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어린왕자와 별
전 호 영
세상을 비웃는 것일까? 태양에 그을린 갈색의 몸뚱이가 무심히 흘러가고 있었다. 퉁겨 오른 조약돌을 순식간에 낚아채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 9월의 강물은 도도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아니 차라리 무례하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 같다.
문득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본 아프리카의 비단뱀이 떠올랐다. 사슴을 통째로 삼키곤 풀숲을 느릿느릿 기어가는 모습이었는데 이 강물이 마치 그 비단뱀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나는 돌 던지는 것을 포기했다. 아무리 세게 때려도 이 거대한 녀석은 머리를 쳐들고 덤벼들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강물에 손을 씻고는 나는 허리높이의 강둑을 가볍게 뛰어올랐다. 산들바람이 버들잎을 희롱하고 흰 조각구름은 태양과 숨박꼭질을 하는지 태양 주위를 빙빙 돌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수양버들 이파리가 얼굴을 간지럽히는 곳까지 걸어갔다. 강물 속에 무엇이라도 있단 말인가? 나무에 등을 기댄 채 아까부터 은아는 강물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깜짝 놀래 줄 생각으로 살며시 손을 내밀어 은아의 눈을 감쌌다. 마치 전기에 감전된 듯 내 입을 빠져 나오려던 외마디 소리가 멈추어지고 힘없이 감았던 손이 풀어지고 있었다.
“이런 바보, 너 울고 있는 거야?”
놀란 눈을 바싹 들이대며 나는 은아의 표정을 살폈다.
장미가 이슬에 흠뻑 젖어 있었다. 내 손에도 빨갛게 장미꽃 물이 들었다.
“자꾸 울면 바보온달한테 시집 보낸다.”
내 농담에 자극을 받은 듯 꽃잎이 흔들리며 작은 새 한 마리가 땅을 박찼다. 그리고 중심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싫어, 싫단 말야. 오빤 날 조금도 생각하지 않아. 이젠 내 기사도 아냐.”.
나는 가만히 쪼그리고 앉아 파닥이는 작은 새의 날개를 세워 주었다. 무척 서운했었나 보다.
강은아, 은아는 내 4년 후배다. 내가 은아를 알게 된 것은 복학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데, 학과장실에서의 우스꽝스런 사건이 있고 나서부터이다.
신입생이던 은아는 학과장과 정례적인 상담을 하고 있었고 3학년에 복학한 나는 비장한 결심을 하고 학과장과 기습적인 면담을 시도했던 것이다. 당시 나는 유급의 위기에 빠졌었는데, 군기가 남아 있었던 터라 학과장과 담판을 지을 작정이었던 것이다, 결국 이 사건은 나의 완전한 실수, 즉 학점계산의 착각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밝혀져 내 이미지만 엉망이 되고 말았지. 아무튼 이것이 계기가 되어 은아와 나는 좋은 선후배 관계를 갖게 된 것이었어.
강의가 없는 오후면 으레 야구장 주위를 걷곤 했는데 그곳에는 장미가 만발한 화단이 끝없이 펼쳐 있었어. 5월이 끝나 가는 어느 화창한 날, 그 화단에서 은아와 나는 선후배가 아닌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게 되었다,
“누가 더 이뻐요.”
장미꽃 사이로 은아가 얼굴을 내밀며 웃고 있었다. 졸고 있던 태양이 눈을 크게 뜨고 감탄의 눈길을 쏟아 붓는다. 요정처럼 은아는 빛났고 동화속 공주처럼 은아는 아름다웠다. 곁에 한 장미가 오히려 빛을 잃는 것 같았다.
“어떤 장미도 너보다 예쁘진 않아. 이제부터 은아를 장미공주라고 불러야겠어.”
“정말요, 그럼 공주에게 무릎을 끓어요.”
나는 영화에서 본 것처럼 정중하게 무릎을 꿇었다.
“이제부터 그대를 나의 기사로 임명하노라.”
은아는 장미 한 송이를 꺾어 나의 머리에 꽃아 주었다. 이때부터 은아와 나는 선후배가 아닌 공주와 기사의 관계를 갖게 된 것이다.
“남 우는 게 그렇게 우스워.”
나도 모르게 웃음을 짓고 있었나 보다. 야속하다는 듯 입술을 깨물며 볼이 잔뜩 부어 있다. 턱 밑에 매달린 눈물방울이 햇살에 반짝거렸다. 나는 그것이 수정이 아닐까 생각했다. 손바닥에 눈물이 닿자, 금방 내 손이 옥빛 물이 들었다.
“금방 돌아올게. 은아를 위해 토실토실한 알밤을 주워서 올 게.”
은아가 빙긋이 웃었다. 내가 토끼띠여서 은아는 산토끼 노래를 부르며 종종 놀려대곤 했던 것이다. 나는 보조개가 핀 은아의 볼을 살짝 손가락으로 눌러보았다. 손끝을 따라 장미 향기가 새어나왔다. 향기에 취한 나비가 꽃잎에 내려앉고 이슬방울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내 입술에도 꽃잎 몇 장이 묻어 나왔다.
은아와 내가 이곳 대성리에 오게 된 것은 학과발표회와 연관이 있다. 우리가 다니던 I대 불문학과는 매년 가을에 cafe francais라는 정기행사를 갖는다. 올해도 여름 내내 이것을 위한 준비를 하였고, 연습이 끝나갈 무렵 수고한 출연진들을 위로하기 위해 1박 2일의 MT를 온 것이다,
은아는 샹송을 부르는데, 하얀 드레스와 애절한 목소리가 이 공연에서 단연 돋보였다. 이 발표회와 전혀 상관이 없던 내가 이곳에 오게 된 이유는 사실 몇 가지가 있었다.
당시 나는 등산에 열중해 있었으며 강 건너의 화야산을 가보고 싶었다. 그리고 무척 중대한 약속을 지켜야만 하였다.
은아가 며칠 전부터 졸라댄 까닭도 빼 놓을 순 없지만…
내가 MT를 같이 가겠다고 했을 때 은아는 날아가기라도 할 듯 기뻐하였다. 분명 설레임으로 이날을 기다렸을 것이다.
동인천 역에서 등산복 차림인 나를 불안한 눈빛으로 맞이하고 내 계획을 말하자, 은아는 완전히 토라져버렸다.
전철과 열차를 바꾸어 타고 이 운명의 강을 앞에 하기까지 은아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리곤 울어버린 것이다.
‘뿌우-응’.
강물 위를 통통배는 미끄러지듯이 멀어져 갔다. 어쩌면 은아가 서 있는 길게 늘어진 강둑이 멀어지는 건지도……,
황토길 비포장도로를 30분 정도 걸었을까, 산행 기점이 되는 큰골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등산 지도를 꺼내 확인하는 절차를 소홀히 않고 첫 미팅의 망설임처럼 조심스럽게 발을 들인다.
전형적인 시골마을, 흙돌담 너머로 맨 먼저 해바라기가 호기심 어린 시선을 던지고 검둥이와 누렁이 몇 마리는 마을을 지키는 사명감에 불타 낯선 이방인을 잔뜩 경계하고 있다. 불현듯 외롭다는 생각이 온몸을 감싸왔다.
마을을 다 벗어나고 풀들이 진정한 자유를 만끽하는 좁은 산길을 밟고 나서야 내게서 외로움이 자취를 감추었다.
