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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Where are you?)
거대담론이 실종된 성경공부
기독교에서 구원은 인간의 공적과 선행은 하나님의 의에 전혀 미치지 못하므로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얻을 수 있다. 한마디로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
그런데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를 너무 강조하는 바람에 반사적으로 나타나는 부작용도 만만찮다. 신자 개인의 성숙이나 빛과 소금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약화되어 버렸다. 심지어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지켜야 할 기본적인 의무마저 등한시되기도 한다. 쉽게 말해 세상 돌아가는 것과 상관없이 신자들끼리 교회에 모여 그저 복 받는 것에 매달리기도 한다는 뜻이다.
나아가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하니까 정말 단순히 믿기만 하는 신자도 많다. 하나님이란 절대적 존재와 그분의 독생자의 십자가 죽음이 정작 자신의 영적 실체와는 아무 연관을 맺지 못한 채 기독교라는 종교의 틀 안에만 들어온 것이다. 단순히 머리로만 교리를 수긍하여 받아들인 것으로 그치고 나머지는 교회에서 시키는 대로 따르기만 한다.
쉽게 말해 천국 보험 들듯 혹시 있을지 모르는 심판에 대비하거나, 신앙이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현실 문제를 극복하는 데에 도움이 되리라 간주한다. 조금 나은 정도라야 품성을 수양하여 가꾸는 데에 주력한다.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대면, 교제, 동행하는 체험에 바탕을 둔 개인적인 관계가 전혀 형성 되지 않는다. 말 그대로 믿기로 결단만 한 것이다.
믿음으로 얻는 구원 교리가 파생하는 부작용이 이것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정말 믿음과 구원에 관해선 간단히 한 문장으로 정리한 후에 신앙생활의 모든 관심을 다른 곳에 쏟아 붓는다. 이미 구원의 문제는 해결 났고 또 그 취소도 없다고 하니까, 어떻게 하면 더 잘 믿어서 더 잘 형통하느냐는 데에 초점이 맞춰진다.
그 결과 성경 공부도 아주 단편적(斷片的)이면서도 피상적(皮相的)으로 변했다. 가르치는 내용이 비성경적이거나 기복주의로만 흐른다는 뜻이 아니다. 분명히 성경을 있는 그대로 제대로 공부한다. 그러나 성경 전체에 일관된 주제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공부하기보다는 인간이 어떻게 하면 종교생활을 더 잘 영위할 수 있느냐에 집중한다.
예를 들면 큐티를 잘 하는 법을 배워서 성경을 매일 읽고 묵상하는 훈련을 시키는 것까지는 좋은데 그 적용이 너무 개인적이다. 그것도 도덕적 반성이나 자기 수양으로 그친다. 기도하는 법,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 등도 마찬가지다. 겉으로 드러나는 명분은 아주 좋다. 기도 잘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아서 순종하겠다는 데에 아무도 반론을 내세울 수는 없다. 그러나 솔직히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을 잘 받고 싶다든지, 하나님의 계획을 사전에 조금이라도 눈치 채서 실패나 환난을 미리 피해자는 심보가 들어 있음도 부인하지 못한다.
교회 성장의 지름길로 공인(公認)되다시피 한 제자훈련만 해도 전도, 기도, 봉사 잘하는 신자 양성에 급급하다. 심지어 십자가 군병이 되어야 할 신자를 오로지 담임 목사에만 순종하는 말랑말랑한 종으로 약화시킬 위험도 상존한다. 그 외에 성령 은사를 받는 법, 찬양과 예배에 관한 교육, 최근에는 자녀 교육, 가정 결혼, 재정 관리, 내적 치유 등등 성경 공부 주제도 아주 다양해졌지만 한 가지 주제만 공부하기에 단편적, 피상적이긴 마찬가지다.
그런 공부들이 필요 없다는 뜻은 전혀 아니다. 당연히 해야 한다. 또 실제 신앙이 성숙하고 현실의 문제에 부딪힐 때에 그런대로 도움이 된다. 그러나 성경이 과연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한 철두철미한 인식이 안 되어 있는 신자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이미 말한 대로 성경 관통도 성경의 외적 구조와 신구약 66권을 책별로 분석하는 것으로 그친다. 기독교의 근본 교리를 체계적으로 공부하지 않는다. 가슴으로 단순하게 믿는 것이 중요하다는 핑계로 교리라면 무조건 고리타분한 것으로 치부한다.
