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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내고향 풍기 원문보기 글쓴이: 배규택
시보네 에세이 40
풍기의 새벽을 연 거목
구당(求堂) 이풍환(李豊煥) 선생과
풍기인삼조합의 탄생
격동의 시대, 민초를 위해
헌신한 선구자의 삶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라는 격동의 시대,
수많은 지식인들이 권력의 그늘 아래
안주하거나 혼란 속에 방황할 때,
한 사람이 스스로 누리던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700리 먼 길을 떠났다.
그 사람이 바로
구당 이풍환 선생이다.
그의 호(號) '구당(求堂)'은 글자 그대로
'풍기를 구하고 살리겠다'는
뜻을 담고 있었으며, 선생의 삶은
그 이름처럼 풍기라는 땅과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통째로 바쳐졌다.
선생의 삶은 단순히
한 개인의 일대기를 넘어서,
'전통의 보존'과 '근대의 수용'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으려 했던
선구자적 고뇌를 담고 있다.
개성의 엘리트 관료가
내륙 오지(奧地)의 농촌으로
기꺼이 이주하여 조선 최초의
인삼 민간조합을 설립하고,
학교를 세우는 일에 힘을 보태고,
지역 경제의 근대화를 이끈 그 여정은
오늘날에도 묵직한 울림을 남긴다.
개성에서의 결단
풍기에 인삼의 씨앗을 품다
이풍환 선생은 1866년 3월 14일,
개성시에서 약 20km 떨어진
천냥고개마을에서 평산(平山) 이씨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부 이병원은
통훈대부·대사헌부 감찰을 역임하였고,
부친 이종식은
영양현감·통정대부를 지낸 명망가였다.
선생은 약관의 나이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훈랑을 거쳐
승정원 시종직을 수행하는
중앙 관직의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그 결정적인 전환점은
부친의 임지인 영양을 오가던 중에
찾아왔다.
죽령(竹嶺)을 넘나들며 경유지인 풍기에
자주 머물게 된 선생은,
수려한 소백산의 산세와 내륙의 기후가
고향 개성보다 인삼 재배에
훨씬 적합하다는 사실을 간파(看破)한다.
이는 단순한 농업적 관찰이 아니라,
조선의 주력 수출 산업이자
국가 재정의 핵심이었던 인삼의
미래를 내다본 전략적 혜안이었다.
19세기 말, 국가는 외세의 압력으로
자주권을 잃어가고, 민초들의 삶은
병란. 전염병·재해라는 삼재로
절박한 지경에 이르렀다.
관직과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
곧 부(富)를 향유할 수 있었던
조선의 권력 구조 속에서, 선생은
3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모든 기득권을 반납하고
풍기군 서부면 구교리(금계동)
298번지로 이주를 결행한다.
이 결단은 단순한 이주가 아닌
'산업 근대화의 선구자'로서
역사적 전환기의 중심에 서겠다는
선언이었다.
"관직에 얽매는 정치적 야심을 접고
민초들과 동거동락하며 산업 근대화의
꿈을 실천해 보겠다."
이풍환의 삶의 궤적이 전하는 메시지
시대적 배경- 왜정 초기의 혼란과
인삼 행정의 공백
선생이 풍기에 정착하던 시기,
이 고을의 행정은
그야말로 공백 상태였다.
고종 40년(1903년)부터 1906년 사이
네 명의 군수가
연이어 부임하고 떠난 뒤,
무려 1년~1년 6개월 동안
군수 재임 기록이 비어있었다.
1908년 1월에는 풍기 군민 대표들이
총리대신에게 직접 청원서를 올리는
극한적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다.
결국 1908년 7월 31일, 상주 출신의
권병선(權丙宣)이 풍기군수 직무대리로
발령받으며 행정 공백이 마무리된다.
권병선 군수는
이후 1914년까지 5년 이상
재임하며 이례적인 능력을 인정받았고,
지역 주민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바로 이 시기, 풍기에는
두 선각자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지역 원로 이풍환 선생과,
산업 근대화에 뜻을 같이한
권병선 군수의
역사적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한편 인삼 행정의 현실은 가혹했다.
인삼 재배는 반드시 허가를 받아야 했고,
토지 면적·생산 기술 등 엄격한 기준
아래에서만 경작이 허용되었다.
힘없는 농민들은
복잡한 행정 절차를 감당하지 못해
중개인에게 수수료와 뇌물을 건네며
허가를 받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개성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인삼 행정의 구조 속에서 소백산 아래
내륙 오지 풍기는 오랜 산지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소외되어 있었다.
전국 최초의 삼업조합 설립
농민의 방패를 만들다
조합 설립의 태동
이풍환 선생은 국내 제1의 인삼 산지로
알려진 개성 출신으로서, 국영으로
운영되던 인삼 재배와 제조 실태를
몸소 보고 자란 사람이었다.
