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중달교수의 역사칼럼(60)
권중달(중앙대 명예교수, 삼화고전연구소 소장)
親君子, 遠小人
군자를 가까이하고 소인을 멀리하십시오.
어느 시대에나 치세(治世)를 이룩하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황제나 최고 권력을 가진 사람이 어떤 사람을 채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사람을 제대로 채용하지 않으면 아무리 많고 좋은 것을 물려받았다고 하여도 이를 제대로 지키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한 실례(實例)로 사람들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사람이 아마도 진(秦)의 이세(二世)황제인 호해(胡亥)일 것이다.
그는 아버지 진시황제(秦始皇帝)가 600~700년 역사를 가진 이웃 여섯 나라를 멸망시키고 통일한 천하를 넘겨받은 사람이다. 진시황제가 살아 있을 때, 아들 호해에게 법률을 잘 알고 이를 잘 적용할 줄 아는 법 전문가 환관(宦官) 조고(趙高)에게 법을 배우라고 시킨 일이 있다. 이때 호해에게 조고는 전문지식을 갖고 입안의 혀처럼 말을 잘 듣는 신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호해가 황제가 되고 나서 조고는 황제를 속이고 온갖 장난질을 하면서 드디어 지마위록(指馬爲鹿)의 고사를 남길 정도로 정사(政事)를 독단하더니, 결국 진(秦)이 천하 통일한 지 15년, 호해가 황제가 된 지 2년 만에 진왕조는 멸망하였다.
그 이후로 환관을 정사(政事)에 끌어들이는 것을 터부시하였다. 하지만 환관들은 여전히 황제의 최근(最近) 거리에서 기회를 보아가며 잇속을 챙기고 심하면 황제를 세우기도 하고 내쫓기도 하는 일을 빈번하게 저질렀다. 그후 황제들은 환관의 폐해를 기록으로 알면서도 여전히 환관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항상 궁궐에서 같이 살면서 온갖 황제가 필요한 것을 입 속의 혀처럼 심부름을 잘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 보통은 소인(小人)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후대의 황제 가운데 소인(小人)으로 치부되는 근시(近侍)에 대하여 특별히 경계하는 태도를 유지하는 사람도 있었다. 금(金)의 세종(世宗)은 ‘사람을 아는 것이 어렵다.’라고 하면서 ‘좌우의 근시(近侍)는 비록 항상 말한다고 하여도 짐(朕)은 아직 일찍 가벼이 믿지 않았다.’라고 말하였다. 근시란 황제를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모시는 사람을 말하는 데, 환관도 여기에 포함되니 금세종은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같은 시기에 남송(南宋) 황제인 효종(孝宗)은 경우가 조금 달랐다. 그에게는 태자 시절부터 옆에서 도와주던 증적(曾覿)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황제에 가까운 사람은 대부분 그러하듯 증적도 겉으로는 권력을 행사하지 않는 척하면서 황제하고 가깝다는 것을 이용하여 보이지 않게 온갖 이권과 인사에 개입하였다.
한번은 증적이 황제인 효종은 사람들에게 열심히 일하게 하려고 관리들에게 상벌(賞罰)을 엄격하게 하려고 하는 것을 알고, 아는 사람에게 말하여 과거시험에서 황제의 생각과 같은 내용의 대책을 쓰게 하여 과거(科擧) 갑과(甲科)에 합격하게 하였던 일이 있다. 커닝을 시킨 것이다.
사실 많은 상금으로 사람을 꾀거나 엄격한 형벌을 통하여 맡은 업무에 충실하게 하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조건에 의하여 행동양식이 바뀔 수 있는 사람은 소인(小人)들이다. 대인(大人)이나 군자쯤 되면 그의 철학에 따라 사명감을 가지고 상을 주지 않아도 자기 일을 할 것이고 벌을 준다고 하여도 해서 안 될 일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재상과 같은 지도자급이라면 상벌(賞罰)로 조종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증적은 황제의 생각에 아부하려고만 하였지, 황제의 모자라는 생각을 고쳐 주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전형적인 소인의 태도다. 효종은 이 정책을 기안(起案)해 놓고 그래도 군자라 할 사호(史浩, 1106~1194)와 조웅(趙雄, 1129~1194) 두 사람에게 이를 검토하게 하였다. 이들은 내용을 본 다음에 ‘상을 받으려고 일하는 사람이나, 벌이 무서워 일하려는 사람은 진정한 인재가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이 대답을 들은 효종도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하고 자기의 생각을 슬그머니 바꾸었다. 소인은 무조건 황제의 뜻에 따르려 하였고, 군자는 황제의 잘 못 생각한 것을 고쳐 주려고 하였다. 여기에 소인과 군자의 차이가 있다.
이 시기에 철학자 장식(張栻, 1133~1180)이 있었다. 당시에 그는 ‘호상학파(湖湘學派)의 대표적인 인물로, 민학(閩學)의 주희(朱熹), 무학(婺學)의 여조겸(呂祖謙)과 정족(鼎足)을 이루는 대철학자였다. 그가 죽으면서 효종에게 유표(遺表)를 남겨서 효종에게 ‘군자를 가까이하고, 소인(小人)을 멀리하며 신임하면서도 자기 한 사람의 편견(偏見)을 막고, 호오(好惡)하는 것 공변된 천하(天下)의 이치에 부합’하기를 간절하게 권고하였다.
