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가까운 공직생활의 만년에 골프에 입문했다. 권하는 한 동료의 손에 이끌려 연습장에 나가게 되었고, 1년여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러 이제는 제법 실전에도 나가는 마니아가 되었다.
그런데 중, 하급 공무원들이 즐겨 가는 곳은 바로 공무원연금공단이 운영하는 ‘천안상록 골프클럽’이다. 사설 골프장에 비하여 비용은 절반 정도인데, 갖춰진 시설 수준은 별 차이가 없으니 애용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비록 박봉을 받지만 저비용의 ‘천안상록 회원권’을 가지고 있으니 대기업의 친구들이 부러울 게 없다고 동료들끼리 농담을 주고받기도 한다.
천안시 병천면에 위치한 천안상록골프클럽은 수도권에서는 조금 떨어져 있어 가끔 예약이 가능한 데다, 페어웨이가 넓고 잔디도 두터워 아무래도 초·중급자들이 자주 찾게 되는 곳이다. 그런데 예로부터 천안은 천연기념물인 향나무와 늘어진 능수버들로 유명하고, 하늘이 내린 평안의 땅, 하늘 아래 가장 편안한 곳(天下大安)이라 하여 수재 등 자연재해가 없는 도시라고 한다. 2014년에는 ‘세계 살기 좋은 100대 도시’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다녀보면 겨울철에도 그리 춥지 않고 바람도 크게 불지 않으며 주위에 큰 규모의 공장이나 오염지역이 없어 공기도 아주 청량하여 운동하기에 최적의 장소로 생각된다.
이곳은 경부고속도로 목천 IC에서 나와 10분 내외의 거리에 있는데, 3.1독립 운동과 유관순 열사의 혼이 서린 '아우내장터'로 유명한 병천면을 통과하여 가게 된다. 아우내는 2개의 개천이 아울러 흐른다고 하여 생긴 이름으로 나중에 한자식인 병천(幷川)으로 바뀌었다고 하며, 예로부터 전해오는 순대 국밥이 아주 유명하다. 면내의 한마을인 병천리는 거의 동네 전체가 순대 가게이며, 천안시가 지정하는 '전통음식 순대타운'으로 조성되어 있다.
주말골퍼들은 시간의 제약으로 어느 때나 바삐 움직이다 보니 식사를 집에서 하지 못하고 구장 주위에서 해결하게 된다. 장내에 들어가면 음식값이 비싸고 먹을 것도 푸짐하지 못하므로 서로 수소문하여 인근 맛집을 개발해 이용한다. 조금만 노력하면 저렴하면서도 그 지방 특유의 음식을 든든히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안에 가면 매번 찾는 곳이 바로 이 '아우내 순대타운'이다. 타운 내에서도 가장 유명한 곳이 원조 중의 원조라고 자랑하는 '박순자 할머니 집'이다. 이 집은 아예 간판에 ‘기다려서 먹는 집’으로 표기해 놓았을 정도로 손님이 붐빈다. 갈 때마다 입구에서부터 길게 늘어선 줄에 합류하여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골프 손님은 물론이고 인근 고장 주민들, 전국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식도락가들이 넘쳐나는 것이다.
메뉴는 단 두 가지인데 바로 모둠 순대와 국밥이다. 모둠 순대는 아주 푹 삶아 기름기가 완전히 빠진 머리고기와 내장, 순대를 푸짐하게 썰어 접시로 내고, 국밥은 전통 질그릇에 이것들을 담아 뜨거운 국물을 부어 허연 김이 풀풀 나도록 해서 나온다. 잘게 썬 파를 넣고 고춧가루 조금 치고 새우젓 한 젓갈 넣어서 젓가락으로 한번 휘~저으면 천하의 식도락가라도 군침을 흘리지 않을 수 없고, 먹기를 시작하면 숟가락 놀림이 빨라지게 되어있다. 밑반찬으로 나오는 김치와 깍두기도 신선하고 짜지 않아 맛있다. 판매를 한다면 한 통 사 갔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같다.
사람이 서너 명 이상 모이면 국밥에 모둠 순대 한 접시를 시키면 금상첨화다. 국밥 한 그릇으로도 거의 배가 차지만 접시 고기를 안주로 막걸리까지 한잔 걸치면 천하에 부러울 게 없다. 운동하는 네댓 시간 내내 든든한 것은 물론이고 중간에 매점에 들러 군것질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다. 국밥은 7천 원, 모둠은 1만 원이니 합해도 골프장 식당의 한사람 밥값 정도라 큰 부담이 없다.
요즘은 한두 달에 한 번씩 가는데 매번 먹어도 물리지 않고, 고속도로 나들목을 나서면 그 생각으로 입에 군침부터 도니 그 이유가 무엇일까.. 바로 조상 대대로 우리 체질에 맞춰져온 전통음식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늘이 내린 편안한 땅 천안, 나라사랑과 독립운동의 기운이 서려있는 고장에서 저렴한 비용으로 운동하고 체력을 단련할 수 있으며 식도락까지 겸할 수 있어 우리는 행복하다. 명문 체육시설의 값비싼 그것은 아니지만 아무나 가지기 어려운 ‘평생 동행 천안 상록회 원권’을 소지하고 있으니 이만하면 그런대로 행복한 소시민이라는 생각으로 퇴직 후의 삶을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