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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지인으로부터 서룡산을 소개받았을 때 필자는 갑자기 눈이 번쩍 뜨이는 걸 느꼈다.
서룡산 정상의 발도장이야 예전 삼봉산 산행때 찍은 적이 있었지만 이번 산길은 또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지난날 실상사를 들렀을 때 백장암을 가고 싶었지만 일정상 찾지 못한 바도 있었고,또 서진암 금강암 답사까지 한달음에 그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서룡산은 삼봉산 능선의 서쪽 끄트머리에 있으며,이 산줄기는 오도재에서부터 동서로 지리산 주능과 나란히 뻗어 내린다.
백장암과 서진암,금강암을 답사하는 서룡산(西龍山) 산행길을 '지리산3암자순례길'이라고도 부른다.
지리산국립공원 에리어에서 벗어나 있지만 맞은편 삼정산 7암자순례길을 패러디한 시각으로 보인다.
산길에서 3암자를 만날 수 있는 것은 지리산 조망과 함께 또다른 테마임에는 틀림없다.
처음 만나는 백장암(百丈庵)은 실상사 소속의 암자로, 이곳의 백장선원은 구산선문(九山禪門) 중에서 가장 먼저 문파를 이루어 한국 선불교의 전통을 계승한 곳이다.
백장(百丈)이라는 이름은 ‘평상심이 도이며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한 8세기경 활동했던 마조도일 선사의 제자인 백장 선사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백장 선사는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를 먹지 않는다’라는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의 백장 청규를 만들고 실천하였다.
국보 제10호인 백장암 삼층석탑, 보물 제40호인 백장암 석등, 보물 제420호인 청동은입사향로가 있다.
서진암은 원래 세암 또는 세진암이라 하였다.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822년(순조 22)에 불탄 후, 1827년에 성윤두타와 대영비구가 다시 세웠고,1917년에 운담기순이 중건하였다.
1927년에는 세진암을 서진암으로 명칭 변경을 신청해 총독부로부터 허가를 받았으며, 화재로 불탄 것을 1935년에 중수하였다.
현재 서진암에는 독특한 손모양을 한 불상과, 1516년(중종 11)에 만든 석조 나한상 외 4구의 나한상이 있으며 지금은 정인(正仁)스님이 머물고 계신다.
금강암은 청화스님과 그의 상좌 성본스님이 수행한 토굴수행처였다.
현재는 수행자가 없어 폐사된 상태로 남아 있다.
금강암(금강대)은 지리산 서북능선을 조망할 수 있는 몇 안되는 명당이다.
산행궤적
GPX (초록색 선이 트랙)
구룡호텔을 돌아서 맵을 열었기에 산행거리를 조금 수정하였다.
고도표는 중간중간 튀어버렸다.
네비엔 구룡호텔을 찍어 88고속도로의 지리산나들목에서 내렸다.
눈이 내릴 거라는 예보와 차창으로 흩뿌리는 눈발은 도착하고서도 끊임이 없다.
바로 지근거리에 희미한 '영우냉동식품'공장이 보이고...(백장암의 접근을 백장공원이 있는 한밭에서 하려다가 변경)
바로 우측으로 서룡산 진입로의 이정표가 하얗게 눈을 뒤집어 쓰고 있다.
서룡산 이정표의 눈발을 털어냈더니 서룡산3.3km 안내가 드러난다.
진입로 입구에 쌓인 나무더미를 뛰어 넘어서야 진입을 할 수가 있었는데, 내려올 때는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
구룡호텔 좌측 뒤로 난 임도급 길을 돌아...
등고선을 따라가듯 산사면을 휘돌며 솔숲길을 따라 걷다가...
우측으로 고개를 돌리니 바래봉 덕두산 능선이 고도를 높혀가는 게 보인다.
백장암 진입로는 솔숲길을 휘돌며 아주 유순한 오름을 유지하고...
가볍고 경쾌한...
발걸음을 걷는다.
그 사이 내린 눈은 키작은 나무 위에...
소복이 얹혀있다.
백장암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 'T'자 갈림길에 닿았다.
좌측으론 능선으로 바로 붙는 수청산 오르는 길이고,우측으로 내려가면 한밭으로 향하는 길.
우리는 조심스레 밧줄을 넘어 암묵적 정숙을 공유한다.
백장암의 경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오전부터 내린 눈으로 인하여 눈덮힌 백장암은 나그네의 마음을 더욱 숙연해지게 한다.
백장암과 뒤로 선방인 백장선원.
