밧지름해수욕장 바닷물에서 더위를 식힌 뒤 옹진농협 덕적지점을 출발해 진리 갈림목(면사무소 2.2km)을 거쳐 다시 비조봉 정상에 올라선 것은 오후 7시 반, 막 해가 떨어질 무렵이었다. 하루종일 대지를 숨김없이 밝혀주던 해는 서서히 서쪽 바다로 내려앉으며 더욱 강렬한 빛과 색을 띠었다. 그러나 바다 위에 두텁게 깔린 구름은 바다를 송두리째 끓어오르게 할 듯 강렬한 기세를 보이던 저녁 해를 날름 삼켜버렸다.
해가 떨어지자 비조봉 정상에 자리잡은 팔각정은 부르르 떨었다. 남쪽에서 불어대는 강한 바람은 태풍을 몰고 오는 듯 불안케 했다. 그 어수선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 준 게 밤하늘의 별이었다. 북두칠성뿐 아니라 은하수까지 비단자락을 펼쳐놓은 듯 밤하늘을 아름답고 곱게 장식하고 있었다. 간간이 유성이 꼬리를 길게 늘어뜨린 채 바다를 향해 곤두박질치고, 덕적군도를 형성한 10여 개 섬들의 갯마을에서 새어나온 불빛이 밤바다에 수를 놓아 아름답고도 동화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 1. 비조봉 서릉 상의 조망대. 2. 벗개고개에서 서포리로 향하는 제인악우회원들. 일흔을 눈앞에 둔 정명호 회장(앞줄 오른쪽)이 활기차게 걷고 있다.
“산을 8년 동안 다니면서 가지고 있던 로망이었어요, 꿈. 앞으론 퇴근길에 청계산이라도 올라 해봐야겠어요.”
음력 6월 26일. 달이 거의 보이지 않는 그믐에 접어들고 있지만 수많은 별들이 새카만 밤하늘을 수놓은 비조봉 정상은 박병욱씨가 여러 해 동안 간직해 온 비박 산행에 대한 꿈을 현실로 이루게 해주었다. 거기다 우리는 복중(伏中) 에 호사로운 복(福)을 누리고 있었다. 산 아래는 ‘열대야’로 인해 잠 못 이루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인데 비조봉 정상은 강하게 불어대는 바람에 오히려 온몸이 오싹오싹할 정도로 시원했다.
“아무래도 단단히 대비해 놓는 게 낫겠는데. 이러다 한바탕 퍼부으면 난리 아니겠어?”
남쪽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처음에는 시원하다 싶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게 아니다 싶어졌다. 바람은 미친 듯이 불어대고 동쪽 하늘이 마른번개가 번쩍이는 것이 곧 비바람이 몰려올 분위기다. 베개삼았던 타프를 펼쳐 팔각정 난간과 기둥 여기저기에 묶고 바싹 당겨놓았다. 타프 높이는 누운 상태에서 팔을 뻗으면 닿을 정도. 바람이 강하게 들이칠 때면 코에 닿을 정도로 낮아지고 펄럭이는 소리는 귀청이 떨어져 나갈 정도다. 그런데도 옆에 누운 정정현 기자는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눕자마자 코를 드르렁거리면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1. 비조봉 능선에는 곳곳에 쉼터가 마련돼 있다. 2. 해당화 꽃이 화사하게 피어 있는 벗개고개 도로. 3. 비조봉 팔각정. 새벽녘 내린 비가 팔각정 안까지 퍼부어 타프 밑까지 적셨다. 4. 밧지름해수욕장 솔밭 캠프장.
깜빡 잠이 들었다가 타프 펄럭대는 소리에 일어나 보면 밤하늘에 은하수는 소리 없이 잘도 흘러간다. 그렇게 서너 번 깨었다 잠이 들었을까, 새벽 5시가 조금 넘자 타프를 툭툭 건드리는 빗방울 소리가 들리고, 20분쯤 지나자 바람에 날아온 빗줄기가 팔각정 안으로 파고들어 타프를 호되게 두드려댄다.
새벽 3시경 하늘이 새카맣다 싶었을 때 탈출할까 망설이다 그냥 침낭을 뒤집어쓴 게 후회스러워졌다. 이제 어찌하랴,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그런데도 무겁게 눌러대는 눈꺼풀 무게에 또다시 깜빡.
“부럽습니다. 이렇게 시원하게 여름밤을 지내시고. 여기서 비박하시는 걸 보니 전문 산악인들이신가 보네요.”
한 마리 새 등에 올라앉아 밤하늘을 날아다닌 셈
새벽 6시,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는데 벌써 우산을 쓴 채 산정을 올라온 등산객이 팔각정에 천막 쳐놓고 자는 우릴 보곤 “좋겠다” 한마디한다. ‘누워 보세요. 정말 좋은가’ 속으로 이렇게 말하곤 “정말 좋은 밤이었다”고 지극히 상투적인 답변을 한다.
오리무중(五里霧中)이 아닌 오보무중(五步霧中). 그래도 해무(海霧)가 걷히지 않을까 기대하며 버티기를 두 시간. 그러다 포기하고 오전 8시 하산길에 들어간다.
풀과 나뭇잎은 새벽녘 내린 비를 듬뿍 묻히고 있다가 팔과 다리에 뿌려댈 때면 반갑고, 안개 속에 핀 여름꽃은 유난히 싱그럽고 아름답다. 그런 분위기를 누리다 앞을 가로막은 바위에 올라서자 안개가 슬며시 걷히고 섬 바깥쪽 바다가 드러난다. 슬며시 드러났다 사라지고, 또다시 나타나곤 하는 섬들은 하나 하나 이어도요 파랑도였다. 안개는 도술을 부리며 몽환적 풍광을 연출했다.
▲ 1. 산길 곳곳에 화사하게 피어 산객의 마음을 빼앗은 말나리 꽃. 2. 능동 자갈마당. 3. 서포리해수욕장 오토캠프장.
부연 안개를 헤치며 능선을 따라 서포리 갈림목을 지나 암릉에 올라서자 발아래 노란 코스모스와 달맞이꽃이 만발해 있다. 하늘이 구름꽃이요, 땅 위의 우리도 꽃이다 싶어지자 얼굴에 미소가 맴돈다.
오전 9시에 접어들자 하늘이 터지고 해무도 하늘 높이 올라가면서 산은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소나무 우거진 산릉은 선경의 극치를 보여주고, 바다는 덕적군도의 섬들로 치장한 비단 치마폭인 양 반짝인다. 비조봉 팔각정도 모습을 드러냈다. 한 마리 새가 나는 형상, 우리는 그 새 등을 타고 밤새 바다 위를 날아다니다 이제 뭍으로 내려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