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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1〉 의병에 의해 처단된 지방관 및 일본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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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고〕 출전은 『매천야록』에 근거를 두고, 『속음청사(續陰晴史)』도 참조했다. 전자는 관보에 기록된 것뿐이고 시기는 1895년 겨울부터1896년 봄에 걸치는 기간으로 되어 있으며, “관보에 누락된 것이 상당히 있었다”로 보아 지방으로부터의 소식불통 때문에 관보에 누락된 것도 상당히 있다고 생각된다.(*는 알렌 저, 櫻井義之 역, 『朝鮮近代外交史年表』에 의함) |
유생의병장들의 논리에 의하면 김홍집(金弘集)정부의 갑오개혁에 대결하는 것이 곧 반일투쟁이 된다. 왜냐하면 김홍집정부에 의하여 각 지방에 파견된 관찰사나 군수는 ‘흉적(凶賊)’ 즉 개화파의 지휘를 받고 일본의 법〔倭夷之律令〕을 받들고 있는 자이며, “춘추의 법〔春秋之法〕은 도적을 다스리자면 먼저 그 당여(黨與)를 다스리라”하였기 때문이다.
초기 단계의 의병 운동에서는 유생의병장들이 평민층에 호소하여 평민의병들을 조직하고 지도하였다. 황현(黃玹)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 의하면 평민의병 중에는 동비여당(東匪餘黨)이 절반을 차지한다고 하였다. 만약 그렇다면 갑오농민전쟁과 초기 의병운동간에는 지도이념의 단절성이 있는 반면에 농민군과 평민의병의 적지 않은 부분간에는 투쟁의 계속성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유생의병장들은 평민의병 중에서도 포군(砲軍)을 포섭하는 데 큰 관심을 가졌으며, 그 성공여부가 의병부대의 전투력을 좌우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와 같은 몇 가지 사례를 들기로 한다.
유인석을 총수(總帥)로 하여 충청북도 제천·단양·충주를 중심으로 활약한 의병부대는 그 문인 이춘영(李春永)·안승우(安承禹)에 의하여 경기도 지평(砥平)에서 조직되었다. 그 핵심적인 병력이 선봉장 김백선(金伯善 ; 혹은 百先)이 인솔하는 400명의 포군(砲軍)부대였다. 그에 대한 포섭과정은 다음과 같다.
그리하여 괴은(槐隱) 이춘영이 곧 밤에 가서 만났더니 김백선이 크게 기뻐하며 가만히 모든 포수(砲手)들에게 암통하였는데, 이는 이 고을에서 방해를 받을까 염려되어 원주의 안창(安倉)에서 모이기로 약속하였으므로 이같이 승우(承禹)를 부른 것이었다.
유인석 부대의 핵심은 이와같이 지평에서 조직되고 원주로 옮긴 다음 점차 제천을 거점으로 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사례는 1896년 2월에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 전투에서 용맹을 떨친 김하락(金河洛) 의병부대에서도 볼 수 있다.
나는〔金河洛〕 이종제(姨從弟)인 조성학(趙成學)과 동지 구연영(具然英)·김태원(金泰元)·신용희(申龍熙) 등 몇 사람과 더불어 16일(1895년 11월) 이른 아침에 한강을 건너 17일에 이천군에 들러 화포군도영장(火砲軍都領將) 방춘식(方春植)을 불러들여 포군명부를 가져다 놓고 포군 백여 명을 징발하여, 여러 대로 나누어 우선 의병을 모집하는 임무를 맡게 하였다. 그래서 구연영은 2개 대의 포군을 거느리고 양근(楊根)·지평 두 고을로 떠나고 조성학은 2개 대의 포군을 거느리고 광주로 떠났으며, 김태원은 안성으로 떠나고 신용희는 음죽(陰竹)으로 떠났다.
포군 1,800명을 핵심으로 하여 2만명으로 증가된 김하락(金河洛) 부대는 남한산성(南漢山城)에 웅거하며 2월 초에 정부군을 격파하였으나, 정부군에 관직으로 매수당한 좌군 김귀성(金貴星), 후군(後軍) 박준영(朴準英)이 정부군의 공격에 내응하는 배신행위를 취함으로써 와해되었다. 김하락은 이후 활동무대를 경상도로 옮겼다.
그런데 유인석 부대는 충청도와 경상도를 연결하는 요충인 조령(鳥嶺)을 제압한 다음 충주성의 일본 수비대를 공격하였는데, 이를 담당한 것이 300명의 김백선(金伯善) 부대였다. 김백선 부대는 충주성을 점령한 다음 충청도 관찰사 김규식(金奎軾)을 처단하고 북문으로 도망가는 일본군을 추격하여 수일간의 격전을 전개했다. 그러나 중군 안승우가 원병을 보내지 않아 제천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백선이 크게 노하여 안승우를 목베려 하였기 때문에 군법에 의하여 처형당했다. 『기려수필(騎驢隨筆)』의 저자 송상도(宋相燾)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 일이 있은 후 물정(物情)이 참담하고 군용(軍容)이 더욱 부진하여, 후에 승우는 참령 장기렴(張基濂) 부대와 제천읍에서 싸웠으나 패배하고 전사했다. 의려(義旅)는 드디어 좌절되고 여지가 없게 되었으며, 대장 인석은 국경을 넘어서 요동(遼東)으로 간 후에 의병을 해산하였다.
