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밤 3
글은 이렇게 끝났다.
"미친 놈! 이놈은 미친 놈이었어."
노범호는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불을 켜서 성명서를 태워버렸다.
허열이 두 손을 움켜쥐고 부들부들 떨어 댔다.
"이 이 자식이 기어이 으흐흐"
"울 거 없다. 애들 불러. 기자들에게 할 말도 있으니까."
최일우와 경호원과 서장이 앞다투어 올라왔다.
"자네가 서장인가?"
"네, 회장님."
서장이 경직된 몸짓으로 경례를 붙이며 대답했다.
"병원 차 불러서 딸아이 시체는 서울로 올려보내고, 이 녀석 시체는 여기서 보관해.
연고자가 나타나면 아무 말 없이 넘겨주고, 나타나지 않으면 5일 후 화장해 버려."
"알겠습니다."
"다음, 최일우."
"네."
"그 동안 수고 많았다. 너는 딸의 시체를 옮길 차에 동승해서 따라 올라가라.
서울에 도착하면 즉시 장례 치를 준비 시작하고 무슨 말인지 알겠지?"
"네, 알겠습니다."
"다음, 경호원."
"네."
세 사람의 경호원이 앞으로 나섰다.
"한 사람은 허 검사 모시고 서울로 올라가라. 그리고 두 사람은 여기서 기다리고 있다가,
내가 기자들을 만나고 오면 나와 함께 서울로 올라가자. 헬기는 돌려 보내라.
자동차로 올라가고 싶으니 차 준비해 두고"
"네, 즉시 준비하겠습니다."
"다음, 허 검사."
"네, 아버님."
"절대로 울지 마라. 너는 사내다. 어찌 되었든 테러는 막은 셈이다. 네가 올라가 대통령 각하와 이후락 부장님께
직접 보고하라. 나라를 구했다. 자칫 온 나라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뻔 했다. 정말 고생 많았다.
너는 내 사위가 아니라, 아들이며 분신이다 거듭 말하지만, 절대 낙심하거나 아이들 보는 데서 슬퍼하지 마라.
사내는 사내다운 데가 있어야 하는 법이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미라 놀라지 않도록 하고"
"네, 아버님."
"자, 그럼 먼저 떠나라. 나는 기자들에게 몇 가지만 설명하고 뒤따라 올라가겠다."
허열이 아내의 시체를 안타가운 듯 한 번 돌아보고 몸을 돌려 밖으로 걸어 나갔다.
사진 기자들이 두 사람의 시체를 향해 열심히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자, 대충 찍었으면 옆 방에 모여들 계시오. 내 잠시 후 들어가 설명할 테니."
노범호는 기자들을 방으로 몰아넣고 아래층 회의실로 내려갔다.
언젠가 보고받은 문제의 태극기와 인공기, 대통령과 김일성의 사진이 나란히 있었다.
그는 그것들을 거둬 탁자 속에 감추었다. 노범호는 놀랄 만큼 침착했다. 딸 옥진의 시체가 옮겨지는데도
곁눈질 한 번 하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가, 기자들이 모여 있는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방 구석에 있는 책상 앞 의자에 앉았다.
기자들이 마치 먹이를 사냥하려는 매처럼 눈에 빚을 띠고 모여 들었다,
"회장님, 설명 좀 해 주시죠."
"별장에 뛰어들었다가 죽은 사람은 누굽니까? 혹 회장님 댁 사모님을 잘 아는 사람은 아닙니까?"
"따님이신 노옥진 여사께서는 왜 죽은 겁니까?"
앞뒤 순서도 없이 마구잡이로 덤벼들었다.
노범호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누구, 라이터 있소?"
"네."
앞쪽에 있던 기자 하나가 재빨리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여 주었다.
노범호는 담배 연기를 길게 빨아들였다가 '훅' 내뿜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지금으로부터 약 한 달 전, 어느 사내로부터 협박을 받기 시작했죠. 협박자의 요구는 5천만 원이었소
돈을 주는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나는 거절했소. 이런 협박자가 있어서는 나라 꼴이 안 된다는
생각에서였소. 그리고 반드시 잡아 내겠다고 다짐했었소. 나는 공개 수사를 하면 범인이 도망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하여 비밀리에 수사하기로 했소. 그런데 불행하게도 범인은 내 단 하나의 혈육인
외손녀를 납치해 이 곳까지 온 거요. 딸을 잃어버린 에미가 찾으러 왔다가 녀석에게 죽음을 당했고,
범인도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 같소. 이상이오."