성경의 근본 교리에 대한 온전한 확신이, 신자 개인의 체험과 삶에서 녹아나고 실제로 능력으로 작용되고 있는 그런, 없다면 믿음의 기초 자체가 없다는 뜻이다. 예수를 믿었으니 이제는 신자가 어떻게 신자답게 변화되느냐에 집중하려는 시도는 좋으나 사실은 예수를 믿은 그 깊고 풍성한 내용부터 모른다. 기도, 전도, 찬양, 예배, 묵상, 봉사 등등을 잘하는 종교인은 있으나 사나 죽으나 예수에게 모든 것을 바친 참 제자는 드물어졌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 십자가의 예수다. 또 그 십자가의 의미는 무엇인가? 죄에서 구원이다. 그럼 성경이 말하는 바가, 아니 신자가 자신의 전부를 던져서 믿고 자라고 완성시킬 내용은 바로 죄와 연결된 문제 아닌가? 죄는 또 단순히 도덕적 결함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을 거역한 것이 그 근본이자 출발이다. 다른 말로 죄를 철저히 해부하여 그 구원책인 십자가가 제시되지 않는 성경공부는 하나마나다.
구원이란 타락이 전제 되지 않으면 아무 의미도 없다. 타락 또한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의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의 일탈이 없으면 성립되지 않는다. 나아가 예수를 믿은 것으로 끝이 아니라 그분 안에서 완성을 소망하면서 정말 그 소망대로 살아야 한다. 도덕적으로 경건하거나 기도 전도 잘하는 기독교인이 된다고 구원이 완성 되는 것, 아니 참 경건을 이뤄나가는 것이 아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교리가 너무 강조되다 보니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것만으로 믿어야 할 내용은 끝맺음을 해버린다. 영접한 후에는 죄에 대해서 따로 더 가르칠 것도 없다. 창조와 타락을 철저히 분석해야 구원의 교리가 더 쉽게 이해된다. 창조와 타락이 경시되면 십자가 구원마저 경시된다. 믿음의 근본과 그 실현을 창조, 타락, 구원, 완성이라는 성경의 네 가지 거대담론들 위에 바로 세워야 한다.
신자의 모든 신앙행위는 십자가에서 출발하여 십자가로 끝나야 한다. 매번 로마서의 이신칭의 교리 공부만 하라는 뜻이 아니다. 자신의 개인적 문제는 물론이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도 이 네 가지 담론으로 해석, 적용, 실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성경 말씀만으로 삶의 유일한 기준과 능력으로 삼아야 한다는 뜻이다.
정치적 정당성
교회에서 가르쳐지고 있는 내용이 거대 담론과는 멀어진, 간단히 말해 죄가 실종된 데에는, 여러 원인이 있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몇 가지만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이 세대에 기독교 외부에서 유행하고 있는 사상적 조류 가운데 특별히 미국의 “Political Correctness”라고 칭하는 한 사회적 운동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캘리포니아 샌디에고 주립대학 (UC San Diego) 철학과 교수인 Herbert Marcuse는 인간을 억압하는 것은 무엇이든 정치적으로 틀렸다고 주장했다. 역으로 그 압제에서 해방되는 것은 당연히 선이 된다. 그는 여성, 흑인, 히스패닉 인종, 동성애자 등을 억압 받는 소수자의 예로 들면서 그 억압의 배경에는 기독교와 자분주의가 있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남성, 백인, 이성애자(異性愛者), 유럽 중심주의자 등의 억압을 제거하는 혁명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한마디로 인간이 다른 인간의 권리와 자유를 억압할 수 없다는 사상이다. 인간의 개인적 자유나 권리를 방해하는 요소는 전부 죄악시 되었고 또 그런 억압이 있다면 무조건 해방시켜야 한다. 결과적으로 소수자나 기득권에서 소외된 자들은 무조건 선이요, 다수자나 기득권자는 무조건 악이 되었다.
