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과 신자들의 머슴"으로 교회 이끄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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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염수정 대주교가 6월 29일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교황 베네딕토 16세에게 팔리움을 받은 후 대화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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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리움을 받은 염수정 대주교가 성 베드로 대성전 앞에서 한국 참가단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6월 29일 금요일 아침 7시. 로마 근교의 한인신학원에서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전으로 출발했다. 오늘은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대주교님이 교황님에게 팔리움을 받는 미사가 있는 날이다. 로마의 여름 한낮은 강렬한 햇살 때문에 무척이나 더웠지만 이른 아침의 공기는 시원했다. 시내 길도 차 없이 한산했다.
"로마에서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을 공휴일로 지내고 있어요. 그래서 오늘 아침 시내 길이 한산하네요. 이 길이 평소 출퇴근 시간에는 엄청 막히는 길이에요." 옆에서 운전을 하던 김남균 신부가 도로에 차가 뜸한 이유를 설명해줬다. 로마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김 신부는 이번에 시간을 내 우리의 로마 취재를 도와줬다.
성 베드로 대성전이 가까워지자 멀리 성 베드로 광장 한가운데에 있는 오벨리스크가 눈에 들어왔다. 광장 주변에 비둘기들이 노니는 모습이 한가롭고 평화롭다. 교황님 주례의 팔리움 수여미사가 시작되려면 아직 두 시간이나 더 있어야 했다. 그런데도 광장 둘레에는 미사 참례를 위해 온 신자들 줄이 끝이 안 보였다. 세계 각국의 참가단 행렬은 성 베드로 광장을 한 바퀴나 돌고도 남을 정도였다.
그 줄 가운데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손에 태극기를 들고 있는 우리 순례단 모습도 있었다. 외국에서 태극기를 보면 마음이 울컥하는 것은 왜일까. 우리는 미리 취재허가를 받은 덕에 사람들이 기다리는 줄을 지나 바로 성당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미 성당 안에는 사전에 팔리움 미사에 참석할 수 있는 비표를 받은 많은 신자들이 자리해 있었다.
다소 낯선 단어인 '팔리움'은 가톨릭교회에서 교황과 대주교가 자신의 직무와 권한을 상징하기 위해 목과 어깨에 두르는 좁은 고리 모양의 양털 띠다. 굳이 번역을 하자면 '양털로 짠 영대' 정도로 할 수 있을까? 처음에는 대주교들이 교황에게 권위를 부여받는 것과 상관없이 팔리움을 착용하기 시작했고, 4~5세기에는 이미 많은 대주교들이 팔리움을 착용했다.
그러다 6세기에 들어서 교황이 명예의 표상으로 대주교에게 팔리움을 수여하기 시작했고, 9세기에는 모든 교구들이 팔리움을 받고자 청원하게 됐다. 9세기 이래로 대주교는 교황에게 팔리움을 받기 전까지 대주교 관할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오늘날 팔리움은 주교 임무의 충실성과 교황 권위에 참여, 교황청과의 일치를 보여주는 외적 표지가 됐다.
묵주기도가 끝나고 8시 45분 정도가 되자 오늘 팔리움을 받을 주교들 명단이 발표됐다. 독일 추기경을 시작으로 44명의 이름이 차례로 호명됐다. 41번째로 "안드레아 염수정 대주교, 대한민국 서울~"하고 소개되자 박수와 함께 함성이 성당을 흔들었다. 우리 한국 신자들의 열기가 그대로 전해지는 듯했다.
잠시 후 입당예절이 시작됐다. 성당 뒤에서부터 빨간 제의를 입은 대주교님들이 차례로 입장했으며, 행렬 마지막에는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이 계셨다. 교황님 모습이 보이자 성당 안의 모든 신자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며 사진을 찍었다. 교황님은 이동식 발판을 이용해 입당했지만, 여유 있고 건강한 모습으로 옅은 미소를 지으며 주변에 축복을 주셨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성호경을 마치고 바로 팔리움 수여식이 시작됐다. 지난해까지는 팔리움 수여식이 교황님 강론 직후에 거행됐는데, 미사 중간에 팔리움 수여하는 것이 자칫 팔리움 수여를 성사로 오해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올해부터는 미사 시작 전에 진행하게 됐다고 한다.
대주교님들이 한 명씩 호명되면서 교황님께 나아가 무릎을 꿇고 팔리움을 받았다. 염수정 대주교님이 교황님 앞으로 나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염 대주교님이 교황님 앞에 무릎을 꿇고 팔리움을 받는 순간, 성당 안의 한국 신자들은 일제히 일어나 환호를 보냈다. 염 대주교님은 오늘 팔리움을 받는 다른 분들보다 오랫동안 교황님 앞에 머무르셨다.
나중에 염 대주교님께 그때 무슨 말씀을 나누셨는지 여쭤보니, "우리나라와 북한을 위해 늘 관심을 갖고 기도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특별히 북한을 위해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교황님을 직접 뵙고 싶어하는 한국 신자들이 많습니다"하고 말씀드렸다고 한다.