그러나 김백선에 대한 처단은 돌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평민의병장 김백선과 선비들과의 신분적 차이에 기인한 감정적 갈등이 축적된 결과라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김백선은 의기(義氣)가 남보다 뛰어 나서 비록 선창(先倡)한 공은 있으나 성질이 거칠고 버룻이 미치광이같아 농담이나 잘하는 사람은 좋아하고 단정하고 규칙적인 사람은 미워하므로, 입암(立庵) 주용규(朱庸奎)를 비롯하여 젊은 선비들이 그에게 상투를 잡아당기거나 뺨 맞는 욕을 당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이때에 민의식(閔義植)이 안에서 참소하고 여럿이 밖에서 훼방하니, 김백선이 이를 갈며 군무를 방해하고 장령(將令)을 거역하는 일이 끝이 없었으나, 유인석이 그 선창(先倡)한 공 때문에 너그럽게 용서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또 의병부대에 대한 백면서생(白面書生)들의 지도를 깔보고 그 지휘권을 장악하려다가 처단당한 동학의 두령 신처사(申處士)에 대한 처단 사건이 있다. 그가 목베이기 전에 고백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본시 동학의 두령인데 갑오년에 패한 뒤로 매양 다시 일어나려고 생각하다가, 모든 선비들이 군사를 일으켰다는 말을 듣고 생각하기를, 섬길만 하면 섬기고 그렇지 못하면 그 장수를 죽이고 그 군사를 빼앗으려 하였다. 와서 본 즉 모두 백면서생(白面書生)이라 하잘 것 없으므로, 꾀를 내기를 수개월 동안 머물다가 군사를 빼앗아 가려 하였다.
이처럼 유교적인 신분적 서계관념에 의한 군법으로서는 선비와 평민 간의 신분적인 갈등을 지양할 수 없고 핵심적 전투력이 되는 평민의병들의 자기 희생적인 전투정신을 발양시킬 수도 없을 것이다. 여기에 유생의병장들이 주동이 된 초기 의병운동의 내재적인 취약성이 있었다.
1896년 2월에 고종의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있은 후 김홍집정부가 무너지고 단발령이 철회되자 각지의 의병부대들은 해산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해산된 평민의병들은 토비(土匪)로 전환하여 경보(警報)가 연달았으므로 지방에 설병(設兵)하자는 논의가 일어났다. 즉 평민의병들은 부자의 재물을 빼앗아 이를 빈민에게 나누어 주는〔劫奪富民之財 散施貧民〕 활빈당(活貧黨)을 비롯한 여러 가지 형태의 ‘토비’로 전환하여 투쟁을 계속하였다.
(3) 재기 단계의 유생의병장과 평민의진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1905년 11월에 을사늑약을 강요해서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함과 동시에, 다음해 2월에는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여 내정에 대한 소위 ‘보호·감독’을 시작하였다.
초기 의병운동이 민비 시해와 단발령에 반대하여 일어났다면 이 시기부터는 박탈당한 국권을 회복하는 문제가 초점적인 애국적 과업으로 제기되었다. 『대한매일신보』(광무 10년 5월 30일)가 지적하듯이 ‘을미지거(乙未之擧;1895년의 의병)’는 국수보복(國讐報復)을 의(義)로 삼았으나, ‘금년지거(今年之擧;1906년의 의병)’는 국권회복을 명분으로 삼았다.
일본의 침략책동이 노골화하자 이미 1905년부터 일부 지방에서 의병운동이 발생하였으나, 재기 단계의 의병운동의 본격적인 시작은 1906년 5월의 전 참판 민종식(閔宗植)과 동 6월의 전 찬정(贊政) 최익현(崔益鉉)의 기병(起兵)이라 하겠다. 두 의병부대의 핵심적 전투력도 역시 포군이었다. 민종식 부대는 충청도 홍산(鴻山)에서 기병하여 서천(舒川)·감포(藍浦)·보령(保寧)·결성(結城)의 각 고을을 경과하여 5월 19일에 홍주성(洪州城)에 입성하였다. 그 병력은 총포(銃砲)를 가진 자 600명, 창을 가진 자 200명, 유회군(儒會軍)이 300여 명, 도합 천여 명으로 되어 있다.
홍주성 전투에서는 공주 진위대가 4시간에 걸친 화전(火戰)에서 패배하자, 일본 주차군사령관의 명령에 의하여 대대장 전중신조(田中新助:다나까 신스께) 소좌가 인솔하는 일본군경이 직접 의병탄압의 전면에 등장하였다. 5월 31일 밤 치열한 백병전 끝에 의병부대는 패배하여 민종식은 공주군 탑산리에서 일본의 헌병과 경찰에 의하여 체포되었다.
