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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상 글 >
일어나 비추어라...
글 : 이 클라우디아(해인) 수녀
<성 베네딕도 수녀회>
내가 원치 않아도 슬그머니 빠져나가어둠 속에 방황하고 쉽게 절망하는 내 마음이여, 
일어서라, 일어나 비추어라 !
희망의 빛으로 오시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오늘도 나에게 새 힘을 주십니다.
바쁜 것을 핑계로 이기심과 무관심의 벽을 쌓고
기도의 말을 잃어버려 괴로운 친구여,
일어서라, 일어나 비추어라 !
신앙의 빛으로 예수그리스도께서
오늘도 그대를 기다리십니다.
한 핏줄 한 형제이면서도 갈라져 사는 슬픈 우리나라 민족이여,
일어서라, 일어나 비추어라 !
일치의 빛으로 오시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어서 하나 되라고 눈물 흘리십니다. 평화를 재촉하십니다.
목숨 바쳐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의 거룩한 피로 세워진 공동체 한국교회여,
일어서라, 일어나 비추어라 !
진리의 빛으로 오시는 예수그리스도께서 풍성한 은총으로 교회를 축성하십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오시어 이 땅의 124위 순교자들을 시복하시고,
우리도 성인되라 초대하며 강복해주십니다...
충실히 걸어야 할 일상의 순례길에서
이미 와 있는 천국을 인내와 겸손으로 살아내고
마침내는 영원한 지복의 나라에 이를 수 있도록
날마다 새롭게 기도하라 하십니다...
완덕의 길로 힘차게 전진하라고 우리를 부르고 파견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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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종의 칙서 >
‘자비의 특별 희년’ 선포 칙서 자비의 얼굴 - 제8부 -
글 : 교종 프란치스코
하느님의 종들의 종, 로마 주교 프란치스코가 이 편지를 읽는 모든 이에게 은총과 자비와 평화를 빕니다.
17-2. 자신의 재산을 탕진해 버렸지만 그 아들을 반기려 뛰어나가는 아버지처럼 말입니다. 고해 사제는 집으로 돌아오는 참회하는 아들을 끌어안고 그를 되찾은 기쁨을 드러내야 합니다. 고해 사제는 기뻐하지 못하고 밖에 서 있는 다른 아들에게도 다가가 하느님 아버지의 끝없는 자비 앞에서 그의 완고한 생각은 바르지 못하고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끊임없이 설명해 주어야 합니다. 고해 사제들은 쓸데없는 질문을 하지 말고 그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처럼 돌아온 아들이 미리 준비한 말도 막아 버려야 합니다. 고해 사제들은 도움을 청하고 용서를 비는 고해자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다. 한마디로, 고해 사제들은 언제나 어디서나 어떠한 상황에서나 그 무엇보다 앞서 자비의 으뜸가는 표지가 되어야 합니다.
18. 이 성년의 사순 시기에 저는 자비의 선교사들을 파견하려고 합니다. 그들은 하느님 백성을 보살피는 교회의 어머니다운 배려의 표지가 되어 참으로 신앙의 근본이 되는 이 자비의 신비가 지닌 부요에 하느님 백성이 깊이 들어가게 해 줄 것입니다. 저는 일부 사제들에게 사도좌에 유보되어 있는 죄를 용서해 주는 권한을 부여하고, 그 위임 권한의 폭을 분명히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용서를 구하는 이들을 따뜻이 맞아 주는 하느님 아버지의 살아 있는 표지가 될 것입니다. 자비의 선교사들은 참으로 인간적인 만남을 마련해 주는 이들로서 해방의 원천이 되며, 장애를 극복하고 세례의 새로운 삶을 다시 시작하도록 하는 막중한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도의 말씀으로 그들의 사명을 수행할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을 불순종 안에 가두신 것은,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려는 것입니다”(로마11,32). 실제로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자비의 부르심을 받아야 합니다. 자비의 선교사들은 자신이 “자비로우시며 충실하신 대사제”(히브 2,17참조)이신 예수님으로 보일 수 있음을 깨닫고 이러한 자비의 부르심을 실행하여야 합니다.
