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단순히 비가 내렸다 정도의 표현으로는 맞지않을 정도로 굵은 비가 바람에 휘날리며 퍼부어댔습니다. 오히려 비가 와야 볼만해지는 명소들이 제주도에는 몇군데 있어서 마음이 잠깐 동했으나 다 따뜻할 때의 일입니다.
평소에는 말라있지만 비가 오면 물이 고여 장관을 보여주는 폭포도 있고, 고여있던 호숫물이 흔들다리까지 찰랑찰랑 올라와서 재미삼아 걸어볼 수도 있는 화산분지도 있다 하는데 바닷물 들어가도 무리가 없는 날씨가 되면 시도해볼 일입니다.
꼼짝없이 집에서 시간을 보내야 하니... 참으로 우리가 얼마나 외부지향적이었는지 실감됩니다. 준이의 가식적인 웃음소리로 시작되는 아침은 감정기복의 예고이기도 해서 가능하면 심기 건드리지 않기에 최선을 다합니다. 무엇이든 하루 한 건 정도의 파괴력을 보이는 완이는 며칠 전 정리해준 침대 커버를 열고 침대와 커버 사이 푹신하게 넣어준 깔개와 스프레드를 계속 까발리고, 오늘은 거실 한구석에서 잘 사용하던 트렘폴린을 작살냈네요.
완이의 촉각추구는 일상생활 다양한 곳에서의 난장판 결과를 가져옵니다. 늘 베개커버 지퍼를 열어 안쪽 솜들을 꺼내놓으려고 하고, 이불을 끌고다니고, 커텐을 못살게 굴며, 튀김이나 부침을 해주면 집안 곳곳에 튀김과 부침 흔적을 여기저기 남겨 놓습니다. 어떻게 이런 사소하지만 중요한 것들을 가르쳐야 할지 막연해지곤 합니다. 심한 촉각방어와 심한 촉각자극 갈구가 혼재된 아주 어려운 케이스입니다.
태균이는 잠자리를 독립시켜 주었습니다. 이층에 있는 방으로 침실을 옮겨주어 태균이만의 공간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신나서 자기만의 공간을 즐기니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서로 조금씩 거리를 두고 자유를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물론 세 녀석 모두 제 손길이 필요하니 제가 좀더 분주하게 움직이면 됩니다.
사람의 뇌구조는 기분나쁘고 화나고 불쾌한 사안에는 쉽게 반응하고 오래 유지하면서, 즐겁고 행복하며 유쾌한 감정은 생각보다 오래 유지하기가 쉽지않기에 이를 역전하는 훈련이 꼭 필요하다고 지금 읽고 있는 책에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뇌는 행복을 기억하지 않는다'라는 작은 책에서 저자는 감정에 반응하는 인간뇌의 뇌파를 정밀하게 기록하고 분석해보니, 행복을 기억하기보다 슬픔이나 분노 등에 더 쉽게 움직이더라 하는 결론을 얻습니다.
위 책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감정에 깊이 관여하는 측두엽과 전두엽 영역의 발달단계 속성상 그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전두엽이 뒷받침되지 않는 측두엽의 감정인지는 공포와 불안, 흥분과 발끈 등의 원초적 감정의 색깔이 강하기에, 원초적 감정에 이성적 분석과 해석을 가하는 전두엽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 책에서 과학적 실험자료를 제공해 주는 듯 합니다. 측두엽과 전두엽 영역의 역할에 대한 설명이 빠져있기는 하지만 결론은 전두엽을 훈련시키라는 속내용입니다.
이 책을 읽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쉽게 하게되는 기분폭력이라는 것도 배우게 됩니다. 신체적 폭력이나 언어폭력 말고도 기분폭력이라는 용어에 깊이 공감하게 됩니다. 기분폭력이란 쉽게 설명하자면 자기감정을 어떤 방식이든 쉽게 드러내서 주변사람들이 눈치를 보게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폭력이라는 것이 붙어있으니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기 마련인데, 기분폭력에 있어 저같은 경우 전형적인 피해자 유형입니다. 태균이도 피해자 유형이 된 듯해서 제가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아침먹고나서 행사치루듯 보충제를 먹고 먹이는 일은 태균이의 큰 기쁨입니다. 이 일은 수 년간 하루도 변함없이 진행되어 왔건만, 이 일조차 '싫어'를 붙여버린 준이에게 저는 더럭 짜증부터 났지만 태균이는 잘 달래서 데리고 옵니다. 저보다 훨씬 나은 행동에 고마움을 느끼지만 그동안 다양한 아이들과의 생활을 통해 태균이가 받았을 기분폭력도 이제는 헤아려야 되지않을까 싶습니다.
남들이 의아하게 볼 수 있는, 인적드문 외진 곳을 찾아 자꾸 숨어들려는 심사 자체가 이미 기분폭력 피해자 심리가 깊어진 것은 아닌지 스스로 진단해 봅니다. 새삼 깊어지기 시작한 준이의 문제들, 돌아갈 날이 오래남지 않았지만 끊임없이 다듬어주지 않으면 거슬릴 수 밖에 없는 완이의 행동들, 한 때 태균이도 기분폭력 가해자로 돌변했던 시기들... 등등.
정말 몇 십년만에 가장 절친이었던 남사친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지방 소도시에서 사고무친(四顧無親) 서울로 유학을 오고, 갓 시작한 대학생활 첫 해에 가장 많이 붙어다녔던 그 친구는 중도에 미국으로 가버렸습니다. 자기는 최소한의 돈으로 미국대학을 간다하면서 같이 가자고 했지만, 그 친구는 미국에 유학 중이던 누나라도 있었지 저는 서울생활도 버거운데 꿈조차 꿀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중도에 미국으로 날라버린 그 친구는 졸업 후 돌아와 최고 언론사에 입사하고 정년퇴직까지 했지만 근 20여년 넘게 연락을 끊고 지내왔습니다. 그럴만한 일이 있기는 했지만, 여러가지로 속깊은 대화가 가장 잘 되었던 친구였는데 아쉬움이 있기는 했습니다. 그와 그의 주변에 저를 알고있는 사람들이 우연히 모였다가 제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다보니 전화를 한 모양입니다.
낯선 번호 전화는 잘 받지 않으니 부재중전화로 남아있었는데 그 친구가 문자를 남겨놓았던 것입니다. 어찌나 반갑던지... 단숨에 통화를 하고 주변에 있던 지인까지 돌려가며 통화를 하고나니 반가움과 동시에 문득 허탈함도 밀려옵니다. 늘 꿈꿔왔던 사회적 공헌도에서 나는 얼마나 직업적 성취를 이루었는지... 이 점에서는 소외감이 깊게 드는 것은 오랜 어쩔 수 없는 감정입니다.
발달학교라도 더 열심히 키워놓았으면, 혹은 부모들에게 큰 도움이 될 책이라도 몇 권 냈다면, 등등 오랜 남사친의 간만의 연락이 제 인생을 반추해보는 계기가 됩니다. 아직 시간들은 많이 남아있으나 늘 그런 마음이듯 이제는 매시간조차 알차고도 아껴써야 하는 시절입니다. 감정의 낭비를 최소화하는 것, 그게 지금은 꼭 필요해 보입니다. 잘 되어갈 것이라 믿습니다.
첫댓글 다 잘 될 겁니다. 태균씨 2층으로 옮긴건 넘 잘 하신 거네요. 완이 학교 가고 내년엔 뭔가 변곡점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아무쪼록 행운이 따르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