이런 사조가 빚어낸 단적인 예가 바로 동성애 논란이다. 동성애자나 그것을 찬동하는 자는 아직은 소수자다. 그러나 현재 미국 지성계나 일반인의 사고는 비록 동성애를 찬동하지 않을지언정 죄라고 지적하고 차별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법적으로 정식 결혼으로 인정되지 않기에 따라오는 민형사상의 여러 제약을 제거해 주어야 한다는 즉, 정치적 피압박자에서 동등한 시민의 위치로 올려주어야 한다는 추세로 변해 가고 있다.
언뜻 들으면 아주 정당한 행위로 여겨진다. 정치적으로 옳지 못하니 법을 고쳐서 옳게 바꿔야 한다는 것에 쉽사리 반론을 제기 못할 지경이다. 그러나 그 이름이 이미 함의(含意)하듯이 정치적으로만 옳을 뿐이다. 도덕과는 전혀 무관하다. 그런 용어를 고안할 때부터 도덕적으로는 옳지 않다는 것을, 비록 그것이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것이라 해도, 이미 대다수가 확인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셈이다. 도덕적으로 올바르고 정치적으로도 옳은 일을 구태여 정치적 정당성이라고 표현할 필요는 없지 않는가 말이다.
다수의 횡포와 압제에서 해방시키자는 의도는, 만약 그것이 정말 압제라면, 분명 좋은 것이다. 또 이전에는 최대 다수의 행복을 우선 목표로 삼았던 공리주의적 입장에서 소수자의 권익까지 옹호하는 방향으로 정치가 일보 진보한 것도 틀림없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옳다는 것은 사회 전체의 보존과 번영을 목표로 하는 일이라면 혹은 최소한 그 일에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 결코 나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바꿔 말해 인간은 구태여 도덕을 따를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아니 기독교가 도덕적 선이라고 강요함으로써 오히려 동성애자들이 당하는 그런 정치적 압제의 악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인권과 자유라는 미명으로 포장했지만 선과 악의 가르는 잣대가 결국은 인간의 기분과 욕망이다. 제 멋대로 살고자 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절대 제한, 방해, 간섭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제는 법으로 나쁜 것을 규제하는 것이 아니다. 나쁜 것을 나쁘다고 말하는 것마저 규제 하게 되었다. 다른 말로 나쁜 것도 법으로 보장해주면 좋은 것으로 둔갑하게 되었다. 법에서 나쁜 것은 살인, 폭력, 강도 같이 남에게 육체, 정신, 경제에 직접적인 피해를 주는 것뿐이다. 제 삼자에게 피해만 주지 않으면 무슨 짓을 해도 되는 세상이 되었다.
인간의 권리와 자유만 주장하는 것을 뒤집으면 하나님을 반드시 배제하겠다는 뜻이다. 이 운동을 주창한 Marcuse의 사상적 배경이 공산주의라는 사실과 바로 연결되지 않는가? 공산주의는 철저하게 무신론을 자양분으로 삼아 자란다. 현 세대에서 정치적 정당성 운동이 대중의 호응을 얻는 까닭은 바로 죄가 실종되었고 또 그 뒤에는 선과 악의 절대 기준인 하나님이 무시되었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체
현 세대를 흔히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라고 부른다. 계몽주의의 발현으로 인간 이성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큰소리친 것이 현대주의(Modernism)였다. 그러나 인간끼리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규모의 살육을 일삼은 일이차 세계 대전의 참상을 겪으면서 그런 기대와 주장은 완전히 소멸되었다. 한 마디로 지금은 그런 현대주의 이후(Post-Modernism)의 세대라는 뜻이다.
많은 사람들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적 조류의 두 축을 상대주의와 다원주의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현 세대의 사조는 나라, 지역, 인종, 종교, 문화마다 너무나 다양하고 아직은 하나의 주도적 사상체계가 없다. 또 계속해서 그 흐름이 변하고 있기에 딱 집어서 규정짓기는 힘들다. 물론 이 둘이 주도적(主導的)이긴 하지만 엄밀히 따져서 선도적(先導的) 사조라고는 말할 수 없다.