민종식 부대의 패배에 이어서 최익현은 그 문도들이 많은 전라도에서 기병하였다. 그는 1906년 5월 23일 태인의 무성서원(武成書院)에서 80여 명의 유생들을 모아 강회(講會)를 열고 기병소(起兵疏)를 발표하였다. 최익현의 기병소도 기본적으로는 위정척사사상이 밑받침이 되고 있으나, 을미년의 의병보다는 진일보하여 구체적으로 일본의 침략에 대결하는 내용이었다. 그는 기병의 목적을 “점차 북상하여 이등박문(伊藤博文:이또오 히로부미)과 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하세가와 요세미찌) 등의 제왜(諸倭) 및 각국 공사들을 불러 회동담판하고, 늑약(을사보호조약)을 불사르고 나라로 하여금 자주권을 회복케 하고 백성으로 하여금 역종(易種;일본화)의 화를 면케 하는 것이 신의 소원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최익현 부대는 태인(泰仁)에서 기병한 다음 정읍을 거쳐 순창으로 행진하면서, 군기·화승총·탄환 등을 거두고 의병을 모집하였다. 물론 모집의 중심을 포군에 두고 강종회(姜鍾會)를 화포장, 채영찬(蔡永贊)과 김갑술(金甲述)을 수포수(首砲手)에 임명하였다. 최익현 부대가 순창에 도착할 무렵 그 수는 900여 명에 달하였으나, 서생이 과반이고 총과 칼을 든 자는 300여 명에 불과하였다.
6월 11일 최익현 부대는 전주와 남원 진위대에 의하여 포위당하였다. 최익현은 ‘이한벌한(以韓伐韓)’은 차마 참을 수 없으니 진위대에게 물러 가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6월 13일 진위대의 선제공격으로 서기 정시해(鄭時海)가 전사하자 최익현은 의병들을 퇴거시키고 스스로 체포되었다. 임병찬(林炳瓚) 이하 13명이 스승의 뒤를 따랐다.
이상 거론한 바와 같이 충청도와 전라도의 의병운동은 홍주성과 순창성 전투를 고비로 고개를 숙이게 되었다. 당시 적아의 역량관계로 봐서 수성전(守城戰)에 의해서 무력적 저항을 지속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전술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종래의 의병투쟁과는 대조적인 새로운 형태의 전술이 평민의병장 신돌석에 의하여 창출된 데 대하여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경상도 영덕 사람인데 사납고 날쌔어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필마단창(匹馬單槍)으로 적을 무수히 죽이니 일병들이 온갖 계책을 써서 생포하려 하였으나 잡지 못하였다. 이리하여 많은 현상금을 붙였더니 그 부하의 속임수에 빠져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가 태어난 곳은 영덕이 아니라 영해(寧海)이다. 그가 장정 백여 명을 얻고 대장기를 세워 영릉의병장(寧陵義兵將)이 된 것은 1906년 4월 6일(음력 3월 13일)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1906년 12월 11일(음력 11월 18일)에 영덕의 눌곡(訥谷)에서 옛 부하였던 김상렬(金相烈) 형제에 의하여 독살당할 때까지 광범한 지역에서 유격전으로 신출귀몰의 활약을 전개하였다. 신돌석 부대는 그 기병 초기부터 영해와 그 부근지역에서 치열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고 추측된다. 『황성신문』(광무 10년 5월 14일)의 보도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4월30일 평해·울진·영해 등지에서 활동하던 수백명의 의병이 영양군 내로 진입하여, 순검(巡檢)·향장(鄕長)·서기 기타 관노를 결박하여 진중에 가두며, 군물고(軍物庫)를 파괴하고 총 22자루·탄환 20발·수철(水鐵) 1발(鉢)을 모두 탈취하였다. 또한 같은 군에서 도적방비차 사장(私藏)해 놓은 조총 25자루와 화약을 빼앗는 등 맹활약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군이나 일본군이 신돌석 부대를 포착할 수 없으리 만치 그 활동은 민첩하였다. 가령 일본군측의 문헌에 의하면, 1906년 6월에 경상북도 평해 부근에서 활약하던 신돌석 부대는 약 천명인데, 대구 및 원주 진위대 약 300명으로 토벌했으나 ‘다만 구축할 뿐’이라 하고 있다. 또 다음 해 9월에는 문경 부근에서 보병 제14연대장 국지(菊池:기구찌) 대좌가 인솔하는 제14연대 및 47연대의 대부분, 기병의 반소대(半小隊), 산포병 1소대, 공병(工兵) 약간명으로 이강년(李康䄵) 부대 약 600백 명, 신돌석 부대 약 300명을 토벌하였으나, “약간의 손상을 주고 일시적으로 이 지방은 조용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신돌석 부대는 한국군 진위대나 일본군과의 정면 충돌을 회피하면서, 광범한 지역에 걸쳐서 유격전술로 무장투쟁을 지속한 것이다. 이와 같은 전술은 적아간의 역량관계로 보아 불리하면 군중 속에 분산하고 적의 약한 고리에 역량을 집중할 수 있는 광범위한 군중적 기반없이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신돌석 부대의 활동범위는 경상도와 강원도가 접경하는 동해안의 영해를 중심으로 한 영덕·평해·울진은 물론 북쪽으로는 삼척·강릉·양양·간성·춘천·원주로부터 남쪽으로는 청송·영양·경주·안동에까지 이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생 의병장들은 신돌석 부대와의 연합전선 형성을 꺼리고 있다.