마지막 유혹인 양 산자락에 이어진 작은 논을 지나쳤을 때, 배낭 속에서 플라스틱 물통 하나를 꺼냈다. 반쯤 물이 찬 그 속에는 배를 하늘로 처든 가재 한 마리가 들어 있었다.
‘안 돼’.
머리속에 온갖 불길한 상상을 느끼며 정신없이 발길을 계곡으로 치달았다. 제법 물이 많은 계곡에 닿아 나는 침착을 찾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른다. 살며시 물 속에 통을 담그고 가재의 힘없는 몸을 두 손으로 감쌌다.
자연은 진정 위대했다. 마치 생명의 물인 것처럼 가재는 몸을 일으키고 집게발에 잡힌 손가락의 아픔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하느님, 나는 당신과의 약속을 지켰습니다. 부끄럽게도 내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무도 없는 산 속이었지만 누가 볼 새라 얼른 얼굴을 물 속에 담구었다. 생명을 걸고 약속한 가재! 이 가재에 관한 이야기를 잠시 하여야겠다.
2주 전, 그러니까 정확히 88년 9월 3일이다. 친구 승호와 북한산엘 갔었다. 하산을 정릉으로 잡았는데 계곡에서 물놀이하는 꼬마들과 잠시 어울렸다. 꼬마들과 헤어질 때 나는 멋진 선물을 받았다. 작은 통 속에는 크고 작은 가재들이 잔뜩 들어 있었는데 나로서는 무척 즐거운 선물인 것이었다.
대학가 허름한 자취방에 돌아온 나는 커다란 어항을 준비하고 물을 갈아준다, 먹이를 준다, 그야말로 갖은 정성을 다 기울였다. 룸메이트의 불만과 짜증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결국 내 고집에 두 손들고 말았지.
그런데 곧 큰 문제가 발생했다, 아마도 물이 적합하지 않았는지 하루에도 두 새 마리씩 가재가 죽어 간 것이다, 황갈색의 몸뚱이가 담장 아래 자리를 넓혀갈수록 나의 슬픔과 안타까움은 좌절과 절망으로 이어지고 그때처럼 내 자신이 미약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이건 결코 말하지 않으려 했는데, 나는 하느님의 도움을 간절히 빌었다. 그것은 가재가 단 한 마리만 남게 되었을 땐데 생전 처음무릎을 끓고 기도를 드렸지.
「하느님 제발 이 가재를 살려 주십시오. 만일 이 가재가 죽는다면 저는 평생을 죄인으로 살아갈 것 같습니다. 살려만 주신다면 저는 기필코 이 가재를 자연의 품으로 돌려주겠습니다.」
나의 기도가 통했는지 1주일 동안 가재는 무사했고 나는 약속한대로 자연의 품으로 가재를 돌려 준 것이다.
물 속을 기어가던 모습이 사라졌다. 틀림없이 가재는 돌 밑으로 숨어들어 되찾은 자유를 확인하고 있을 것이다.
--북한산에서 화야산. 너의 운명은 누구의 장난일까? 절망 속에 탄생한 표정 없는 생명, 자연 속에 뿌리내린 고귀한 삶을 깨우쳐 주고 이제는 두고 가야 할 정든 가재! 나를 기억하지 않아도 좋다. 다시는 사람 손에 붙잡히지 말고 이 맑은 계곡에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아가렴--
물 속에 떠오른 은아의 고운 얼굴을 애써 흐트러뜨리곤 나는 산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바위를 감고 도는 시원한 물줄기가 나를 소리쳐 반기고 은은히 풍겨오는 솔잎 향기는 이미 나의 감각기능을 마비시켜버렸다. 키를 넘는 덩굴 앞에 이따금 암담해 하고 돌부리에 나뒹굴며 인적 끊긴 산 속을 얼마나 헤매었을까?
이윽고 정상. 잡초 우거진 황량한 정상엔 빨간 삼각기 하나가 나그네를 반겨주었다. 잡초사이로 가지런히 박혀진 하얀 돌맹이가 헬기장임을 확인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외로운 산정에 외로운 길손으로 처음 마주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때처럼 이상한 기분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다.
마치 마취된 자신의 신체가 수술실의 메스에 무감각한 그 때와 같다 할까. 아무튼 모든 것이 정지돼 있는 것 같았다.
커피 한 잔을 앞에 한 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햇살에 물든 나그네의 눈이 그리움으로 넘치고 가슴에선 실로폰 음악이 파도처럼 부딪히고 있었다.
바로 그 때, 등뒤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끈 하나만 그려 줘.”
이 돌연한 목소리에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홀로 있는 산정, 그것도 좀처럼 발길이 드문 이곳에서 누군가가 불쑥 나타났다고 상상해 보라. 바로 등뒤에서 말이다.
한 열 살쯤 되었을까, 옷차림이 다소 남루하고 머리카락이 다소 붉다는 점을 제외하곤 보통의 아이들과 별로 다른 점은 없었다
“너, 너는 누구니?”
나는 시간이 필요했다. 어쩌면 내가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를 일인 것이다.
“양을 매어 둘 끈 하나만 그려 줘.”
아이는 애원하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벌떡 일어섰다. 분명히 꿈은 아닌 것이다. 때 론 이성과 판단이 무시될 필 요도 있는 것이다. 나는 노트 와 볼펜을 꺼내 그림을 그리 기 시작했다. 옆의 그림은 그 때 그린 것인데 나로서는 최 선을 다한 것이었어. 물끄러 미 바라보던 작은아이는
“싫어, 싫어 뱀은 싫단 말아야.”
아이는 손을 내저으며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기세다.
아! 나는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이 아이는 바로 어린왕자 인 것이다. 소설 속의 주인공을 실제로 만나다니, 아니, 생떽쥐베리는 어린왕자를 진짜로 만나본 것이다. 그리고 어린왕자를 누군가가 보게 된다면 자기에게 꼭 연락해 달라고 하지 않았던가. 살아 있었다면 88세가 되는 것이다.
1944년 전장의 막바지에 자신이 아끼던 비행기와 함께 실종된 그는 조국을 사랑한 훌륭한 문인이었다.
아무튼 나는 끈을 그려줘야만 했다. 내 그림이 뱀으로 오인 받다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런 나를 바라보며 어린왕자는 다시 눈물을 글썽였다. 나는 쫓기듯 그림을 그렸는데 전의 것과 별로 다른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무척 난감해졌다. 망설이던 나는 잎새를 몇 개 달았다. 그리고 어린왕자에게 주었다.
“이것은 칡넝쿨이야. 틀림없이 너의 양도 좋아 할거야.”
“좋아, 뿌리가 생기면 양도 멀리 가지 못하고 잎은 배가 고플 때 뜯어먹을 수 있을 거야.”
어린 왕자는 칡넝쿨이 그려진 종이를 품 속에 집어넣었다. 어린왕자가 가져 간 그림을 여기에 다시 그려보았다. 아 마도 어린왕자는 칡넝쿨 한 쪽을 땅에 심을 생각이었던 것 같다.
어린왕자는 서쪽하늘로 기울어지는 태양을 마주해 말없이 앉았다. 붉게 물든 구름이 솜사탕처럼 느껴졌다. 어린왕자의 얼굴도 머리카락처럼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나도 어린왕자의 곁에 조용히 앉았다. 발 아래의 산봉우리들은 졸린 듯 눈을 지긋이 감고 눈 아래의 태양을 향해 정답게 손짓을 하고 있었다.