이 두 사조에 가장 정통할 것 같은 현대인이 사실은 그 정의(定意)조차 정확히 모르고 있다. 한 마디로 상대주의(相對主義 Relativism)란 진리는 있지만 시대와 장소와 사람에 구애받지 않는 보편적이며 절대적인 진리 판별 기준은 없다는 뜻이다. 반면에 다원주의(多元主義 Pluralism)는 진리에 대한 그런 기준이 여럿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언뜻 보면 둘 다 진리가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둘 사이에 엄연한 차이가 있다. 상대주의가 진리란 보는 입장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전제로 하지만, 내 기준으로만 판단하기에 나는 진리이고 다른 사람은 진리가 아니라는 결과를 낳는다. 반면에 다원주의는 진리를 판단하는 기준 자체가 여럿이므로 진리도 다양하게 존재한다. 쉽게 말해 상대주의와 다른 점은 나도 진리이고 너도 진리라는 것이다.
현 세대에 상대주의와 다원주의의 두 큰 흐름이 공존하고 있는 것은 분명 맞다. 그러나 그 둘뿐이라고 이해한다면 일면 순진하고 일면 잘못된 분석이다. 이미 말한 대로 선도적인 사조는 따로 있다. 그것은 진리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없다는 것을 넘어서 진리 자체가 아예 없다는 것이다. 상대주의와 다원주의가 너무 주도적이 되어서 모든 것을 다 진리라고 인정하다 보니 결국은 진리가 하나도 없다는 피치 못할 결론에 이른 셈이다.
상대주의와 다원주의만 해도 궁극적 진리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그것을 찾고자 노력은 했다. 그러나 이제는 진리 자체가 없기에 그런 노력조차 포기한 상태에 다다랐다. 말하자면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인정하는 유일한 진리는 “궁극적 진리가 없다”는 것뿐이다. 진리가 없으면 비(非) 진리도 자연히 없다. 선이 있어야 악이 있는데 선이 없으니 악도 없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이전의 염세주의나 허무주의는 진리를 찾는 과정 중에 실망한 탄식이었다면 지금은 아예 그런 탄식조차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한탄할 때까지만 해도 절대적 존재 자체를 부인했다기보다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이 죽었다고 하면서 오히려 절대적 존재에 대한 갈망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러나 현 세대는 그런 갈망조차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현 세대에게 가장 의미가 있는 것은 오직 “지금 당장 나의 기분이 어떠한가?” 뿐이다. 이전 세대도 동일했다고 함부로 말해선 안 된다. 겉으로는 이전이나 지금이나 나만의 현실적 풍요와 안락을 추구하는 것 같지만 여기에도 사실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지금은 현실적 풍요와 안락도 반드시 내 기분(feeling)을 좋게 만들어 주어야만 한다. 남들과 다른 나만의 기분을 만끽해야만 한다. 한 마디로 표현하면 "Cool"(아직은 우리말로 적당한 표현이 없음)해야 한다. 남들과 차별화 된 자기만의 Up 된 기분을 느껴야 한다.
반면에 이전 세대는 단순히 현실의 풍요와 안락만 추구했다. 쉬운 예로 이웃이 빅 스크린 TV를 사면 나도 사는 식이다. 동일한 종류의 풍요와 안락이라도 얼마든지 만족했다. 그러나 이제는 오히려 그러면 자기 기분을 Down 시키는 요소가 된다. 그렇다고 단순히 남들보다 더 크고 더 좋은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남들과는 다른 나만의 것을 가져야 한다. 오직 나만이 절대적 존재요, 기준이 되었다. 아니 내가 바로 진리다. 이 진리 외에는 어떤 진리도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선과 악이 분명히 존재한다면 인간은 악은 버리고 선을 실현해야 한다. 또 선과 악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을 가르는 기준이 있다는 뜻이다. 선과 악이 없으면 그런 기준 자체도 없기에 선과 악을 구분하는 논쟁은 아무 의미가 없다. 기준을 찾거나 만들든지, 아니면 과연 그런 기준이 실제로 있는지, 최소한 있어야 하는지 여부부터 결정해야 한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기준이 아예 (필요) 없다는 단계에 이르렀다. 기준을 찾거나 따지는 것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종교적으로 따지면 죄가 있다고 확실히 인정하면 인간은 죄에서 구원 받을 필요와 의미도 갖게 된다. 