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먹고 잠자면 깨칠 것을 어찌 남 탓하며 죄 짓는가 / 근일 스님
‘제법종연생 제법종연멸(諸法從緣生 諸法從緣滅)이라.’
모든 법은 인연에 따라 이뤄지고 인연이 다 되면 흩어집니다.
부처님 말씀에 소매 끝만 스쳐도 500생의 인연이라 했으니,
같은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인연이겠습니다.
이렇게 소중한 인연으로 만났으니 서로 돕고, 서로 존경하고, 서로 존중해야 합니다.
인연을 다 놓아버리면 고요하고, 인연에 자유로우면 해탈입니다.
해탈하고자 하면 깨우쳐야 하고 깨우치려면 그릇이 커야 합니다.
허공을 담고, 우주를 담을 수 있을 만큼 큰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비록 우주는 다 못 담더라도 지구는 삼킬 수 있을 만큼 큰 그릇이 된다면
사상과 이념, 종교와 민족이 다르다고 해서 싸우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큰 그릇을 만드는가.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신심불이요 불이신심(信心不二 不二信心)이라.’
믿는 마음은 둘이 아니요 둘 아님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있다 하더라도 힘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능히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하는데 그 힘은 곧 지혜입니다.
지혜는 정에서 비롯됩니다. 정은 선에서 비롯됩니다. 그래서 선정을 닦으라 했습니다.
그러나 참선만 한다고 해서 깨우치는 것은 아닙니다.
깨치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깨달음의 핵심은 버리는 것,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좋아하고 미워하는 마음, 너와 나, 생과 사를 모두 놓아버려야 합니다.
‘지도무난 유혐간택 단막증애 동연명백(至道無難 唯嫌揀擇 但莫憎愛 洞然明白)하리라.’
깨우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좋아하고 미워하는 마음, 나라는 생각까지도 다 놓으면 됩니다.
‘외식제연(外息諸緣)하고 내심무천(內心無喘)하면 가이입도(可以入道)라.’
밖으로 모든 반연을 쉬고 안으로는 헐떡임이 없어야 합니다.
참선을 하든 염불을 하든 일념으로 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비록 무엇인가를 구하는 마음으로 했다 하더라도 계속하다보면 일념이 됩니다.
그러다 일념도 녹아진 것을 삼매라고 합니다. 부처가 되려면 백천삼매를 통달해야 하는데,
그럼 언제 백천삼매를 통달하겠습니까. 하나를 하면 다하게 돼 있습니다.
일마다 삼매가 돼야 합니다. 어떠한 일을 하든 주어진 일이 수행이 돼야 합니다.
참선한다고 제 할 일을 제쳐둘 것이 아닙니다.
중국에 유명한 방거사가 있는데, 이 방거사는 중국 최고 갑부의 아들이었습니다.
훗날 단하 선사가 된 스님과 함께 과거 시험을 보러가다가
한 행각승에게 법문을 듣고 그대로 출가를 했습니다.
석두 스님 회상에서 출가를 했는데 큰스님에게 묻기를
“불여만법위여자(不與萬法爲侶者)는 시심마인(是甚麽人)이닛고” 했더니
석두 선사가 손으로 방거사의 입을 탁 막는데 그때 깨우쳐버렸습니다.
마조 선사를 만난 방거사가 또 물었습니다.
“불여만법위여자(不與萬法爲侶者)는 시심마인(是甚麽人)이닛고”하고 물으니
마조 선사가 ‘일구흡진서강수(一口吸盡西江水)면 즉향여도(卽向汝道)’라,
“네가 한 입에 서강수를 다 들이 마시면 일러주리라”했습니다.
이 말에 확철대오, 삼현삼요(三玄三要)를 다 깨우친 것입니다.
그렇다면 방거사가 깨친 것은 무엇인지 점검해 봅시다.
우주를 삼킬만한 큰 그릇 돼야
한 입에 서강의 물 (一口吸盡西江水) ,
우리로 치자면 한강수 정도인데 그것을 다 마시려면 그만큼 그릇이 커야 됩니다.
허나 한강수 정도로는 안 되지요. 적어도 지구를 삼킬 수 있을 정도의 큰 그릇이 돼야 합니다.