저는 형제 주교님들이 이러한 선교사들을 초대하고 받아들여 그들이 무엇보다도 확신에 찬 자비의 설교자가 될 수 있게 하기를 바랍니다. 모든 교구가 만민 선교를 조직하여 이러한 선교사들이 용서의 기쁨을 전하게 하여야 합니다. 주교들은 자기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주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희년이 우리에게 선사한 은총의 시기에 하느님의 많은 자녀들이 하느님 아버지의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여정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특히 사순 시기에 목자들은 열심히 신자들을 다시 불러들여, 그들이 “은총의 어좌로 나아가 자비를 얻고 은총을 받도록” 하길 바랍니다(히브 4,16참조).
19. 용서의 말씀이 모든 이에게 전해지고 자비를 경험하라는 부르심에 그 누구도 제외되지 않도록 하길 바랍니다. 저는 하느님의 은총과는 멀리 떨어진 생활 방식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회개하라고 더욱 간곡히 권유합니다. 저는 특히 모든 범죄 조직에 속한 이들을 생각합니다. 저는 그들이 자신을 위하여 새로운 삶을 살도록 간절히 요청합니다. 저는 죄와 맞서 싸우지만 죄인을 마다하지 않으시는 하느님 아드님의 이름으로 이를 요청합니다. 인생이 돈에 달려 있고 돈 앞에서는 그 무엇도 가치와 존엄이 없다고 생각하는 끔직한 덫에 빠지지 마십시오. 이는 단지 허상에 불과할 뿐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날 때 그 돈을 가져갈 수 없습니다. 피 묻은 돈을 긁어모으려고 폭력을 행사해 보아야 그 누구도 강해지거나 영원히 살지도 못합니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하느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며, 아무도 이를 피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부패를 저지르거나 그에 연루된 사람들도 포함됩니다. 사회의 이러한 곪은 상처는 개인 생활과 사회생활의 근간을 위협하기에 하늘에까지 이르는 중대한 죄입니다. 부패는 우리가 희망을 가지고 미래를 바라보지 못하게 합니다. 부패의 무도한 탐욕은 약자의 미래 계획을 산산조각 내버리고 가장 가난한 이들을 무참히 짓밟아 버립니다. 바로 이러한 죄악이 일상생활에 파고들어 퍼져 나가 공공연히 추문을 일으킵니다. 부패는 우리 마음을 죄로 완고하게 만들어 하느님을 멀리하고 돈이 곧 힘이라는 허상에 빠지게 합니다. 부패는 의혹과 음모로 조장되는 어둠의 활동입니다. 대 그레고리오 성인은 “가장 좋은 것의 부패가 가장 나쁘다.”(Corrupio optimi pessima)라고 바르게 말하였습니다. 이는 그 누구도 부패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단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개인 생활과 사회생활에서 이 부패를 척결하려면 현명함, 경계심, 정직성과 투명성 그리고 어떠한 부정행위라도 고발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공개적으로 부패와 맞서 싸우지 않으면, 우리는 언젠가 부패에 가담하여 우리의 삶을 파괴하고 말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적절한 때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야 할 때인 것입니다! 악행에 맞설 때, 심지어 중대한 범죄와 맞설 때가 바로 재산을 박탈당하고 존엄과 감정이 짓밟히며 생명마저도 빼앗긴 무고한 이들의 외침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때입니다. 악의 길에 머무르면 결국 환멸과 비탄에 잠기게 될 뿐입니다. 참된 삶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다가오십니다. 하느님께서 언제나 귀 기울이실 준비가 되어 계신 것처럼 저도 저의 형제 주교님들과 신부님들과 함께 그렇게 한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교회가 마련한 자비의 특별한 시기에 모두 회개하라는 초대를 받아들이고 정의를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 8월호에 제9부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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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B 영적지도신부 훈화 >
7월의 아침에...
윤 클레멘트( 양호) 신부님
<전주교구 소속 지도신부>
비가 내리는 7월의 아침, 계속해서 비가 내린다.
어느덧 7월이 시작되는 이 아침인데, 세월 속에서 맞는 또 하나의 새로운 달이다.
유수(流水)와 같이 흘러가는 시간의 선상(船上)에서 그처럼 우리는 살아간다.
