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럼은 주일마다 '바이블25'와 '당당뉴스'에 연재 중입니다.
한여름 밤의 꿈자리
지난 주간은 정전(停戰) 70주년을 기억하는 시간이었다. 아마 많은 국민이 마음의 몸살을 앓으며 보냈을 것이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나라 모든 집집마다 전쟁으로 난리를 치룬 당사자였으니 예외가 있을까? 광화문이든, 혹은 평택과 용산 그리고 미 전략 핵잠수함이 입항했다는 부산 어느 항구에서든 흘러간 전쟁의 시간을 기억하면서, 다시는 우리의 미래가 되지 않을 것을 전전긍긍 다짐했을 것이다.
때가 때인지라, 수요일에는 남북평화재단에서 주최한 ‘위기의 한반도, 시민사회의 과제’를 묻는 강좌에 참석하였다. 어쩌다 보니 맨 앞자리에 앉아 강사와 눈을 연신 마주치며 모처럼 모범생처럼 강의를 들었다. 최근 통일부 장관 임명을 둘러싸고 들이닥친 통일부의 진통에 누구보다 씁쓸해 할 이종석교수(전 통일부장관)가 강사였다. 종전선언을 외치면 반국가세력이라고 규정하는 터무니없는 세태에 맞서 할 말이 많았을 텐데, 강사는 목소리 톤을 낮추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목소리를 높인다고 당장 바뀔 상황은 없었다. 현실을 애써 무시할 것도, 데면데면 바라볼 일도 아니었다. 강사와 청중 모두 너무나 멀어진 이 땅의 평화를 답답해 하고, 실낱이나마 통일에 대한 전망 부재를 아쉬워하였다. 특히 젊은 세대일수록 민족사의 중요한 이슈의 관심 밖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안타까웠다. 물론 중독 증세를 보여온 안보 세대의 몰역사적 행태는 더욱 볼썽 사납다.
몇 해 전 일이 떠올랐다. 미국에서 예수전도단의 일원으로 한국에 온 젊은이들이 김포 고촌교회 ‘크로스 갤러리’를 방문한 적이 있다. 하루 전에 그들을 안내하는 요청을 받았는데, 놀랍게도 그들의 더 큰 관심사는 한반도의 분단 현실이었다. 요즘 한국 젊은이들도 무관심한 주제인데, 미국의 크리스찬 젊은이들이 듣고 싶다니 호기심이 일었다. 내게 한 말씀을 부탁하였지만, 단지 말발로 해결될 일은 아닌 듯 하였다.
뾰족한 수를 궁리하다가 묘수가 생각났다. 이참에 외국인들과 한반도 지리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심 끝에 잎에 대형 한반도 지도(大韓全圖)를 준비하고, 개인별로 같은 지도를 복사해 나누어 주었다. 동행한 2세 젊은이가 능숙하게 통역하니 저으기 안심이 되었다. 먼저 한반도의 모양과 이웃 나라들에 대해 살펴보았다. 대한민국에 대한 지리적 상식을 테스트하며 뜸을 들였다.
모두 뜻밖의 한반도 지리 수업에 흥미를 보인다. 먼저 누구나 알만한 서울의 위치를 물었더니 대부분 능숙하게 자기 지도에 표기하였다. 다음으로 부산, 제주, 경주 등 유명 관광지의 위치 역시 어금지금 알아 맞췄다. 문제마다 짧은 관광 안내를 덧붙였다. 이젠 본격적으로 평양을 묻고, 낙동강과 인천의 의미와 백두산 위치를 살펴보았다. 이 땅에서 벌어진 분단과 전쟁을 요약하면서 모두 자신의 지도에서 휴전선을 그렸다.
교회는 방문한 젊은이들에게 피스 십자가를 선물하였다. 언젠가 연합감리교회(UMC) 총회에서 한반도평화 프리젠테이션을 할 때 선물했다는 그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춤추는 한반도 모양인데, 중심에 한반도 지도를 새긴 것이다. 울릉도와 독도까지 선명하게 보인다. 그리고 진심을 담아 평소 피스 십자가를 붙잡고 기도할 것을 부탁하였다. 짧은 이벤트는 성공작이었다.
한반도 지도를 공부하면서 함께 꿈을 꾸었다. 이 땅에 평화가 열리면 부산에서 서울과 평양을 거쳐 신의주까지 고속철도가 놓일 것이다. 이미 분단 57년만인 2007년 5월에 남과 북이 철로를 연결하고 첫 시범운행을 한 적도 있다. 서쪽 경의선은 문산 역에서 개성 역까지, 동쪽 동해선은 금강산 청년역에서 제진 역까지 철길이 열렸다. 장차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부산에서 출발해 베를린과 파리를 거쳐 런던까지 다다른 오리엔트 특급열차도 이어질 것이다.
지도를 들여다보면 현실 속 딴 세상이 보인다. 국토 지리를 넘어 역사 지리와 인문 지리 그리고 생태적 지리까지 담겨 있다. 지도 속 세상에 영감을 불어 넣으면 한반도 지형은 시차를 오가면서 춤을 춘다. 옛 삼국(三國)과 후(後)삼국은 분단 시대를 나누어 보냈으나, 역사의 눈으로 보면 다 우리 민족의 지체들이다. 고려와 조선, 심지어 일제강점기에도 이 땅은 하나의 백성이 살았다. 지금 한반도는 분단 78년째를 맞지만, 과연 그 아픔의 세월이 영원할까? 역사의 상상력으로 꿈을 꾸면 이 땅은 언젠가 다시 하나 될 것이 분명하다. 그마저 영감이 사라진다면 우리 기도는 얼마나 빈약할까?
바야흐로 한반도 상공은 긴 장마 끝에 폭염을 뿌리는 고기압으로 뒤덮고 있다. 불면의 밤도 깊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