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시 42:1-5)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금요일 오후, 날씨가 너무 좋아서, 무심천을 차로 한 바퀴 돌았습니다.
무심천 거리에는 아름다운 벚꽃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왕 내친 김에, 상당산성 벚꽃은 피었을까 싶어, 산성에 올라갔으나, 사람도 없거니와, 벚꽃을 하나도 보지 못하고, 실망을 하고서 그냥 내려왔습니다.
어느 한 쪽은 아름다운 꽃과 많은 사람들로 인하여, 웃음과 행복이 가득한 반면에, 어느 한 쪽은 썰렁함과 실망만이 가득했습니다.
사람들의 옷차림을 보면, 어떤 사람은 두꺼운 옷을 입고 있는 사람도 있거니와, 또 어떤 사람은 벌써 반 팔을 입고 다니는 사람도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침략자요 살인자인 러시아의 푸틴과 전쟁 중인데, 어느 나라에서는 나라 문을 활짝 열어놓고, 구경 올 사람들을 맞이하고자 하는 나라도 있음을 보게 됩니다.
같은 시대를 살고 있지만, 모든 사람들이 같은 마음일 리가 없습니다.
똑같은 환경일지라도,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들을 다 다를 것입니다.
무심천에 벚꽃이 만발하였지만, 거기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문명이 발달하고, 인간의 이성이 높아지면, 세상은 저절로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살기 좋은 세상에서, 소외당하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없을 것이라고 여기고 싶지만, 다른 사람들의 현실을 조금만 들여다 보면, 아직도 소외당하고, 고통당하는 이들이 많다고 하는 것을 쉽게 알 수가 있습니다.
나라와 나라 간에도, 유엔이 있고, 나토가 있고, 평화와 인권을 위한 수많은 국제조약과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수많은 국제기구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일어나고, 전쟁의 한복판에서, 죽음과 공포 속에서, 고통 당하며, 아파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일어난 일들이 우리에게는 전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지만, 우리나라도 동족상잔의 비극이 아직도 가시지 않고 있고, 아직도, 전쟁이 종식되지 않은 채, 휴전중이라고 하는 사실을 마주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북한이, 공해상으로 미사일을 발사하고 있지만, 방향을 바꾸어, 남쪽을 향하여, 발사한다고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핵시험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그럴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우리의 생각과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기에, 제발 이 땅에서, 다시는 전쟁의 아픔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여러분! 인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도 전쟁 이야기가 많이 등장합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전쟁에서 이길 때도 있지만, 질 때도 있음을 보게 됩니다. 사울, 다윗,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통일 이스라엘이 솔로몬이 죽고 난 후, 북쪽의 열 지파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쪼개져 나가고, 남쪽의 두 지파만이 “유다”로 남게 됩니다.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는 왕족간에 결혼을 함으로, 사이가 좋을 때도 있지만, 영토를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하여, 계속 전쟁을 하게 됩니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하여, 주변에 있는 다른 나라와 손을 잡기도 하고, 다른 나라의 힘을 빌려, 상대방을 침략하기도 합니다.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멸망을 당했습니다. 앗수르의 수도가 니느웨이기에, 그곳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사명을 받은 요나가 니느웨에 가지 않고, 다른 나라로 가려고 했던 것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앗수르에게 멸망당한 북이스라엘 사람들도 포로가 되어 많이 끌려갔습니다.
앗수르는 북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다른 곳으로 강제이주시키고, 사마리아에는 이방 민족들을 강제로 이주시켰습니다. 앗수르는 사마리아에 남아 있는 북이스라엘 사람들과 사마리아로 와서 정착하게 된 이방 민족들을 강제로 결혼시킴으로 인하여, 혼혈민족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사마리아에 살게 된 사람들을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하기도 그렇고, 이방 사람이라고 하기도 그렇고, 애매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훗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사람으로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무시하고, 멸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을 당한 후, 100년 정도 후, 남유다는 앗수르를 멸망시키고, 세계를 제패하게 된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을 당했습니다. 그리하여, 왕을 비롯하여, 남유다 백성들은 강제로,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남유다 백성들은 바벨론이 바사(페르시아)에게 멸망하기까지, 70년 동안,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동안, 바벨론에 의하여, 완전히 파괴된 예루살렘은 사람이 전혀 살지 않는 황폐한 도시가 되어 버렸습니다.
