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삼매(海印三昧, skt. sgaramudr-samdhi)>
해인(海印, skt. sgara-mudr)은 비유이다.
큰 바다에 바람이 그쳐 파도가 고요해지고 물이 맑아지면
온 세상의 모든 것이 해면에 비추어지지 않는 것이 없다.
바다가 잔잔하면 삼라만상이 그대로 해면에 나타나 그것이 마치
바다에 그대로 찍은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해인이다.
그리하여 해인이란 삼매라는 수행법에 의해
들어선 경지를 의미하는 용어이다.
모든 번뇌가 사라진 부처님의 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해인에서 ‘해(海)’는 바다란 말인데, 마음을 뜻하고,
‘인(印)’은 도장 찍는다는 말인데, 불가에서는 “인(印)친다”라고 말한다.
해인(海印)은 바다에 도장 찍는다는 말이 아니고,
바다(마음)에 삼라만상이 비친다는 말이다.
즉, 진리의 바다에 망상(妄想)이 다하고, 마음이 맑아짐에
만상(萬象)이 함께 나타난다. 대해(大海)는 바람에 의해 물결을 일으키되
만약 바람이 자면 맑아져서 현상의 나타나지 않음이 없음과 같다.
초기경전에서도 4선 8정(四禪八定)이나 삼삼매(三三昧) 등
중시되지 않은바 아니나 대승경전에서는 무량한 삼매가 수없이 나타난다.
특히 부처님의 깨달음을 전하고 있는 모든 교설이
삼매에 들고 나서 설해지고 있는 것이다.
삼매(三昧)란 고요함이다. 산란한 마음 망령된 생각을 없애고
부동의 결정심을 내어 마음을 한곳으로 집중시켜
번뇌 망상을 다스리는 수행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해인삼매, 법화삼매, 능엄삼매,
일광삼매, 월광삼매 등 백천 삼매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이름은 달라도 한 가지 마음을
가라앉히는 방법이므로 하나만 통하면 모두 다 통하게 돼 있다.
모든 삼매 가운데 해인삼매를 가장 뛰어난 삼매라고 하며,
해인삼매를 불지(佛智)로 보고 있다.
즉. 부처님의 지혜가 해인(海印)이라는 뜻이다.
해인삼매(海印三昧)란 부처님이
<화엄경>을 설명하면서 도달한 삼매의 경지,
즉 부처님께서 증득하신 바로 그 삼매를 말한다.
이처럼 부처님의 마음속에서는 분별의 파도가 일지 않아
맑고 고요하여 삼라만상이 한 번에 비추어져 삼세의 일체법이
모두 빠짐없이 나타나는 부처님의 삼매 경계를 해인삼매라고 한다.
불교에서 삼매는 지혜를 얻기 위한 방편으로 여겨지기도 했으나
그 자체가 지혜까지도 포용된 의미를 지니기도 하면서,
삼학(三學)의 하나로 매우 중시돼 왔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일체 모든 삼매의 근본이며 그 삼매를
다 포섭한다는 것이 해인삼매이다.
해인삼매(海印三昧)는 <화엄경>의 전체적인 선정을 말 한다.
신라의 고승 명효(明皛) 스님이 지은 <해인삼매론>에 따르면,
해인삼매는 수행자로 하여금 물러섬이 없는 경지에 속히
도달하게 하는 삼매로, 작은 방편을 써서 큰 이익을 얻게 한다고 했다.
이는 <화엄경>에 나오는 ‘십지품(十地品)’의 요지이자,
<화엄경>의 핵심사상이다.
해인삼매는 <화엄경>의 모든 삼매를 포섭하는 총정(總定)으로까지
주시되고 있다. 입ㆍ출정 후에 설해지는 다른 경전과는 달리
<화엄경>은 해인삼매 속에서 설해진 것으로 주지되고 있다.
즉, 바다에 풍랑이 쉬면 삼라만상 모든 것이 도장 찍히듯
그대로 바닷물에 비쳐 보인다(印象)는 뜻으로
모든 번뇌가 끊어진 부처님의 정심(定心)에는
만법의 실상(實相)이 명료하게 비친다는 뜻이다.
즉, 모든 번뇌가 사라진 부처님 마음속에는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든 업이 똑똑하게 보이는 것을 의미한다.
곧 부처님께서 얻은 삼매(三昧)의 이름이다.
이에 법을 관조(觀照)함을
바다에 만상이 비추는 것에 비유해 이르는 말이다.
결국 부처님 지혜에 이르면 우주의 모든 만물 실상을
깨달아 알게 됨을 의미한다.