어제는 6월이고, 오늘은 7월이다.
엊그제는 1년 전이고, 낼 모레는 내년일 것이며...
사랑, 미움, 고통, 기쁨, 고독, 희망, 절망, 슬픔도 접어놓고서 문득 다가선 7월을 바라다본다.
그렇게들 우리는 살아간다...
몹시 아팠던 지난 이틀간, 내 작은 육신이, 이 작은 몸이 그토록 힘들었다.
많이도 몸살을 했다.
6월을 보내기가 그만큼 아쉬웠을까?
지나가는 달을 보내기가 그렇게나 쉽지 않았던 까닭일까?
불청객으로 찾아온 육신의 아픔으로 6월이 가는 저녁을 나는 내내 괴로워했다.
아직은 아직은 내 작은 몸, 맘, 영혼 안에 그 토록 절절하게 욕망, 욕심, 한이 스민 까닭일까?
희망, 바램, 소망이 그리운 때문일까?
이 몸이 그러합니다... 이 육신이 그러합니다... 이 삶이 그러합니다...
하늘을 이고서 부끄럼 없이 살기를 바라고 바랐더니만,
내 안에, 내 속에 쌓여온 누더기, 누더기 내 삶의 누벼진 자국들이여...
올바르게 서 있고 꿋꿋하게 걸어가기를 바라고 바랐더니만,
걸어온 내 삶은 이토록 휘청이며 속절없이 방황해야 하는가?
비우고 떠날 수 있어야 하는데... 버리고 훌훌히 나설 수 있어야 하는데...
아무 것, 아무 에게도 매임도 갇힘도 없이... 내가 살아가는 삶이 그러합니다.
내가 묻힌 날들이 그러합니다. 내가 내린 시간들이 그러합니다.
자유롭고 가벼운 존재성으로 구속도, 얽힘도 없는 마음과 육신인 채 길을 나설 수 있어야 하는데...
언제든지 어느 곳이든 떠날 수 있어야 하는데, 훌훌히 표표히 하늘의 님과 해님과 달님만 바라보면서 바람에도 구름에도 걸림이 없이 그렇게 길을 나설 수 있어야 하는데... 어느 날, 어느 곳으로...
생각합니다.
내 삶은, 지금 내가 묻혀서 사는 이 몸, 맘, 영혼은 그 토록이나...
세상, 사람들, 일, 욕망, 욕심, 어둠, 죄, 그늘, 아픔이 묻혀 있다는 것을... 스미어 있다는 것을...
7월의 아침인데 오늘따라 유난히도 많이 죄스럽습니다... 많이 부끄럽습니다... 많이 송구합니다...
하느님, 하느님, 이 죄인을 용서하소서... 이 죄 많은 육신, 마음을 사하소서.
이 송구한 영혼을 강복하소서... 나의 하느님, 우리의 하느님이시여...!!!
- 신부님의 '영성의 물가‘ 中에서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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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2016. 7. 3
마태오 10, 17~22
♠ 복음 묵상 – 매일미사 49~50쪽 참조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발행)
*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따라 세례를 받고 낯설기만 한 신앙에 입문한 김대건은 15세에 신학생으로 선발되었습니다. 중국 대륙을 지나 마카오로 가 사제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하고 사제가 된 나이는 만 24세였습니다. 실로 미력한 나이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순교하기 전 감옥에 갇혀서도 사제요 지도자답게 신자들에게 편지를 보내, 재앙을 겁내지 말고, 용기를 잃지 말 것이며, 하느님을 섬기는 데 뒷걸음치지 말라고 강력하게 권고했습니다.
주님의 복음을 선포하고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려고 이 광활하고 거친 세상에 나설 때 맞게 되는 많은 고통의 순간에 나 자신에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그 뿌리에서부터 지켜 주시는 그분께 의지합니다. 평소에는 잘 느끼지 못하다가도, 가장 큰 위기와 고통의 순간에는 우리 내면에서 자신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드러나게 되고, 또한 내가 가장 크게 의지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김대건 신부님을 비롯한 모든 순교자가 고문과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도 자신의 삶과 신앙의 뿌리가 무엇이고 어디에서 왔는지 훌륭히 보여 주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우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우리에게 알려 주실 것입니다.”