당연히 구원 받을 방도 중에 무엇이 옳은지 여부도 따지게 된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믿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기독교의 선포가 유용하다. 사람들이 그 십자가 복음을 인정하든 안 하든 간에 여러 구원관 중의 하나로 비교 검토할만한 가치는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제 죄 자체가 완전히 없게 되었다. 절대적 기준인 하나님이 완전히 실종되었다.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전도의 권면은 자신이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만 먹히는 말이다. 그러나 무엇을 해도 죄가 아닌 상태에선 과연 그 절대적 기준이 있는지 여부부터 따져야 한다. 죄가 있을 때는 여러 종교 중에 어느 것이 옳은지를 따져야 하지만 죄가 없기에 구원의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하게 된 것이다. 현 세대는 급기야 종교가 그 본연의 의미를 완전히 상실되고 단순히 하나의 취미 활동으로 전락했다.(**)
교회의 실정
교회는 죄악에 빠진 세상을 건져낼 방주다. 그런데 정작 교회 안에서 작금 죄에 대한 설교가 사라졌다. 하나님의 이름은 그런대로 남아 있는데 예수님의 십자가는 변조, 퇴색, 혹은 실종되었다. 위에서 말한 이 세대의 풍조에 물이 들어버린 것이다. 절대적 진리란 없다고 너무나 당당하게 말하며 오직 자신이 Cool 해지는 데만 관심을 쏟는 현대인들에게 완전히 주눅이 들어버렸다.
종교 자체부터 무용하다고 덤비는 그들 앞에 기독교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지성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반론하지 못한다. 교회마저 개인의 상처와 허물을 씻어서 내적 평강만 주는 곳이 되었다. 또 다른 의미로서, 아니 종교적 색칠을 해서까지 단지 Cool 해지려는 사람들의 요구에 굴복하고 말았다.
그렇게 된 데에는 교회 자체의 결정적인 판단 착오 또한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 일은 1975년 미국 시카고의 윌로우크릭 교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빌 하이벨스 목사는 불신자들을 교회로 모이게 하기 위해서 그들의 문화로 교회에 덧입히기 시작했다. 죄와 심판에 관한 메시지는 사람들이 듣기 거북해하므로 새로운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기로 했다. 소위 말하는 구도자 예배(Seeker's Worship)를 필두로 교회의 모든 분위기를 아주 세련되고도 고급한 대중문화의 양식을 빌려서 바꾸어버렸다.
그 동안 고리타분하고 폐쇄적이던 분위기를 풍겼던 교회가 현대식 쇼핑몰처럼 변했다. 교회에서 현실적인, 심지어 영적인 부담조차 받지 않는 대신에 자기 입맛에 맞는 각종 서비스를 골라 누리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음악은 절로 신나고, 헌금 강요도 없고, 심지어 온갖 문화시설까지 갖추었으니 금상첨화였다. 불신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미국 최초의 대형교회가 출현했다. 교회 성장을 바라는 대부분의 교회들이 똑 같이 흉내 내기 시작했다.
그분의 최초 의도의 순수성에 의심을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렇게라도 해서 일단 교회로 모이게 한 후에 성경공부를 통해 복음을 전하면 되리라고 섣불리 판단한 것이 문제였다. 죄, 심판, 지옥, 마지막 날, 재림 같은 용어 없이는 인간의 타락이 절대 온전하게 설명되어질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자연히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살아 있는 성령의 역사를 대체했다. 학교 공부 같은 규격화된 성경공부로서 십자가 보혈의 능력을 차용해 보려 했다.
그러나 지난 30여년의 모든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이 단지 머리로 납득해 받아들이거나, 아니 암기하거나 한 번 듣고 흘려버리면 그만인 기독교의 한 신조가 되었다. 개인적으로 그분의 복음 앞에 자기 존재 전부를 걸고 거듭나는 체험을 할 수가 없었다. 사람은 모이는데 변화가 없었다. 말 그대로 구도자(求道者)들만 모여서 열린 예배는 즐겨도, 진리를 깨닫고 체험하여 온전한 믿음 안에 사는 신자(信者)로는 끝내 바뀌지 않았다. 교회 멤버는 넘쳐 나도 예수님의 제자는 너무 드물었다.