“아저씨도 해 지는 거 좋아해? 나는 해지는 걸 볼 때가 제일 행복해. 어떨 땐 해지는 걸 보다가 잠이 들 때도 있어.”
어린왕자의 말대로 해 지는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다. 그름 위에 앉아 세상을 한눈에 내려다보니 마치 신선이 된 기분이랄까. 꿈꾸듯이 흘러 간 잠깐의 감동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나는 황급히 일어섰다.
「이런 바보. 해가 지는데 이러고만 있다니」
혼잣말을 뱉으며 황급히 배낭을 꾸리기 시작했다.
-- 불확실한 등산로, 단독산행, 어둠 속에서 길을 잃는다면 그야말로 위험천만인 것이다.--
“왜 그래?”
갑자기 서두르는 나의 모습을 의아해 하며 어린왕자가 물었다.
“곧 어두워질 거야. 산에서 어둠을 맞으면 무척 위험 한 거야.”
“왜 위험 해?”
모든 아이들이 그렇듯이 어린왕자는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한다. 나는 산에서 일어난 많은 사고들이 떠올랐으나 입을 다물기로 했다. 어린왕자는 또 무엇인가를 물어 올 것이 뻔하였고 우리들의 생활을 어차피 이해하지 못 할 것이란 생각이 든 것이다.
내가 짐을 다 꾸리고 났을 때, 나는 어린왕자의 흐느낌 소리를 들었다. 풀 위에 엎드려 무척 서러운 듯 울고 있었다.
나는 어린왕자를 가만히 일으켜 안았다. 어린왕자의 눈에서는 반짝거리는 별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아저씬 나와 같이 있는 게 싫은 거지? 어른들은 언제나 아이들을 귀찮아 해. 급해, 급해, 서둘러, 위험해, 하면서 아이들을 쫓아버리곤 하지. 아이들의 의견은 들어보지도 않으려고 해.”
별똥별처럼 꼬리를 끌며 어린왕자의 이야기가 어둠이 내리는 산정에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어린왕자를 꼬옥 껴안았다.
「아! 어린왕자! 너는 별빛으로 내려앉아 천사처럼 하늘의 비밀얘기 들려주고 있는데 이보다 무엇이 더 급하단 말인가? 하늘과 가장 가까운 이곳에서 나는 밤이 새도록 길 잃은 별님과 얘기 나누리….」
내 눈에서도 별빛이 쏟아지고 어둠은 곧 별들을 감싸기 시작했다.
어둠이 내려와 세상을 뒤덮고 희미하게 지켜보던 산봉우리들도 인사도 없이 떠나가 버렸다. 어린왕자와 나는 나란히 앉아 오랫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내 허리에 머리를 기댄 채 어린왕자는 어둠 저편을 응시하고 있었다. 무엇인가를 간절히 기다리는 표정으로,
우리들 곁에 하얀 안개가 피어올랐다. 잠시의 망설임이 있은 후, 신기한 듯 우리의 손과 얼굴을 어루만져 본다.
아마 우리들도 산의 일부라고 여겼나 보다. 어디선가 나타난 둥근 달님을 향해 우루루 몰려 갈 때까지 우리는 그냥 조용히 앉아 있었다.
달님과 별들로 가득한 군청빛 하늘은 아름답기보다 오히려 신기한 광경이었다.
나는 죽이라도 끓일까 하고 수통을 흔들어 보았다. 물이 별로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수통을 던져버리며
“물이 모자라”
미안해서 말꼬리를 흐렸다.
“아저씨, 나, 물 있는 곳 알아.”
어린왕자가 자신 있다는 듯 말했다.
나는 어린왕자가 가르쳐준 대로 조금 내려가 보았다. 과연 100미터도 안돼 샘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심마니들이 만들어 놓은 듯 주먹만한 돌로 가지런히 담을 두르고 작은 공기돌로 바닥을 깔고 있었다. 달빛 아래 속삭이던 샘물의 재잘거림이 한밤의 불청객으로 숨을 죽이고 샘물 속에는 또 하나의 우주가 있었다. 나는 수통 속에 물을 가득 채웠다. 틀림없이 별 몇 개쯤은 함께 담겼을 터였다.
어린왕자는 여전히 앉은 채였다. 왠지 지쳐 보였다.
판초우의를 꺼내 어깨를 감싸주었다. 밤이슬에 어느 정도의 보온작용은 할 수 있을 것이다.
석유버너의 소음이 잠시 밤의 평화를 깨트렸다. 풀들이 깜짝 놀라 고래를 들고 달을 유혹하던 별들의 시선이 일제히 산정을 향했다. 향긋한 죽 냄새에 밤은 호흡을 가빠하고 다시금 풀벌래들의 노랫소리 들려 올 때 어린왕자와 나는 하늘의 만찬을 즐기고 있었다.
어린왕자는 죽을 아주 조금 먹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어린왕자는 언제나 배고프지 않다고 한다. 배고픔이란 지구를 제외한 어느 별에도 존재하지 않고 최초의 인간들이 너무나 자만한 나머지 스스로 키워간 의식일 뿐, 마치 허상과 같은 것이라 했다.
어린왕자도 가끔 식사를 하는데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지구에서 배운 의식을 흉내내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보통의 사람들은 자신이 정성을 기울인 음식(다른 모든 것도 마찬가지지만)을 남이 먹으려하지 않으면 무척 불쾌해하고 심지어는 화까지 낸다. 특히 어른들이 그러한데 아이들의 의견과 선택은 사랑이라는 말로 언제나 방해받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나는 이것에 완전히 동의할 순 없었다.
그러나 내가 이미 어른이 되었고, 어른들과 같이 생활하고 있으므로 내가 반대의 의견을 말한다면 어린왕자가 얼마나 실망할까 싶어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바로 그때 유성 하나가 길게 꼬리를 끌며 떨어졌다.
“왜 별이 떨어질까?”
어린왕자가 중얼거렸다.
“별이 흘리는 눈물일 거야. 별이 빛나는 건 슬픔이 많기 때문이지.”
나는 이렇게 말하는 나 자신에 무척 놀랐다. 그러나 어쩌면 사실일 거리고 여기게 된 것은 모두가 그렇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어린 왕자는 물론이고 풀과 밤안개, 그리고 풀벌레들, 심지어 달님과 별들조차 내 말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나는 더욱 의기양양해져서 신화에 나오는 별자리들을 몇 개 가르쳐 주었다. 언제인가 천체학 강좌를 수강한 적이 있어 쉽게 성좌들을 찾을 수가 있었다.
동쪽 하늘엔 쳐녀와 목동좌가 정겹게 밀담을 나누고 있었고, 서쪽하늘에는 토끼좌와 황소좌, 그 가운데 오리온 별자리가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남쪽으론 바다뱀이며 게, 사자별자리가 어슬렁거리고 북쪽하늘에는 가장 알려진 북두칠성과 카시오페아 별자리가 머리 위에는 큰곰과 작은곰좌가 모자간의 애정을 맘껏 나누고 있었다.
어린왕자는 남쪽의 어느 별을 손으로 가리켰다.
“내 별에서도 저런 별자리를 본 적이 있어.”
“그것은 헤라클레스성좌야, 그는 무척 힘이 세었어.”