그러자 교황님께서는 살짝 미소를 짓고 고개를 끄덕이셨는데, 마치 "나는 늘 한국과 북한을 위해 기도드리고 있다"는 표정이셨다고 한다. 교황님께서는 고령이지만 우리나라에서 세계청년대회 같은 큰 행사가 열린다면 한국을 방문하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팔리움 수여가 모두 끝나자 바로 미사가 시작됐다. 시스틴성당 성가대와 교황님이 특별히 초청한 영국 웨스트민스터수도원 성가대가 함께 부르는 전례음악이 참 아름다웠다.
교황님께서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강론을 시작하셨다. "성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의 대축일인 오늘, 이 성인들의 모범을 본받아 하느님과 하나로 일치된 교회의 신비를 기억합시다. 오늘 팔리움을 받은 대주교들은 각자의 공동체에서 교회와 일치할 수 있도록 성령께 도움을 청합시다"는 내용이었다.
미사가 끝난 후 한국 사제와 수도자, 신자들은 성 베드로 대성전 밖으로 나왔다. 강한 태양빛과 불볕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모두들 염 대주교님을 기다렸다. 염 대주교님이 밖으로 나오는 모습이 보이자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졌다. 모두 한마음으로 축하인사를 하고 기념촬영을 했다. 염 대주교님은 아직 긴장과 흥분이 가시지 않은 듯 상기된 표정이었고, 신자들은 모두 즐거운 표정이었다. 나는 '이것이 바로 진정한 축제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염 대주교님의 세례명은 안드레아다. 염 대주교님은 늘 주교반지를 끼고 계시는데, 반지에는 X자형 십자가가 새겨져 있다. 전승에 의하면 안드레아 성인은 예수님 부활 후 흑해 북쪽인 스키디아에서 선교를 하다 X자형 십자가에 달려 순교했다고 한다. 그래서 X자형 십자가는 안드레아 성인을 상징한다.
안드레아는 베사이다 출신으로 시몬 베드로와 형제지간이다. 안드레아는 본래 요한 세례자의 제자였다. 그가 요한 세례자와 함께 있을 때 예수님이 마침 그 옆을 지나셨는데, 이를 본 요한 세례자가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가신다"하고 말했다. 순간 안드레아는 마치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예수님을 따라 나섰다. 그리고 바로 자신의 형 베드로와 함께 예수님을 찾아가 제자가 되기를 청하고, 그분의 첫 제자가 됐다. 초대교회에서는 안드레아가 베드로보다 먼저 예수님을 만났기에 안드레아를 '첫 번째 선택 받은 사람'으로 불렀다.
안드레아는 주님을 따르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던 적극적이고 열정적 인물이었다. 그는 특히 예수님께 사람들을 많이 모아 오는 것으로 유명했다. 안드레아는 그의 형제인 베드로뿐만 아니라 같은 고향 사람인 필립보와 나타나엘도 소개했다.
안드레아는 조용하고 신중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안드레아를 통해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알게 된 것을 보면 친화력도 좋았던 것 같다. 제자들 가운데서도 조용하게 뒤로 물러나 자신의 일을 묵묵히 수행했다. 아무도 자신의 일을 알아주지 않아도 예수님께서 자기를 쓸모 있는 사람으로 생각해주면 그것으로 만족해하는 겸손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당시 배척을 받던 이방인인 그리스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온 적이 있을 정도로 개방적이며, 미래적 안목이 있던 인물이기도 했다(요한 12,20-22 참조). 염 대주교님도 수호성인인 안드레아 사도처럼 겸손하고 훌륭한 목자, 봉사자가 되시기를 기원해본다.
염 대주교님이 2002년 주교품을 받으셨을 때 인사말로 "주님과 신자들의 머슴이 되겠노라"고 했던 것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리더가 되고 싶다면 우선 하인이 되라는 말이 있다. 과거의 리더는 능력이 출중해 앞에서 다른 이들을 끌고 가야 했지만, 현재의 리더는 구성원과 함께 소통을 하고 보조를 맞춰 나가야 한다.
'서번트 리더십'(servant leadership)은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리더가 될 수 있다는 이론이다. 역사상 훌륭한 업적을 남긴 슈바이처, 데레사 수녀, 마하트마 간디 등은 바로 서번트 리더들이었다. 이 서번트 리더십의 가장 대표적 인물은 바로 예수님이 아닐까?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 2,7).
서번트 리더십은 책임과 권한보다는 가치와 사랑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리고 무조건적 명령보다 신뢰와 믿음으로 구성원들이 소신껏 일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나보다 남을 더 내세우는 종의 리더십을 갖고, 다른 이를 섬김의 대상으로 여긴다면 현대에 꼭 맞는 지도자상인 것이다. 부디 염 대주교님이 봉사자의 모습으로 교회를 이끌어 우리 교회를 더 크게 성장시켜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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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