이는 <화염경>에 나오는 해인삼매(海印三昧)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진여본각(眞如本覺)을 말한다.
진여본각이라 함은 일체를 깨달아서 아는 부처님의 지혜를 말한다.
본래 진리의 세계이며, 곧 비로자나불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해인삼매는 <화엄경> 이외의 다른 경전에도 물론 보인다.
예를 들면, <대집경>, <보적경> 등 많은 경전에 설해져 있다.
그러나 해인삼매는 <화엄경>의 세계를 드러내는 대표적인 삼매로
간주되고 있다. 법보사찰로 유명한 가야산 해인사(海印寺)의 이름이
이 말에서 유래됐다.
특히 <화엄경>에서 광명의 부처님이라 불리는 비로자나불의
삼매 속에서 펼쳐진 세계가 해인삼매이다.
그리고 부처님이 <화엄경>을 설할 때에 취했던 삼매(三昧) -
번뇌가 끊어진 부처님 마음 가운데 삼세의 모든 법이 뚜렷이 나타났다
해서 일컫는다.
이것이 또 대원각(大圓覺)의 경지이기도 하다.
바다에 풍랑이 쉬면, 삼라만상이 모두 고요한 바닷물에 비치는 것과 같이,
번뇌가 끊어진 부처님 정심(定心) 가운데에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법이 명랑하게 나타나는 것을 해인삼매 혹은 해인정(海印定)이라 한다.
이에 비해 내 마음의 바다가 출렁이고 비뚤어 있으면
삼라만상이 비뚤게 비쳐 바로 볼 수가 없다.
따라서 수행을 통해 내 마음의 바다를 고요하게 해야
만상(萬象)을 바로 볼 수가 있다. 그리고 모든 부처님들이
해인삼매 안에 있고, 우리 또한 해인삼매를 떠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여러 부처님이나 우리의 모든 일상생활이
그대로 비로자나불이라는 크나큰 바다 위에 있는 것이다.
<화엄경>의 세계관은 일심법계(一心法界)로 요약된다.
온갖 물듦이 깨끗이 사라진 진실 된 지혜의 눈으로 바라본
세계가 일심법계이다.
그 세계는 객관적 사실의 세계, 영원한 진리의 세계이다.
그러한 세계는 모든 번뇌가 다한 바른 깨달음의 경지에서 펼쳐진다.
깨달음의 눈, 부처의 눈으로 바라본 세계가 바로 일심법계이다.
일심법계에는 물질적 유기세계(有機世界, 器世間), 중생들의 세계(衆生世間),
바른 깨달음의 의한 지혜의 세계(智正覺世間)가 있는 그대로 다 나타난다.
마치 바람이 그치고 파도가 잔잔해져 바다가 고요해지면
거기에 우주의 만 가지 모습이 남김없이 드러나듯이,
이러한 경지가 곧 해인삼매(海印三昧)이다.
우리들 마음의 바다에서 번뇌라는 가지가지 물결이 일고 있는 것은
지혜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이라는 바람’이
불고 있기 때문이다.
그 어리석음의 바람이 잦아들고 번뇌의 물결이 쉬면
참 지혜의 바다(海)에는 흡사 도장을 찍듯이(印) 무량한 시간,
무한한 공간에 있는 일체의 모든 것이 본래의 참모습으로 현현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해인삼매이자 부처님이 이룬 깨달음의 내용이며,
우리들이 돌아가야 할 참된 근원이요 본래 모습이다.
<해인삼매론(海印三昧論)>이란 신라의 명효(明皛) 스님의 저서이다.
명효 스님은 의상(義湘) 대사의 <화엄일승법계도>를 모방해서
7언 28구 196자의 게문으로 57각의 회독문(回讀文:그림 모양에 따라
빙 돌아가며 읽게 된 글)의 도인(圖印:그림처럼 된 문장)으로
<해인삼매론>을 지었다.
여기서 도인이 의미하는 바를 풀이하면서
<화엄경>의 중요한 내용을 하나하나 간추려 짤막하게
설명해 가는 문답형식으로 구성했다.
명효(明皛) 스님은 생몰연대가 확실치 않으나
7세기 말~8세기 초의 신라시대 승려로서, 명효(明曉)라고도 한다.
당(唐)나라에서 유학하다가 700년(효소왕 9)에 신라로 귀국했다.
그는 귀국에 앞서 당의 번역가인 이무첨(李無諂)에게
밀교경전인 <불공견삭다라니경(不空羂索陀羅尼經)>의
새로운 한역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이전의 번역을 수정한 새로운 번역본이 나오자
이것을 가지고 신라로 돌아왔고, 신라에 와서
<해인삼매론(海印三昧論)>을 저술했는데,
이는 <화엄경>을 토대로 한 것이었다.