더 이상의 질문은 허락되지 않았다.
노범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던 그가 다시 머리를 돌렸다.
"기관에서 수사를 계속할 거요. 수사가 완료되면 다시 알려 주겠소. 한 번 더 말하지만,
정신 나간 젊은 놈의 행패에 내 딸이 죽었소. 다음에 봅시다."
그는 기자들을 남겨 두고 밖으로 나섰다. 경호원들이 대형 크라운 승용자를 구해 와서 시동을 걸어 놓고 있었다.
"서울로 가자. 허 검사와 미라는 서울로 떠났는가?"
"네. 20분이 넘었습니다"
노범호는 딸 옥진의 죽음을 몰고 온 별장을 떠났다. 승용차가 온양을 지나고 천안을 벗어나 고속 도로로 올라서자,
노범호는 마침내 참고 참았던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한번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걷잡을 수 없었다.
손수건이 흠뻑 젖도록 흐느껴 울었다. 백수웅과의 사랑을 강제로 떼어 놓은 것이 후회되기도 하고, '
백수웅을 일본에 버린 후에라도 잘 다독여 마음을 위로해 주었더라면'하고 생각해 보기도 했다.
아내도 죽고 늙어 가며 의지해오던 단 하나의 자식 옥진이가 이렇게 허망하게 생명을 끊을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장례라도 화려하게 치르고 싶었다. 아아, 이제 무슨 낙으로 살아간단 말인가.
5월 29일 아침
휴전선을 중심으로 남북한의 전투 부대는 잔뜩 긴장한 채 전진 배치를 점검하고 있었다.
하급 부대와 상급 지휘 부대 간에 무전 연락이 어지럽게 오갔다. 왜 갑자기 1급 비상이 걸렸는지
알지 못하는 사병들은 군가를 부르며 주먹을 휘둘렀다.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일도 많다만, 너와 나, 나라 지키는 영광에 살았다
5월 29일 아침은 이렇게 찾아왔다.
날은 맑고 투명했다. 5월의 신록은 향기롭기까지 했다. 산과 들, 하다못해 골짜기에서 흐르는 물 한 방울까지도
남한이나 북한이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삼천리 강산이 두루 수려했다. 얼굴도, 옷도, 말도, 웃는 모습조차도
다를 것이 없는 이 땅의 민족이었다. 그런데도 박성철이 비무장 지대(DMZ)를 지나고 판문점을 지나 통일로를
달리는 데 무려 25년이나 걸렸다. 참으로 머나먼 길이었다. 이제 얼마 가지 않으면 서울에 도착한다는
안내원의 말을 들으며 박성철은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박성철은 아직도 긴장에서 해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남조선 땅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살아 돌아갈지, 아니면 서울에서 귀신도 모르게 죽음을 당할지,
그건 누구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떻게든 합의를 이끌어 내야 한다. 시간을 벌어 가며 마음을 놓게 하고 기회를 보아 적화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
그는 남조선에 대해 불타는 적개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반드시 조국을 적화 통일하여 압박받는 인민을
해방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서울로 가는 목적이 명분과는 달랐다. 그의 가슴에는 오직 주석 동지에
대한 충성심밖에 없었다. 주석동지를 기쁘게 하는 것만이 조국에 충성하는 일이며, 그렇게 하자면 회담을
성공리에 마쳐야 한다. 우선 남북한 정권을 고착시킨 다음, 통일 제 1 정책인 무력 적화 통일을 이끝어 내야 한다.
그는, 6 . 25 전쟁 때 한 떼의 젊은이에 의해 죽창에 찔려 무참히 죽은 아버지를 보아야 했던 백수웅을 알지도 못했고,
알 이유도 없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여인의 총에 맞아 숨을 거둔, 살아있다면 썩 괜찮을 한 청년의 비극적인 운명을
전혀 알지 못했다. 박성철은 마침내 서울에 들어섰다. 승용차는 도심을 가로질러, 평양에도 잘 알려진
장충 체육관을 지나 한 호텔에 이르렀다. 앞뒤에 한 대씩의 경호차가 있었지만, 비밀리에 개최되는 회담이어서,
보도진들이나 요란한 경비 병력은 전혀 눈에 뜨이지 않았다.