1907년 8월에 한국군이 해산된 후 의병운동은 해산군인을 흡수하면서 광범위한 지역에 확산되었다. 같은 해 12월에 경기도 양주(楊州)에 각도에서 약 만명의 의병들이 집결하여 이인영(李麟榮)을 13도 창의대장(十三道倡義大將), 허위(許蔿)를 군사장(軍師長)으로 하여 서울 진격을 계획하였다.
1909년 6월 20일 일본의 한국주차 헌병대본부(韓國駐剳憲兵隊本部)에서 진행된 「제3회 이인영문답조서」 에 의하면, 이인영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문―그때 인솔해 온 각 도의 지휘자는 누구인가.
답―전라도는 문태수(文泰洙), 본명은 문태현(文泰鉉)이라 한다. 충청도는 이강년(李康䄵), 강원도는 민긍호(閔肯鎬), 경상도는 신돌석(申乭石), 평안도는 방인관(方仁寬), 함경도는 정봉준(鄭鳳俊), 경상도는 허위(許蔿), 황해도는 권중희(權重熙)였다.
권중희는 그후에 나의 배하에 소속되었으므로 황해도는 의병장이 비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허위가 경기도·황해도를 책임지고 박정빈(朴正斌)을 황해도의 아장(亞將)으로 하였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결정된 13도 창의 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각 부서를 보면, 경상도의 교남창의대장(嶠南倡義大將)에 박정빈을 배치하고 신돌석은 제외되고 있다. 투쟁의 실적으로 보아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 전국연합 의병부대 개편과정에 있어서 주목되는 것은 천민이며 비호용장(飛虎勇將)으로 그 이름이 알려진 신돌석의 탈락이다. 당시 각도 책임 의병장들이 모두 양반·유생신분이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천민 출신의 신돌석의 존재는 양반·유생의병장들로 보아 서계적(序階的)인 봉건사회 질서를 문란하게 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당시 양반·유생의병장들의 사상적 한계성과 그 투쟁의 취약성을 그대로 드러내게 되었던 것이다
3) 군대해산 후 의병활동의 확대와 평민의진
(1) 군대해산 후의 평민의진
1907년 6월에는 헤이그 밀사사건이 있었고, 일제는 이를 구실삼아 7월에는 정미7조약을 강요하였다. 이 조약에서 이완용과 이등박문(伊藤博文)간에 교환된 비밀각서에 의하여 8월 1일부터 9월 3일에 걸쳐 한국군이 해산되었다. 해산군인의 많은 부분이 무기와 탄환을 탈취하여 의병대열에 합류함으로써, 의병운동은 전국적으로 번져 확대되었으며 전투력도 더욱 강화되었다.
동시에 일제와의 민족적 모순이 재기 단계보다도 더욱 분명해지고 광범위한 군중이 무장투쟁 대열에 참가하게 되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종래에는 의병탄압의 전면에 일제군경외에 한국군 진위대가 왕명을 받들어 등장하여, 최익현 부대의 경우에는 ‘이한벌한(以韓伐韓)’의 무력충돌을 회피하여 의병부대 자체가 와해된 실례가 있다. 물론 헌병보조원이나 일진회원도 있었으나 일제의 주구적 성격이 뚜렷이 드러나게 되었다.
군대해산 후 의병투쟁의 확산에 더욱 박차를 가한 것이 1908년 3월 미국 샌프란시스코 근처의 오클랜드역에서 장인환(張仁煥)·전명운(田明雲)의사가 스티븐스(D. W. Stevens)를 응징한 사건이다. 스티븐스는 1904년 8월의 제1차 한일협약에 의하여 한국정부 외교고문에 취임한 일제의 충복이다. 스티븐스를 사살한 두 의사의 애국적인 의거는 『대한매일신보』가 자세히 국내에 보도하여 각계 군중을 크게 격동시켰다. 일제 문헌은 그 파급영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3월 하순에 전 한국정부 고문 겸 통감부 촉탁이었던 미국인 스티븐스가 미국에서 배일주의(排日主義)의 한인에게 살해되었다. 그 소식이 한국내에 전해지자 이것이 동기가 되어서 형세가 일변하고 진세(賑勢)가 또다시 격증하여, 폭도봉기 이후 미증유의 치성(熾盛)을 이루어 그 소요구역이 확대되어서 6월 현재 전국의 의병장이 241명, 의병수가 3만 2천 4백 15명에 달하였다는 것이다.