선생은 풍기에 정착하자마자
관청(풍기군청)과 협의하여
인삼 경작 허가 면적을 확대하고,
재배 방법을 직접 연구·지도하며
인삼 재배의 체제를 공고히 다져 나갔다.
선생은 또한 복잡한 행정 절차를
어려워하는 농민들을 위해
관과 민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자처했다.
인삼 재배 면적 허가를 받는 민원 사항을
직접 조율해 주고,
모르는 것은 가르쳐 주며,
못하는 것은 대리해 주었다.
과거 관직의 힘을 빌려
이권을 독점할 수도 있었지만, 선생은
오히려 궂은일에 앞장서는
위민봉사정신을 실천했다.
1908년, 풍기삼포조합의 탄생
이러한 절박한 필요성이
공식적인 제도로 발전하여,
마침내 1908년 12월,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인삼 단체 조합인
'풍기삼포조합'이 설립된다.
이후 한일합방(1910년)이 이루어지면서
이풍환 외 49명의 발기로
경상북도지사의 공식 인가를 받게 된다.
조합의 설립은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제도였다.
조합은 인삼 경작 면허증을
일괄 교부받아 농가에 배분하는
역할을 맡았고, 상거래 질서를 확립하여
개성인삼에 밀리던 풍기인삼의 품질을
정상에 올려놓는 데 집중했다.
우리나라 농업협동조합이
공식 설립된 1969년보다
무려 60년 이상 앞선, 실질적인
'농업협동조합'의 선구 형태였다.
브랜드 보호
상표 출원의 경제 독립운동
조합은
단순한 행정 대행에 그치지 않았다.
1919년(대정 8년), 이풍환 선생은
악덕 상인들의 무질서한 거래를 막고
풍기인삼의 진가를 지키기 위해
조선총독부 특허국에
상표를 출원·인가 받아
일정한 용기에 '풍기인삼'
상표를 붙이는 체계를 만들었다.
이는 단순한 상업적 행위가 아니라,
우리 자본과 자원을 법적으로
지키려 한 '경제 독립운동'이었다.
같은 해 10월에는
일본농회총재의 표창인
'녹백수유공장'을 수여받았으며,
1912년(대정 원년)에는
동양척식박람회에 풍기인삼을 출품하여
오늘날의 대통령표창에 해당하는
포장(褒狀)을 수상했다.
1920년대 이후에는 인삼을 넘어
과수·양잠·축산·소맥·대맥 등
농업 전 분야로
조합의 역할이 확산되면서,
사실상 지역 종합 농업협동조합의
기능을 담당하게 된다.
일곱 가지 병(病)
마음을 고치는 교육자
선생은 인삼과 산업에서만
활약한 것이 아니었다. 1908년, 선생은
풍기군 관아의 문루인 제운루 옆
빈청을 개조하여 안정학교
(현 풍기초등학교의 전신)를 설립하는데
일조한다.
권병선 군수가 설립자로,
이풍환 선생이 총무로 함께 힘을 모은
이 학교의 탄생에는 선생이 진단한
'시대의 병증'이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1911년 권병선 군수의 권고문에도
담겨 있는 이 '일곱 가지 병'은 당시
지역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를
날카롭게 꿰뚫는다:
▪자존증(自尊症) —
스스로 잘난 체하며 변화를 거부하는 병
▪미신증(迷信症) —
합리적 사고 대신 미신에 기대는 병
▪자처빈핍증(自處貧乏症) —
가난을 운명이라 여기며 자처하는 병
▪아동재둔체약염려증 —
자식의 재능과 체력을 미리 걱정해
교육을 포기하는 병
▪학교과교서태이부적병증 —
신학문이 너무 쉽다며 무시하는 병
▪단발염려증(斷髮念慮症) —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에 매몰
되어 본질을 놓치는 병
▪자포자기증(自暴自棄症) —
변화하는 시대에 스스로를 포기하는 병
선생이 표방한 교육 철학은
"신학문도 구학과 다름없다"는 것이었다.
이는 전통의 도덕적 가치와
인문적 기반 위에 새로운 지식의 날개를
달아주려는 진정한 교육자의 자세였다.
선생은 '일곱 가지 병'을 고치기 위해
학교를 설립했고, 그 병증에 대한 경계는
100년이 지난 오늘에도 여전히 유효한
가르침으로 남아 있다.
"신학문도 구학과 다름없다.“
전통의 토대 위에 새 지식을 세우는 것
그것이 이풍환 선생의 교육관이었다.
권병선 군수와의 운명적 동행
이풍환 선생의 업적을 이야기할 때
권병선 군수를 빼놓을 수 없다.