승용차가 서자, 누군가가 문을 열었다.
박성철은 차에서 내렸다.
바로 눈앞에 말쑥한 감색 싱글을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바로, 한국 정보부장이며 권력의 제 2인자로 알려진 이후락이었다.
이 날 아침 이른 시간, 이후락 정보부장은 회담에 관한 마지막 보고를 하기 위해 청와대로 갔다.
이제 세 시간만 지나면 평양에서 북한 제 2 부수상 박성철과 그의 수행원 세 명이 온다.
회담장은 깔끔하게 준비되었고, 회담 내용과 합의할 사항은 암기할 정도로 수도 없이 매만져 두었다.
회담장을 테러하겠다던 미치광이는 허열과 노범호가 온양 별장으로 유인하여 완전 포위하고 있다니,
그것 또한 걱정할 것 없다. 박성철이 서울을 와 주는 것만으로도 회담 작전은 성공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청와대에 들어선 이후락은 한 방에 이르러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60여 평의 커다란 집무실. 그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대형 책상위에는 번뜩이는 검은 알의 안경이 놓여져 있고,
대통령이 먼저 들어와 기다리고 있었다. 두꺼운 회색빛 양탄자가 깔려 있는데도, 이후락은 발자국 소리를
죽이기 위해 조심스럽게 걸어 들어왔다.
대통령이 예의 코브라 가죽 지휘봉으로 손바닥을 두드리며 이 부장을 맞았다.
"오늘이지?"
"네, 각하."
"자, 앉지."
이 부장은 대통령이 가리키는 소파에 앉았다.
"이 부장, 그 동안 고생 많았소."
"아, 고생이라뇨. 국가와 민족과 각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지 오래 되었습니다."
"알고 있어. 아무튼 이번 회담의 성패가 우리 정권의 앞날을 좌우해."
"잘 알고 있습니다."
"최대한의 합의를 이끌어 내고, 양보해도 좋을 것은 양보해 줘. 체면에 손상 가지 않는 한도에서"
"알겠습니다. 각하."
"이후의 정국은 대충 구상이 끝나 가나?"
"네, 각하. 이번 회담은 6월 1일까지 4일 동안 계속하며, 박성철일행이 돌아가면 한 달 정도의 재검토
시간을 가졌다가, 7월 3일이나 4일쯤 서울과 평양에서 내외신 기자들을 초청, 동시에 합의 문을 발표할 생각입니다.
통일의 기초 작업이란 전제하에 발표한 후, 앞으로 통일의 구상과 실현을 위해 초법적(超法的)인 헌법을 만들어
일단 국회를 해산하고 대통령 간선제를 실시하여 현재 추진 중인 고속 경제 성장을 지속시키며 통일기반을
구축할 생각입니다."
"흠-."
대통령의 입이 한일자로 굳게 다물어졌다. 집권 연장, 종신집권 집권당인 공화당 내에서도 후계자 물색론이
공연히 거론되고 있는 판이니, 야당측이 입을 다물고 있을 것 같지가 않다. 미국의 거부감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한다면 하는 성격의 대통령이다. 학생이건 야당이건 여당이건, 누구든 반대자는 일거에 제거할 것이다.
할 일이 너무나 많아, 지금 자리를 내놓을 수는 없다.
"좋아. 돌아가 보라구. 회담 잘 끌어 가고."
이 부장이 일어났다. 대통령은 이번에도 테러리스트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이후락은 사기가 햐늘을 찌를 듯했다. 북한의 박성철을 서울로 끌어들이기 위해 먼저 평양을 다녀온
모험이 적중한 것이다. 대통령은 이번 회담을 아예 이 부장에게 떠맡겨 버렸다. 신임을 담뿍 받고 있다는 증거다.
이 부장은 청와대에서 영빈관으로 돌아왔다. 이제 한두 시간정도 휴식을 취한 뒤, 평양에서 오는 박성철을 맞을 것이다.
이 부장이 응접실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 비서가 달려와 노범호가 도착했다고 보고했다.
"뭐라구? 노 회장님이 오셨다고?"
"네, 각하."
"어디 계시나?"
"밖에 계십니다."
이 부장이 달려나갔다. 그리고 두툼한 손으로 노 회장의 손을 잡았다.