이 시기의 특징은 의병장의 계층별 구성이 다양하게 되어 유생의병장 외에도 민긍호를 비롯한 해산군인 및 이미 언급한 신돌석을 비롯한 김수민(金秀敏)·홍범도(洪範圖) 등 유력한 평민의병장들이 등장하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의병운동의 핵심적인 전투력은 초기 및 재기 단계와 같이 평민의병이었다는 점에서는 공통되나, 의병장의 계층별 구성이 상당히 변화되었다는 것이다. 1908년 10월부터 1909년에 걸친 시기의 전국 의병장 430명에 대한 일제의 조사자료에 의하면, 그중 직업과 신분이 분명한 의병장 및 부장(部將)이 255명에 달한다. 255명 중에서 유생·양반이 63명(23%)으로 가장 많고, 농업이 49명(19%), 사병이 35명(14%), 무직 및 화적이 30명(12%), 그 외에 포군이 13명, 광부가 12명, 주사·서기가 9명, 장교가 7명, 군수·면장이 6명, 상인이 6명, 기타 25명이었다. 장교(7명)와 군수·면장(6명)을 유생·양반에 가산한다면 77명으로서 전체의 30%에 불과하고, 평민의병장의 비율은 70~75%에 달하는 새로운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다음으로 우리는 평민의병장의 두 개의 전형적인 활동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김수민(金秀敏)의 의병운동에 대하여 박은식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김수민은 경기도 장단(長端)사람이다. 그는 힘이 세고 사격을 잘하여 백발백중이었으며 자신이 탄약을 제조하고 사용하였다. 13도 총도독(十三道總都督)이 되어 의병 2천명을 거느리고 장단의 덕음동(德蔭洞)에 웅거하여 군량을 저축하고, 보부상들을 모집하여 정찰대로 삼아 원근에 배치하였다. 그리하여 적과 교전하여 누차 승리를 거두었으나, 적이 대부대를 이끌고 와서 공격하니 그의 군사는 무너지고 자신은 도망하여 버렸다. 이리하여 재거를 기도하려고 비밀리에 입경하여 인력거꾼 노룻을 하며 적정을 탐지하다가, 마침내 일본 밀정에게 체포되어 1908년 2월 17일에 죽음을 당하였다.
이를 더 보충하면, 그는 갑오농민전쟁에 가담하여 관헌으로부터 동학당으로 지목을 받아 왔다. 즉 그는 국내의 봉건통치에 반대하여 싸웠고 계속해서 일제의 침략을 반대해서 싸운 평민의병장이다. 스스로 탄약을 제조하고 사격에 능숙했으며 보부상으로 정찰대를 삼았다는 것은 그의 오랜 투쟁경험에서 체득한 지혜일 것이다. 김수민 부대의 활동에 대해서는 오히려 일본군의 기록이 더 상세하다.
전년(1907년) 경기도와 황해도의 경계에 있는 졸랑리(卒浪里) 부근에서 봉기한 적도의 수괴 김수민은 11월 17일 개성수비대에 의하여 격파되었다. 그후에 열은동(悅隱洞) 부근에 숨어서 교묘하게 양민을 선동하고 세력을 부식하는 데 노력하던 바 금년(1908년)에 들어와서부터 여당 약 3백명을 충원하게 되었고 20~30명의 소집단으로 각지를 횡행하면서 특히 4월 16일에는 구화장 헌병분견소(九化場憲兵分遣所)를 습격하여 무기와 탄약을 횡취한 것을 비롯하여 장단(長湍)·양합리(兩合里)·풍덕(豊德) 부근에 출몰하면서 약탈을 자행하였다. 그러므로 이의 토벌을 장단·구화장·양합리·개성·풍덕의 각 수비대 헌병 등의 협력하에 실시하여 간혹 그 소집단을 궤란시키고 약간의 손상을 주었으나 아직도 적염(賊熖)이 종식하지 않고 있다.
즉 약 3백명의 김수민 부대는 20~30명의 소부대로 각지에 분산 활동하는 유격전을 전개함으로써 일본 수비대와 헌병과의 정면충돌을 피하면서 완전히 그들을 농락하고 있다. 계속하여 김수민 부대는 강화도를 기습하여 일본군의 포위공격을 격파하면서 무사히 황해도로 빠져나오는 신출귀몰의 유격전을 전개하고 있다.
구화장 부근의 폭도 일부는 점차 남하하여 10월 상순에 강화도에 침입하여 재류일본인을 참살하고 해적적 약탈을 자행하였다. 이에 10월 상순 제13사단과 교체하여 수비의 임무를 맡은 제6사단장 서도(西島:니시시마) 중장은 이를 토벌하기 위하여 용산보병 제13연대로부터 소산(小山:고야마) 소위 이하 30명을 강화도에 파견하였다.