나는 헤라클레스가 별이 된 슬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신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헤라클레스는 힘이 장사였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의협심이 강한 용사였어. 이런 헤라클레스에게 신들도 큰 두려움을 느꼈지. 열 두 가지의 위험한 모험을 다 완수하고 그는 그리이스 제일의 영웅이 되었는데, 어느 날 디아네이러라고 하는 아름다운 여자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행복한 결혼생활이 계속되던 어느 날, 네소스라는 나쁜 켄타우루스(반인 반마족)가 그녀를 붙잡아 가려고 하였다. 아내의 비명소리를 들은 헤라클레스는 히드라의 맹독을 칠한 화살로 네소스를 쏘아 맞혔다. 네소스는 숨이 끊어져 가면서도 디아네이러에게 언젠가 헤라클레스의 애정이 식어가거든 자기 웃옷을 입히면 틀림없이 그의 사랑이 되돌아 올 것이라고 말하고 죽었다.
몇 년이 지난 뒤 헤라클레스의 사랑이 식어간다고 본 디아네이러는 간직했던 켄타우루스의 웃옷을 남편에게 입혔다. 그러나 이것은 켄타우루스의 무서운 복수였던 것이다. 곧 히드라의 맹독을 받은 헤라클레스는 미칠 듯한 아픔을 느꼈다.
만일, 정신이 돌면 상대방을 가리지 않고 죽여버린다는 사실(헤라의 저주)을 잘 알고 있는 헤라클레스는 장작을 쌓아놓고 불을 지른 다음 그 속으로 뛰어들었다. 죽은 뒤 헤라클레스는 신들의 배려로 하늘로 올라가 별자리를 이루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어린완자는 눈물이 고인 눈을 떨구며 가만히 말했다.
“장미도 별이 될 수 있을까?”
“왜 너의 장미가 어떻게 되었니”
대답대신 어린왕자는 내가슴에 얼굴을 묻고 마구 울음을 터트렸다.
“장미가 죽어버렸어. 내 장미가 양과…. 내가 나빴어 흐흑, 흐으-흑, 장미야 용서해 줘, 엉엉엉….”
나는 어린왕자의 등을 토닥거리며 울음이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흐느끼던 어린왕자가 내 무릎에 엎드린 채 장미와 양의 전쟁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린왕자는 지구의 보통 어린이와 다를 바 없어서 논리 정연한 말을 하지는 못한다. 내가 알기엔 아이들은 언제나 어른들과 같이 있고 싶어하고 이야기를 듣고 또 들려주고 싶어한다. 그런데 어른들은 아이들이 이야기에 끼어 들면 몹시 싫어하고 아이들의 이야기를 조금도 귀담아들으려 하지 않는다.
혹 친절하다는 사람들이 ‘허 그놈 참 맹랑하군’ ‘무척 조숙하군’ ‘여우같아’ 등등의 말을 할 뿐 거의 모든 어른들이 아이들의 말과 생각을 무시해버리는 것이다.
이 글을 읽는 어른들에게 나는 이렇게 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하루라도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어보라고, 일부러 어려운 화제를 피하려고 하지 마라. 아이들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른들을 이해하고 기꺼이 상담자가 되어 줄 것이다. 그러면 아이들도 자신의 문제를 얘기하고 진지하게 들어줄 것이다.
얘기를 들을 때에 주의할 점이 있다. 먼저 이야기를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 아이들은 시간에 쫓기는 것을 싫어한다. 아니 모른다는 편이 맞을 것이다. ‘그런데’ ‘그 다음에는’ ‘어머나’ ‘저런’ 등등의 말이 참을성 없는 어른들을 위해 그나마 사용할 순 있을 것이다. 또한 진심으로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하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눈과 표정을 통해 거짓과 진실을 쉽게 구별하는 능력이 있다. 만일 건성으로 자기 말을 듣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면 그 어른은 아이에게서 더 이상 상담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른들에게 전혀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행히도 아이들은 빨리 잊어버리고 쉽게 용서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 점을 너무 이용하는 것은 아주 나쁜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다. 현명한 어른이라면 그러한 모험을 되풀이하진 않을 것이다.
나는 어린왕자가 이야기를 다 마칠 때까지 가만히 듣기만 하였다. 그 때 들었던 장미와 양의 전쟁을 여러분에게 들려주고자 한다.
// 어린왕자는 가끔 지구라는 별로 여행을 가곤 했다. 어린왕자의 별에서 지구까지는 약 열흘 정도가 걸린다. 물론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는 말하기가 곤란하다. 어린왕자가 셀 수 있는 숫자도 열까지가 아닐까 싶다. 북두칠성의 별을 셀 때 양 손가락을 이용해 별을 헤는 어린 왕자를 보았다.
언젠가 사막에서 어린 왕자는 한 어른을 만났는데 그가 양 한 마리를 그려주었다.(나는 그가 생떽쥐베리라 여겨진다). 상자에 든 예쁜 양이었는데 바오밥나무를 먹게 할 생각이었다. 자신의 별로 돌아온 어린 왕자는 곧 양을 풀어놓았다. 어린 왕자가 없는 동안 바오밥나무들이 무척 자랐고 화산의 불꽃들도 희미하게 빛을 잃고 있었다. 양이 바오밥나무들을 먹어치우는 동안 어린 왕자는 하나밖에 없는 장미에게로 갔다.
“안녕 장미야, 잘 있었니?”
“안녕 어린 왕자”
잠시 머뭇거리다 무관심한 듯 고개를 돌리며 장미가 말했다. 어린 왕자는 늘 하던 것처럼 장미에게 물을 뿌려 주었다. 지구에 가 있는 동안 내낸 장미에 대한 걱정을 했는데 장미가 별로 반가워하지 않아 조금 기분이 나빠졌다.
지구에서 본 정원 가득한 장미 얘기를 해줄까 하다가 자존심이 강한 장미가 상심해서 죽어버리면 어떡하나하는 생각에 꺼내지 않기고 했다.
어린 왕자는 화산입구를 청소하였다. 두 개의 불꽃 화산과 불이 꺼진 한 개의 화산을 정성스럽게 손질하였다.
어린 왕자가 가버린 뒤 장미는 곧 자기의 행동을 후회했다. 사실 장미는 어린 왕자가 지구로 떠난 후에 무척 외롭고 무서웠다, 아침해가 떠도 자기를 보아 줄 누구도 없고 햇볕에 탄 잎새에 물을 뿌려주는 누구도 없었다.
이 별에는 어린 왕자, 장미, 화산 세 개(그중 하나는 불이 꺼져 있다.), 그리고 양, 바오밥나무 뿐인 것이다.
이 별에서 장미의 아름다움을 알아주는 유일한 사람인 어린 왕자가 없다면 장미는 어떤 낙도 없을 것이다. 마음속으로는 어린 왕자가 돌아와 무척 기뻤지만 기뻐하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라고 여겨졌던 것이다. 한편 어린 왕자는 해지는 모습을 더 많이 볼 수 있어 무척 기뻤다. 양이 매일 같이 자라나는 바오맙나무들을 먹어치우기 때문에 어린 왕자가 할 일이 하나 줄었기 때문이지.
그런데 장미는 양을 좋아하지 않았다.
“너는 먹보야. 네 털은 더럽고 냄새가 나. 내 곁에 가까이 오지 마.”
언제나 장미는 양에게 싫은 말만 했다. 양은 무관심한 듯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바오밥나무만 먹곤 했다.
어린 왕자는 양이 장미를 먹을까봐 밤에는 늘 유리관을 씌워주었다.
“양 따위는 무섭지 않아. 내겐 네 개의 가시가 있어. 호랑이도 나를 어쩌진 못해. ”
장미는 그때마다 짜증을 내며 말했다.
