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나라의 말이 다른 나라의 말과 어순이나 문법구조·음운·어휘는 물론 조사나 감탄사까지 같다면 그 둘은 서로 같은 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숫자를 세는 말까지 같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숫자를 세는 일본말은 고구려어이다. 일본어의 바탕을 이루는데 고구려말이 크게 기여했음을 보여주는 사례. ‘부 처님 손바닥 안’이라는 말이 있지만, 일본어는 고구려·백제·가야 및 신라의 한반도에서 쓰인 옛말을 그대로 사용 하는데 불과하다.
현재 일본어에서 ‘하나 둘……’을 열까지 세는 수사數詞로는 いち(一, 이찌), に(二, 니), さん(三, 산), し(四, 시), ご(五, 고), ろく(六, 로꾸), しち(七, 시찌), はち(八, 하찌), きゅう(九, 큐-), じゅう(十, 쥬-)이다. 그러나 이것은 ‘일一, 이二, 삼三……십十’의 한자를 일본한자음으로 읽어낸데 불과하다. 우리말의 ‘일, 이, 삼…십’에 해 당한다.
그런데 이와 달리 갯수나 숫자를 세는 수사로서 또 다른 체계가 있다. 말하자면 ‘하나, 둘, 셋…열’에 대응하는 말 이다. 물론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하나·둘·셋…’의 숫자 이름체계는 신라어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결과로, 고구려 말은 한반도의 중심무대에서 퇴장해 버렸으나 일본에 건너가서 살아남았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지리지의 지명에 남아있는 숫자는 み(미), いつ(이츠), なな(나나), とお(토-)의 네 가지 뿐 이다. 다시 말해서 이들 네가지 숫자를 세는 말은 고구려 지명에 명확히 남아 있어서 고구려어임을 알 수 있다. 다만 지명 표기는 철저한 이두식 표기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므로 이두로 풀면 숫자의 절반 가량이 풀린다.
그러나 위의 네 가지를 제외하면 기타의 나머지 수는 그 연원을 알 수 있는 자료가 없으므로 파악할 방법이 별로 없다. 다만 ひとつ(히토쯔)는‘홑’(單, 단)이라는 말에서 그 흔적을 엿볼 수 있을 뿐이며, ‘여덟’을 북한 지방에서 나 호남에서는 ‘야듭’으로 발음하고 있어서 어두음語頭音 야(や)가 정확히 대응하는 것으로 보아 やっ(얏)의 っ 가 ‘듭(덟)’의 ‘ㅂ’이라는 음가를 대신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수사數詞에는 일정한 통일성과 체계가 있기 마련. 이를테면 ‘いち, に, さん…’의 읽기를 하다가 욧츠(よっつ) 또는 이츠쯔(いつつ)로 바꿔서 세는 경우는 없으며, 더 나아가 서로 다른 나라 말을 섞어쓰지 않는다. |
나라와 아스카는 우리의 경주나 부여와 같은 무덤의 도시이다. 아스카 일대에 있는 무덤만도 6백여 개에 이르는 데, 우리가 역사시간에 배우는 일본 내 유명한 한반도계 고분으로 잘 알려진 다카마쓰(高松)고분, 후지노키(藤の木) 고분이 여기에 있으며 기토라 고분도 이곳에 있다.
1988넌 6월에 발굴된 후지노키 고분은 나라현 이카루카. 호류지法隆寺 근처에 있다. 여기서는 금동제신발·금동 관모·금동관식·순금귀고리·금동환두대도 등이 나왔는데, 그것은 뚜렷한 백제계의 무덤이다. 당시 발굴자들이 이 무덤을 황급히 덮은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한반도, 더구나 백제계의 천황급 무덤이 발견됨으로써 일본 천황가 의 뿌리가 한반도에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한 까닭이었다. 하여간 후지노키 고분에서 나온 금동신 발은 공주 무령왕릉이나 나주 반남고분군에서 나온 것과 한치도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그런데 1970년대 초에 발굴된 다카마쓰 고분은 명백한 고구려계 무덤이다. 머리를 뒤쪽으로 모아서 묶은 속발束髮이며 주름치마와 더플코트마냥 길게 늘어뜨린 상의, 옷자락과 소매끝에 다른 색깔의 천을 덧댄 것으로 보면 지 금의 첨단패션을 능가하는 옷을 입은 시종들이 벽화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고구려 덕흥리 고분에서 보 는 것과 너무도 똑같다.
후지노키 고분이 발굴된지 10년이 지난 1998년 3월 또다시 기토라고분이 발굴되었다. 7세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 정되는 이 무덤의 사방 내벽에는 고구려의 벽화에서 흔히 보는 청룡·백호·현무의 사신도와 남자·여자가 각기 8명 씩이 그려진 것이었다. 바로 이 고분의 천정에 그려진 천문도가 한일 양국 학자들의 커다란 관심을 모았다.
이것을 일본 동해대학교에서 컴퓨터로 복원, 조사했는데, 천문도에는 약 6백여 개의 별이 그려져 있었으며 태양 의 운행궤도인 황도나 별들의 운행궤도를 분석한 결과 별자리 관측지점이 북위 38∼39도선으로, 지금의 평안남 도일 것으로 보았다. 다시 말해서 평양의 하늘일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별자리의 관측시 기는 아마도 3∼4세기 쯤일 것이라고 결론지었는데, 이것은 고구려의 첨단 천문 관측기술이 일본에 넘어갔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증거이다.
당시로서는 고구려가 중국보다도 월등히 앞선 동아시아 최고의 첨단 과학(?) 국가였다. 그리고 천문과학의 기본 역시 숫자였으며, 이 수식체계 가운데 10진법이 일본으로 전해졌음을 지금의 일본어 1부터 10까지의 숫자에서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알아낼 수 있게 한 것이 삼국사기에 수록된 고구려 지명들이다. 역사의 기록은 그래 서 참으로 중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