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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도 행전 2;1-13. 성령의 은혜를 소망하고 감동을 받은 사람의 태도와 자세2, 2022. 6. 5.
1. 먼저 오늘 본문의 배경과 의미입니다. 오늘이 2022년도 오순절 성령 강림주일입니다. 오순절이라는 헬라어는 50이라는 뜻입니다. 이 날은 유월절 주간의 안식일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입니다, 유대인의 3대 절기 중에 유월절 다음으로 중요한 절기가 오순절인데 오순절은 유월절의 축제기간 중 첫 열매와 이삭을 드린 다음날부터 계산하여 칠 주(49일) 후 50일째 되는 날입니다. 그래서 이 날을 칠칠절이라고 하는데 이 날에는 흩어져 사는 모든 유대인들이 처음 익은 밀과 보리로 떡을 만들어 성전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유월절이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예표 한 것이라면, 오순절은 신약시대교회의 시작의 새로운 의미입니다. 구약 3대의 절기는 유월절과 오순절과 장막절입니다. 유월절은 출애굽을 기념하는 절기이고 장막절이라는 초막절은 광야 생활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리고 오순절은 가나안 땅에서 처음 추수를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구약성경에는 오순절보다는 칠칠절과 맥추절이란 명칭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오순절은 추수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면 왜 추수의 절기에 성령이 강림하셨을까?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절기에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며, 그 부활하신 날로부터 오십일 째 되는 날에 성령이 오셨습니다. 그래서 고전15;20,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예수님은 부활의 시작을 알리는 첫 열매이었는데 주님이 부활하신지 50일째 되는 날 성령이 오심으로, 모든 성도들을 거두어들이는 영적인 추수가 시작되었습니다. 성령이 오신 날은 안식일 다음날인 주일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주일은 주님의 부활을 매주 기념하는 교회 최대의 절기이기 때문에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면서 또한 성령의 강림을 소망하고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그러면 성령의 은혜를 소망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무엇이고 성령의 강림이 어떠한 상황에서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1-1. 다 같이 한 곳에 모였습니다. 1절에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다 한 곳에 모인 자세와 태도입니다. 모인 이유는 주님의 명령 때문입니다. 주님의 명령은 행 1;4,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것이었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약속하시기를 1;5,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그래서 다 같이 한 곳에 모였고 모인 사람들은 주님의 명령에 따라 열심히 기도하면서 성령강림을 기다렸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아니하고 다 같이 한 곳에 모였습니다. 이 표현은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의 자세이고 태도입니다. 특히 저희가 다 같이 라는 말은 꼭 같이, 한 마음과 같은 마음의 태도입니다. 그들은 한 곳에 모였습니다. 그 곳은 1;14,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쓴 곳인데 마가의 다락방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다 함께 모이는 것은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의 태도와 자세이지만 또한 교회의 원리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시고, 우리는 다 주님의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골1;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고전12;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니라. 여러분, 지체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지체는 더불어 있을 때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게 됩니다. 우리의 몸에도 여러 부분의 지체가 있습니다. 눈, 코, 귀, 입은 그들의 위치에서, 손과 발 역시 제 위치에서 제 위치를 지키며 할 일들을 제대로 할 때에 문제가 없습니다. 지체의 위치와 기능은 서로 의존하며, 보완하는 밀접한 관계를 가집니다. 그래서 지체들이 그 본래의 위치를 지키지 못할 때 아픔과 고통이 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한 지체의 아픔이 온 몸에 고통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몸의 지체 그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교회는 주님을 머리로 한 지체들의 모임이며 지체의 연합이지만 각기 고유한 역할이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 말씀 중에 시은소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시온 소는 은혜를 베푸는 곳으로 현재의 교회를 말씀합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에도 주 앞에 기도드릴 곳 다 함께 모일 시은소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교회는 미움이 아닙니다, 모이는 지체는 원망과 불평이 아니고, 한 마음으로 함께 모이는 곳입니다. 그런데 다 함께 모이기 위해서는 서로간의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하고 목적하는 바의 가치관이 일치해야 합니다. 이는 주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명령의 내용입니다. 공감대와 가치관이 일치했습니다. 그들은 다 같이 같은 마음으로 한 곳에 모였습니다. 여러분, 일본에서 우리 비전 교회 구성원이 작은 인원이 아닙니다. 적용하기에는 그렇지만 일본의 100년 된 교회의 평균 구성원의 수가 18명입니다. 한국의 교회로 유추하면 250명이 회집하는 교회입니다. 결코 작은 수가 아닙니다. 그러나 매주일 예배를 드리는 성도가 30여명 미만인데도 시끄럽지요? 생각이 다 다르지요? 공감대가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지요? 그런데 주님의 명령 앞에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각 나라와 각 급의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고 약속하신 것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의 은혜를 받아야 하는 공감대와 가치관이 같았습니다. 그래서 다 같이 한 곳에 모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약속대로 이 사람들 위에 오순절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주님의 명령에 다 같은 마음으로 비전 교회 한 곳에 모였고 성령 강림 주일로 예배를 드립니다. 같은 공감대와 같은 가치관입니다. 이 시간 은혜를 사모하는 모든 분들에게 불같은 오순절 성령의 역사와 같은 은혜가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1-2. 은혜를 사모하는 각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했습니다. 2-4,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 하니라. 성령 강림의 세 가지는 바람과 불과 방언이 나타났는데 어떻게 표현을 합니까?