또한 작게는 입을 열 수 없어야 합니다. 한 생각 일으키면 전부 망상이라.
‘일심불생이면 만법무구(一心不生 萬法無咎)라.’
한 생각도 난바가 없으면 만법에 허물이 없다.
‘무구무법이요 불생불심(無咎無法 不生不心)이라.’
허물이 없으면 법도 없고 난바 없으면 마음도 없다.
무슨 마음이 없습니까. 좋다 싫다는 마음이 없고,
너와 나도 없고, 없다는 생각까지도 다 떨어지고 없으니 안 깨우치려야 안 깨우칠 수가 없습니다.
가장 빠른 길이 이 길입니다. 그러나 이러는 동안 마장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달마 스님께서는 네 가지 꼭 지켜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수행 뿐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도 이 네 가지를 꼭 지키라 했습니다.
그 첫째가 원망하지 마라입니다.
오늘 여기 계신 여러분들이 다른 법문은 다 잊더라도
이것만 실천하시길 바랍니다. 자녀들이 잘못하면 남편 탓을 합니다.
이것이 커지면 원망하는 마음이 됩니다. 무엇이든 반복하면 취미가 되고,
취미가 거듭되면 소질이 되고 소질이 거듭되면 업이 됩니다. 업이 되면 고치기가 어렵습니다.
나 하나쯤, 오늘 하루쯤이라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는 우주를 삼킬 만큼 큰 그릇이 돼야 합니다.
배고프면 밥 먹고 곤하면 자고,
그래도 충분히 깨우치는데 쓸데없이 허송세월하며 죄만 짓습니다.
둘째는 수연행(隨緣行), 인연 따라 살아야 합니다.
세째는 무소구행(無所求行), 구하는 바 없이 행해야 합니다.
네 번째는 여법하게 행하라 입니다. 여러분 모두 육바라밀, 십바라밀을 들어 잘 아실 것입니다.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가 육바라밀이고
여기에 방편, 원, 력, 지를 합하여 십바라밀입니다.
십바라밀은 외우기도 힘들지만 실천하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 십바라밀을 행하면 보살(菩薩)이 수행 과정에서 거치는
십지(十地)와 그대로 연결이 됩니다.
우선 보시를 행하면 초지보살인 환희지(歡喜地)입니다.
보시에는 재보시, 법보시, 무외시 세 가지가 있습니다.
무외시는 상구보리이고 재보시, 법보시는 하화중생입니다.
보시를 하면 주는 사람도 즐겁고 받는 사람도 즐겁기 때문에 보시를 하면 환희지라 합니다.
다음은 지계인데 단순히 오계, 십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경계, 팔풍오욕에 흔들리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계를 잘 지키면 깨끗하여 때가 없으니 떠날 이(離), 때 구(垢)를 써서 이구지(離垢地)라 합니다.
셋째로 인욕은 참는 것입니다.
참는 것은 괴로움만 참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도 참아야 합니다.
참으면 빛을 발하니 발광지(發光地)라 합니다.
보시, 지계, 인욕이 작심삼일 하지 않고 꾸준히 밀고 나가는 것을 정진이라고 합니다.
정진하면 염혜지(慧地)라, 불꽃이 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더 깊어지면 선정에 듭니다. 선정에 들려면 팔풍오욕에 흔들리지 않아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으니 난승지(難勝地)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지혜가 현전합니다. 지혜가 바로 드러난다고 해서 현전지(現前地)라고 합니다.
일상도 일념되면 깨닫는 길
다음으로 이때부터는 중생을 교화하러 나서도 허물이 아니니 원행지(遠行地)라 합니다.
그리고 부동의 원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경우라도 불퇴전하겠다는 원력이 있어야 하니 부동지(不動地)입니다.
아홉 번째는 힘이 있어야 함인데 선한 힘으로 중생을 제도해야 하므로 선혜지(善彗地)라 합니다.
십바라밀의 열 번째는 ‘지(知)’인데 이 지는
육바라밀의 여섯 번째인 지혜(智慧)와는 달리 ‘알 지(知)’자를 씁니다.
