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11월 11일,
이리(현 전북 익산)역 폭발사고
1977년 11월 11일 밤 9시 15분쯤의 전북 이리(현 익산). 시민들은 월드컵 아시아 예선전 한국 대 이
경기를 TV로 지켜보고 있었고, 시내 삼남극장에서는 700여 명의 방청객이 몰려든 가운데 ‘하춘화쇼’가
시작되고 있었다. 진행자 이주일이 막 오프닝 멘트를 마친 순간, 갑자기 “꽝!”하며 천지를 진동하는
대형 폭발음과 함께 엄청난 불기둥이 이리역에서 솟아올랐다. 이 소리는 30Km 떨어진 전주까지 들릴
정도였다. 건국 이래 최대 사고인 이리역 폭발사고다.
인천에서 광주로 가던 한국화약(현 한화의 전신)의 화물열차가 이리역에서 정차하던 중 발생했다.
열차에는 다이너마이트와 전기뇌관 40톤의 고성능 폭발물이 가득 실렸다. 사고의 직접적 원인은
어이없게도 어둠을 밝히기 위해 세워놓은 촛불 한 자루였다.
당시 수사당국 발표에 따르면 화약호송원 신무일(당시 36세)씨는 11일 오후 역 앞 술집에서 막걸리 한
되와 소주 한 병을 마시고 열차로 돌아왔다. 신씨는 어두운 열차 안에서 촛불을 켜 닭털 침낭을 편 뒤
곧 잠에 골아 떨어졌다. 부주의하게 켜져 있던 촛불은 침낭으로 떨어졌고, 잠결에 몸이 뜨거워진 신씨는
밖으로 나왔다. 오후 9시13분. 신씨는 맨발로 뛰쳐나와 “불이야 불이야”를 외치며 역 사무실로 달려가
“빨리 대피하라”고 소리치고 달아났다. 한 순간이었다. 불길이 옮겨 붙은 화약은 커다란 굉음을 내며
한꺼번에 폭발했다.
이리역은 물론 인근 판자촌이 싸 그리 사라졌다. 산산조각 난 열차의 파편이 100미터 멀리 시청 앞까지
날아갔다. 폭발 지점에는 깊이 15m, 폭 40m나 되는 5층 높이의 웅덩이가 패였고 반경 500m안은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폭발 피해는 반경 4km까지 미쳐 4km 이내의 가옥은 창문이 떨어져 나가고
반경 1km 이내의 건물은 반파돼 완파된 건물이 811동, 반파된 건물이 780동이나 될 정도로 피해가 컸다.
이리역에서 100m 떨어진 삼남극장도 지붕이 날아가고 14명이나 현장에서 죽는 등 아비규환을 이뤘다.
당시 이주일은 하춘화를 업고 숙소에 도착해 자동차로 2시간을 달려 군산도립병원에 도착
했다. 다행히 하춘화는 우려만큼 다치지 않았지만, 오히려 이주일이 폭발물 잔해에 맞아 뒷머리
가 함몰되는 중상을 입고 있었다. 이주일은 4개월간의 대수술과 입원 치료를 거쳐
건강을 회복했다.
1965년 샛별악극단에서 데뷔한 이주일은 1970년대 톱스타 하춘화의 리사이틀 사회를
단골로 맡았다. 1979년 하춘화가 은퇴를 선언하자, 이주일은 이듬 해 TV를 통해 코미디언으로
변신했다. 그는 ‘못생겨서 죄송합니다’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 등 유행어를 낳으며 코미디계의
최고 스타로 우뚝 섰다. 그해 말 이주일은 자신의 이름으로 리사이틀을 열었고 은퇴한 하춘화는
이리역 참사때 빚진 은혜를 ‘연출’의 이름으로 갚았다.
사망 59명, 중상 185명, 경상 1158명, 모두 1402명의 인명 피해가 났다. 재산피해는 당시로선 어마어마한
규모인 4300만원. 이리라는 이름은 1995년 익산군과 합쳐져 익산시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