여러분! 러시아의 침략으로 인하여, 우크라이나의 많은 사람들이 피난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떠나지 않고, 남아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죽임을 당한 사람들도 많이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도시는 파괴되고, 사람들은 떠나거나, 죽임을 당하고, 도시로서의 기능을 전혀 할 수 없는 도시들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파괴된 모든 것들이 다시 제기능을 회복하기에는 많은 세월이 필요할 것입니다.
전쟁이 종식되고, 떠났던 이들이 자기의 집으로 되돌아와, 전과 같은 일상생활을 한다고 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번 동해안 산불로 인하여, 집이 불타고, 삶의 자리가 파괴된 이들이, 다시 집을 마련하고, 불타버린 밭에 씨를 뿌리고, 거두려고 한다면, 많은 수고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여러분! 불타버린 집과 삶의 자리를 보고, 망연자실, 주저앉아, 절망의 한숨을 내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참혹한 전쟁으로 인하여, 사랑하는 사람들은 뿔뿔히 흩어지고, 죽었는지, 다쳤는지, 끌려갔는지, 생사 확인도 하기 어렵고, 집은 파괴되어 마땅히 돌아갈 곳도 없고, 돌아간다고 한들, 먹고 사는 일이 막막한 사람들은 절망의 한숨을 내뱉게 될 것입니다.
바벨론으로 끌려온 사람들, 사랑하는 가족들의 죽임당함을 보기도 했을 것이고, 정든 집이 불에 타는 것을 보기도 했을 것이고, 자신들을 지켜줄 왕마저도 두 눈이 뽑히고, 온 몸이 쇠사슬에 묶인 채, 함께 끌려오는 것을 보기도 했을 것입니다.
조국 이스라엘은 너무나 멀고, 꿈에 그리던 예루살렘 성전은 철저하게 파괴되어 버렸고, 자신들을 지켜줄 왕마저도 노예로 끌려왔기에, 자신들이 살았던 이스라엘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소망은 사라진 지 오래였습니다.
여러분! 다윗은 블레셋의 골리앗을 이김으로, 이스라엘의 영웅으로 등장했지만, 그 일 때문에, 사울 왕으로부터 시기와 미움을 받게 되어, 도망자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사울의 추격과 칼날 아래에, 죽음의 위기를 넘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지만, 왕궁 안에서의 삶이 순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조선의 3대 왕이었던 이방원이 왕이 되기 까지의 과정과 왕이 된 후의 모습을 보면, 왕의 자리를 굳건하게 지키고, 왕노릇 제대로 하려고 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왕이 된 다윗에게 가장 큰 위기는 아들 압살롬의 반역이었습니다.
유비 옆의 제갈공명처럼, 다윗을 도왔던 뛰어난 책사인 아히도벨마저이 아들 압살롬에게 붙어,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반드시 다윗을 죽여야 합니다.”
로마의 황제 시이저가 블루투스에게 암살 당할 때, 시이저가 블루투스를 보고 “블루투스 너마저도!”라고 말했던 것처럼, 다윗은 아히도벨마저도 자신을 배반하고, 아들 압살롬 편에 붙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여호와여 원하옵건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아히도벨의 모략이라고 한다면, 다윗은 자기에게 더이상 소망이 없다고 하는 것을 알았기에,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던 것입니다.