“호랑이가 뭔 대?”
어린 왕자는 처음 듣는 말에 호기심을 느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짐승이야. 나처럼 가시가 달려있고 천둥소리를 내.”
“어디가면 볼 수 있니?”
어린 왕자는 꼭 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물었다.
“음……”
장미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지나가던 철새에게 단지 들었을 뿐인 것이다.
장미가 처음으로 양을 보았을 때, 호랑이가 아닌가 하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다. 가시가 없다는 것을 알고 나서야 겨우 안심을 할 수 있었다.
어느 날, 늦게까지 해 지는 걸 보다가 어린 왕자가 깜박 잠이 들었는데 엄청난 일이 발생하였다.
양이 무심코 달빛에 비친 장미의 그림자를 밟게 되었는데 장미는 또 억지를 부렸다.
“비켜, 더러운 양아. 냄새가 난단 말야.”
양도 이번에는 기분이 몹시 나빠졌다. 화산에 발을 헛디뎌 털이 많이 그을려 있었기 때문이다.
양은 장미의 얼굴에다 방귀를 뀌고 말았다. 장미는 숨을 쾍쾍거리며 죽는 시늉을 했다.
“덤벼, 덤비란 말야. 너 따위는 무섭지 않아.”
양이 장난 삼아 얼굴을 내밀자, 장미의 가시가 양의 코를 할퀴었다. 양은 정말로 화가 났다. 이렇게 해서 장미와 양의 큰 싸움이 시작된 것이었다.
장미의 비명소리에 잠을 깬 어린 왕자가 깜짝 놀라 달려갔다. 어린 왕자가 나타나자, 양은 씩씩거리며 한쪽으로 물러섰다. 장미는 엉망이 된 제 모습을 어린 왕자에게 보이자, 곧 죽고만 싶어졌다. 세 개의 가시가 부러졌고 꽃잎도 다섯 개나 망가졌기 때문이었다. 어린 왕자는 정성을 다해 간호했다. 그러나 장미는 점점 시들어 가더니, 끝내 고개를 내저었다.
“어린 왕자, 난 이미 틀렸어. 얼굴이 엉망이 되었고 가시도 하나밖에 남지 않았어.”
장미는 아름다움을 잃었기 때문에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어린 왕자는 몹시 슬퍼하며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장미야, 내가 잘못했어. 내가 너를 지켜줬어야 했는데 날 용서해 줘.”
“아니야, 내가 나빴어. 너는 언제나 내게 물을 뿌려 주고 내 이야기도 잘 들어줬는데, 나는 늘 내 자랑만 하곤 했어. 어린 왕자! 난 너에게 얼마나 고마워했는지 몰라.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어. 정말 고마웠어. 그리고 널 사랑해.”
장미는 난생 처음으로 고맙다는 말을 했다. 자기의 진심을 털어놓고 나자, 장미는 무척 홀가분했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가슴 벅참에 몸이 마구 떨려왔다.
“어린 왕자! 내가 죽으면 비석을 세워 주겠니? 이 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으로 나를 기억해 줬으면 해.”
장미는 별들이 지켜보는 밤에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어린 왕자는 화산에서 주워온 검은 돌로 장미가 잠든 무덤 앞에 비석을 세워 주었다.
이 별에서 유일한 꽃이자 가장 아름다운 장미가 죽은 뒤 어린 왕자는 너무나 외로웠다. 장미의 무덤 앞에 서서 한참동안을 있다 가곤 했다. 양도 속으론 슬퍼하는 것 같았다. 괜히 신경질을 부리며 바오밥나무를 발로 파헤치곤 하였다. (심리학에 근거하면 슬픔에 대해 여러 가지 반응을 볼 수 있는데 때론 분노, 신경질, 증오심 등으로도 표출된다. 동물들과 특히 아이들에게 이런 경향은 쉽게 관찰할 수 있다.)
얼마 후 어린 왕자는 지구를 찾아가 보기로 했다. 언젠가 보았던 장미로 가득 찬 정원에서 친구가 되어줄 장미를 찾기로 했던 것이다.
철새들의 도움을 받아서 어린 왕자는 지구로 왔다. 여러 날 동안 근처를 헤맸는데, 지구가 너무나 많이 변했기 때문이었다. 생떽쥐베리를 사막에서 만난 후 약 45년이 지난 것이다.(물론 이것은 그 이후에 어린 왕자가 한번도 지구에 오지 않았다는 것을 전제한 것이다. 나는 그럴 것이라고 믿고 있다.)
“안녕, 장미야.”
어린 왕자는 죽은 장미와 제일 비슷한 작은 장미에게 말했다. 정원도 많이 변해 있었지만 장미들은 어린 왕자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지구에는 꽃과 대화할 수 있는 사람들이 거의 사라졌기 때문에 장미는 오래 전의 어린 왕자를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꽃과 얘기를 나눌 수 없게 된 것은 아주 불행한 일이다. 옛날에는 모든 사람들이 꽃과 동물들, 별들과도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들을 지배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자, 꽃이며 동물, 별들의 이야기를 외면하게 된 것이다.
이제는 그들의 이야기를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게 되었다.
아직도 그들과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조금은 남아 있다고 한다. 혹 여러분들이 그것을 볼지도 모르겠다. 꽃잎에 귀를 대고 있는 사람, 동물의 귀에 무엇인가를 불어넣는 사람, 밤에 옥상 같은 곳에 앉아 별을 보고 있는 사람들을 주의해서 보기 바란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꽃들은 아직도 사람들의 이야기를 알아듣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언제나 마음을 열어놓고 있다. 만일 여러분이 진솔하게 마음을 열고 그들과 대화하고자 노력한다면 틀림없이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다. 어린아이들이라면 더 빨리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안녕, 어린 왕자”
“안녕”
“왜 이제야 왔니.”
“어머, 어린 왕자.”
주위의 많은 장미들이 어린 왕자를 반겨 주었다.
“난 친구가 필요해, 나와 우리별에 가지 않을래?”
“너의 별이 어딘데?”
“우리별은 무척 멀어, 화산이 셋 있는데 하나는 불이 꺼진지 오래되었어. 나는 늘 입구를 청소해. 그래야 불이 잘 타고 철새들이 길을 잃지 않거든. 그리고 양도 한 마리 있어. 매일 같이 바오밥나무를 뜯어먹어. 장미는 먹지 않아.(어린 왕자는 장미가 양을 무서워 할까봐, 양이 장미는 먹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해서 말했다).‘’
“다른 것은 없니?”
“춥진 않니?”
“햇볕은 잘 드니?”
장미들은 많은 것을 물었다. 그러나 어떤 장미도 어린왕자의 별에 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미안해, 어린 왕자.”
“그곳은 너무 외로울 것 같아.”
“양은 냄새가 나,”
“너의 별은 너무 작아.”
“나는 꽃의 여왕이거든.”
“나는 먼 여행은 질색이야.”
“양은 고상하지 못해.”
어린 왕자는 모든 장미에게서 거절을 당했다. 실망과 절망으로 어린 왕자는 몹시 슬펐고 여러 곳을 헤매 다니다, 해가 지는 화야산에서 나를 만나게 된 것이었다.//
이상이 어린 왕자가 들려준 「장미와 양의 전쟁이야기」 이다. 이야기를 마친 어린 왕자의 얼굴은 몹시 부어 있었고, 볼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아무도 내 친구가 되려고 하지 않아. 내 장미는 영원히 없어. 난 벌을 받는 거야.”l
어린 왕자는 다시 흐느끼기 시작했다. 바로 그 때, 풀 속에서 가녀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가면 안되겠니?”
