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는 온조왕의 건국 이후 2세기까지 '다루왕' '기루왕' '개루왕' 등
이른바 '루' 자가 달린 왕들이 지배한다.
-그러나 초고왕부터는 이런 다른 계통의 이름이 등장한다.
바로 이런 기록을 내용적으로 분석해서 '조약돌'은 이 기사를 쓰고 있다.
(배달국 허성정 주해)
1. 온조왕 : BC 9년 ~ AD 28년(재위기간 37년) - 창업자
2. 전 다루왕 : 28년 ~ 54년(재위기간 37년) - 독립국가의 군주
3. 후 다루왕 : 54년 ~ 77년(재위기간 24년) - 친 백제파인 엄지
4. 전 기루왕 : 77년 ~ 97년(재위기간 21년) - 친 백제파인 엄지
5. 후 기루왕 : 97년 ~ 128년(재위기간 32년) - 다시 독립함
6. 전 개루왕 : 128년 ~ 131년(재위기간 3년)
7. 후 개루왕 : 131년 ~ 166년(재위기간 36년) - 명목뿐인 왕
= 175 ÷ 7명 = 평균 25년(합리적임)
*결론 : 십제는 나라를 세운 지 7대 175년 만에 독립을 잃고 백제에 정복당했다
(일도안사님이 [삼한사의 재조명]에 실으신 '한성백제의 계보'와는 약간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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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다루왕과 후기루왕>
*김상의 [삼한사의 재조명]을 읽다가,
미흡한 부분이 있어서 제 나름대로 가설을 세워 봤습니다(글쓴이 : 조약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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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와 십제는 서기 28년(온조왕이 세상을 떠난 해) 이후에도 대립한 듯하다.『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백제(십제)’가 ‘신라(서나벌)’와 싸웠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첫 번째 전투가 서기 29년이 아닌 서기 64년에 일어나기 때문이다.
만약 두 나라가 화해했다면, 백제가 용성국과 가야를 동남쪽으로 밀어낼 때 십제도 도왔을 텐데,「백제본기」다루왕 조에는 ‘백제군’이 서기 42년(이 해에 가야족이 가지산에서 김해로 내려와 가야 연방을 세움)에 가야 군사와 싸웠다는 기사나, 서기 56년에 ‘신라군(서나벌 군사나 용성국 군사)’과 싸웠다는 기사가 안 나오는 것이다.
이 사실은 십제가 서기 64년 이전까지는 독립을 유지했고, 온조왕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백제와 여전히 사이가 안 좋았음을 암시한다. 과연 이 가설이 사실인지를 검증해보자.
우리는 우선「백제본기」를 펼치고 서기 29년부터 서기 63년까지의 기사를 살펴봐야 한다. 그러면 곧 어느 부분이 자연스럽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 온조왕 : 서기전 18년(실제로는 서기전 9년) ~ 서기 28년 (재위기간 46년)
- 다루왕 : 서기 28년 ~ 서기 77년(재위기간 50년)
“왕위상속에서 재위기간이 가장 긴 것이 부자상속만으로 이루어진 경우인데 이 경우도 30여년 정도(일도안사님)”이기 때문이다.
만약 기록대로 다루왕이 온조왕의 맏아들이면 그는 서기 10년/온조왕 28년에 태자가 되었으므로 온조왕이 세상을 떠났을 때 46세였을 것이다. 온조왕이 졸본부여를 빠져나올 때 20세였다고 가정하고 계산하면, 다루는 서기전 18년에 태어났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온조왕 28년(서기10년)’에 태자가 되었으므로, 서기 10년에 그의 나이는 대략 28세였을 가능성이 크다. 끝으로 46세라는 나이는 온조왕이 다루를 태자로 삼은 지 만 18년 만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28세에다 18년을 더해서 계산한 것임을 밝힌다,
기껏해야 2~30년만 다스릴 수 있었을 그가 어떻게 50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왕위에 머무를 수 있었을까?