백장암(百丈庵) 편액엔 임인년 가을에 조주승이 썼다는 '임인추조주승(壬寅秋趙周昇)'이라 쓰여있다.
임인년이면 1890년으로 벽하(碧下)가 36살이였던 셈.
벽하(碧下) 조주승(趙周昇:1854-1903)은 조선 말기 서예가로 자는 장일(章日)이고, 호는 벽하(碧下)이며, 본관은 김제(金堤)이다.
속리산 법주사(法住寺) 일주문(一柱門)의 ‘호서제일가람(湖西第一伽藍)’ 현액과 금강산 유점사(楡店寺)의 대웅전(大雄殿) 대액, 전주 남고산성(南固山城)
관성묘(關聖廟) 현액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백장선원(百丈禪院)의 이름은 백장회해(百丈懷海, 749~ 814)스님에서 비롯된 것이다.
백장선사는 청규를 통해 주지부터 행자까지 선원의 모든 대중이 울력에 동참하도록 한 보청법(普請法)을 제정한 장본인이다.
이곳은 백장청규(百丈淸規)에 입각해 대중이 함께 수행하고 울력하는 도량이다.
편액
수조도 하얗게 눈을 뒤집어 썼다.
백장선원에서 내려선 대웅전 앞마당에 여러 기의 부도와 석탑, 그리고 석등이 나란히 서 있다.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되는 국보 10호인 '백장암 삼층석탑'이다.
낮은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4면에는 난간을 섬세하게 양각하고 있다.
일반적인 탑은 위로 올라갈수록 너비와 높이가 줄어드는데 비해 이 탑은 너비가 거의 일정하며, 2층과 3층은 높이도 비슷하다.
층을 이루지 않고 두툼한 한 단으로 표현된 지붕돌의 받침도 당시의 수법에서 벗어나 있다.
1층은 그 남면에 문비를 중심으로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으며, 다른 3면에 보살상, 천왕상, 동자상 등이 조각되어 있다.
석탑의 몸체에 양각된 조각상
상륜부의 모습.
숨죽이고 둘러보는 적막강산의 백장암엔 아직도 소리없이 눈이 내리고 있고...
보물 제40호인 백장암 석등은 전체적으로 8각의 평면으로 통일신라 시대 석등의 기본 형태이다.
일반적으로 석등은 불을 밝히는 화사석(火舍石, 석등의 중대석 위에 있는 불을 켜는 돌)을 중심으로 밑에 3단의 받침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는데
이 석등은 받침의 밑부분이 땅속에 묻혀있는 상태다.
받침은 가운데에 8각 기둥을 두고 아래와 윗 받침돌에는 한 겹으로 된 8장의 연꽃잎을 대칭적으로 새겨놓았다.
화사석 역시 8각형으로 네 면에 창을 뚫어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했다.
지붕돌은 간결하게 처리했으며 그 위의 머리장식으로는 ‘보주(寶珠, 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큼지막하게 올려져 있었다.
하지만 이 보주 부분이 1989년에 도난 돼 공개수배중이며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현재 이 자리에는 상륜부 보주 부분이 상실된 상태로 탑신부와 하단부가 남아 있다.
안내판을 차례로...
담았다.
그 새 어지럽혀진 절마당.
아침부터 곱게 내린 눈은 경내를 깨끗이 단장하고 있었지만 불청한 답사객들의 어지러운 발자국으로 상당히 산만스러워졌다.
산길은 저쪽 화장실 옆으로 열려 있지만...
공양실 모퉁이를 돌아나가면 개울로 인하여 건너는 길이 없고,공양실 앞에서 우로 돌아서야만...
화장실을 만나는데,저쪽 앞서가는 일행들 옆...
또다른 건물에 다불유시(多弗留是)팻말이 달려있다. 그 말은 WC(water closet, 화장실)를 말하는 모양.
다시금 이어지는 산길을...
묵묵히 걷는 일행들.
작은 개울을 건너자 갈림길이 나타난다. 우측으로 난 길은 백장암옛길로 매동마을로 내려가는 길.
우리는 좌측 돌탑이 있는 오르막길을 한동안 힘차게 올라야 한다.
아이젠을 신고 20여분 된오름을 하고 난 뒤에야 능선(서진암 사거리)으로 올라설 수가 있었다.
좌측 능선으로 오르는 길은 서룡산 남릉으로 서진암 갔다가 되돌아와 우리가 진행해야 할 길이고,직진의 사면길은 서진암 가는길이다.
서진암 사거리의 기왓장 이정표.
사면을 비스듬히 돌아 200여m 진행하여 모퉁이를 돌자 서진암이 보인다.