달빛에 비친 보라색 꽃잎이 살포시 고개를 들었다. 어린 왕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는지, 꽃잎에는 눈물이 가득 맺혀 있었다.
“너는 누구니? 장미와 조금도 닮지 않았는데……”
어린왕자가 호기심에 가득한 눈으로 보라색 꽃잎을 쳐다보았다.
“나는 제비꽃이야. 그렇지만 너의 친구가 되고 싶어.”
어린 왕자는 가만히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어린 왕자는 장미꽃만이 꽃인 줄 알았다. 장미꽃 말고 다른 꽃이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게 된 것이다.
제비꽃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나는 제비의 깃털에서 떨어져 지난봄부터 이 곳에서 살아왔어. 나는 사람들의 곁에서 살고 싶은데, 아무도 날 좋아하지 않았지. 어쩌다 나를 발견한 사람도 무심한 듯 지나치곤 하는 거야. 바람이 불어와도 비가 내려도 나는 언제나 혼자였어. 내겐 어떤 친구도 없어. 뜨거운 태양은 내 숨을 콱콱 막고 세찬 바람은 내 허리를 부러뜨릴 것만 같았어. 이렇게 별이 많은 밤에는 알 수 없는 고향을 그리워하곤 해. 그러나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사랑인 거야. 누군가가 나를 가장 소중한 것으로 여겨줬으면 해. 그래서 내가 그의 일부가 되고 싶어.”
제비꽃은 부끄러운지 고개를 살짝 숙인다. 그 순간, 나는 저고리 앞섶을 여미고 있는 우리네 옛 여인네를 보는 듯 했다. 청초한 꽃잎이 파르라니 떨리며 부끄러움에 젖어 막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나는 지난 날, 장미만 찬양하던 기억을 떠올리며 몹시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어린 왕자도 이 보라색 꽃잎에 커다란 동정과 관심을 느끼는 것 같았다.
“좋아, 난 네게 매일같이 물을 줄 꺼야. 바람이 불면 네 곁에 기둥을 세우고 햇살이 너를 괴롭히면 예쁜 모자를 만들어 줄 꺼야. 넌 내게 가장 소중하고 아름다운 꽃이 되는 거야.”
제비꽃은 부끄러운 듯 말없이 웃고만 있었다. 너무나 행복해서 말문이 막힌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때 처음으로 꽃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들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도 나는 꽃잎에 귀를 대어보곤 하는데, 그 때처럼 꽃들의 얘기를 들을 수가 없다.
그 때 나는 장미만 사랑한 나의 용서를 빌며 제비꽃에게 즉석시를 들려주었다.
제비꽃
외로운 산정에 말없이 피어
별밤에 소망 비는 여리운 꽃잎
가슴 가득 새벽이슬이 넘쳐
가녀린 허리에 눈물처럼 흐르네
잃어버린 사랑 찾아
향기는 가고
기다리는 잎새에는
주름만 늘어
잊었던 내 사랑
아 보랏빛 잎새
인생을 말하는가?
그 여린 입술로
세월을 셈하는가?
그 여린 가슴으로
이 가슴의 작은 파문은
지워지지 않는 보랏빛 추억
너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려는지
이슬에 젖은 꽃잎이
지쳐 잠들면
나는 밤안개 되어 너를 안는다
아 보랏빛 잎새
잊었던 내 사랑
-- 이때부터 제비꽃은 내게 가장 소중한 꽃이 되었고 내가 얘기를 나누었던 유일한 꽃이 된 것이다. --
“아저씨도 제비꽃을 좋아하는 거지?”
어린 왕자가 내 눈을 쳐다보며 말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마음을 쉽게 꿰뚫어 볼 줄 안다.
“어린 왕자. 이제야 알게 되었지만 내가 정말로 사랑한 꽃은 제비꽃이었던 것 같아. 지금껏 장미만 찾아다닌 난 정말 바보였어.”
나는 진실로 마음에서 우러나는 말을 했다.
“그래, 나도 장미만이 꽃인 줄 알았어. 장미가 중요한 게 아니고 나의 꽃이란 것이 중요한 걸 거야. 나의 꽃이란 내게 의미를 갖는다는 거야.”
어린 왕자는 무척 어른스럽게 말했다. 사실 모든 아이들이 이처럼 깊이 있고 냉철하게 사물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어른들이 무시하고 억압하여 이러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아저씨와 나 중 누구를 더 좋아할까?”
어린 왕자가 불안스레 나를 쳐다본다. 나는 재빨리 어린 왕자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어깨를 가볍게 잡으며
“어린 왕자, 제비꽃은 너의 별에 가는 게 더 행복할 거야.
그곳은 작지만 이곳보다 사랑이 넘치는 곳이야. 제비꽃은 너의 사랑으로 더욱 아름다워지고 그 별에서 하나밖에 없는 꽃이 되는 거야.”
어린 왕자가 활짝 웃었다.
“고마워. 내게 하나밖에 없는 꽃이 되는 거야.”
내 말을 그대로 따라한다. 제비꽃은 가만히 있었다. 너무나 행복해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울음을 참고 있었던 것이다.
잠깐 잠이 들었나 보다. 풀들의 뒤척임에 잠에서 깨어나고 내 무릎을 배고 있던 어린 왕자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 갔을까? 어쩌면 샘에 갔는지도…….
나는 커피도 끓일 겸 수통을 들고 샘으로 갔다. 얼마쯤 내려가자, 어린 왕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꿈꿀 때 같단 말이지. 아프진 않니?”
“염려 마. 너도 보다시피 나는 무척 아름다워. 어서 먹어봐.”
누구와 얘기하는 것일까? 나는 불안한 마음이 되어 걸음을 빨리 했다. 모퉁이를 돌자 어린 왕자가 눈에 들어왔다. 무엇인가를 입에 대고 있었다.
“어린 왕자!”
나는 황급히 소리쳤다. 어린 왕자가 고개를 돌리며 베시시 웃었다. 어린 왕자의 손에는 독버섯이 들려 있었다. 비단처럼 빛나고 장미처럼 붉은 것이었다. 조각난 독버섯이 바닥에 떨어지고 도망치듯 풀섶을 굴러갔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나는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어린 왕자를 두 팔로 번쩍 안았다. 산정으로 향하는 내 발길은 천근만근의 무거운 추가 달린 것 같았다.
“왜 이런 짓을 했니?”
“아저씨, 오늘이 지구에서 내별이 가장 가까이 오는 날이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린 왕자가 자기 별로 돌아갈 때는 늘 이런 식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마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해서나 별똥별로 변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어린 왕자는 잠꼬대처럼 마구 소리치고 있었다.
“이상해. 내 몸 속에서 거품이 일어나는 것 같아. 꿈을 꾸려는 가 봐.”
어린 왕자의 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올랐다. 독이 퍼지는지 얼굴은 잔뜩 부어 있고 눈을 감은 채 손을 마구 내저었다. 희미하게 드러나는 밤의 파괴자, 새벽이 거침없이 어둠의 평화를 유린하고, 밤을 지키던 성좌들은 사방에서 밀려드는 침략자들과 힘겨운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동쪽하늘의 페가수수와 돌고래는 장렬한 최후를 맞고, 북쪽의 카시오페아가 마악 새벽에 삼켜지고 있었다. 전의를 상실한 전갈과 바다뱀이 꼬리를 감추며 마침내 도망을 쳤다.
