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거룩하고 복된 주의 날에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사랑하는 성도님께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의 제목은 “예수님의 지상명령”입니다.
물고기 두 마리가 싱싱한 지렁이 한 마리를 발견했습니다. 한 물고기가 집어삼키려고 하자 다른 물고기가 말립니다. "저 지렁이는 낚시 바늘에 걸려 있는 거야. 저것을 삼키면 바늘에 걸려 사람들의 식탁에 오르는 신세가 되고 말아." 그러나 한 물고기는 "그것을 누가 믿어? 아무도 그것을 증명하지 못하잖아. 어디 사람들의 식탁에 갔다 온 물고기가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라며 덥석 지렁이를 삼켰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바다로 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지옥과 천국을 말할 때 이런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천국이나 지옥에 갔다 온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그러면 믿을 테니까." 이런 사람들은 끝내 천국을 보지 못합니다. 후회해도 이미 늦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기 전에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보이신 장면입니다. 그런데 17절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이렇게 의심하던 사람들이 모두 몇 명이나 되는가 생각해 봤더니 380명이나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을 지켜 본 사람들이 500명인데 성령의 약속을 믿고 기도한 사람은 120명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도 믿지 못하고 부활하심을 보고도 믿지 못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도마에게 말씀했습니다.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은 더 복 되도다.” 이 자리에 계시는 우리가 복된 자인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명령했습니다. 그래서 지상명령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유언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19,20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 명령, 유언은 먼저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를 삼으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 명령 때문에, 이 명령에 순종한 이들의 수고와 헌신에 의해 오늘 우리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고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백 년 전 우리 민족을 찾아온 선교사님들도 수 백명에 이릅니다. 그중에는 조선이란 나라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순종한 선교사님들도 있었고 대부분 우리의 언어나 문화를 전혀 알지 못한 채 입국했습니다. 이들은 서양귀신을 전한다는 소리를 들어야 했고 마을에 부정한 일만 일어나도 자신들 때문이라는 오해를 받아야했습니다. 그들 중에 많은 이들이 목숨을 바쳤고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선교지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양화진에만 15개국에서 온 417명의 선교사 묘지가 있습니다. 창원에 있는 경남선교120주년기념관에는 호주선교사만 126명의 묘지가 있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된 분들에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은 유대인에게만 주어 메시야가 오는 길을 예비하게 했지만 복음은 어느 민족에게만 전파하라 하지 않고 모든 민족에게 전하라 하셨습니다. 모든 민족에게 가라 하셨고 제자 삼으라 했습니다. 이것은 교회에 주어진 사명으로 먼저 믿는 자들이 반드시 받들어야 할 명령입니다. 이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교회를 주님이 기뻐하실 줄 믿습니다. 우리 교회도 그러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도 가든지 보내든지 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께 돌아온 자에게 세례를 베풀라는 것입니다. 세례가 무엇인지를 가장 잘 알려주는 말씀은 아마 벧전 3:21일 것입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세례는 물로 죄를 씻는다는 의미가 있지만 그 자체, 즉 세례 받았다고 육신의 죄를 씻은 것이 아니라 다만 선한 양심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증거입니다. 많은 사람 앞에서 이제 나도 여러분과 같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형제자매로서 하나님을 섬기며 주님의 몸인 교회의 지체가 되고 일원이 되겠다는 고백이자 출발입니다.
우리의 죄를 씻는 것은 물이 아니라 예수님의 보혈입니다. 죄는 불로 태우는 것도 아니고 오직 십자가의 보혈만이 우리 죄를 씻는 샘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슥13:1입니다.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우리가 물세례를 받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우리의 더러운 죄를 씻는다는 상징입니다. 그래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물속에 잠겼다가 나와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침례가 더 성경적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상징적인 의미이기에 물로 적시는 것으로 대신하는 것입니다.
또한 세례는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가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롬6:3,4절입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세례 받음으로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사망이 다시 예수님을 주장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도 그러할 줄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도 세례 받음으로 옛 사람, 우리 자아가 주님과 함께 온전히 죽고 주님과 함께 다시 살아나게 되길 축복합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길 축복합니다.