소산 토벌대는 10월 29일에 서울을 출발하여 30일 오전에 강화도 광성에 상륙하고 정족산 전등사에 웅거한 폭도 약 백명에 대한 공격을 일주야나 계속하였으나, 31일 밤에 강화부로 퇴각하여 증원군의 도착을 기다렸다. 제6사단장은 보병 제13연대로부터 도변(渡邊:와다나베) 중위 이하 20명 및 공병 15명을 강화도에 급파하였다. 이 부대는 11월 1일에 광성에 상륙하여 즉시 전등사를 공격하였으나 폭도는 이미 도망간 후였다. 그후에 소산부대는 장봉도(長蜂島) 방면에서, 도변부대는 헌병과 협력하여 별입산·이포(別立山伊浦) 방면을 수색하였으나 얻은 바가 없다.
김수민이 인력거꾼으로 변장하여 서울에 잠입한 것은 강화도 기습전투가 있었던 직후라고 생각되나, 그도 신돌석과 같이 일본군경과의 전투에서 쓰러진 것이 아니라 적에게 매수당한 배신자에 의하여 비극적인 최후를 마치고 말았다.
다음으로 함경도를 중심으로 활약한 평민의병장 홍범도에 대하여 보기로 하자. 그는 우리나라 민족독립운동사상에서 의병운동으로부터 독립군운동에로 발전하는 무장투쟁과정을 체험한 불굴의 투사이다. 그의 경력은 확실치 않으나 일반적으로 평안도 양덕(陽德) 사람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평양진위대에 입대한 후 탈출하여 대동금광(大同金鑛)의 광부가 되었다가 처가가 있는 함경도 삼수(三水)로 옮긴 것 같다.
이 곳에서 그는 산포수(山砲手)가 되어 수렵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체구가 장대하고 의협심이 강하여 포연대장(捕捐大將)에 추대되었다.註 031031 姜德相, 「義兵大將 洪範圖の生涯」, 『朝鮮獨立運動の群像』(東京:靑木書店, 1984).닫기 그가 갑산군(甲山郡)의 차도선(車道善), 북청군(北靑郡)의 태양욱(太陽郁)과 더불어 일진회원인 북청군 안산면장 주도익(朱道翼)을 처단하고 기병한 것은 1907년 11월이다. 그들이 기병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수렵생활자에게 결정적인 타격이 된 ‘총포화약류단속법(銃砲火藥類團束法)’이 같은 해 9월 3일에 공포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단속법이 공포된 후 11월 말까지 한국인이 소유한 무기 99,747점, 화약 및 탄약류 364,377근이 압수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압수당한 무기 가운데 95,981점(73.6%)이 화승총이나 칼·창류인 구식무기이고 3,766점(26.4%)이 신식 소총 및 대소포인데, 이 가운데서 87%를 차지하는 3,144점(약식총과 피스톨)이 함흥 관내에서 압수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상상할 수 있는 것은 홍범도 부대는 사격의 명수인 산포수들이 신식무기로 무장한 강력한 무장부대였다는 것이다. 일본군측의 기록은 차도선·홍범도 부대가 11월 31일 삼수에서 일본군의 포위 공격을 격파한 공방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11월) 상순 이래 혜산진(惠山鎭) 삼수(三水) 부근의 형세가 불온하여 18일에 함흥수비대로부터 상월(上月:우에쓰끼) 기병소위 이하 16기(騎)를 삼수 부근에 파견하였다. 이 부대는 26일에 삼수의 남쪽 중평장(仲坪場)에서 약간의 폭도와 조우하여 3명을 죽이고 삼수방면으로 격퇴하였다.31일 혜산진 및 갑산수비대와 협력하여 삼수를 포위 공격하였다. 차도선이 거느리는 폭도 약 4백명은 삼수의 성벽에 웅거하여 완강히 저항하여, 약 3시간에 걸쳐서 공격했으나 구축할 수 없었다. 탄약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야음을 이용하여 혜산진으로 퇴각하였다.
한편 일본군은 차도선에 대한 귀순공작에 성공하여 1908년 3월에 그는 귀순했으나 5월에는 갑산 헌병분견소를 탈출하여 의병투쟁에 복귀하였다. 그러나 홍범도는 자기에 대한 귀순공작을 노리던 북청수비대에 소속한 제3순사대장 임재덕(林在德)을 처단하여 완강한 저항을 계속하였다. 그가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톡에 망명한 사실은 정보가 구구하여 확실하지 않지만, 그는 여기서 권업회(勸業會) 혹은 노동회(勞動會) 등의 간부로서 활약하였다고 한다. 일본관헌은 밀정 엄인섭(嚴仁燮)을 이용하여 그를 체포하려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간도성(間島省)에서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을 창설하여 1920년 6월에는 왕청현 봉오동(旺淸縣鳳梧洞) 전투, 동년 10월에는 김좌진(金佐鎭)·최진동(崔振東) 부대와 협력하여 화룡현 청산리(和龍縣靑山里)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는데, 이것이 1920년대 독립전쟁의 개막를 고하는 효종(曉鐘)이 되었다는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이다.