♠ 대화 방향 : 신앙생활을 하면서 박해가 왔을 때 주님의 도우심으로 끝까지 견뎌냈던 경험이 있는지... 어려운 상황에서 자신의 신앙이 흔들릴 때 순교자들의 삶을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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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5주일
2016. 7. 10
루카 10, 25~37
♠ 복음 묵상 – 매일미사 75~76쪽 참조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발행)
*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오늘 율법 교사의 질문에서 우리는 인간의 나약함과 두려움을 봅니다. 자신의 삶 안에서 늘 마주치는 불확실성과, 결국은 죽음을 맞이하게 될 인간의 한계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인간은 이 두려움을 이겨 내려고 하느님을 만나고 싶어 하고, 하느님 안에서 영원한 안식처를 얻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찾던 하느님의 모습은 큰 변화를 겪게 됩니다. 하느님을 “절대적 타자”, 곧 우리와 완전히 다른 분으로 인식했던 구약의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만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그분과의 계약, 곧 율법에 충실함으로써 구원을 얻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절대자이신 하느님께 바칠 만한 절대적 충실함은 오히려 인간에게 더 큰 짐을 지워 줍니다. 반면, 우리에게 다가오신 메시아는 우리와 완전히 다른 분이 아니고, 하느님의 모상이시면서 동시에 완벽하게 우리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이제 하느님께 드려야 할 봉헌도 율법 안에서의 완벽함이 아니라, 우리 일상에서 만나는 이웃들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착한 사마리아인은 비록 무시와 경멸을 당하는 사람이었지만, 종교적으로 거룩한 직분을 가진 이들이 그냥 스쳐 지나갔던 그 가엾은 사람에게 다가가 치료해 주고, 자기가 가진 것을 나누어 쉴 곳을 마련해 줍니다. 모든 것에 앞서 그의 근본적인 선택은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자비는 세상을 바꿉니다. 약간의 자비로도 세상은 덜 차갑고 더욱 정의로운 곳이 됩니다.” 이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입니다.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입니다. 고통받는 이를 보고도 지나가 버리는 세상에서, 우리는 이웃에게 자비를 베푼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 대화 방향 :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적극적인 자비로 이웃을 사랑했던 체험을 나눠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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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6주일 / 농민 주일
2016. 7. 17
루카 10, 38~42
♠ 복음 묵상 – 매일미사 106~107쪽 참조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발행)
* 자기 집에 찾아온 손님을 잘 대접하는 것은 모든 이에게 필요한 덕입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자신들이 이집트에서 이방인이며 노예로 살았던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신앙의 행위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손님을 맞아들이고 가장 잘 대접하는 것은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해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첫 번째 자세는 바로 듣는 것입니다. 손님의 뜻을 먼저 듣지 않고 자기의 뜻대로 차리는 것은 대접이 아니라 자기 과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의 접대는 자신의 삶을 완전히 뒤집어 변화되기를 바라시는 그분을 맞아들이는 것입니다. 내 자신의 삶의 공간을 ‘조금’ 내어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세상의 가치관을 버리고 그분의 가치관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삶의 주변에서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면 우리가 이웃이 되어 주고 봉사해야 할 이들이 보입니다. 모두에게 버림받은 노인이든, 불의하게 천대받는 외국인 노동자든, 삶의 의미를 상실한 노숙자든 모두 다 우리가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귀를 기울이기를 바라시는 주님의 초대요 부르심입니다.
교회의 일꾼으로 갖가지 일을 하며 분주하게 살다가 정작 중요한 것을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우리 “영광의 희망”이신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는 일에서부터 다시 출발합시다.
♠ 대화 방향 : ① 나는 분주하게 생활하느라 영적 힘을 소진해 버렸거나 삶의 방향을 잘못 잡지는 않았는가? 그렇다면 먼저 바라보고 만나야 할 분은 누구인지 생각해 봅시다.
