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탓에 사랑하는 아가씨를 뭍에 빼앗기고 만 서인도 제도 총각들의 자조적인 노래지만
무겁고 느릿하게 어두운 감정으로 부르는 대신 카리브해의 눈부신 하늘 아래서 부르기에
안성맞춤인 밝고 명랑한 멜로디를 경쾌한 칼립소리듬에 실어 노래했다.
단순하게 코믹하다는 느낌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강렬한 에너지와 함께 애틋한 감정을
동반하는 노래라 할 수 있다.
칼립소가 미국으로 흘러 들어간 것은 1937년 경이었다 한다.
"Somebody Stole My Wedding Bell"이란 곡이 칼립소 형식으로 최초로 소개되었지만 관심을
끌지 못 했고 1950년대 되어서 비로소 해리 벨라폰테의 등장으로 세계적 관심을 끌었다.
그는 어릴 적 부모와 함께 수년을 자메이카에서 살았으며 그후 미국 뉴욕에 돌아와 유년기의
경험을 잊지 못해, 서인도 제도의 음악 특히 칼립소의 연구와 녹음에 집중했다 한다.
1956년 'Calypso' 앨범을 발표, 전미차트에 무려 31주간 정상을 차지하면서 칼립소 붐을
정점으로 끌어올렸다.
지금도 칼립소를 대표하는 2곡의 명작 'Jamaica farewell' 'Day-o(Banana boat)'가 그
음반에 수록되어있다. 이 곡들의 전국적 히트와 함께 해리 벨라폰테에겐 '칼립소의 왕'
(The king of Calypso)이란 칭호가 붙었다.
1959년 그는 클래식 음악의 전당 카네기홀에서 이틀 간 정신장애아들을 위한 자선공연을
가졌다. 이 공연을 프로듀스한 '밥 볼라드'(Bob Bollard)는 벨라폰테가 머뭇거렸던,
'성공 가능성이 있으나 위험한 도박'을 제의한다.
그건 카네기 공연실황을 한번 녹음해보자 실황음반을 내보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해리 벨라폰테의 공연 가운데 생생한 순간을 가장 잘 포착했다는 평가를
얻은 본 앨범 2장 짜리 LP가 나올 수 있게 되었다.
이 음반은 벨라폰테 개인의 영광을 넘어 라이브 앨범의 역사에 있어서도 획을
그은 작품이라는더 큰 영광을 수확해냈다. 당시 가수이자 배우이기도 했던 그만의
청중 흡인력이 공연장의 열기를 타고 전편을 질주한다.
57년 전인 그 시기에 이런 분위기의 실황앨범이 가능했다는 자체가 놀랍기만 하다.
그것이 녹음기술에 힘입음 것이었음은 앨범이 이듬해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베스트
엔지니어링 상을 받은 사실로 입증된다.
라이브의 생생함과 관련하여 앨범 마지막 곡이자 공연가수와 객석 상호간의 피드백과
혼연일체가 최고조로 달한 노래 'Matilda'를 잊을 수 없다.
밥 볼라드는 그것을 단적으로 "카네기홀 전체가 노래하고 진동하고있다"고 묘사했다.
이 곡은 국내에서도 1970년대까지 줄기차게 음악다방과 라디오전파를 통해 울려 퍼졌다.
해리 벨라폰테가 칼립소와 서인도제도 음악만 전문으로 다룬 건 아니었다. 이 앨범
이전부터, 흑인의 민요를 중심으로 하되 미국인들이 소화 가능한 민요라면 흑백과
국적을 따짐 없이, 입에 붙이고 대중화를 위한 진전을 꾀했다.
미국의 흑인영가 'When the saints go marcing in', 미국 남부의 흑인 블루스 'Cotton
fields', 이스라엘 민요 'Hava nageela', 아일랜드 민요 'Danny boy', 멕시코 민요
'Cu cu ru cu cu paloma' 등은 이미 전작들에서 불렀던 노래들이다.
국내 음악교과서에서 실리고, 교실에서도 불려졌을 만큼 이 노래들은 이제 민요의
범주를 떠나 대중음악의 고전으로 위상을 굳혔다.
해리 벨라폰테 이전에 이미 친근한 레퍼토리임에도 그가 이 곡들의 세계적 대중화의
선두 역할을 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에 대중화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민요의 오리지널리티를 훼손했다는 일각의 비판은 쉽게 무력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