실제로 그 교회에서 지나간 모든 시도들이 완전한 실패했다고 자인했다. 핵심 사역자인 그렉 허킨스와 콜리 파킨슨이 지난 3년간 만 여명을 대상으로 조사하고 120명을 일대일로 면담하면서 지난 32년간의 교회 사역에 대한 백서("Reveal: Where are you?")를 발간했는데, 이렇게 결론 맺었다. “뭔가 잘못됐다. 우리가 실수했다. 숫자로는 성공을 했는지 몰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참 된 제자를 만드는 일에 실패했다.” 또 이 결론에 빌 하이벨스 목사 본인도 회개하며 동의했다.
이 백서의 저자들은 근본부터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그린 그림을 지우개로 지우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흰 종이를 꺼내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영감을 얻어야 하는데 그 영감이 시대를 앞서가는 안목, 탁월한 마케팅, 세련된 프로그램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서 거기서 영감을 얻어야 한다고 했다. 다른 말로 지금까지는 성경 외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뜻이 된다.(***) (지금껏 이 교회를 벤치마킹한 수많은 한국 교회들은 과연 또 어디서 영감을 얻을 것인지....)
희망은 없는가?
그 동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벌어졌다. 세태는 아주 멀리 앞서 나갔다. 죄를 인지해 죄에서 구원 받으려는 인식이 완전히 사라졌다. 절대적 기준자체가 없어졌다. 포스터 모더니즘은 예수님의 십자가는커녕 창조주 하나님도 안중에 없다.
그런 세대를 교회가 복음으로 변화시키려면 그렇게 앞서 나간 것을 거꾸로 되돌리는 수밖에 없다. 절대적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가 있다는 사실, 최소한 그럴 가능성부터 다시 각인시켜야 한다. 그리고 그 진리에 반(反)하는 것은 절대적 죄임을 깨닫게 해야 한다. 그래서 죄에서 용서 받고 싶은 소망부터 생기게 해야 한다. 다른 말로 성경의 구원 담화를 사람들과 나누려면 그 앞에 전제가 되는 타락 담화부터 해야 하며 또 그 담화를 하려면 그 이전의 창조 담화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도 교회 스스로 타락 이야기는 아예 하지 않기로 했으니 어떤 결말이 될지 너무나 빤하지 않는가? 자연히 그 다음 단계인 구원 이야기를 아무리 심각하게 전해도 기독교의 일개 장식품 내지는 맛보기 정도로 밖에 여기지 않는다. 십자가 없이, 죄에서 사함 받아 거듭남 없이 어떻게 신자가 되며 그 인생이 바뀌기를 기대할 수 있는가? 아니 성경이 바로 인간의 죄에 관한 이야기인데 대체 성경을 안 가르치면 교회가 무엇을 하겠다는 심보인가?
인간이 죄를 죄라고 인정하면 회개와 용서의, 최소한 하나님이 더 인내하며 심판을 유보해 주실 여지는 남는다. 그러나 죄를 죄가 아니라고 여기면 더 이상 용서와 심판의 의미가 없어진다. 거기다가 하나님 당신 자체를 부인한다면 하나님이 다시 나서는 수밖에 없다. 예수님의 초림은 구원에 대한 유일한 길을 보여주는 데 목적이 있었다. 이제는 그런 구원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 남은 것은 심판뿐이다. 초림의 목적은 심판 대신에 구원이었지만(요3:17) 재림의 목적은 당연히 심판이다.
그럼 이런 포스트모더니즘의 세상에서 기독교는 아무 소망이 없는가? 아니다. 오히려 반전의 기회로 삼을 수 있다. 우선 인간 이성의 무용성을 확실히 인정했다는 점만큼은 아주 긍정적 요인이 된다. 한 마디로 인간의 한계를 자인한 것 아닌가? 그럼 그 다음 단계는 믿음 아니면 절망 둘 뿐이다. 따라서 기독교가 절망에서 빠져 나올 확실한 방도를 보여준다면 더 큰 호응을 받을 수 있다. 아니면 사람들이 절망의 심연에 떨어지고 나면 위를 향해 고개를 쳐들 수도 있으리라는 기대를 희미하게나마 가질 수 있지 않겠는가?