② 우리는 마르타처럼 많은 일에 마음을 쓰고 걱정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 실상 나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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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7주일
2016. 7. 24
루카 11, 1~13
♠ 복음 묵상 – 매일미사 132~139쪽 참조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발행)
*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입니다. 신앙인은 기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소통하며, 자신의 청원을 올리고, 기도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으려 노력합니다. 그러나 기도가 올바른 대화가 되려면 하느님과의 관계가 제대로 정립되어야 합니다. 기도 안에서 하느님은 오로지 우리에게 필요한 선익을 주시는 분으로, 그래서 우리는 기도를 통해 자신의 부족함이나 게으름을 보충할 수 있는 정도로 생각할 위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기도 안에서 자신의 온전한 존재로, 살아 계시며 진실하신 하느님을 만납니다. 한 인격과 인격의 만남이며, 자유로운 인간과 참자유이신 분의 만남입니다. 아브라함의 표현처럼 그분은 절대자이시며, 우리는 그분 앞에서 먼지와 재에 지나지 않는 존재이지만, 그분은 우리에게 먼저 자신을 드러내시고 우리 삶의 굴곡의 순간들에 함께하시어, 오늘 시편이 노래하듯이 “제가 부르짖던 날 당신은 응답”하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의 기도도 청원보다는 응답입니다. 우리에게 먼저 자신을 드러내신 분에 대한 응답이요, 우리를 위해 자신을 바치신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입니다. 입으로 바치는 기도를 통해 우리는 자신의 의식을 성찰하여 하느님과 일치해야 하며, 삶으로 바치는 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완성될 수 있도록 주어진 사명을 완수해야 할 것입니다.
♠ 대화 방향 : ① 우리의 기도는 어떤 것이었나요? 하느님의 원의에 맞춘 것이었는지 우리의 욕구충족에 맞춘 것이었는지 돌아봅시다.
② 참된 기도는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어떠한 모습이든 남김없이 하느님 앞에 열어 놓았을 때, 기도 안에서 삶이 변화된 체험이 있다면 나눠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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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8주일
2016. 7. 31
루카 12, 13~21
♠ 복음 묵상 – 매일미사 165~170쪽 참조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발행)
* 모든 사람은 근본적으로 삶의 확실한 안전판을 갖고자 합니다. 죽는 날까지 편안한 삶을 누리면서 자신의 존재를 기댈 수 있는 든든한 기둥을 마련하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재산을 많이 모아 둠으로써 이것이 가능하다고 믿기에 돈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합니다. 또한 돈은 인간에게 권력을 주기도 합니다. 돈을 가진 자는 그것을 이용해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그래서 자고이래로 돈이 권력이 되고 우상이 됩니다.
돈에 대한 갈증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고, 이웃을 형제가 아니라 극복하고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유산을 나누는 것 또한 가족들에게 쉽지 않은 일이며, 때로는 유산으로 가족이 분열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삶의 확실한 기초는 재산이 아니라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느님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하느님 안에서만이 재산의 사용도 진정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모든 재화는 개인주의로 인한 분열의 도구가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나눔으로써 친교를 이루는 데 그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이 되도록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선물인 재산을 움켜쥐지 않고 손을 펴 가난한 이들과 나눌 때, 하느님만이 주시는 참된 부를 갖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이 허무로다!” 하고 뒤늦게 후회하지 말고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사람이 됩시다.
♠ 대화 방향 : ① 현재 나에게 가장 큰 관심과 걱정거리는 무엇인지 나누어 봅시다.
② 물질에 대한 탐욕 때문에 내 안에 계신 주님을 외면한 적 없는지 반성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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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 생활 나눔 >
용 서
전주 효자4동 파티마 팀 FB
김 세실리아 (양숙)
† 찬미 예수님
지난 6월 19일 주일 미사 때 마태 18, 19ㄴ-22 복음말씀 강론을 듣고서 용서에 대하여 새로운 관점을 발견하게 된 얘기를 말씀 나누고자 합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마태18.21~22) 주일미사 복음입니다.
