라고 이야기 할 사람들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너는 뭔데?’ 나는 이 사람, 저 사람, 할 수 있는 권한과 권리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다가 얻어터진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닙니다.
욥기에 보면 욥이 열 자식이 있었고 재산이 많았습니다. 열 자녀와 재산을 동그라미 치고 그걸 범위로 잡을 때 그 안에 누가 들어 있는가, 욥 본인이 들어 있는 거예요. 그 안에 욥이 있다는 말은 열 자식이 있고 그것은 다 내 자식이고 막대한 재산이 있을 때 그 것을 합쳐서 욥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욥은 자신을 믿고 있다고 그 테두리를 믿고 있다고 마귀가 그렇게 오해했었지요. 마귀가 슬슬 심술 나서 하나님께 시비를 겁니다. ‘하나님, 욥이 자기 자신을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닐 건데. 욥은 내가 준 믿음이 있기 때문에 아마 천하가 다 안 믿어도 욥은 믿을 건데.’ ‘아닙니다. 욥은 자기 자신을 믿습니다.’ ‘마귀야, 네가 뭘 로 그렇게 장담하느냐?’ ‘욥의 가진 것을 치면 아마 환장을 할 겁니다.’ ‘한 번 쳐 봐라.’
그래서 욥의 가진 것을 치기 시작합니다. 자식 열 명 다 죽고 그 가운데 딸도 셋 있었는데 그 딸들이 다 예뻤던 모양인데 예쁘면 뭐합니까, 다 죽어버렸는데. 그렇게 자식들 다 죽고 재산도 하루아침에 다 날라 갔습니다. 그런데 욥이 하는 소리가 이상한 소리를 합니다. 이것은 특이한 거예요. 이것은 천국 갈 사람에게서만 나오는 이상한 소리입니다. 뭐라고 하느냐, 주신자도 하나님이요, 가져가신 자도 하나님이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다시 말해서 나라고 하는 것은 나한테 있는 것이 아니고 저쪽 분, 생명의 말씀 저쪽분이 생명을 주면서 ‘나’라는 말도 같이 붙여서 준 것이라고 이해하시면 되는 거예요.
설명하는 내가 더 어렵다! 우리에게 생명을 줄 때 생명 받은 내가 나라고 할 권리나 권한이 없고 창조주가 피조물을 만들 때 나라고 하는 것은 피조물이 피조물보고 그런 소리 하지 말고 창조주가 준 것이 있을 때에만 그것을 나라고 할 수가 있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라는 말 속에 우리도 포함돼요. 나도 하나님에게서 받은 겁니다. 쉽게 말해서 ‘나요, 하나님 것입니다. 나는요, 내 것이 아닙니다.’ 그런 뜻이라는 말이지요. 내 것도 아닌데 왜 걱정하는지 모르겠어요, 왜 걱정하는지. 남의 것을 왜 걱정합니까? 주신자도 하나님이요, 가져가신 자도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면서 ‘욥이 그 소리 하면서 참 입맛 다셔 가면서 무지 섭섭해 했을 거다.’ 할 거예요. 어디서 들은 풍월이 있어서 교회 와서 그런 소리 하면 믿음이 있다고 치니까 문장이야 읊어댈 수 있지만 ‘와, 더러운 신세! 그래! (마지못해서) 주신자도 하나님이니 다 가져가, 가져가!’ 우리는 감사가 아니고 기쁨이 아니라 성질내면서 그런 소리 한 소리 할 수 있어요. 어쨌거나 마귀가 1회전 패배했습니다. 또 나옵니다. ‘몸은 아마도 자기 몸이라고 우길 건데요?’ 하나님이 자신 만만해서 ‘그러면 생명만 뺐지 말고 몸 한 번 쳐봐라.’ 몸을 치니 과연 마귀 말대로 드디어 원망이 쏟아지는데 그동안 욥이 이야기했던 그것은 다 무효가 되고 ‘주신자도 하나님이요, 가져가신 자도 하나님’이라고 얼추 믿는 문장을 남발했던 그 모든 것도 쑥 들어가 버리고 ‘차라리 태어나지 말게 하지 무엇 때문에 태어나게 해서 이런 수모를 당하게 합니까?’