게다가 온조왕은 “46년 재위 중 왕의 마지막 출현이 43년 기사”지만, 다루왕은 “50년 재위 중 왕의 마지막 출현이 37년 기사”라서 그가 실제로 세상을 떠난 해가 서기 54년(다루왕37년)이 아니냐는 의심을 불러일으킨다(만약 그의 재위기간이 50년이 아닌 37년이라면, 그는 46세에 즉위해 82세에 세상을 떠난 셈이므로 재위기간과 수명이 보다 현실적인 수치가 된다).
「백제본기」에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즉위한 왕(82세에 세상을 떠났을 가능성이 많은 '前다루왕'과 구분하기 위해 ‘後 다루왕’으로 부르겠다)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만약 십제의 왕이 전 다루왕의 태자였고, 그가 독립국가의 군주였다면, 굳이 이름을 숨길 필요가 없다).
십제가 서나벌과 처음 싸운 해가 서기 64년이므로(「백제본기」에 따르면 다루왕은 서기 77년에 세상을 떠남), 십제는 서기 54년에 백제의 담로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다루왕 37년 조에 “용 두 마리가 나타났다”거나 “용이 나타났다”는 기사가 안 실린 점으로 미루어볼 때, 전 다루왕은 자연사한 듯하다. 다루왕의 아들이나 손자는 그가 세상을 떠난 뒤 백제와 화해하고 백제의 담로주가 되었을 것이다).
후 다루왕이 이런 선택을 한 까닭은 서기 37년 고구려 대무신왕이 낙랑국을 정복한 뒤부터 고구려와 십제가 직접 국경을 맞댔고, 백제와의 갈등은 여전히 풀리지 않아 십제가 위태로웠기 때문이다. 그는 어느 한 나라와 손을 잡아 부담을 덜어야 했는데, 고구려는 자신들을 쫓아낸 해(解)씨 일족이 다스리고 있고(고구려는 서기 2세기에 지배층이 바뀜), 백제는 십제와 반(反) 말갈[:고구려] 감정을 나눠 갖고 있었으므로 고구려보다는 백제의 편을 드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백제도 마한의 잔존세력이나 마한의 옛 거수국(제후국)들과 싸우는 마당에 십제까지 적으로 돌리고 싶지는 않았고, 고구려의 남침을 막으려면 십제를 자기 편으로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후 다루왕의 제의(화의)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후 후 다루왕은 더 이상 남쪽으로부터의 위협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으며, 백제 진왕은 서나벌군과 싸울 때 십제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서기 77년 다루왕이 죽은 뒤 즉위한 전 기루왕(후 다루왕의 아들인 듯하다)은 서기 85년(기루왕9년) 선왕처럼 서나벌(신라)을 치면서 백제를 적극적으로 도왔으나, 서기 97년에 세상을 떠났고, 그가 죽은 뒤 두 왕자가 한강변에서 싸웠다. 이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기사는「백제본기」기루왕 21년 조에는 “여름 4월, 한강漢江에 용 두 마리가 나타났다.”는 기사에서 알 수 있다. 용은 왕이나 왕족을 가리킬 때에도 쓰는 말이므로 이 기사는 왕족들의 왕권 다툼을 설명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一龍이면 전왕으로부터 왕권을 직접 빼앗은 것이고, 二龍이면 2명의 왕자가 대결한 것이다. 따라서 기루왕 21년에 벌어진 사건은 기루왕이 ‘전기루왕’과 싸운 것이 아니라, ‘전기루왕’이 죽자 그의 후계를 놓고 왕자들 사이에 실력대결이 벌어진 것이다[일도안사님]”. 이긴 자가 왕위에 오른 다음부터는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후 기루왕 대에는 십제가 백제의 뜻과는 반대로 서나벌을 돕기 시작하는 것이다.