십지에 도달해야 비로소 세상 모든 진리를 알게 되는데
이것은 마치 법구름이 감로법을 내려 중생들을 이롭게 하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십지에 도달해야 중생들의 마음을 모두 알아 그들을 교화하니 그것을 법운지(法雲地)라 합니다.
여러분은 이런 원력을 세워 공부를 해야 합니다.
나에게 모든 진리가 있으니 여러분은 스스로의 그릇을 크게 키워야 합니다.
그릇을 크게 키우려면 믿음이 돈독해야 하고,
그러려면 힘이 있어야 하는데 그 힘은 버림으로부터 나옵니다.
나라는 생각, 안다는 생각을 다 버리면 됩니다. 다 버리고 무엇을 하든 일념으로 하면 정이 됩니다.
염불을 하더라도 처음에 비록 구하는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그것이 깊어지면 삼매가 됩니다.
그러니 염불을 해도 삼매에 들게 해야 합니다.
노는 입에 염불하지 모이면 남 이야기 하고 남 탓하지 마세요.
남 원망하는 것은 자기 얼굴에 침 뱉는 것과 같습니다.
밥 먹고, 잠자고 공부만 하면 누구나 충분히 깨칩니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도 백년 미만에 다 가는 것이 사람입니다.
정말 할 것이 무엇인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갈 것인지를 생각한다면 죄를 지을 시간이 없습니다.
공부하는 사람이 오직 주의해야 할 것은 말이니,
말을 적게 하고 비록 말을 하더라도 좋은 말을 할 지언 정 나쁜 말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昨夜夢中頭頭佛(작야몽중두두불)
今朝開眼物物薩(금조개안물물살)
遠看窓外處處主(원간창외처처주)
春來草葉念念一(춘래초엽염념일)
어젯밤 꿈속에는 머리 머리마다 부처이더니
오늘 아침 눈을 뜨니 물건 물건마다 보살이로다.
멀리 창밖을 바라보니 곳곳이 주인인데
봄은 풀잎 따라 오고 생각 생각은 하나로다.
이 법문은 고운사 조실 근일 스님이
2009년 4월 10일 조계사 대웅전에서 봉행된
법화산림대법회에서 설한 법문을 요약 게재한 것입니다.
근일 스님
법호는 현봉(玄峰). 1960년 은해사에서 사미계를
1967년 해인사에서 비구계와 보살계를 수지했다.
통도사 극락선원, 해인사 해인총림, 묘관음사 길상선원, 용주사 중앙선원 등
제방선원에서 안거하고 영천 묘각사에서 10년간 보림했다.
고운사·부석사 주지, 9~12대 종회의원, 재심 호계위원,
능인중고등학교 이사장 등을 역임하고
현재 고운사, 부석사, 삼보사 조실로 주석하고 있다.
법보 신문
첫댓글
방거사 (龐居士)
당나라 형주(衡州) 형양(衡陽) 사람.
당나라 정원(貞元) 때 석두(石頭)에게 선지(禪旨)를 깨우쳤다.
탐욕스럽고 속된 것을 싫어해 재산을 모두 동정호(洞庭湖)에 던져 버리고
죽기(竹器)를 팔아 생계를 꾸렸다.
뒤에 마조(馬祖)에게 가서 묻기를
“온갖 법과 더불어 짝하지 않는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하고 묻자
마조는 “네가 서강(西江)의 물을 한 입에 마셔버린 뒤면 일러주마.”라고 대답했다.
그는 이 말에 깨달은 바가 있어 2년 동안 정진,
죽으려 할 때 딸 영조를 시켜 그늘을 보아 오시(午時)가 되거든 말하라고 부탁했다.
딸 영조가 “지금 오시가 되었는데, 일식(日蝕)이 일어납니다.” 하자,
그는 평상에서 내려와 문밖으로 나가서 보는 동안, 딸 영조가 그의 평상으로 올라가 죽어버렸다.
이를 본 그는 웃으면서 “내 딸의 솜씨가 나보다 빠르군!”이라고 말한 뒤 이레 뒤에 죽었다.
유명한 공안에 호설편편(好雪片片)이 있다. 시를 잘 지었고, 저서에 『시게(詩偈)』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