"들어오시지 않고 자, 들어가서 커피나 한 잔 합시다. 곧 손님들이 올 겁니다. 그래, 그 녀석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죽였습니다.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
"살려 두면 오히려 더 골치 아플 겁니다. 잘 됐습니다. 각하께는 제가 오후에 보고 올리겠습니다.
누구, 다친 사람은 없습니까?"
"뭐 별로 허 검사도 괜찮구요, 그 아이가 고생 많이 했죠."
"죽은 너석은 죽은 거고, 아무튼 회장님이 심려가 크셨겠습니다. 회담은 잘 될 겁니다.
이 곳은 걱정 마시고, 가서 좀 쉬도록 하시죠."
'아니다. 이 중요한 자리를 떠날 수는 없다. 평양 사람들도 만나고, 회담에 참석해서 1등 공신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노범호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사실 좀 피곤합니다. 또, 마무리 지을 일도 있구요. 언제쯤 돌아오면 좋겠습니까?"
"저녁에 식사가 있습니다. 그 때는 참석해 주셔야겠습니다. 여흥 자리도 마련했으니,
평양 손님들과 가볍게 한 잔 합시다."
노범호는 영빈관에서 나와 딸 옥진의 시신이 어디 있는가를 알아보았다.
최일우가 딸의 시신을 서울 대학 병원에 안치시켜 놓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노범호는 승용차에 올랐다.
"남산으로 가자."
"남산요?"
오랫동안 노범호를 모셔 온 비서가 의아한 듯 바라보았다.
"그래, 남산."
비서가 핸들을 잡았다. 영빈관을 빠져나온 승용차는 타워 호텔앞에서 우회전하여 남산 팔각정으로 숨차게 올라갔다.
팔각정 아래 광장에 차를 세운 노범호는 비서도 대동치 않고 혼자서 터덜터덜 팔각정으로 올라갔다.
노인들 몇몇이 모여 앉아 따뜻한 햇볕을 쬐고 있었다. 노범호는 그들 옆으로 가서 앉았다.
"누구, 담배 있으면 한 대 주구려."
"못 보던 얼굴인데요? 자, 여기 있어요."
70이 훨씬 넘어 보이는 노파가 싸구려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주고, 불까지 붙여 주었다.
"허허 맛있구려."
노범호는 하늘을 바라보며 공허한 웃음을 웃었다.
노범호는 뼛속까지 스며드는 슬픔을 견딜 수 없었다. 노파가 준 담배를 피우며 한없는 비감에 젖어 있었다.
아내의 죽음, 그리고 목숨처럼 사랑한 외동딸 옥진의 자살 딸을 사랑하다가 목숨까지 잃어버린 백수웅
그리고 사위 허열에 대한 생각들이 두서없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돈은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많고, 권력은 핵처럼 중심부에 서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들이 아무런
위로도 되지 못했다. 자신보다도 오히려 아침 햇볕을 쬐러 나온 이 노인들이 훨씬 더 행복해 보였다.
노범호는 노인들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자신의 앞일을 곰곰이 생각했다. 일부 재산을 사회에 돌려,
복지 사업에 쓰도록 지시할 것이며, 각 회사는 책임을 념겨 경영케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총괄을,
슬퍼할 허열에게 맡게 할 것이다. 정계에서도 완전히 은퇴하여, 책이나 읽고 여행이나 하며 남은
인생을 조용히 보낼 것이다.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이나마 마음을 비우고 살고 싶었다.
이렇게 마음먹으니 한결 가벼운 기분이 되었다.
노범호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노인들이 떠드는 사이, 앉았던 자리에
만 원짜리 다섯 장을 놓고 팔각정에서 내려왔다.
비서가 달려와 맞았다.
"이번엔 어디로 가실?"
"청와대로 가자."
결심이 섰다.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는 것이다. 재산도 권력도 모두가 부질없다. 자신이 해야 할 마지막 일은,
대통령에게 사직서를 제출하는 것이었다. 노범호는 자신의 청와대 집무실로 들어갔다. 경제 관계 주요 정책의
산파역을 맡았던 정든 방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미련 없이 떠나야 한다. 감회에 젖어 몇 번이고 책상을 매만지던
노범호는, 한 장의 백지를 꺼내 사직서를 쓰기 시작했다. 사직서를 제출한 다음에는 딸 옥진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병원으로 달려갈 것이다. 딸의 시신앞에서 마음껏 울어 볼 작정이었다.