- 기루 29년(서기 105년) :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 → 이것은 후기루왕이 서나벌에 사신을 보내 전기루왕의 서나벌 침공을 사과하고 서나벌과 십제가 동맹을 맺어 백제를 견제하자고 제안했을 것이다.
- 기루 32년(서기 108년) : 말갈이 약탈 → 고구려(말갈)가 십제를 공격하고 있다. 온조왕대와 마찬가지로 십제의 주적은 고구려다. 후 기루왕은 백제에서 빠져나오는 대신 고구려군의 공격을 함께 막을 상대를 구해야 했을 것이다. 이제 4년 전 왜 서나벌에 사신을 보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 기루 37년(서기 113년) : 신라에 친선사신 보냄 → 위와 같다. 백제에서 빠져나온 나머지 고구려군에게 당해도 백제의 도움을 바랄 수 없게 된 십제가 백제와 대립하는 서나벌에 동맹을 맺자는 제안을 하고 있는 것이다.
- 기루 49년(서기 125년) : 말갈(고구려)의 공격을 받은 신라를 구원 → 십제와 말갈(고구려)은 서기 114년 고구려 태조왕이 고구려의 “남해(南海)”로 “순수”한 뒤부터는 싸우지 않는다. 이는 고구려에 고(高)씨라는 새로운 왕족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고구려에 새로운 왕통이 등장하여 과거와 단절하였으므로, 건국기에 발생한 두 나라 사이의 해묵은 감정을 털어 버리고 후한의 공격에 대하여 서로 협력하기로 한 것으로 보인다(일도안사님)”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서나벌과 맺은 동맹이 흔들리지는 않았으므로, 후 기루왕은 서나벌이 십제에게 구조요청을 했을 때 군대를 보냈던 것이다. 말갈군(고구려군)이 십제군이 온다는 소식만 듣고 물러난 것도, 애써 화해한 십제와 싸워서 좋을 게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십제는 적어도 이때까지는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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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후 기루왕이 죽은 뒤 왕위를 이어받은 개루왕인데, 그는 재위기간이 39년이라 얼핏 보면 합리적으로 왕위를 이어받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재위 기간 중 왕이 마지막으로 출현한 기사가 4년 기사고, 나머지 35년이 공백이라는 데에 문제가 있다.
만약 그가 39년 동안 다스렸다면 39년 중에서 못해도 30년이나 35년까지는 기사가 나와야 하는데, 무려 35년이라는 긴 세월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이 사실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4년 동안 다스린 사람이 후 기루왕의 아들(이하 ‘전 개루왕’으로 부름)이고, 나머지 35년을 다스린 사람은 개루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인물(김상의 설을 따라, 이 인물을 ‘후 개루왕’이라고 부르겠음)이라고 보는 것뿐이다.
개루왕 대에는「백제본기」기사의 양이 선대(先代)의 3분의 1 정도로 줄어들고 후개루왕의 행적은 아예 나오지도 않는 점으로 미루어볼 때, 십제는 이 때 나라의 힘이 약해질 대로 약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아니면 후 개루왕이 백제의 담로주가 되었기 때문에, 삼한사를 뺄 때 그의 기록도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는 이 가능성이 보다 합리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십제가 이렇게 된 까닭은 지배층이 ‘백제의 담로가 되느냐, 아니면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서 독립을 유지하느냐’를 놓고 치열하게 대립했기 때문이며(전 다루왕이나 전 기루왕이 죽은 뒤 이 문제로 권력투쟁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크다), 왕이 바뀔 때마다 ‘친 백제’와 ‘반 백제’를 오가던 십제의 지배층은 자신들의 힘을 정변을 일으키는 데에만 써서, 나라의 힘을 키울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반대로 백제는 (전북 내륙지대를 뺀)전라도와 강원도를 점령하고 진한인이나 예족을 받아들이면서 힘을 키웠고, 그 결과 강대국이 되었다(“한예강성”). 결국 십제는 서기 2세기 중반인 “후개루왕 시대에 무너져 초고왕 때부터 한(韓:삼한백제 - 옮긴이)의 마한에 편입(김상)”된다.
