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세주와 조선민족혁명당. (1)
글쓴이 : 상지대학교 강만길 총장
석정(石正) 윤세주(尹世胄)의 독립운동전선에서의 활동을 크게 보아 4시기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그 제1기는 물론 김원봉(金元鳳) 등과 함께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여 활동하던 시기이며,
제2기는 감옥생활을 통해 사상적진보를 이루는 한편 국내에서 신간회(新幹會)운동에 참가했다가
망명하여 역시 사상적으로 변화한 의열단에서 활동하면서 대일전선통일동맹(對日戰線統一同盟)등을
결성하던 시기이며, 제3기는 민족해방운동단체 중 최초의 좌우익 통일전선정당이라 할 수 있을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에서 활동하던 시기이면, 제4기는 조선민족혁명당을 중심으로 하는
중국전선에서의 좌익세력 통일전선체인 조선민족전선연맹(朝鮮民族戰線聯盟)의 군사력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의 일원으로 활동하던 시기라 할 수 있다.
이들 각 시기에 걸친 윤세주의 활동이 모두 중요하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조선민족혁명당에서
활동하던 시기가 주목될 만하다. 왜냐하면 조선민족혁명당은 중국전선에서 활동하던
우리 민족해방운동전선이 최초로 결성한 정당(政黨)인대, 정당에는 정강(政綱)이 있고
정책(政策)이 있게 마련이며, 대개의 경우 기관지(機關紙)를 발행했다. 조선민족혁명당이
정강ㆍ정책을 마련하는데 윤세주의 활동이 컸다고 생각되며, 많지는 않지만 그의 글도 남아 있어서
그 정치사상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한다. 즉 조선민족혁명당에서의 윤세주의 활동상을 살펴보면
그의 활동과 사상을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는 것이다.
한편 일제강점시대(日帝强占時代)의 우리 민족해방운동은 좌우익(左右翼)의 통일전선운동으로
추진된 경우가 많은데, 조선민족혁명당의 활동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특히 윤세주는 “우리 운동(運動)의 새 출발(出發)과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의 창립(創立)”이란
글을 써서 좌우익 통일전선 정당으로서의 조선민족혁명당이 결성된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우리 민족해방운동전선에서의 좌우익 통일전선운동의 필요성과 그것이 가지는 의의(意義)를
잘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1940년 경 조선민족혁명당의 당원(黨員)과 조선의용대원(朝鮮義勇隊員) 대부분이
중국공산군지역으로 갈 때 김원봉을 비롯한 다의 중앙부는 그대로 장개석(蔣介石)지역에 남았으나
윤세주는 젊은 대원들과 함께 중공군지역, 태항산지역(太行山地域)으로 가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결국 전사(戰死)했다. 그는 일제강점시대 우리 민족해방운동전선의 이론가(理論家)의
한 사람이었으나 그의 글이 많이 남아있지 않은 것이 유감(有感)이다. 일부 남은 글을 통해서도
그가 무엇을 위해 민족해방운동전선에 뛰어들었는가를 알 수 있게 한다.
특히 그가 이론가로서 참가했던 조선민족혁명당이 우리 민족해방운동전선 전체를 통해서
어떤 위치에 있는 정당인가를 살펴 봄으로서 윤세주의 활동과 생각이 우리 민족해방운동전선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이해 할 수 있게 된다.
1920년대의 조선의열단(朝鮮義烈團)과 윤세주(尹世胄)
의열단원(義烈團員), 신간회(新幹會) 회원(會員) 윤세주(尹世胄)
석정(石正) 윤세주(尹世胄)는 고향인 밀양(密陽)의 동화학교(同和學校)에 다닐 때부터
김원봉 등과 함께 이미 민족독립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연무단(鍊武團)이란 비밀조직을 만들어
활동했고, 3ㆍ1 운동이 폭발하자 고향에서 시위(示威)를 주도했다. 일본경찰의 검거를 피해
만주(滿洲)로 망명(亡命)하여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에 입학했는데,
일본경찰은 수배령(手配令)을 내린 후 궐석재판(闕席裁判)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했다.
만주(滿洲) 길림성(吉林省)에서 김원봉(金元鳳) 등 12명의 동지들과 함께 폭력적독립운동단체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했다. 의열단이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와 매일신문사(每日新聞社)와
동양척식회사(東洋拓植會社)를 폭파계획을 세우는데 참가하고, 그 행동대원으로서
1920년에 국내에 잠입했다가 모래 들여 온 무기가 발각되어 동지 5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것이 “기미운동 이후로 가장 세상의 이목을 놀라게 한
의열단 제1차 밀양폭탄사건(密陽爆彈事件)”이다. 윤세주는 재판 끝에 7년형을 선고받았다.
의열단의 밀양폭탄거사는 실패했으나 같은 해에 부산경찰서(釜山警察署) 폭파거사(爆破擧事),
밀양경찰서(密陽警察署) 폭파거사(爆破擧事) 등이 계속 되었다.
7년 간의 감옥생활을 하는 동안 윤세주 개인과 의열단에게 각각 큰 변화가 생겼다.
먼저 윤세주는 옥중에서의 독서를 통해 사회주의적(社會主義的) 세계관에 접하게 되였다.