(2) 호남지역 평민의진의 활약
1909년에 이르러 일본군은 의병운동이 가장 왕성하게 지속되고 있는 지역으로서 임진강 하우(臨津江河盂)지방(황해도 동남부 및 경기도 서북부 일대), 소백산(小白山)지방(강원도 충청북도 및 경상북도의 경계부근) 및 섬진강(蟾津江) 서쪽지방(전라북도 서남부 및 전라남도 일원)으로 지목하고 있었다. 일본군경은 순차적으로 이 지방에 탄압역량을 집중하게 되는데 그중 가장 선차적인 탄압작전이 1909년 9월 1일부터 10월 말까지 2개월에 걸쳐서 전라남북도에 대하여 실시된 ‘남한대토벌작전’이다.
특히 이 시기에는 의병세력이 거의 고정화되었으며, “그들의 행동은 시간을 경과함에 따라 교묘해져, 첩보 근무 및 경제법 등도 날이 갈수록 세련되고 그 행동도 더욱 민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때로는 우리 토벌대에 대하여 오히려 우롱하는 태도로 나오고 있다. 그 세력은 때로 소장(消長)이 있지만 아직도 경시할 수 없으니, 사람들은 언제 평정하게 될지 모른다”라고 할 정도로 일본군경에 부담을 주었다.
남한대토벌작전은 1909년 6월에 종래 전라도 지역의 의병 탄압을 담당해 온 일본군 보병 제12여단과 교체된 일본 본토로부터의 임시파견대(보병 2개 연대, 2,260명)와 제6사단 공병1소대에 헌병 및 경찰을 혼합하여 실시되었다. 9월 1일부터 2개월에 걸쳐서 실시한 이 작전에서 일본군은 전라북도 서남부로부터 전라남도 전역을 외곽으로부터 포위하고 교반적(攪拌的) 방법으로 수색·체포·살육을 반복함으로써, 의병과 일반주민들을 무차별로 탄압하였다. 그러면 교반적 방법이란 어떤 전술인가.
교반적 방법(攪拌的方法), 즉 토벌군을 세분하여 한정된 하나의 국지(局地) 안에서 교반적(攪拌的)인 수색을 실행하고 전후좌우로 수차에 걸쳐서 왕복하면서, 또 기병(奇兵)적 수단으로 폭도로 하여금 우리의 행동을 살필 여유가 없도록 한다. 동시에 해상에서는 수뢰정(水雷艇) 경비선(警備船) 및 소수부대로 연안도서 등으로 도망가는 폭도에 대비하는 등 포위망을 조밀하게 하여 결국 그들로 하여금 진퇴양난에 빠지도록 한다.
남한대토벌작전이 실시되기 직전에 전라남도에서 전개된 의병운동의 실태를 살펴보면 〈표 2〉와 같다. 다음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특히 전라남도에는 의병수가 백명 이상의 의병부대만 하더라도 전해산(全海山) 부대(500명), 심남일(沈南一) 부대(500명), 안규홍(安珪洪) 부대(450명), 임창모(林昌模) 부대(300명), 강무경(姜武景) 부대(150명), 황준성(黃俊性) 부대(130명), 김경구(金京久) 부대(120명), 황두일(黃杜一) 부대(100명), 강사문(姜士文:일명 判烈) 부대(100명), 장인초(張仁肖) 부대(100명), 추기엽(秋琪曄) 부대(100명) 등이며 기타 소부대들이 전 지역을 장악하고 있다.
〈표 2〉후기 호남 의병장들의 활약지와 병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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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은 강대한 의병부대들이 백주에 횡행하면서 약탈·살해·방화를 자행하고 있다고 매도하면서도, “오직 심남일·강무경·안규홍·임창모 등은 다소 그 양상이 달리 엄격하게 부하를 조심토록 하여 만행을 금지하고 민심을 얻어서, 그 세력을 지속하는 데 노력하면서 일본의 대한정책을 실패시키고 열국의 간섭을 이끌어 내려고 하고 있다”고 그들이 우국지사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동시에 일본군은 전라남도에서 1908년 4월 이후 재래의 화승총을 대부분 뇌관식으로 개조한 사실에 대하여 주목하고 있다.
그런데 전라남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의병장 중에 심남일과 임창모는 유생의병장이나 안규홍(빈농)과 강무경(필묵상)은 평민의병장이다.
강무경은 원래 전라북도 무장(茂長)사람인데, 심남일이 1907년 12월에 전라남도 함평군 신광면(咸平郡新光面)에서 기병하자 그의 전군장(前軍將)이 되어, 나주(羅州)·남평(南平)·능주(綾州)·강진(康津)·영암(靈岩)·장흥(長興)·보성(寶城) 등지를 활동무대로 하여 맹렬한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는 1909년 10월 9일에 능주의 풍치(風峙)에서 체포될 때까지 심남일과 형제의 의(義)를 맺고 생사를 같이했다. 「의병장 심남일전(義兵將沈南一傳)」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1908년 4월 15일 장흥 유치(長興有峙)에 이르러 왜의 상등병 3명을 쏘아 죽였다. 이로부터 연전연승하여 무릇 적과 어울려 싸운 것이 전후 대소를 합해서 15회 가량인데, 모두 왜놈의 혼을 날렸고 잡아 죽인 수효도 수백 명이었다…….