지금까지 돌진만 하며 살아 온 과거를 뉘우치면서 한없이 울고싶었다,
그 시간, 서울로 먼저 돌아온 허열은 아내의 시신이 안치필 서울 대학 병원의 영안실에 앉아 있었다.
무릎에는 일곱 살 어린 미라가 앉아 훌쩍이며 엄마를 찾고 있었다.
"엄마, 엄마 엄마, 왜 죽었어? 잉잉, 엄마"
허열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달래는 것도 지쳐 그대로 놔 두었다,
미라는 울면서 생각하고 있었다.
'엄마는 왜 오토바이를 태워 준 아저씨하고 싸웠지? 그리고 왜 죽었지? 또, 그 아저씨는 어떻게 된 거야?
이런 때 와서 나와 놀아 주지 않고 이제 엄마는 다시 살아나지 못할까? 다시는 만날 수 없을까?'
모른다. 어린 미라는 아무것도 모른다. 엄마가 왜 죽었고, 옛날얘기 잘 해 주던 그 좋은 오토바이 아저씨가
어떻게 되었으며 그가 누구인지를 왜 별장까지 가게 되었으며, 어떻게 해서 아빠 와 할아버지가 거기 나타났는가를
엄마의 죽음이 미라에게는 풀 수 없는 수수깨끼였고, 미라의 출생 비밀은 모두에게 비밀이었다.
그러나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 세월이 흘러 미라가 어른이 되면 알게 될 것이다. 사회가 무엇인지,
정치와 권력이 무엇인지, 돈은 무엇이며 사랑이란 어떤 것인지, 영리하고 똑똑한 미라는 알아 낼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엄마와 아빠와 오토바이 아저씨의 비밀이 밝혀지면, 그녀는 엄마의 영혼을 향해 통곡할 것이다.
뼈아픈 눈물을 흘릴 것이다. 그렇게 울면서 살아갈 것이다. 그녀도 누군가를 지독히 사랑하면서
노옥진의 장례는 성대하고 화려하게 치러졌다.
노범호는 회사 재산의 대부분을 사회에 환원시키기로 하고, 주력 업체 둘을 허열에게 넘겨 주었다.
허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라는 노범호가 맡아 키우겠다고 했다,
"마음이 진정되면 네가 가고 싶은 길로 가거라. 정계로 가든 사업을 키워 가든,
이제 옥진이는 잊어버리고 새 생활을 시작하도록 해."
이렇게 두 사람은 결별을 선언했다.
남북 회담은 남북 모두가 원하는 선에서 합의를 보았고, 박성철은 무사히 평양으로 돌아갔다.
정부는 헌법 개정과 정치 구조에 지각 변동을 일으킬 작업에 돌입했고, 이후락 정보부장은
이 작업에 다시 몰두하기 시작했다.
미라는 다음 해에 국민 학교에 들어가야 한다. 학교에 들어가기전에 많은 세상 구경을 시켜 주고 싶었다.
노범호는 미라와 함께 제주도, 경주, 설악산 등지를 돌아다녔다. 미라는 아직도, 왜 엄마가 죽었는지,
죽음이 무엇인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박성철이 평양으로 돌아가던 날, 온양 경찰서에 건장한 사내 서너 명이 찾아왔다.
신문과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한 사내의 죽음을 안 이들은, 백수웅과 함께 6 . 3 사태를 주도한 사람들이었다.
노옥진의 어린 딸을 납치하여 돈을 요구하다 자살한 범인으로 보도되었지만, 그들은 그가 백수웅임을 확신했고,
은밀히 시체를 찾아 조촐한 장례식이라도 치를 생각이었다.
신원 미상의 자살한 납치범 그 시체를 확인하는 순간, 그들은 오열에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가난에 찌든 생활을 하면서도 누구보다 당당하고 힘찼던 백수웅, 정치와 사회, 경제에까지 해박한 지식을
갖추었던 학생 운동의 선구자 백수웅 그가 싸늘한 시체가 되어 한 조각 흰 천에 덮여 누워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경찰서에 시체 인수증을 써 주고, 시체를 영구차에 싣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 화장터로 가서 한 줌 재로 만들었다. 그들은 그 재를 가지고 푸른 물 줄기가 도도히 흐르는
한강 가로 갔다. 그리고 그 재를 모래 위에 놓았다.