라고 원망을 해댔는데 하지만 결국 승리자는 욥도 아니고 욥의 친구들도 아니고 마귀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욥을 버리지 않고 마지막에 찾아와 주었기에 그렇습니다. 찾아오신 분이 승리, 버리지 않으신 분이 승리에요. 찾아왔을 때 ‘황무지에 비가 오는 이유를 네가 아느냐?’ 수능 시험을 딱 내니까 답이 턱 막혀버렸어요. 채소밭도 아니고 고추밭도 아니고 황무지에, 난데없이 황무지에. 황무지는 뭐가 없느냐, 사람이 없어요. ‘나’라고 할 존재가 없다는 말이지요. ‘나’라고 할 존재도 없는데 비는 미쳤다고 왜 내리느냐는 거예요. 왜 내려요?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는 것이 내가 있고 내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날 지켜주고 위해주고 날 사랑해줘야 당신은 하나님다워, 이런 사고방식으로 우리는 학습되어 왔다는 말입니다. 학습, 교회에서 학습되어 온 거예요.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 노래 불러가면서 우리는 학습을 해 온 거예요. 그런데 황무지에 비는 왜 내리는 거예요? 주객이, 주인과 손님이 바뀐 거예요. 우리는 바뀌기를 원치 않았던 겁니다. 하나님, 예수님 하지만 항상 주인공은 나이기를 원하면서 살아왔던 거예요. 그런데 이 나, ‘이’라고 이야기하고 ‘저’라고 이야기하고 그렇게 부를 수 있는 ‘나’는 하나도 안 빼앗기고 이것을 움켜쥐고 어떤 누구의 침투도 허락지 않는 거예요. 욥에게 마지막 찾아오니까 욥이 할 말을 잊고 재를 뒤집어 써버렸어요. 이 말은 내 속은 재만 채울 때 가장 나답습니다, 그 말이에요. 쓰레기의 재만 가득가득 쟁이는 것이 바로 십자가 앞에서 주께서 우리를 보는 안목입니다. ‘아이고, 재 덩어리야.’
욥이 그렇게 재를 뒤집어쓰고 입을 막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딸 셋 새로 생기고 미스 코리아 진선미 다 되고, 모든 것은 주의 말씀대로 되매 우리는 그냥 거기에 합류된 거예요. 그게 바로 이 지상에서부터 시작하는 천국입니다. 우리는 가슴 아파 하면서 말씀에 포위된 것에 대해서 우리는 울어야 됩니다. 그리고 기뻐해야 돼요. 이렇게 나를 버리지 않고 간섭해 주니 고맙다고 해야 돼요. 우리는 주제넘게 남을 ‘이’라고 ‘저’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권리나 권한이 나에게 있다고 장담한 거예요.
그런데 이 세상에 ‘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어요. 모든 것이 예수님을 위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에 예수님이 ‘어이, 너!’라고 할 때만 비로소 ‘너’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나보고 ‘나’라고 하면 안돼요. 예수님이 말씀을 가지고 ‘어이, 죄인!’ 하면 ‘여기 있습니다.’ 해야 돼요. 우리는 얼마나 자기 자신을 잃기 싫어서 독자적으로 살고 싶어 하는지, 그것은 선악과 독약을 따먹은 후유증이에요. 약을 잘 못 먹었어요. 약을 잘 못 먹어서 영혼이 다 비틀어져서 완전히 미쳤어요. 미쳐서 자기밖에 몰라요. 예수든 삼위일체든 다 이용해서 자기 스타 되려고, 온종일 24시간 그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정신이상도 그런 정신이상이 없습니다. 전부 다 악마가 살고 있는 세계에요.