출옥 후에는 밀양신문사(密陽新聞社) 사장으로 있으면서 일본 대학의 강의록 등을 통해
지식을 넓히는 한편, 1927년에는 신간회 밀양지회 창립준비집행위원(創立準備執行委員) 13명중의
한 사람으로 참가하고 지회가 조직된 후에는 5년 간 그 총무간사(總務幹事)를 맡았다.
그가 민족해방운동전선의 좌우익 통일전선운동에 참가하기는 이 때가 처음인데,
사회주의적 세계관을 가지고 또 신간회운동에 참가했으면서도 당시 화요회파(火曜會派)나
신간회운동에 참가한 주류세력인 엠엘파(ML派) 등 국내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조직에는
가입하지 않았던 것 같다. 조선공산당은 신간회 해소를 주도했으나 그는 해소를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다시 중국(中國)으로 간 윤세주(尹世胄)와 의열단(義烈團)
출옥 후 밀양신문사 사장, 중외일보(中外日報) 밀양주재 경남주식회사(慶南株式會社) 사장 등을
맡았던 윤세주는 신간회가 해소된 후 1932년에 다시 김원봉 등 옛 동지들이 있는 중국으로 갔다.
남경(南京)에서 12년 만에 김원봉을 만난 그는 “나의 과거 인생(人生)은 다만 열정(熱情)과
용기(勇氣)로서만 조선독립(朝鮮獨立)을 하려고 분투(奮鬪)해 왔다.
그러나 현재의 나의 경험(經驗)과 교훈(敎訓)에 근거(根據)하여 단 혈 열정과 용기만으로는
목적을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을 다시 깨달았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혁명적 인생관ㆍ세계관 등과
과학적 혁명이론(革命理論)으로 나의 두뇌(頭腦)를 재무장(再武裝)하여야, 나아가
정확한 혁명운동을 추진할 수 있다.”고 했다.
이 말은 윤세주의 세계관(世界觀)이 의열단에 참가했던 때와는 크게 바뀌었음을 말해주고 있지만,
그가 국내에서 있은 12년 동안 의열단 자체의 성격도 역시 크게 변하고 있었다.
1919년 의열단이 조직될 때의 “공약 10조”에는 사회주의적 성격이 전혀 없었으나
“계급타파(階級打破) 평균지권(平均地權) 등을 최고의 이상으로 했다”는 기록이 있고,
1921년경의 기록에도 의열단이 소련공산당과 연결이 있다는 기록이 있으나 사실여부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신채호(申采浩)가 1923년에 쓴 유명한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은
의열단의 요청에 의한 것이므로 이 무렵의 의열단은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에
기운 단체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의열단이 사회주의적 단체의 성격을 가지게 되는 계기는
김원봉을 비롯한 그 지도부가 중국의 황포군관학교(黃浦軍官學校)에 입학하는
1925년부터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 무렵의 김원봉 등은 ‘독립(獨立)’을 ‘혁명(革命)’으로
이해하고 그것이 제도의 변화와 함께 이루어져야 함을 알게 되었다. 그 ‘혁명(革命)’의 길은
‘각오(覺悟)된 민중(民衆)’에 의한 무장투쟁의 길밖에 없으며, 민중을 ‘각오’시키기 위해
먼저 그들 스스로가 탁월한 지도이론(指導理論)을 터득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으로
황포군관학교에 ‘일개 생도(生徒)’로 입학했다.
이후부터 의열단의 성격은 급격히 변화해 갔다.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한 김원봉 등은
중국의 북벌전쟁(北伐戰爭)에 참가하게 되는데, 이 무렵의 의열단은 이미
‘농공민중(農工民衆)’ 정권 수립을 지향했다는 자료가 있으며,
1927년에는 당시의 우리 민족해방운동전선에 크게 대두된 민족협동전선운동(民族協同戰線運動)
즉 좌우익 통일전선운동에 참가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28년에 발표된 제3차 전국대표자대회선언(全國代表者大會宣言)에서는
“대지주(大地主)의 재산(財産)을 몰수(沒收)함” “대규모의 생산기관 및 독점성의 기업은
국가에서 경영함”이라 했고, 같은 해 발표된 ‘창립9주년기념 문’에서는 ‘조선혁명을 위한
중요 정세변화’로서 “민족적 공동전선의 개시”와 함께 “공산주의자의 지도 아래
급격히 전개되는 노동대중의 운동”이 거론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후 의열단 단장 김원봉은 국내의 공산당운동에서 협동전선론(協同戰線論)을 펴다가
망명(亡命)한 엠엘파(ML派) 간부 안광천과 제휴하여 조선공산당 재건동맹을 결성하고
그 전위투사(前衛鬪士)양성기관으로서 ‘레닌주의 정치학교’를 북경(北京)에 설치하고
1930년부터 31년까지 2회에 걸쳐 합계 21명의 졸업생을 내기도 했다.
1920년대를 통해서 국내에 있던 윤세주도 세계관의 변화를 이루었지만, 같은 시기 주로 중국에서
활동하던 의열단도 급격히 사회주의적 단체로 변모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중국에 간 윤세주가 의열단과 행동을 같이하게 된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