.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예기치 못한 순간에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는데 그 소리는 강하게 몰려오고 요동치는 공기의 흐름과 같았습니다, 시내 산에서 울려 퍼진 나팔소리와 같았습니다.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같은 공감대와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모여 있던 사람들의 마가의 다락방에 이 신비한 영적인 강한 바람 소리가 들렸고 그 은혜를 모두 느꼈습니다.
.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불의 혀는 불이 타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했습니다. 불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과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오순절 성령강림의 현상이 구약의 시내 산 사건과 같았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나고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이 것은 시내 산에 하나님께서 강림하실 때에 우뢰와 번개와 나팔 소리로 인하여 온 산이 진동하고 연기가 자욱했던 그 모습입니다. 이 것을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모든 사람들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내용은 요엘2:28-32에 예수님에 대한 약속이 구체적으로 성취되었음을 보여주는데 이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모든 무리 가운데 성령이 임재하심을 나타냅니다.
. 각 사람 위에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한 의미입니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다는 것은 그들이 한 곳에, 다 같이, 한 마음으로, 한 목적을 가지고 모였을 때에 그들 각자 위에 성령이 임했다는 사실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달란트 비유에서 주인은 종들의 재능을 따라 각각 다른 분량을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종들과 회계할 때에 숫자와 분량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성실함과 충성됨을 가치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성령의 은사도 이와 같습니다. 일률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각 사람 위에 임했다는 것은 주님의 약속과 명령에 대하여 얼마나 간절함이 있고, 얼마나 성실하고, 얼마나 충성되는가에 따라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명은 한 결 같이 하나이지만 각 사람들 위에 성령이 임했습니다.
1-3.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4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 하니라. 사도행전의 기록자 누가는 여기서 다시 한 번 더 다, 전부, 모두라는 말을 사용하여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고 기록합니다. 여러분, 주를 믿는 120명의 무리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충만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들의 마음속에 거하시는 성령의 지배와 인도를 받는 신앙의 삶을 말합니다. 성령의 충만은 빈 항아리에 물을 붓듯이 성령이 공간적으로 채워지거나 다시 들어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본문에 분명하게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성령의 지시하시는 대로 행동을 했습니다. 4절,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 하니라. 그들은 성령을 받고, 아직 배운 적이 없었던 언어로 말하기를 시작했고, 그들 앞에 모여든 각 족속들의 방언으로 구사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성령께서 이상한 언어를 제자들의 입에 넣어 주시므로 하나님의 위대한 복음을 선포하게 하셨고, 주님께서 원하셨던 것을 주님께서 원하셨던 방법으로 역사 하신 내용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놀라운 기적입니까? 얼마나 사모하던 은혜입니까? 요엘이 예언했던 사모함입니다. 생각지도 못했고, 경험되지 않았던 은혜입니다. 그래서 7-8, 다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다른 여러 지방에서 온 사람들은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였고, 다 놀라 기이히 여겼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의 역사는 이렇게 우리를 놀라게도 하고 기대하게 합니다. 감동하게 합니다. 사람이 달라지고 보는 관점이 달라지고 생각하고 경험하는 것이 달라집니다. 전혀 생각 밖의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에 기이히 여겼습니다. 여러분, 성령은 매일 매일의 용기와 능력의 원천입니다. 그런데 1;8, 제자들은 성령이 임하셨을 때 권능을 받았습니다, 무슨 권능입니까? 성령의 역사의 결과인데 행4;31, 산헤드린에서의 베드로의 용기와 설교의 권능입니다, 행13;8-12, 구브로에서 무당 엘루마를 소경이 되게 한 바울의 승리는 성령의 역사인데 어두움의 세력을 무력화시키는 권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험한 사태에 대처하는 신앙인의 용기와 능력이 나타나는 권능입니다.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투지와 이해관계에 연연하지 않는 담대함과 주위 환경과는 관계없이 신앙인이 갖는 기쁨과 소망의 권능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은 성령의 기적을 더욱 많이 체험하게 됩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던 예수님은 오순절에 그의 백성 가운데 내려오셨습니다. 내려오신 예수님은 이미 여러분의 하나님과 구주가 되심을 선언하셨으며, 여러분에게 믿고 행할 바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거하시면서 최종적으로 영원한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될 때까지 광야와 같은 이 세상에서 인도해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어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해주셨습니다. 이 약속의 보증으로 성령께서 이미 강림하셨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렇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 그러면 오순절 성령 강림의 때를 무엇이라고 하는가? 19-20. 