이것 주님께서 고치지 않으면 아무도 못 고칩니다. 내가 나를 고칠 수가 없어요. 자기한테 미쳐 있는데, 자기 섬기기 바쁜데 남 섬길 틈이 어디 있습니까, 남에게 자기 자랑하기 바쁜데. 교회 온다고 고쳐질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 오면 다만 ‘아, 이런 문제가 있구나.’ 하고 알면 돼요. 노 수희라는 사람이 있어요. 조국통일범민족연합 회장인 사람이에요. 그 사람이 몰래 북한에 들어갔다가 다시 판문점 내려오기 직전에 ‘조선만세’ 하면서 내려왔는데 나는 그 분 만나면 이런 이야기 하고 싶어요. 본인의 그런 사상에 대해서 하등 간섭할 권한이 없어요. 그런데 이상스러운 것은 그렇게도 좋은데 왜 그 북한에서 안 사느냐, 그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할 것은 다시 그쪽으로 돌려보내면 돼요. ‘가세요. 좋은데 가서 사세요.’ 라고 돌려보내면서 그 때 내 마음에 드는 생각이 그거예요. 목사들이 뭐라고 하느냐, 천국이 좋다고 하거든요. 노 수희가 뭐라고 하느냐, 북한이 좋다는 거예요. 그러면 북한에서 사시라고 보내는 것처럼 교인이나 성도가 난 죽어도 천국이 좋다, 그러면 돌아가세요, 이렇게 돼야 돼요. 그게 진짜 입에 발린 믿음이 아니고 가짜가 아니라 진짜로 천국이 좋으면 빨리 죽어서 가시라고! 그래야 된다니까요. 그게 앞뒤가 맞는 이야기잖아요.
뭐 그렇게 양다리를 걸치려고. 양다리 걸치면 마귀도 안 속습니다. 마귀가 바울도 알고 예수도 아는데 마귀가 안 속아요. 우리가 천국, 천국 운운하는 것은, 그렇게 반복적으로 강압적으로 나에게 스스로 교육을 시키면 혹시 알겠나, 천국 보내줄지, 이러한 세상에서 배웠던 교육을 그대로 답습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뭔가 홈이 파이는 것이 있어야 돼요. 그것을 어떻게 파는가, 그것을 하고 말씀 마치겠습니다.
지금 베드로가 본인이 가는 길이 천국 가는 길이라고 그렇게 자부했습니다. 본인이 가는 길이 있는데 예수님께서 앞에 닭을 준비했어요. 그 닭을 일종의 큰 컨테이너 화물 트럭으로 봅시다. 그게 역주행을 해서 정면으로 충돌했습니다. 그럴 때 베드로가 그 닭이라는 컨테이너 트럭에 받혀서 울면서 사망한 거예요. 주님께서는 베드로가 어떤 길로 가고 있는지 알아요. 알아서 주께서 천국으로 몰아넣기 위해서 ‘너 예수와 한 편이지’라고 하는 사람들을 배치해 놓은 겁니다. 우리의 미래가 있는 그 대로, 그 길에 난데없이 뭔가 예수와 엮이는, 십자가와 엮이는 그런 천사인지 마귀인지 모르지만 하여튼 뭔가가 와서 우리 가는 길과 꽈당, 하고 정면충돌을 일으킵니다.
그러니까 그때 베드로가 통곡하고 울었지요. 이 세상은 내 길 고집한다면 모든 구석에서 충돌되게 하신 그 방식이 주께서 나를 건지시는 레이저 광선들이고 장치였구나, 하는 겁니다. 베드로는 혹 뿔이 많이 났어요. 이리 가다 받치고 저리가다 또 받치고 울룩불룩 천지가다 부딪힌 흔적입니다. 그게 성도의 모습입니다. 사도바울도 마찬가지에요. 바울도 예수 잡아 죽인다고 그걸 취미삼아 열심히 달려가다가 사울이 가는 그 다메섹 길에 또 난데없이 번개 치면서 주님 나타나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하고 또 컨테이너 나타나서 박아버리네요.
그래서 눈 봉사가 되어서 ‘주여, 누구십니까?’ 할 때 다른 사람에게는 그 소리가 안 들렸다는 거예요. 아마 사울이 법정에 가서 증언하게 되면 증인들이 다른 소리 할 거예요. ‘어이, 증인! 손들고 선서하세요. 그때 사울이라는 사람이 이 말씀을 들었다고 하는데 당신도 들었습니까?’ ‘아닌데요? 우리가 들은 것은 뇌성뿐이었습니다.’ ‘거 봐, 사울 당신이 거짓말쟁이 맞잖아.’ 완전 졸지에 거짓말쟁이 되어버렸어요. ‘당신이 환각 속에서 환청을 들었다.’ 그렇게 되어버리는 거예요.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대충돌, 그게 바로 말씀이 우리에게 준 충돌입니다. 우리를 인간취급하지 않고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동원되는 하나의 떨어져 나간 예수님의 한 일부분으로서 나타났다가 결국 나중에는 사라지게 만드는 그 작업, 그게 오늘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과 베드로의 만남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