이 말씀은 용서에 대한 주님 말씀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용서는 어디까지 용서해야 한단 말인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원한도 있지 않을까? 신부님께서는 이 복음말씀에 대하여 이렇게 강론하셨습니다. 용서에는 제한이 없어야 한다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용서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용서의 반대는 미움이 되는데 미워하게 된다면 누가 먼저 손해를 볼까요? 라고 신부님께서 물으셨습니다. 증오하는 상대방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자신만 괴로움에 사로잡혀 먼저 불타오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용서한다는 것이 마치 증오의 대상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라고 우쭐대기도 했었는데, 저는 언감생심(焉敢生心)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습니다. 용서란 자선이나 자비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마음의 평화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요.
또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에페소서 4.32) 여기에 그 명쾌한 해답이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용서하신 것처럼 너희들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죠.
너, 꼼짝 마라!! 당신의 몸까지 내 주시어 우리 죄를 용서하신 그분께 무슨 변명이 있겠는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고, 목소리도 들을 수 없고, 고통에도 침묵하시는 하느님은 과연 존재하실까?’ 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 후 저는 그분께서 존재하심을 이렇게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상을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십자가에 달리시어 피땀 흘리신 그분께서 얼마나 아프시고 힘드셨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아프고 눈물이 납니다. 하느님이시면서도 고독과 고통까지도 철저하게 인간적인 모양으로 보여주신 하느님, 저는 손톱 밑에 가시 하나도 감당하기 힘들어 절절매는데 주님께서는 그 오랜 시간 동안 십자가에 매달리시어 고통과 고독을 모두 견디어 내셨습니다. 저희들 죄를 용서하시려고 말입니다.
따라서 용서라는 것은 그분의 자녀로서 인간적 자존심과의 갈등 속에서도 해결해야만 하는 의무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끝으로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말씀을 인용하면서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미움은 자신과 남을 모두 망가뜨리는 무서운 힘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기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참된 화해와 용서는 보복으로 내 맘이 편해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또 다시 앙심을 품고 보복해 오지 않도록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 줄때 가능하기 때문에 문제는 그것을 누가 먼저 하느냐에 대한 자존심 싸움이 힘들 뿐입니다.”
+ 예수님! 오늘도 용서하며 마음의 평화를 회복하는 날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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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B 큰모임 스케치 >
긴 여운을 준 6월, 당산동에서 월례회를 갖다...
안산 원곡동 세르브스 팀 FB
서기 보 권 토마 (순)

+ 찬미 예수님 !
늘상 회의가 끝나기가 무섭게 그날의 스케치를 발 빠르게 올리는 이가 웬일인지 일주일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팀별 월례보고는 간단히 했으며, 코이노니아 나눔도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아주 간단하게 진행되었다. 식사 후에는 본 안건으로서 이번 FB 하계연수회 기본 프로그램과 준비사항에 대해 검토하였다.
이어서 창설자 최 바오로마리아(규업) 신부님이 예수그리스도 수녀회를 통해서 보나벤뚜라에게 전하신 말씀이 있어 공지되고, 그에 대한 많은 의견이 교환되었다.

그동안 예수그리스도 수녀회와 성서형제회, 그리고 창설자 신부님과의 깊은 유대관계에서 그 무엇인가를 남기려고 많이 작성했지만, 이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면서 그동안 우리들이 매달 만나면서 나누었던 것을 모든 이들이 채워 넣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안나 수녀님은 에콰도르에 가 계시고 수도원은 이사를 가서 더 이상 사강에서의 모임이 거의 불확실해지고... 소식지와 공동체와 수도원에 대한 새로운 지침 전달은 창설자신부님의 오랜 고뇌의 결정이었으리라 여겨진다.
전국의 모든 코이노니아가 세밀하게 관찰되지는 않았지만, 코이노니아 기록 등을 살펴보면, 코이노니아 안에서 우리들이 해야 하는 말씀에 대한 주제발표와 이에 이어지는 나눔 방향이 제대로 지켜지고 있는지에 대한 위문은 남아있다.