아들 압살롬이 반역했다고 하는 소리를 들은 다윗은 예루살렘 성을 버리고, 삼십 육계 줄행랑을 쳤습니다. 얼마나 다급했는지, 신발도 신지 못하고, 맨발로, 도망을 쳐야만 했습니다. 도망치는 다윗을 보고, 함께 따라오고자 하는 사람도 있기는 했지만, 다급하게 도망치는 다윗을 보고, 욕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참기 힘든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산불로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사람들, 참혹한 전쟁으로 삶의 기반이 파괴되어 버린 우크라이나 사람들, 포로로 끌려온 유다 사람들, 피난길에 오른 다윗들은 언제 돌아갈 수 있을까요?
10년, 20년, 50년, 세월은 자꾸만 흘러가는데, 언제, 이스라엘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정든 그리움 속에서, 나이 든 사람들은 하나둘 세상을 떠나가는데, 할아버지에게서, 아버지에게서,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에 대한 이야기는 듣기는 들었지만, 한 번도 가 본적이 없는 그 낯선 땅에 대한 그리움을 이어받아 살아가고 있는데, 언제쯤, 조상들이 살았던 그 땅, 가나안 땅, 이스라엘 땅, 예루살렘으로 가 볼 수 있을까요?
수많은 역경을 뚫고, 마침내 승리하여,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예루살렘 성을 쌓고, 궁을 만들어, 그 속에서, 왕으로서 살았는데,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도망자가 되어버린 다윗은 언제쯤 다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까요?
탈레반이 집권함으로 인하여, 생명의 위협을 느껴, 우리나라에 온 아프가니스탄 사람들, 그들은 언제쯤 자유롭게 자신의 조국의 땅을 밟아볼 수 있을까요?
우리나라 대한민국에서 계속 살고 싶은 사람도 있겠지만, 하루라도 빨리 자신이 살았던 조국 아프가니스탄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언제쯤, 자유롭게, 마음대로, 오고 갈 수 있을까요?
러시아의 침략으로 인하여, 자신이 살던 집과 마을 떠나, 타국으로 피난길에 오른 사람들, 피난처에서, 영원히 살고 싶은 사람들은 없을 것입니다. 하루라도 빨리 이 참혹한 전쟁이 종식되고, 집으로, 마을로, 고국으로 되돌아가고 싶을 것입니다.
낯선 타국으로 피난길에 오른 우크라이나 사람들, 그들은 언제쯤, 전쟁의 공포가 없이, 다시 정든 집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까요?
지금 우리는 코로나19와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변에 있는 가까운 사람들이 코로나에 걸렸다고 하는 소리를 너무 자주 듣게 됩니다. 우리는 언제쯤 코로나 없는 세상을 다시 살아갈 수 있을까요? 보일 것 같으면서도 보이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어쩌면, 한숨소리와 절망만이 가득한 세상입니다.
내 생각대로 되어지지 않습니다. 내가 계획하고 기도한 대로 되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라가고 있지만, 내게는 믿음의 역사가 나타나고 있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 못해서 일까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적어서 일까요? 부족해서 일까요? 의심이 많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아예 믿지를 않았거나,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히브리서 기자는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6)고 말했습니다. 또한, 히브리서 기자는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1-2)라고 말했습니다.
믿음은 단거리가 아닙니다. 믿음은 장거리 마라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믿음에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인내할 때에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인내하며, 끝까지 믿음의 주가 되시고, 우리의 믿음을 온전하게 하여 주실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1-2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피난길에 오른 다윗은 당장이라도, 예루살렘에 올라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낙심하고 절망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낙심과 두려움과 절망 가운데 있는 다윗을 향하여, 주변의 사람들은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고 한다면, 너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왜 이렇게 살아”라고 말합니다.
그런 말들을 듣게 되면, 있던 믿음이 흔들리게 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왜 나를 도와주지 않을까?”
“하나님은 항상 나와 함께 계신다고 하셨는데, 왜 지금은 안 계시는 것처럼 느껴질까? 어디 가셨을까? 주무시고 계시나? 나를 떠나셨나? 나를 버리셨나?”
여러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했을 때, 주변의 다른 나라들은 우크라이나가 금방 러시아에 함락될 것이라고 예상했다고 합니다.