또한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가르치고 무엇을 지키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말씀의 일부만 아니라 예수님이 전한 모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내 말은 내 말이 아니요 아버지가 내게 주신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전하라고 내게 이른 것을 전한다고 했습니다. 요17:8입니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그래서 내 교훈은 내 교훈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것이라고 했습니다(요7:16).
교회의 사명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돌아와 단지 죄 용서받고 구원받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이제 성도로서 살아가는 방식을 가르쳐 지키도록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주님의 제자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배우고 따르는 자입니다. 지식은 머리로서 가르치는 것이지만 삶은 본을 보여 가르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본을 보여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심처럼, 사도바울과 베드로가 교회에 본을 보인 것처럼 먼저 믿는 우리가 삶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또 다른 사람을 제자로 삼게 하는 것입니다(딤후2:2).
어느 맞벌이 부부가 시골 할머니에게 아이를 한 동안 맡겨 두고 데려왔더니 어느날 공원에서 토끼를 보고 말합니다. “토까이, 토까이.” 좀 더 가다가 염소가 있는 것을 보고 또 말합니다. “얌새이, 얌새이.” 따라가던 엄마가 어이가 없어 누가 그러더냐고 하자 아이가 대답합니다. “할마이.” 그렇지만 본을 보인다고 즉시 따라하고 순종하는 게 아닙니다. 어린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일어서고 첫발을 딛자마자 뛰어다니지 않는 것처럼, 신앙도, 생활도 그렇습니다. 그러니 참고 기다리고 인내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두 번 가르쳤는데 안 된다고 포기하면 남아 있을 분이 몇 명이나 있겠습니까.
마지막으로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고 하십니다.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미국의 한 흑인 청년이 있었는데 목뒤에 혹이 있고 말도 어눌해서 어릴 때부터 사랑도 제대로 못 받고 친구도 없이 자랐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한 백인 가정에 막노동꾼으로 취직했습니다. 백인 사장은 예수님을 잘 믿는 분이었는데 이 청년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청년은 사장의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믿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확신과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 28장 20절 말씀을 읽고 큰 감동을 느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부모와 형제, 친구가 다 떠나도 하나님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신다는 말씀을 믿고 그는 결심했습니다. ‘하나님, 이제 나도 결코 하나님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니, 나도 하나님과 함께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그때부터 책을 읽고 열심히 공부하여 대학교에 진학했습니다. 더 열심히 공부하여 교육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다른 사람 같으면 그런 환경에서 술 마시고 절망하고 자포자기할 수밖에 없을 텐데, 그런 외모, 그런 가정, 그런 환경 속에서 그는 열심히 공부하여 마침내 박사학위를 받았던 것입니다.
졸업식장에 사람들이 찾아와서 축하했습니다. “얼마나 감격스럽습니까?”라고 묻자, 그는 말했습니다. “내게는 박사학위가 감격스러운 것이 아니라, 나의 가장 큰 감격과 기쁨은 주님이 나와 항상 함께 하신다는 그 사실입니다.” 그는 이후에 예일대학교에서 교육학을 담당하는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이 단 바틀렛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도 항상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이 사실 때문에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신다는 것은 지금도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으로 끝났다면 우리와 함께 하겠다는 약속도 거짓일 뿐입니다. 그러나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지금도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무엇이 가장 우리를 힘나게 하고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고 있습니까. 무엇 때문에 자신감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아가십니까? 잘생긴 외모 때문입니까. 모아둔 재산 때문입니까. 잘 나가는 자녀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설령 그러한 것이 내게 없을지라도 우리도 정말 낙심하지 않을 이유는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인해,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 때문에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고 살아갈 힘을 얻게 되고 거룩한 비전을 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게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인입니다.
삼손의 불행은 단순히 머리카락이 잘려 힘을 쓸 수 없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떠난 것을 그가 깨닫지 못하더라고 했습니다(삿16:20). 그게 불행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고 있는데도 알지 못하는 것, 하나님과 무관한 계획들로 가득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지 못하는 것, 이것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 불행의 시작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엠마오로 향하는 두 제자처럼 주님과 동행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면,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그게 불행입니다.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확신하고 살아계신 주님이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심을 확신하시고 부활하신 주님이 지금도 나와 함께 하심을 믿고 나가길 축복합니다. 우리 교회도 주님의 지상명령을 받들어 가서 복음을 전하여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며 예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지키게 하는 일들이 계속 진행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