<화엄경>은 7처8회로 구성돼 있고(60화엄),
80화엄은 7처9회여서 다소 다르나, 명효 스님이 지은
<해인삼매론>은 60화엄에 의거한 것이므로 7처8회이다.
각 회마다 설법에 들어가기에 앞서 부처님은 특별한 선정에 들어간다.
<해인삼매론>은 서문, 서시(序詩), 논(論), 해인삼매도(海印三昧圖),
게송, 회향게(廻向偈) 등으로 구성된 짧은 저술이다.
7언 28구 196자로 된 게송을 도인(圖印)에 합쳐서 만든 반시(槃詩) 형태이다.
반시(槃詩)는 불가(佛家)의 시(詩) 형태의 글을 말한다,
<법성게>의 7언 30구 210자로 이루어진 시가 바로 반시이다.
명효 스님은 <해인삼매론>에서 소박하고 교훈적인 글을 담아
수행자의 여설수행(如說修行)을 강조했는데,
여설수행은 부처의 교설과 같이 수행하는 것,
즉 부처님이 설한 대로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화엄사상을 밀교적 시각에서 해석한 특징이 보인다.
따라서 명효 스님의 불교사적 위치는 화엄과 밀교의
겸학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해인삼매론>의 대의에서는 수행의 목표는 크고 깊은 도리를
자기 안에 실현시키는 것이므로 도(道)는 찾아 행해야 하고,
이(理)는 알아 제 것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해인삼매는 수행자로 하여금 물러섬이 없는 경지,
즉 불퇴전의 경지에 속히 도달하게 하는 대삼매를 이루어,
적은 방편을 써서 큰 이익을 얻게 하는 것이라고 규정했으며,
이 책의 도인(圖印)은 모든 경(經)의 깊은 뜻이 다 간직돼 있고,
모든 부처님의 공덕이 두루 다 포함돼 있는 다라니라 했다.
이 다라니의 본체는 일심(一心)이고, 그 표현은
이지(理智)와 사지(事智)의 두 가지 지(智)이며,
그 작용은 응신과 화신의 두 가지 몸으로, 두루 이 세상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을 수용해 중생을 교화하되,
그 교화기능이 멈추는 날이 없는 것으로 봤다.
그리고 이 책의 중심 내용인 게송을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생사와 열반은 다른 것이 아니요, 번뇌와 보리의 몸은 둘이 아니네.
열반이 가까이 있어도 아는 이 없고, 보리가 가까이 있어도 매우 보기 어렵네.
몸과 마음은 본래 생멸함이 없고, 모든 법(法)들이 또한 그와 같도다.
생함도 멸함도 주함도 없는 곳, 이것이 곧 보리 열반의 몸일세.
지자(智者)는 하나 안에서 일체를 알고, 일체의 법 안에서 하나를 아니,
무량한 법이 곧 그 하나의 법이요, 하나의 법이 곧 무량한 법일세.
하나의 불국토가 시방의 나라들을 가득 채우니,
한 나라의 본형(本形)은 또한 크지도 않네.
한 불국토에 시방세계 다 들어 있으나 모든 세계들이 겹치는 일이 없고,
한 티끌 속에 시방의 나라들이 들어 있고, 모든 티끌 속에 또한 그와 같으나,
한 티끌이 늘거나 커지는 것이 아니니, 모든 나라의 본래 모습이 항상 여여(如如)한 까닭일세.
헤아릴 수 없이 광대한 시간을, 지자는 곧 한 생각이라고 깨달으니,
한 생각이 일찍이 길게 늘어난 일이 없고, 긴 시간이 또한 조급히
줄어든 일도 없네.
시방을 찾아다니며 성불하기를 구했으나, 몸과 마음이 예로부터
성불됐음을 몰랐고,
지난날 정진하며 생사를 버렸으나, 생사가 열반인 줄을 모른 것일세.
이와 같이 설명을 하면서 명호 스님은 이 법문이 능히
모든 보살의 혜안(慧眼)을 열고 소원을 성취시키며,
정토에 태어나고자 하는 모든 수행자들이 간단없이 이 법을 타고 가면
속히 불과(佛果)를 얻을 수 있음을 강조했다.
현재 이 책이 국내에 판본으로 전해지는 것은 없으나
일본 측의 대장경 속에 그 원문이 수록돼 전하고 있다.
[출처] 블로그 아미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