그래도 후개루왕 대에는 허울 뿐인 해씨족 왕이 남아있었지만, 그가 죽은 뒤에는 백제 진왕이 임명한 전혀 다른 사람(초고왕)이 와서 십제를 다스리게 되며, 십제는 이때부터 독립을 완전히 상실하고 삼한백제의 담로가 된다(『양서』「백제전」에는 백제가 “삼한”의 여러 ‘나라(國)’ 가운데 하나였다는 구절이 나오며,『주서(周書)』「백제전」에도 “백제의 선조는 모두 마한에 속했으며”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 두 구절은 모두 삼한백제가 십제를 점령해 자신의 담로로 만든 사실을 설명하는 것이다).
초고왕이 개루왕의 아들이 아니라고 여기는 까닭은, “삼국사기는 초고왕을 간단히 ‘개루왕의 아들이다.’라고만 하였지, 몇 번째 아들이라던지, 또는 이전 3루왕에서 보이는 외모나 성격이 어떠하다든지 하는 서술이 전혀 없”고 “루(婁)자 돌림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호로 시작”하며, 그가 즉위한 다음부터 십제의 “대 신라정책이 강경책으로 바뀌어 신라를 공격”하기 때문이다. “백제본기는 초고왕의 출신을 정통성을 위하여 이전 왕통에 연결시킨 것”이다.
만약 십제가 서나벌과 사이가 나빠져서 강경해졌다면 못해도 그렇게 된 사연을 소개하거나, 서나벌을 비난하는 십제 왕의 성명이라도 실려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갑자기’ 정책이 바뀌어 서나벌을 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기사를 십제가 삼한백제의 일부가 된 뒤 백제가 시키는 대로 서나벌을 친 사실을 설명한 것이라고 풀이한다.
정리하자면 십제는 - 서기 236년 삼한백제가 “건국 이래 뜸했던 온조백제와의 냉랭했던 관계를 청산하기 위해”, “서해의 큰 섬”인 강화도와 “부산(釜山)”에서 정상회담을 열어 “서로의 구원(舊怨)을 풀고 협력을 기약”해 -서기 260년에 “백제 연합”을 “결성”했다는 김성호 박사의 말과는 달리,
서기전 9년부터 서기 9년까지는 마한의 거수국(제후국)이었고, 서기 9년부터 서기 54년까지는 독립을 유지했다가, 서기 54년에는 백제의 담로가 되었고, 서기 97년부터는 다시 독립했으며, 서기 131년에는 백제의 속국이 되어 허울뿐인 왕실을 유지하다가 서기 166년에는 그마저도 사라져 독립을 잃고 담로가 된 것이다.
초고왕 이후 십제를 다스린 구수왕은 말갈의 위협을 무릅쓰고 군사를 보내 백제의 서나벌 공격에 합세하여(이는 십제가 서나벌 공격에 동원된 것이다), 자신이 백제에 철저히 얽매여 있으며 독립국가의 군주가 아님을 알리고 있다.
백제에 정복당한 다른 나라들도 십제와 비슷한 처지가 되었을 것이며, 백제는 이런 식으로 담로를 늘려 “한(韓)”이라는 연방국가를 만들었을 것이다.
첫댓글 순수하게 연대를 따져야지... 담로고 지랄이고.. 韓이 삼한백제고 나발이 다 필요가 없다. 그렇게 해서는 비밀을 못 알아 낸다. 자꾸 말을 만들어 붙이지 말아야 해요. 복잡하기만 해요. 나이를 따지고... 재위 기간과 사건의 연관성만 따져야 합니다.
담로에다 십제에다...서나벌군에다..괄호 쳐 놧질 않나..고구려(말갈)가 말갈이라고 표현 해놓고..별의 별 설을 다 갖고 와서 짭뽕질 해 놨어요. 이게 뭐냐? 이런 놈들은 조인트를 까 줘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