또 현세대의 “나만 Cool하면 그만”이라는 선언도 사실은 절대적 진리를 찾는 인간 본연의 몸부림이지 않겠는가? 절대적 진리를 찾지 못해서 자신과 자기 기분으로 대체한 것일 수 있다는 뜻이다. 피조물로 연약하고 죄에 물든 인간은 어떤 수를 동원해도 예수님의 십자가 없이는 곧바로 자신의 한계에 부딪히게 마련이다.
실제로 그런 징조도 서서히 보인다. 컴퓨터 앞에서 고립된 채 혼자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젊은 세대조차 여전히 진정한 사랑을 그리워한다. 생판 모르는 남이라도 같은 취향을 공유한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금방 친해진다. 최근 연쇄 살인범을 옹호하는 카페까지 생긴 것도 비록 선악의 기준은 사라졌지만 결코 인간이 혼자 자기 왕국의 제왕으로 남아 있을 수는 없다는, 그래서 반드시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어야 살 수 있는 존재라는 반증이지 않는가?
또 인간끼리 관계를 맺으면 필연적으로 선악은 생기게 마련이다. 동물과 기계만이 무슨 짓을 해도 선악과 무관하다. 바보나 정신병자에게 선악을 물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반면에 혼자만 즐기는 것은 말 그대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에 옳고 그른 것으로 나눌 정치적 기준마저 없다. 그러나 일단 인간이 다른 사람과 연결되면 어떤 형태로든 손익의 대차가 발생하고 그 여파로 반드시 죄악이 따른다.
이런 맥락에서 기독교에 결정적인 소망이 하나 더 남아 있다. 아무리 절대적 기준이 없기에 절대적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고집(?)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신봉자도 나치 독일만큼은 확실히 죄악이었다고 실토한다. 그럼 나치 같은 악이 역사상 한 번만 있고 앞으로 다시는 있지 않을 사안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예컨대 지금도 아프리카 다푸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종 청소가 바로 나치와 하나 다를 바 없는 분명한 죄악이다.
절대적 악이 있다면 당연히 절대적 선도 있어야 한다. 아니 있다. 너무 고상하고 심각하게 생각할 것 없다. 절대적 악의 반대가 바로 절대적 선이지 않는가? 아프리카 다푸르에서 인종, 문화, 정치, 관습, 종교 등 모든 면에서 자기들과 다른 사람이 와서 인종 청소 대신에 자기부터 먼저 희생하며 진정으로 그들의 유익만을 위해 돕고 섬기는 것이다.
지금 세상에서 하나님이 사라져 선악간의 기준마저 사라졌지만 분명히 절대적 악은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그럼 절대적 선만 세상 앞에 보여주면 선악간의 기준도 다시 생길 수 있다. 바로 그 일을 신자가 맡아야 한다. 성경만이 절대적 하나님의 절대적 선악의 기준을 밝혀 놓았기 때문이다. 또 포스트모더니즘을 주도하는 다원주의와 상대주의와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지금이야말로 모든 교회와 신자가 다시 한 번 절대적인 성경의 영감으로 돌아가야 할 때다. 창조, 타락, 구원, 완성이라는 성경의 거대 담론을 신자들부터 습득하고 나눌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의 믿음이 과연 어디에 있는지, 또 내가 어떤 신분의 존재로 바뀌었는지 십자가 예수 안에서 정립해야 한다. 당신은 지금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거대한 격랑 속에서 과연 어디에 서있는가? Where are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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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nderstanding The Times" (by David A Noebel, Summit Press, 2007, page 24)
(**) 현 세대의 이런 영적 흐름에 대해선 David Wells의 사부작을 자세하게 참조 바람 (신학실종 / 거룩하신 하나님 / 윤리실종 / 위대하신 그리스도, 부흥과 개혁사 번역 발간)
(***) Chosun.com의 한 블로그의 기사에서 참조했음, 윌로우 크릭 교회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그 백서를 구입하려 시도해 보았으나 아마 대내용으로 작성한 보고서인지 구할 수 없었음, 실제로 이 교회에 출석하는 한 한국인 자매님에 따르면 최근 하이벨스 목사의 주일 설교에 잘못했다는 회개와 함께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메시지를 자주 전하고 있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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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땅의 모든 교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하여
새롭게 개혁되어지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