조용한 사찰이 갑자기 소란해지자 스님은 과일을 깎는 등 불청객들을 맞는다.
칠성각의 기둥과 서까래는 온전해 보이지만 비가 새는 듯 지붕에 천막을 임시로 덮고 있다.
칠성각 현판에 무인사월팔일(戊寅 四月八日)이라 쓰여있지만 정확한 햇수는 알 수가 없고, 그 아래 서진암만세(瑞眞庵萬歲)만이 그 영욕을 말해주고 있다.
이 하얀색 페인트의 글귀는 사람 이름으로 보이고...
서진암 편액에 백아서ㅇ(白我書ㅇ)가 읽히지만 정확히 알 길이 없다.
서진암은 승려가 머무르는 곳에 불상을 함께 봉안한 인법당(人法堂)이다.
서진암의 중앙문을 당겨 연 뒤 신발을 벗지않고 묵례부터 올린 후 조심스레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석조 나한좌상이 5구가 있었는데, 그 중 1구의 바닥에 '정덕십일년병자화주경희'라는 글자가 둥글게 새겨져 있다. (금산사 불교박물관 보관 중)
1516년이라는 정확한 조성 연대를 알 수 있어 조선시대 전반기 석조상의 면모를 반영하는 중요한 작품으로 주목된다.
5구의 나한상은 모두 머리에 형태가 약간씩 다른 두건을 쓰고 있으며, 얼굴은 약간 살이 쪘지만 나한상으로서의 면모를 잘 갖추고 있다.
그러나 움추린 어깨와 형식화된 손모양, 양 어깨를 모두 덮은 의복의 옷주름 등의 표현은 조선 전반기 조각양식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나머지 4구의 상들도 각 부의 양식과 조성기법이 명문에 있는 상과 흡사하여 1516년 당시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 나한(羅漢)은 깨달음을 얻은 조사를 일컫는 것.
서진암을 되돌아 서진암 사거리로 돌아와 능선으로 붙는다.
가파른 능선 오름길엔 온통 하얀 설화가 피어있다.
능선에 붙은지 30여분 만에 금강암 갈림길을 만나지만 이 갈림길에서의 지형지물은 전무하다.
서룡산 남릉으론 계속 날등길이 이어지지만...
아침에 내린 적설로 금강암으로 난 실핏줄 같은 길은 묻혀버리고,그저 기계의 힘에 의지하여 등고선을 따라 이리저리 타고 넘었더니 계곡변으로 고로쇠 호수가 보이고,
좌측으로 작은 간이건물(화장실)이 보인다.
고로쇠 호수를 따라 이어지는 계곡은 나중에 능선으로 붙는 길.
얼어붙은 샘을 만나고...
모퉁이를 돌자 금강암이 그 모습을 보인다.
산행전에 이미 금강암에서 점심식사를 하기로 계획하였는데,시간상 딱 맞아 떨어지 것.
금강암 안에는 세간살이가 그대로 남아있고,처마의 채양도 손본 지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금강암 손바닥만한 마당에도 수북이 눈이 쌓였고,우측 열린 곳으로 살짝 비켜 올랐더니...
사방천지가 뿌우옇게 채색된 금강대다.
높은 대에 고요히 앉으니 잠은 멀리가고,
외로운 등불만 적적하게 벽에 걸려 있네.
문밖에 바람이 지나가고 있는가.
솔방울 떨어지는 소리 뜰에 있네
高臺靜坐不成眠
寂寂孤燈壁裡懸
時有好風吹戶外
却聞松子落庭前
정관(靜觀) 선사의 게송(重上金剛臺)
금강대는 쓸쓸한 산 속의 토굴이다.
인적이 없는 지리산 높은 곳(해발 1,000m)에서 푸른 산으로 벽과 울타리를 삼았다.
정면으로 보이는 곳에는 벽소령이 왼쪽으로는 천왕봉이 오른쪽으로 반야봉이 멋진 풍광을 자랑하고 있다.
온 누리가 장엄하다.
흰 구름 속에 청산은 첩첩하고
푸른 산 속에 흰구름도 많아
날마다 구름과 산을 벗삼나니
이 몸이 편안하면 집 아닌 곳 없으련만
白雲雲裡靑山重
靑山山中白雲多
日與雲山長作作
安身無處不爲家)!
암자가 비어 있다.
적막하다.
그러나 아직 추운 겨울인데도 바람 한 점 들어오지 않을 만큼 경내가 다숩다."