2월 21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하여, 많은 무고한 인명 피해가 발생하고, 많은 도시들이 처참하게 파괴되었지만, 우크라이나는 물러서거나 무너지지 않고, 계속 러시아에 맞서 힘겹게 싸우고 있습니다. 일부 지역에서는 러시아군이 퇴각하였다고 합니다.
우크라이나에게 있어서, 이번 러시아 침략은 너무 벅차고 힘겨운 전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낙심하고 절망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조국 우크라이나를 지키기 위하여 일어섰습니다.
할 때가 아니라, 소망을 갖고 싸워야 할 때입니다.
여러분! 시편 39:7절을 보면, 다윗은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주님께 있습니다.
5절 말씀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다윗은 낙심이 되었습니다. 불안했습니다.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믿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다윗을 죽이려고, 아들 압살롬이 많은 군사들을 이끌고, 예루살렘 성을 향하여 달려 오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너무 놀라서, 신발을 신지도 못하고, 도망쳐야만 했습니다.
다윗과 함께 전쟁터를 누비며,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장군들이 적들을 물리쳤던 칼로, 이제는 다윗을 죽이려고 한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다윗은 낙심하고 말았습니다.
위급한 일을 만났을 때, 그 일을 피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던 책사 아히도벨마저도, 아들 압살롬 편에 서서, 다윗을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했을 때, 다윗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절망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디로 도망을 간다고 살아남을 수가 있겠습니까?
다윗을 지키기 위하여, 도망치는 다윗을 끝까지 따라오는 군사들은 얼마 되지 않고,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오는 군사들은 엄청나게 많은데, 어떻게, 목숨을 부지 할 수가 있겠습니까?
전쟁터를 누비며, 함께 적들을 물리쳤던 군사들이 이제는 그 칼로 다윗을 죽이려고 한다고 하는 사실 앞에, 다윗은 더 이상 누구를 믿을 수 있고, 더 이상 누구를 의지할 수가 있겠습니까? 자기를 지키려고 서 있는 군사의 칼이 어느 순간, 자기를 죽이려고 한다면, 어떻게 피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토록 믿고 의지했던 장군들도 배신을 했고, 책사 아히도벨마저 다윗에게 등을 돌렸는데, 그리고 잘못을 범한 압살롬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오고, 왕자로서의 신분을 유지할 수 있게 해 주었는데, 그런 아버지 다윗의 마음을 철저하게 짓밟고, 죽이려고 한다는 사실 앞에, 낙심과 절망 속에, 한숨소리만 커져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위대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라고 고백했던 다윗은 눈물만을 흘리고 있지 않았습니다.
낙심되고, 불안했지만, 다윗은 과감하게 그 낙심과 불안을 떨고 일어섰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다윗은 지금 자기에게 일어나는 일들 때문에, 낙심하고, 불안해하면서, 절망에 빠져버렸다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대로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떨고 일어나야 했습니다.
다윗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라고 자기 자신에게 외쳤습니다.
그는 소망이 사라진 줄 알았습니다. 그가 의지했던 것들이 무너지면, 더 이상 소망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의 소망은 하나님이구나”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입니다.
앞으로 무슨 일을 만나든지,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시편 146:5절을 보면, 시편 기자는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했습니다.
욥기 31:24,28절을 보면, 욥은 “만일 내가 내 소망을 금에다 두고 순금에게 너는 내 의뢰하는 바라 하였다면,... 내가 그리하였으면 위에 계신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리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소망을 금에게 두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속이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우리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에게 내일이 있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다윗처럼,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라고 외쳐야 할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 15:13)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소망을 둘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바로 소망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소망의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충만하게 채워주셔서, 언제든지, 소망이 가득 넘쳐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주여, 우리에게 크신 은총을 베풀어 주옵소서.
우리 안에 있는 낙심과 불안한 마음을 제거하여 주옵시고, 소망을 부어 주셔서, 기쁨과 평안을 누리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첫댓글 은혜의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