군수보다 네 살 연장인 선생은
중앙 관직의 선배 원로로서,
군정(郡政)의 모든 현안을
긴밀하게 논의하는 파트너였다.
두 사람의 관계는 상하의 관계를 넘어
친구에 가까웠고, 향청 향사들과의
교분도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권병선 군수는 이풍환 선생이
인삼 조합을 설립하고
학교를 세우는 모든 과정에서
행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12년의 동양척식박람회 포상,
인삼 경작 면허증 발행 체계의 확립,
안정학교 설립 — 이 모든 과업은
두 선각자의 의기투합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저자는 이를 두고 '하늘이 내려 준
풍기 고을의 축복'이라 표현했다.
군수 재직 시절인 1908년부터 1914년,
이 6년의 시간은
풍기 근대화의 황금기였다.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 군수가
조선 중기에 처음으로
가삼 재배를 시험했던 그 땅에서,
40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 이풍환과
권병선이라는 두 사람이 인삼을 다시
역사의 전면으로 불러낸 것이다.
인삼의 긴 역사
수난과 개화의 서사
이풍환 선생의 업적은 인삼이 걸어온
오랜 역사와 분리될 수 없다.
삼국시대 신라의 '나삼(羅蔘)'에서
시작해 고려·조선을 거치며 인삼은
국가 재정의 핵심 수입원이자 외교 수단,
그리고 백성의 고통을 상징하는
이중적 존재였다.
고려 말 안축(安軸) 선생의 시(詩)
'삼탄(蔘歎)'은 인삼 공납으로 인한
백성의 참상을 생생하게 전한다.
조선 중기에는 주세붕 풍기군수가
금지된 가삼 재배를 비밀리에 시험하며
삼폐(蔘廢)로 피폐해진 고을을 구했다.
1756년 '삼화세' 제정, 1908년
홍삼전매법 공포에 이르기까지 인삼은
언제나 국가 권력과 민초의 삶이
교차하는 지점에 있었다.
1910년 조선총독부 전매국이
인삼 산업 전반을 장악하면서,
개성 중심의 인삼 행정 구조는
더욱 공고해졌다.
바로 이러한 구조적 불평등 속에서
이풍환 선생의 조합 설립은
더욱 빛을 발한다.
소외된 풍기인삼을
개성과 대등한 위치로 끌어올린 것은
단순한 경제적 성취를 넘어,
중앙 집권적 수탈 구조에 맞선
지역 자립의 선언이었다.
마지막 가는 길
수백 개의 만장(挽章)이 증명한 것
1933년, 이풍환 선생이
세상을 떠났을 때 풍기 사람들은
그를 '어른'으로 대접했다.
풍기면장(葬)으로 치러진 장례식에서,
풍기초등학교부터 금계리 장지까지
이어진 수백 개의 만장(挽章)은 그가
풍기의 땅에 심은 것이 단순한
인삼이 아니었음을 웅변했다.
인삼 조합, 금융 조합,
학교 설립, 농업 근대화
평생을 지역 공동체를 위해 바친
그의 삶은
수백 개의 애도의 글로 돌아왔다.
그 만장들은 한 인간이 자신의 시대에
얼마나 깊은 흔적을 남길 수 있는지를,
그리고 권력이나 재산이 아닌
헌신과 섬김으로 쌓은 신뢰가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지를
무언으로 증명했다.
100년이 지나도 유효한 가르침
이풍환 선생의 삶은 풍기의 상징인
소나무의 꿋꿋함과 퇴옹죽(退翁竹)의
절개를 동시에 닮아 있다.
관직과 재산을 버리고
민초의 땅으로 내려온 결단,
농민의 방패가 되어 전국 최초의
인삼 조합을 만든 혜안,
시대의 병을 진단하고 학교를 세운
교육자의 열정
이 모든 것이 한 사람의
삶 속에 오롯이 녹아 있다.
선생이 일깨운 '일곱 가지
병증'에 대한 경계는
1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지
묵직한 울림을 준다.
자포자기하지 말 것,
미신보다 합리를 택할 것,
가난을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말 것,
그리고 무엇보다 변화의 흐름 속에서도
사람을 잃지 말 것.
풍기인삼조합의 탄생은
단지 경제사의 한 페이지가 아니다.
그것은 한 인간이 자신의 이익을
내려놓고 공동체를 위해 헌신할 때
역사가 어떻게 바뀌는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다.
구당(求堂) 이풍환 선생이
고을을 구하겠다는 뜻으로 지은
그 호(號)처럼,
그는 실제로 풍기를 구했다
그리고 그 정신은 오늘도
소백산 기슭 어딘가에
살아 숨 쉬고 있다.
2026.3.29.
배규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