금강대가 있는 범바윗골은 ‘사지목 절터’였다.
지금도 기와 조각과 담이 남아 있어 이에 발심한 성본 스님이 큰스님(청화스님)을 모셔와 토굴에서 지내고자 오늘의 금강대를 지었다.
청화스님(1923~2003)은 염불선을 제창한 원로의원으로서 청빈한 수행자의 표상이다.
24세에 출가한 이래 40여년 간 눕지 않고 좌선하는 장좌불와(長坐不臥)와 묵언(默言)수행을 한 당대의 선승으로 꼽힌다.<자료요약>
몇 발자국 앞으로 고개를 내밀었더니 우리가 올라온 서룡산 남릉이 펼쳐 보인다.
그 우측 골짜기로 뻗어내린 곳에는 백장공원이 있는 한밭이고, 백장암은 골짜기 우측에 숨어 있을 것.
그 새 일행들이 뛰따라 합류하였고,옥분씨의 모습이 이채로워 돌려 세웠다. 머리도 눈섶도 새하얀 산신령 버전이다. 여자 산신령 말이다.
해발 1000m에 육박하는 금강암 작은 마당은 우리들의 아늑한 식당이었고,정상을 눈앞에 두고 체력비축을 하는 마지막 전진기지였던 셈이다.
이제 정상을 가기위하여 절문을 되돌아 나와 좌측 산사면으로 바로 붙어 수더분한 계곡길로 오른다.
길은 따로 없고 가파르나 수로처럼 난 계곡길은 그리 힘들지는 않았으나...
식사후의 시린 손까진 어쩔 수가 없어 호호불며 마지막 안간힘을 쏟아 부은 뒤...
고통과 희열의 상관관계를 방정식으로 풀어보고서야...
주능선에 올라설 수 있었다.
고통이 수반되어야만 희열이 고조되는 법.
오늘 우리가 누리는 이 즐거움은 뽈떼기 시리고,손시리고,만류인력으로 인하여 가중되는 무릎의 하중을 이겨내고나서야 느낄 수 있는 댓가가 아닐까?
서진암 삼거리를 돌아 80m지근거리의...
서룡산에 올라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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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구봉은 700m의 거리.
하산능선에서 바라보이는 곳으로 덕두산 바래봉 능선이 구름에 묻혀있다.
범바위를 지나고...
위에서 본 범바위
우회하여 내려서서 돌아본 범바위.
이정표
작은 봉우리 하나에 올라섰더니 나무에 매달린 '수청산 백장봉(水淸山 百丈峰)'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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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하면 이런 모습으로 묘지를 관리해야 할까? 후손들의 고충을 이해할 만하다.
백장암삼거리에서의 이정표에서...
삼각점이 있는 지도상 정상(수청봉)을 가리키는 이정표
'백계남'님의 표식기에 수청봉 표식과...
눈밭에 묻힌 수청봉 삼각점.
하산 능선길은 가팔라...
조심조심 하강하여...
얼추 내려서면...
임도에 닿는다.
이제 역으로 구룡호텔 뒤로 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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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에 내려서면서 산행은 끝이 난다.
오전엔 희미했던 '영우냉동식품'
돌아보니 승용차 앞 진입로의 나무들이 말끔이 치워져 있다.
-서진암 가는 길-
산에 길 있네
시작은 나였지만 끝은 어디인지도 모를
허상(虛像)의 내가
허상뿐인 나를 찾아 헤매이던 길
잘게 분해된 시간
빛 바랜 햇살로 증발하는 오후의
느릅나무 숲, 으름 덩굴 사이로 열려 있네
털어버려, 그냥
훌훌 털어버리라는 허허로운 바람의 길
시월이 멈추어 선 산자락
내 젊은 날이 중년(中年)의 내 어깨에 손 얹으면
야윈 오솔길은 제 혼자 두런거리며 간다
아득한 그리움 지나 더 아득한 그리움으로
산 넘어 산, 그 넘어 산으로
백장암 뒤란 대숲을 건너, 저 - 편
잊혀진 어느 가을의 모퉁이에서
하염없이 기다릴 사람아
만남과 이별,
어제와 내일이 윤회(輪廻)할 그 길 위
네 눈빛만큼이나 한없이 투명한 하늘
아쉬운 날들의 사랑같은 노을이 진다
<권 경 업>
첫댓글 멋진 사진구경 잘했습니다 진짜로 설경도 좋고요 산마루님 감사합니다~~!
'풍년'님, 잘 계시죠 산 내려와서 꿀맛 같은 소맥(,)에 생각나는데...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