성서형제회 50주년을 향한 나아가는데 있어서 우리들에게 크나큰 전환점이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주님! 그동안 우리가 깨닫거나 그동안 관계를 위해서 회복치 못한 것이 있다면 우리 스스로가 이를 채워갈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살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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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공부 참고 도서 >
- 사강 ‘예수그리스도 수녀회’의 박 요한 수녀님이 FB 코이노니아에서 성경공부할 때 참고할 도서 목록을 제공해주셨어요... 많은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 마르코 복음 (제목 / 저자 / 출판사 / 년도 )
1. 영적독서를 위한 마르코 복음, 루돌프 슈네켄 부르크, 성요셉출판사, 1991
2. 마르코 복음서의 재발견, 가톨릭 성서모임, 성서와 함께, 1994
3. 마르코 복음 이야기, 정양모, 성서와 함께, 1996
4. 마르코 복음 읽기, E.M. 발란친, 성바오로, 1997
5. 마르코가 전하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이영헌, 생활성서사, 1997
6. 마르코 복음 묵상, 이현주, 바오로딸, 1999
7. 200주년 신약성서주해, 200주년 신약성서번역위원회, 분도출판사, 2001
8. 공관 복음서의 비유, 정양모, 성서와 함께, 2000
9. 나자렛예수, 박태식, 바오로딸, 2001
10. 성서의 길을 따른 여정(신약편1), ,생활성서사, 2001
11. 예수를 따라, 성서와 함께, 2001
12. 성서 못자리 그룹공부교재-나눔터3 마르코 복음, 안병철, 기쁜 소식, 2002
13. 예수전, 김규항, 돌베게, 2009
14. 슬픈 예수. 김근수, 21세기북스(북 이십일), 2013
15. 마르코복음 이해, 처;승전 신부, 마리아사랑넷 2015
** 마태오 복음 (제목 / 저자 / 출판사 / 년도 )
1. 마태오 복음 주석서, 루돌프 슈네켄 부르크, 1990
2. 마태오 복음, C.M 마르띠니, 성바오로 출판사, 1998
3. 성서의 길을 따른 여정(신약편2), 생활성서사, 2001
4. 국제성서주석, 한국신학연구소, 2001
5. 마태오 복음(거룩한 독서를 위한 신약성경 주해1), 이우식, 성바오로 출판사, 2014
6. 마태오 복음 해설, 가톨릭출판사, 2012
7. 행동하는 예수, 김근수, 메디치미디어, 2014
** 루카 복음 (제목 / 저자 / 출판사 / 년도 )
1. 성서의 길을 따른 여정(신약편3), 생활성서사, 2001
2. 루카 복음(거룩한 독서를 위한 신약성경 주해1), 유승희, 성바오로 출판사
3. 마르코복음 마태오복음 루카복음 사도행전의 주된 가르침, 박영식, 가톨릭출판사, 2012
4. 루카복음해설(성경의 세계 신약 4,5,6), 박영식 가톨릭출판사, 2006~2013
** 요한 복음 (제목 / 저자 / 출판사 / 년도 )
1.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
2. 성서의 길을 따른 여정(신약편4), 생활성서사, 2001
3. 신약성서 입문, K.H.셸클레, 분도출판사
4. 성서가족을 위한 요한복음서 해설, 최안나, -나오너라(1,2권)”, 성서와함께
5. 신약성서 영적독서를 위한 요한복음서(상,하), 요한 하클 외2인 공저, 성요셉출판사
6. 놀라운 변화-마음으로 만나는 요한 복음, 스테픈 버니, 생활성서사
7. 요한복음, C.M.마르띠니, 성바오로출판사
8. 요한복음, 박찬용, 성서연수강의집
9. 요한복음국제 성서주해, C.K.바레트, 한국신학연구소
10. 요한복음, 안니조베르, 가톨릭출판사
11. 삶의 우물가에 오신 예수(요한복음 산책 1), 송봉모, 성바오로 출판사, 2011
비참과 자비의 만남(요한복음 산책 2), 송봉모, 성바오로 출판사, 2012
생명의 빛이 가슴 가득히(요한복음 산책 3), 송봉모, 성바오로 출판사, 2014
12. 다 이루어졌다, 한재호, 성바오로출판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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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B 재정 회계 보고 >
☧ 매월 FBI본부로 보내주시는 의연금은 본당별로 보내지 말고, 각 팀별로 회계 정산하시어,
금액이 크든 적든 매월 꾸준히 보내주셔야 합니다...
✟ 2016년 5월 입출금 및 FB묵상회 입출금 내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