대개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을 같이하고 사생을 초월하여 여러 번 공을 세운 자는 선봉장 강무경과 모사 권택(權澤), 염원숙(廉元淑)이요, 패전해서 순절한 자는 후군장 최일평(崔一平) 등 10여 명이었다.
안규홍은 전라남도 보성사람으로서 그는 1908년 2월에 보성 동소산(桐巢山) 아래서 의병의 깃대를 세웠다. 그러나 유생의병장들이 그와의 공동작전을 꺼리기 때문에 의병장 이하 부대전원이 평민으로 편성된 것 같다.
이리하여 이듬해 1908년 2월에 드디어 크게 거사하여 약간명의 사람을 모았다. 그러나 선비란 자들은 그를 무식하고 물망(物望)이 없다 하여 함께 일을 계획하기를 부끄러워하였다. 그래서 그에게 따르는 자는 구름이 모이고 까마귀 떼가 물려들 듯 했지만 그들이 가진 물건은 모두 호미·괭이·나무작대기 등에 불과하니, 이는 이른바 굶은 범에게 먹이를 주는 것밖에 되지 못하였다.
보는 바와 같이 안규홍 부대는 보잘것 없는 무기를 들고 광양군 백운산을 중심으로 하여 보성·순천·홍양·여수·돌산·광양·곡성·남원·구례·장흥·순창 등 광범한 지역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전과는 1908년 2월에 보성군 파청(巴靑)에서 일본군 보성토벌대를 격파한 파청대첩, 동년 8월 24일에 진산(眞山)에서 일본 수비대 및 기병을 격파한 진산대첩, 1909년 3월 25일에 일본의 원봉(圓峰)기병주둔소를 야습한 원봉산대첩이다. 그러나 그는 중과부적으로 의병을 해산하여 귀가 중 주구의 밀고로 1909년 9월 25일 체포되었다. 이상은 ‘남한대토벌작전’ 당시 전라남도에서 활동한 평민의병장이다.
이와 함께 앞의 일본군 조사표에 전라북도 남포(藍浦) 부근에서 70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활약했다는 박도경(朴道京)도 평민의병장의 한 사람이다. 박도경은 1907년 7월 조약이 있은 후 전라남도 장성에서 기병한 기삼연(奇參衍) 부대의 종사(從事)로서 종군하였다. 기삼연이 중군장에 등용한 평민의병장에는 그외에도 김봉규(金奉奎)가 있었다. 그는 가협산(加峽山)에서 궁벽하게 살아서 아는 이도 적은 빈농이었다.
기삼연은 1895년에도 기병을 계획하다가 전주진위대에 체포된 바 있다. 고종의 아관파천 후 국왕의 선유에 의하여 각지의 유생의병장들이 의병을 해산하자, 그는 크게 노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다.
선비와는 함께 일을 할 수 없구나. 장수가 밖에 있을 적에는 임금의 명령도 받지 아니하는 수가 있거늘, 하물며 강한 적의 협박을 받는 것이요, 우리 임금의 본심이 아님에야. 이 군사가 한 번 피하면 우리 무리는 모두 왜놈이 될 뿐이다.
기삼연이 1907년에 의병부대를 또다시 조직할 때, 그를 대장으로 하는 호남창의맹소(湖南倡義盟所)에 김봉규나 박도경과 같은 평민의병장을 등용한 데는 선비와는 같이 일할 수 없다는 쓰라린 경험이 밑받침이 되었을 것이다. 기삼연이 김봉규에게 군무의 중책을 맡기자 그는 이를 사양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가문이 높지 않으므로 백성이 믿고 따르지 않을 것이요. 모든 일은 보좌하는데 있어서는 나의 힘이 미치는 것이라면, 비록 죽어도 사양하지 않겠나이다.
그후 김봉규는 기삼연의 손발이 되어 보좌하였다. 1908년 2월에 기삼연이 체포되자 의병들은 흩어지기 시작하였다. 김봉규는 스스로 대장이 되고 박도경에게는 포사장(砲士將)의 직책을 맡겨 서로 협력하여 의병투쟁을 계속하였다. 하여간 ‘남한대토벌작전’의 2개월간에 심남일·안규홍·임창모·강무경·김경구 이하 130명의 의병장과 4,138명의 의병들이 전사 체포되거나 자수하여, 전라남북도의 의병운동은 산발적인 소조(小組)활동으로 넘어갔다. 전국적인 시야에서 본다면, 1907년 후반기부터 일대 고조기를 맞이한 의병운동은 ‘남한대토벌작전’을 고비로 해서 퇴조기로 전환하게 되었다.
전라남북도의 의병운동이 진압되자 곡창지대인 이 지역에로의 침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일본 거류민들이 물밀듯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즉
이번 토벌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미 농업경영자 및 상인들이 연이어 내륙에 진입하여 재빠르게 사업에 착수하는 자도 있게 되었다. 이리하여 비로소 착실하게 일본인의 식산흥업이 결실을 보게 되고 일본인의 대한사업의 발흥을 촉진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민을 개발유도하는 데도 커다란 효과를 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