기사와 징조, 그리고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입니다. 베드로는 요엘서의 이적을 기사와 징조로 재해석하고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을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로 재해석했습니다. 기사와 징조는 하나님께서 임박한 심판을 알려주기 위해서 베풀어주시는 자연 현상의 변화입니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은 주님의 재림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성령 강림이 있는데 그 강림은 지금이고, 성령의 강림은 모든 육체에 임재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편만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때는 또한 고난의 기간입니다. 그러니까?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인 재림이 있기 전에 환난이 있습니다. 그 환란은 계시록의 천년과 같습니다. 말세의 기간은 고난과 핍박을 당하는 기간입니다. 좁은 문과 좁은 길을 결정한 사람들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기간입니다. 이 기간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기간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이 사람들은 말세의 기간에 깨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이해합니까? 하나님의 예언이 성취된 것으로 이해를 합니다. 오순절 성령의 강림은 우연이 아니고 구약의 예언이 성취입니다. 여러분! 요14:26절과 29절을 기억하시지요?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이제 일이 이루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이룰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신 이 일이 임하자 사도들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명합니까? 과연 그렇다고 합니다. 구약에 예언되어진 말씀이 성취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의 당위성에 기초하고 담대함으로 설교를 합니다. 하지만 이는 주님으로부터 베드로 자신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고, 함께 모여서 기도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예언의 성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오순절 성령 강림에 대한 의미가 무엇입니까? 예언의 성취이고, 이 예언의 성취인 성령은 이제 모든 사람, 즉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재 하신다는 뜻입니다. 언제 그렇게 됩니까? 지금 이 말세의 기간에 그렇게 됩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이런 모든 것이 다 어디에 기초합니까? 다 말씀에 기초합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담대함의 원천이요. 권능인데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첫 번째 메시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에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성령시대가 도래했고, 모든 육체가 성령의 충만을 받게 되지만 환난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의 강림은 우리의 삶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만이 아니고, 환경을 바꾸어서 모든 것이 안락하게 만들어 주는 것만이 아니고, 편안하지만, 안락하지만 또한 고난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고난 가운데서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도록 하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성령이십니다. 우리 속에 내주 하시는 성령께서 말씀이 생각나도록 도우시고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은 베드로의 생각에 변화가 있고 삶의 변화가 있고, 말씀에 대한 시각의 변화가 있습니다. 과거에는 깨닫지 못하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담대하게 말씀을 전하는 권능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오순절 성령 강림의 참된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에게도 이와 같은 성령의 충만함으로 여러 상황에서 여러 가지의 권능과 능력의 역사가 나타나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3. 그렇다면 성령의 충만한 역사가 일어나면 삶에 어떤 변화가 일어납니까? 믿음의 태도와 자세입니다. 계3:7-8,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볼찌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여간한 능력을 가지고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의 말을 지키며 예수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다는 태도와 자세입니다. 여러분, 이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런데 이런 태도와 자세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충만으로 유지가 됩니다. 그러면 성령의 충만함으로 이루어지는 믿음의 태도와 자세는 무엇입니까? 주님 안에서의 긍정 gain 입니다, 주님 안에서의 낙관 joy 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종말 end입니다. 여러분, 사도행전 최대의 사건은 오순절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강림은 구원의 역사에 최대의 전환점이며, 교회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성령의 강림으로 성령의 거주가 시작되었습니다. 居住라는 말은 장소를 떠나지 않고 계속 살아간다는 뜻인데 영원히 함께 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강림이란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강림이후에 충만을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믿음의 태도와 자세 때문입니다. 계3:13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성령이 나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들려져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의 충만한 믿음의 태도와 자세가 무엇입니까?