사실 장식은 생전에 효종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때 효종이 ‘일찍이 절조를 굳게 지키며 의를 위하여 죽는 신하를 얻기가 어렵다.’라고 말하자 장식은 “마땅히 용안(龍顔)을 범하여 감히 간언(諫言)하는 사람 가운데서 이를 찾으십시오. 만약에 평시에 용안을 범하여 감히 간언할 수 없다면, 다른 날에 어찌 그가 절조를 굳게 지키며 의를 위하여 죽기를 바라겠습니까!”
이어서 “폐하께서는 마땅히 정사(政事)를 잘 아는 인사를 찾아야 하고, 정사를 처리하는 신하는 찾아서는 안 됩니다. 만약에 다만 정사를 잘 처리하는 신하만을 구한다면 다른 날에 폐하를 실패하게 하는 사람은 아직 반드시 이 사람이 아니고는 없을 것입니다.”라고도 하였다. 예의 조고나 증적 같은 소인은 실무를 잘 처리하는 사람일 터이지만 국정 철학을 알고 정사를 잘 아는 군자는 아닐 것이다.
이 역사 사실을 읽으면서 문득 오늘날 우리의 현실을 보는 것 같다. 전 정권에서는 민변 출신들이 중요한 일을 맡더니 요즈음에 와서는 검찰 출신들이 대신 들어서고 있다. 그렇다고 야당을 이끄는 사람도 율사(律師) 출신이 많은 것 같고 TV 토론에 나오는 사람들 가운데 유독 율사가 많이 눈에 띄니 혹 조고 같은 사람이 우대받는 시대가 아닌지 걱정스럽다.
사실 한(漢) 왕조는 진(秦)시대에 모든 것을 법으로 처리하려 하였던 부작용을 알고 형리(刑吏), 법리(法吏)를 도필리(刀筆吏)라고 하면서 하급직에 묶어 두었다. 이들을 실무적 심부름이나 시키겠다는 뜻이었다. 대신 커다란 정사의 방향을 결정하는 일은 철학자라 할 유학자(儒學者)로 채우려 하였다. 말하자면 한대에는 도필리는 소인이고 유학자는 군자로 인식한 셈이었다.
각설하고 법을 공부하였다고 모두 소인인 도필리로 매도할 이유는 없다. 이들도 법의 철학적 근거와 배경을 제대로 이해하고 법조문의 적용에 철학적 배경을 갖추며 해석하고 적용한다면 도필리라고 하면 안 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각종 시험에서 법철학은 외면받고 있다는 것을 염두(念頭)에 두면서 현재 우리 사회를 이끌어 간다는 사람의 행태를 보니 신뢰가 가기보다는 소인인 법꾸라지로 보이는 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답답하다.
첫댓글 "친군자 원소인"을 잘 읽었습니다.
우리는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오늘을 인식하고 비판하며 보다 합리적이고 건설적인 판단과 결단을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많은 지식인들이나 이른 바 정친들은
역사적인 사실과 교훈을 외면하고 근시안적인 자사자리와 당리당략에 사로잡혀
국가와 국민을 어지럽게 하고 나아가서는 세계적 질서를 교란하는 사례가 적지 않은 듯 합니다.
오늘날의 많은 국가의 정치에서 올바른 역사의 교훈을 외면하고
반지성적이고 반이성적인 정치행태를 빚는 사례를 허다히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곧 "친군자 원소인"의 진리에 어긋남은 말할 것도 없고 "정치"의 개념이 완전히 왜곡되었음을 깨닫게 하기도 합니다.
벌써 수년전에 어느 정치학자가 "정치학은 사기학이다"라고 떠드는 것을 본 기억이 새롭습니다.
어느 정치학자의 말에 대하여 무심히 넘길 수 없음을 지적하게 됩니다. ....................(청계산)
좋은 사론을 읽었습니다.
옛 날에는 군주 옆의 사람이 대단히 중요한 일을 했습니다. 지금은 각종 언론의 논설이 정치적 문제를 제기합니다. 최고의 책임자가 인사를 잘못 쓰고 있어 국민의 지지도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현실이 몇 년 후의 자기 무덤을 파고 있다는 사실을 왜 못 깨닫을 가요. 현실에서는 측근의 한 두 명을 중시하기에는 정치적 구조가 너무나 다릅니다. 어떻게 될런 지 국가의 장래가 염려됩니다.
近侍라는 말을 쓰지요. 가까이서 시중 잘 드는 사람입니다. 예전에 환관을 주로 가리켰는데,.... 사실 이번 정권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전정권도 마찬가지고 그 전도 마찬가지 였다고 생각합니다. 전체적으로 사회가 경박하게 가고, 당장 눈 앞만 바라보는 사회가 되었지요. 이럴 때 역사학이나 철학, 종교가 중심을 잡아야 하는데, 이 역시 경박해 지기는 마찬가지 같아서 답답하다는 말입니다. 힘이 있으면 진중한 태도를 갖자는 운동을 벌이고 싶지만 ..... 그래도 소리라도 내 보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