시인(詩人)이 된 한 청년이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펴 들고 시를 낭송했다.
들리는가, 그대여 들리는가.
저 위대한 침묵의 함성이.
한강은 흘러도 마르지 아니하며
너는 죽어도 죽지 않나니,
너의 힘찬 맥박과 고동은
우리 혈관에 살아 남아
내일을 기약하는도다.
친구여 !
메마른 이 땅의 한 줄기 물줄기여!
서러워도 울지 않고
배고파도 비굴하지 않으며
억눌려도 무릎 꿇지 아니하고
슬퍼도 눈물 흘리지 않나니,
메마른 가지에도 잎이 돋고
설한의 언 땅에도 싹은 돋나니
오라.
살아서 돌아오라.
이 민족은 너의 함성으로 다시 일어서고
너의 눈물로 다시 꽃피우리라.
마른 하늘에
너의 피는 천둥 번개가 되어
마침내 이 땅을 적시리니
돌아오라.
닫힌 문 활짝 열고
침묵으로 돌아오라.
조국은 너의 영혼 앞에서
덩실덩실 춤추고
한강은 너를 싣고
도도히 흐르나니
아아, 그대여, 친구여,
나는 오늘 슬픔에 겨워
네 영혼 앞에 통곡하고
너는 내 눈물 속에
다시 부활하는구나.
돌아오라. 돌아와 뜨거운 가슴 비비며
내일을 이야기하자꾸나.
아아, 그대여. 사랑하는 그대여.
길고 긴 조시(弔詩) 낭독이 끝났다.
그들은 백수웅의 유골을 한강에 뿌린 뒤 둥그렇게 둘러앉아 소주잔을 기울이며 진지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무슨 큰 사건이 있었어, 백수웅이 실종되었다가 지난 3월에 처음 내 앞에 나타났거든,
그 동안 그가 어디 있었는지 말하지 않았어. 하지만 납치범으로 몰았다는 건 너무 유치해."
백수웅이 돌아왔을 때 처음 만났던 이성구였다.
"납치범이라고? 터무니없어. 백수웅이 6 . 3 사태 무렵 무척 사랑한 여자가 노옥진이었어.
정부 발표는 거짓말이야. 백수웅은 무엇인가 일을 저질렀어. 그리고 쫓기다가 죽은 거야."
"그렇다면 노옥진의 죽음은?"
"글쎄, 그게 이상하단 말이야 혹, 8년 만에 다시 만나 밀월을 즐기다가 남편 허열에게 발각된 건 아닐까?
그래서 허열이 두 사람을 쏘아"
"맞다. 그건 논리가 성립된다. 백수웅이 그 당시 사랑했던 여자가 노범호의 딸이라는 사실은
우리도 뒤늦게 알지 않았나. 백수웅을 간첩 협의로 집어넣고 허열과 결혼시켰는데,
8년 만에 용케도 탈옥한 백수웅이 노옥진과 만나다가 허열에게 피살된 거야."
"그럼 당국의 이번 발표도 또 거짓말이로군."
그들은 말이 되지도 않는 8년의 역사를 추리해 가며 입에서 침을 튀기고 있었다.
[끝]
첫댓글 그동안 너무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수고 하셨습니다.
수고 많이 하셨어요 ㅎㅎㅎ 감사 합니다 ㅎㅎㅎ
그동안 긴 글 올려주시느라 고생하셨어요 ..............감사해요
그동안 잼나게 잘읽었읍니다~!고생 하셨읍니다~~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날마다 기다려 주시는 우리님들 생각하면서 즐겁고 행복한 마음으로 준비하는 시간을 갖곤 합니다,,,,늘 긴 글 읽어 주시고 마음 놓아 주시는 우리님들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많으 격려와 사랑담아 주시길 바랍니다 ....행복하세요*^^*
수고하셨습니다. 매일 잘 보았습니다..
너무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정말 잘 봤습니다....조시 부분에서 가슴이 짠~한게 눈물을 감출수가 없네요...추리소설을 보면서 눈물 흘리는건 흔한일이 아니겠지요?
물안개님 안녕하세여 새해 복 많이 받으시구요 좋은 글 신경써서 올려주신 성의가 대단함니다 잘봤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읽고갑니다. 즐감 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즐독했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