아! 어린 왕자. 너는 결국 떠나야만 하는가. 소리 없는 파괴자 새벽이 그토록 미울 수가 없었다. 마지막 보루였던 큰곰은 아기곰을 보호하며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밤은 마침내 운명을 받아들였다. 어린 왕자와 헤어져야 한다는 것이 현실로 다가오자 내 눈에서는 눈물이 마구 떨어졌다. 어린 왕자가 다시 헛소리를 했다.
“아저씨, 아저씨는 다른 어른들과 다른 점이 있어. 자꾸 졸음이 와. 아저씨 우리별엔 화산이 세 개 있는데, 내가 꼭 필요해. 불이 꺼지면 철새들이 방향을 잃거든….”
“아저씨, 제비꽃을 좋아하지. 언제 우리별에 왔으면 좋겠어. 아저씨, 자꾸 졸음이 와. 아저씨……”
어린왕자의 목소리가 점점 약해졌다. 별이 흠모하던 달님의 얼굴이 핼슥해 지고 어린 왕자의 얼굴도 하얗게 변하였다. 달 속으로 빨려드는 것처럼 어린 왕자의 몸이 가볍게 솟아올랐다. 빨간 머리가 바람에 흩날리며 달빛 속에 녹아드는 것 같았다. 어린왕자의 가슴에는 제비꽃이 수줍은 듯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아침햇살에 희미해진 별들의 호위 속에 어린 왕자는 별빛처럼 빛을 발하며 아득한 공간으로 사라져 갔다.
만남은 떠남을 전제하고 추억은 세월 따라 묻혀가지만, 막상 이별을 긍정하기엔 남겨진 슬픔이 너무나 컸다.
사랑은 소유가 아니고 기쁨이라지만 막상 운명을 받아들이기엔 남겨진 아쉬움이 너무나 컸다.
아! 어린 왕자, 너의 별의 가장 멋진 왕자님과 너의 별의 가장 아름다운 꽃으로 내가 만난 천사들을 나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안녕, 어린 왕자. 안녕, 제비꽃.…
아침 햇살이 비추기 시작했을 때, 나는 산을 내려섰다. 마악 눈을 부비는 풀들이 놀라 후두둑 잎새를 일으키고 짙은 안개에 잠겨 있는 산자락은 무심한 듯 나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밤사이의 기억들이 순서 없이 나열되고 떨어지는 속도만큼 내 머리는 뒤죽박죽 혼란스러웠다.
얼마나 걸었을까? 옷자락을 잡아끄는 가시덩굴을 애써 뿌리치고 발을 거는 돌부리에 몇 번이나 휘청거렸다.
노래를 시작하는 계곡의 분주함이 잠시 나를 붙들고 시원하게 펼쳐진 솔밭을 지나갈 때였다.
허름한 움막 한 채가 눈에 들어왔다. 사람이 살고 있을까? 약간의 호기심이 동하며 고개를 돌렸다. 열려진 문 사이로 누군가를 보았던 것 같다.
“이보우, 젊은이.”
불현듯 들려오는 소리에 나는 발길을 멈췄다. 문턱을 넘으며 한 노인이 연신 손짓을 하고 있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나는 그냥 지나치는 것도 실례겠다 싶어, 움막으로 다가갔다.
노인은 온화한 눈길로 산을 내려서는 나의 위아래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던져지는 눈빛이 내게는 무겁게 느껴졌다.
“화야산에 갔다가 비박을 하고 내려오는 길입니다.”
변명하듯 묻지도 않은 말을 던졌다. 노인은 여전히 미소를 거두지 않고 손짓으로 자리를 권한다. 열려진 문으로 경계를 알 수 있을 뿐 안과 밖이 그리 달라 보이지 않았다. 등산화를 벗고 있는 등뒤에서 노인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참 이상한 일도 다 있소. 새벽에 잠이 안 와 솔밭을 걷고 있는데 산너머에 파란 불꽃이 하늘로 올라가지 않겠소. 땅으로 떨어지는 게 아니고 오히려 하늘로 치솟더란 말이요.”
나는 그것이 어린 왕자일 거라고 생각했다. 노인에게 어린 왕자를 얘기할까 하다가 그만 두기로 했다. 어차피 믿지도 않을 것이고 혹 믿는다 해도 나의 어린 왕자를 섣부른 화젯거리로 삼을 기분이 아니었던 것이다.
대꾸 없는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노인은 갑자기 생각난 듯 내 손을 잡고 자리에 앉힌다. 허름한 방안에는 촛불이 하나 켜져 있었다. 조그마한 옷장, 낡은 라디오, 흩어진 책 몇 권이 눈에 들어왔다. 노인은 촛불 하나를 더 켰다. 구석에 감춰진 그릇 몇 개와 소주병이 수줍게 모습을 드러냈다. 초라한 살림살이. 나의 눈을 통한 첫 느낌은 궁핍한 촌로의 생활, 바로 그것이었다. 설사 촛불을 하나 더 켠다 해도 나의 느낌을 바꿀 그 무엇이 나타날 것 같진 않았다.
노인은 나의 기분을 의식한 듯 술과 새우깡 봉지를 어색한 웃음과 함께 가운데로 내밀었다.
“어제는 어찌나 달이 밝던지…”
노인과 나는 이야기를 더해 가면 갈수록 다다를 수 없는 일종의 심연 같은 것을 느꼈다.
“무엇이 되고 싶소?”
“글쎄요…”
“산에서 무슨 생각을 했소?”
“많은 것을 생각합니다.”
“왜 산을 찾소?”
“언제나 포근하게 절 받아 주니까요”
나는 곤혹스러움을 느꼈다. 50대의 노인과 대화를 나눈 기억이 거의 없고 더구나 흔들리는 촛불 아래 노인과 나 오직 둘 뿐인 것이다. 그리고 나는 좀처럼 내 마음을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그런 성격인데, 이 노인은 나의 속을 들여다보고 싶어하지 않은가.
노인은 불편한 나의 마음을 아는지 잠시 화제를 돌린다.
“젊은이, 참 대단하이. 혼자서 산을 다닌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텐데, 혼자 밤을 지새니 무섭지는 않던가.?”
“예, 별로 무서운 줄은 못 느꼈습니다.”
“허, 참 용감한 젊은일세”
노인의 감탄사가 이어질수록 나의 마음은 오히려 초라함으로 채워져 갔다.
남이 자기를 인정해준다는 것은 분명 즐거운 일이지만 눈에 보이는 칭찬이 그렇게 어색할 수 없었다.
아부와 자만을 극히 싫어하는 나는 종종 선의의 칭찬마저 오해할 때도 있었으니까……
나는 이곳의 계곡이 아주 좋았다고 말했다. 바위를 휘감고 도는 물살이 지리산의 웅장함이나 설악산의 날카로움을 능가할 수는 없지만 은은한 감미로움을 쉽게 잊을 수 없을 것이라고, 그것은 내 진심이었다.
노인의 말을 듣고 내가 길을 잘못 내려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곳은 고동산인데 화야산 우측으로 이어진 4백 고지의 아담한 산이라고 했다. 여러가지 생각이 나를 이 곳까지 이끌고 왔었나 보다. 어쩐지 산을 내려서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린다 싶었다.