3-1. 성령 충만함으로 나타나는 믿음의 태도와 자세는 주님 안에서의 긍정입니다, gain oriented person입니다. 빌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사도 바울은 언제나 얻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궁핍과 핍박과 어떤 환경에서도 얻은 것만 생각했습니다. 핍박이 올 때 얻은 참 믿음을 생각했습니다. 환난을 당할 때 얻은 참 소망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충만한 사람은 언제나 더 큰 것과 더 위대한 것을 생각합니다. 허상을 잃고 진실을 얻으며, 명예를 잃고 겸손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충만하지 않은 삶은 어떻습니까? 모든 상황과 환경에서 피해를 찾아냅니다. 태어난 것과 죽는 것이 피해라고 합니다, 가난과 실패와 병드는 것과 헤어지는 모든 사건이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늘 원망과 불평이 있습니다. 부당한 대우와 대접을 받으면 불의의 판정이라느니, 다음번에 두고 보자는 말을 합니다. 여러분, 화를 내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불평가운데 있으면 더 나을 것이 무엇입니까? 공정한 룰과 공정한 판정이 있는 사람이 되겠다는 이런 자세가 바로 얻는 자세입니다. 성령의 충만이 긍정의 사람으로 만들어 갑니다. 지금 베드로가 그렇습니다. 반면교사가 무엇입니까? 최악의 모습을 보고도 배울 수 있습니다. 무엇을 배웁니까? 나는 저렇게 하지 말아야지 하는 교훈을 얻습니다. 비난하면서 같은 길을 걷는 것은 어리석은 삶입니다. 비난은 교만이고, 배움은 겸손입니다. 결국 겸손이 교만을 이깁니다. 이런 삶의 영적인 혜안이 어디서 나올까요? 성령의 충만에서 나옵니다. 성령이 충만해야 영적인 혜안이 있습니다. 보게 하고 보여 지고 생각하고 생각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3-2. 성령 충만한 사람의 삶의 태도와 자세의 두 번째는 주님 안에서 낙관입니다. joy oriented person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소망을 둡니다. 바울은 빌립보 감옥 안에서도 항상 기뻐했습니다. 옥중서신인 빌립보서에 10번 넘게 기뻐한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빌2;17,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무슨 의미입니까? 죽어도 좋다는 말입니다. 절대 기쁨입니다. 절대 기쁨은 바닥 체험에서부터 나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핍박자이며 포행 자이었던 바울을 부활의 주님께서 용서해 주셨습니다. 바울에게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이 바닥체험에서 주신 은혜의 결과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억울함과 분노와 원망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기쁨이요 모든 것이 감사입니다. 성령의 충만한 베드로도 모든 것이 감사이고 모든 것이 기쁨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사람들의 평가보다 자신을 더 낮게 여깁니다.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합니다.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라고 합니다. 왜 이런 인식을 가지고 있을까요? 이런 인식이 있는 사람에게 비난과 공격은 의미가 없습니다. 죄인보고 죄인이라고 하는 표현에 기분 나쁘지 않습니다. 나쁜 사람에게 나쁜 사람이라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지 않습니다. 나는 죄인이고 바닥까지 떨어진 존재이지만 바닥에서 일으켜 세우신 주님이 있다는 고백은 모든 상황에서 절대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뿌리가 됩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성령 충만하면 됩니다.
3-3. 성령 충만한 사람의 삶의 태도와 자세는 종말의 승리입니다. end oriented person입니다.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의 자녀는 최종 승리입니다. 그래서 중간 과정에서 실망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선을 생각합니다. 순리와 역경도, 핍박과 환난도 다 하나님이 콘트롤 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콘트롤 하시기에 결국 끝은 해피엔딩입니다. 하나님께 맡긴 인생은 end 의 승리입니다. 여러분, 맡긴 인생의 반댓 말이 무엇입니까? 맡긴 인생의 반대말은 자기 수고에 연연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자기 능력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절망을 합니다. 자기 뜻대로 안되면 자주 억울해 하고 몰라준다고 합니다. 가끔 무엇인가를 이루면 나는 이렇게 많은 일을 했는데 너는 무엇을 했느냐는 식으로 공격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자기 수고에 연연해하는 사람은 오래 못갑니다. up and down이 심하기 때문에 꾸준히 못합니다. 성실성이 없고 신실하지 못합니다. 오래 가고 싶습니까? 성실하고 싶습니까? 자기 수고를 잊으십시오. 나의 수고보다 중요한 것은 주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맡기고 충성하고 맡겨진 삶의 걸음을 계속 걸으면 최종적으로 승리하게 됩니다. 계3;10-11,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시험의 때를 면하게 되고 나의 예비 된 면류관을 빼앗기지 않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성령 충만한 사람의 믿음이고 인생입니다. 오늘 모든 분들이 이렇게 사시고 이렇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