노인은 내 손금을 보자고 했다. 나는 좀 꺼렸지만 노인에게 실례를 범하고 싶지는 않았다. 관상을 보겠다고 내 얼굴을 찬찬히 살필 때도 얼굴을 돌리지 않았다. 나는 나름대로 맹랑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차피 점 따위는 믿지 않는다. 당신이 어떤 수를 쓴다 해도 나의 마음을 읽을 순 없을 것이다. 나는 범죄를 부인하는 죄수처럼 마음을 꼭꼭 닫아걸었다.
“젊은이의 가슴엔 불길이 너무 강해”
“불길이라고요?”
“불길이 강하다고 능사는 아닌 걸세. 작은 불씨로도 천하를 밝힐 수 있는 것이네”
무슨 대답을 듣고 싶은 걸까? 나는 가슴이 답답해지는걸 느꼈다.
“지금은 웃는 법을 배워야 할 때요.”
노인은 사뭇 진지한 표정이다. 나는 아까 한 말이 후회되었다. 내가 대학생이란 것과 학생시위에 대한 어중간한 대답이 오히려 노인에게 말꼬리를 잡히게 된 것 같았다.
단지 몇 잔의 술 탓은 아니었으리라. 노인은 현재의 정치와 사회상황에 대한 나의 의중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처음에 나는 촌로의 단순한 호기심이겠거니 하고 가볍게 넘어가려 하였다.
“데모요? 필요악이죠. 적당히 쓰면 약이 되고 과하면 독이 되는 거죠. 본분은 공부하는 거니까. 주객은 전도되면 안되겠죠.”
나는 노인의 질문에 정답임 직한 말을 했다고 나름대로 생각했다. 그런데 이 노인이 내 마음의 무엇을 보았기에 나를 이리도 궁핍하게 하는지…….
내가 잠자코 침묵을 지키고 있자, 노인이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왜 자신을 속이고 있는가? 나를 촌 늙은이라고 무시하는 겐가?”
“예, 저 그게 아니고…”
나는 뜻밖의 호통에 무척 당황했다.
1988년은 기만과 비굴의 세월이었다. 최소한 정의를 지켜보던 살아 있는 눈으로는…….
평화적 정권교체의 허울로 하늘을 눈 가리고 올림픽의 휘황찬란함으로 지상의 귀를 틀어막았다.
역사의 심판을 기다리기엔 우리의 피가 너무나 붉었다. 하늘의 심판을 기다리기엔 우리의 눈물이 너무나 뜨거웠다.
그래서 우리는 통곡을 한 것이다. 거리에서, 학교에서, 철창에서,
하늘을 아버지로 땅을 어머니로 우리는 착한 아들이고 딸이고 싶었다. 눈멀고 귀먹은 어버이 앞에 그래도 우리는 귀염받는 자식이고 싶었다. 꽃향기로 전해지고 이슬 먹고 살아가던 우리의 진리가 무슨 죄를 범하였는가?
영욕과 허상을 쫓는 무리들이 진리의 눈과 귀를 두려워하여 사나웁게 휘몰아쳤다.
통곡의 세월. 길 잃은 별들이 슬픔에 잠겨, 설움에 잠겨, 노여움에 잠겨, 목놓아 통곡하였다.
달리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나는 봄날의 어지러움을 회상하였다. 쫒기는 함성, 진동하는 군화소리, 뒤덮은 최루가스, 춤추는 지랄탄, 손수건을 건네주는 너의 눈에도 새빨갛게 꽃물이 흘러 내렸지.
통곡의 세월에 눈물 많은 너와 나는 틀림없이 친구였고 형제였고 애인이었다. 학을 수놓은 그 손수건의 주인도 백마 타고 오는 기사를 기다렸을 수줍은 소녀였을 것이다.
누가 이 가냘픈 소녀에게 돌멩이를 쥐게 했는가? 누가 이 소녀에게 피눈물을 흘리게 했는가? 나는 극도로 격한 감정이 되었다.
“별처럼 생생한 앞서간 절규를 어찌 외면합니까? 위선과 억압의 무리들이 탈을 바꿔 썼을 뿐, 여전히 진리를 기만하는데 어찌 침묵할 수 있겠습니까?”
소나기처럼 한바탕 퍼붓고 나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 내렸다.
‘이게 무슨 꼴이람. 이 노인이 대체 뭐 길래 이리도… ’
나는 왠지 모를 분함을 느끼며 도저히 마음을 진정할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젊은이, 미안하네. 사실은 자네가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우연히 자네의 노트를 보게 되었네. 그래서 자네가 마음을 감추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왜 내가 촌 늙은이라 그랬나?”
노인은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혼자 여행을 다닐 때마다 늘 한 권의 노트를 빠트리지 않는데 부끄러운 일이지만 시를 쓰고 싶기 때문이다.
그 때의 노트에는 소위 조국이니 사랑이니 따위와 함께 학생시위와 관련된 것이 많이 있었다. 대부분이 불 속에 던져지는 변변찮은 것이지만 마음을 들키기엔 충분한 것이었다. 노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별 하나가 졌다고 우주가 노래를 멈추진 않는다네. 우주는 별을 구별하지 않는다네. 별에는 두 종류가 있지. 하나는 빛나는 별이고 다른 하나는 빛나지 않는 별이지.”
“이름 없는 별을 기억하게, 우주를 볼 수 있고 노래를 들을 수 있는 별은 빛나지 않는 이름 없는 별인 것이야. 빛나는 별은 제 빛에 취해 황홀해 있을 뿐, 우주를 진정으로 알지 못하는 법일세.”
노인의 이야기는 내 가슴에서 하나의 골을 이루고, 고동산의 물살처럼 은은하게 흘러내렸다.
노인은 끝내 자기 신분을 밝히지 않았다. 성이 장이라는 것밖에는, 내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깊은 사연이 있어 고동산에 발을 들이게 됐으리란 것 뿐이다.
노인은 내게 시 한 수를 읊어 주었는데 시구가 무척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지금도 내 가슴에 울리는 노인의 즉석시를 여러분에게 소개하고자 한다.
내가 표현하는 별
내가 표현하는 별이 있다면
아름다운 강산 위에서 표현하는 별이고 싶다.
별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생각하는 별밖에 없다.
떨어지는 별도 함께 웃어주자.
내가 나라를 위해서 생각하는 마음을 변치 않는다.
조국통일을 위한 마음을 변치 않는다.
나는 고동산에서 생각하고 싶다.
별이 넘쳐도 갈 곳은 고동산 밖에 없다.
--고동산에서 장노인--
정오의 태양이 높이 떠 있고 어제처럼 강물은 거침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흔들이는 배와 같이 내 마음도 이리 저리 흔들리고 간밤의 기억들이 꿈결인 양 느껴졌다.
가만히 주머니 속에 손을 넣었다. 알밤 몇 개가 집혀왔다.
「누가 더 이뻐요?」
강의 수면에 은아의 고운 얼굴이 비친다. 장미처럼 아름답다. 물살에 구겨지며 장미가 고개를 꺾었다. 장미가 꺾어진 자리에 수줍어하며 제비꽃이 피어올랐다.
흔들리는 강물 속에 별똥별이 길게 꼬리를 끌며 사라졌다.
어린왕자의 하얀 얼굴이 웃음을 짓고는 희미해졌다.
가재, 장노인, 제비꽃, 어린왕자, 화야산이 맺어준 이 모든 것들을 한 순간에 이해하기엔 너무나 벅찬 것이었다.
강물은 변함없이 흘러가건만 강을 건넘으로써 모든 것이 변하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