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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aus 미디어스 인터넷신문 | ||||||||||||||||||
쌍용차…쓰나미…고도를 기다리며 | ||||||||||||||||||
[기고] 이득재 대구가톨릭대 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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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정치적인 드라마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오늘날 끊임없이 고도를 기다리기만 할 뿐 고도에 다다르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끊임없이 실업자의 리스트에 올라갈 뿐, 영원히 비정규직의 리스트에 올라갈 뿐 실업자나 비정규직은 고도에 도달하지 못한다. 영원히 고도를 기다릴 뿐이다. 오늘날 노동자들의 모습도 철거민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인간다운 삶을 원하고 기다리지만 철거민과 노동자들은 고도에 다다르지 못한다. 자본의 분신인 노동은 자본으로부터 인간다운 삶을 원하지만 자본은 노동에게서 고도를 영원히 강탈해간다. 따라서 고도를 아무리 기다려도 고도는 노동자와 철거민에게 성큼 성큼 다가오지 않는다. 때문에, 철거민과 노동자들에게 남은 무기는 파업과 투쟁 밖에 없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던 작년 2월에 개봉한 영화 <추격자>는 폐기된 인간에 대한 기록이다. 사람들을 죽여 앞마당에 파묻는 주인공 영민이가 바로 그 폐기된 자이다. 오늘날 노동자는 언제든지 처분 가능한 존재이고 크리넥스 휴지처럼 한 번 쓰고 버려지는 존재이다. 철거민은 도시 중심에서 철거되고 삶 자체에서 철거된 존재들이다. 폐기된 인간, 처분 가능한 인간, 철거된 인간들로 넘쳐나는 곳이 현재 대한민국이다. 영화 <해운대>에 등장하는 쓰나미는 바로 국가와 자본의 쓰나미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서 국가 권력은 해운대를 뒤덮은 수백 미터 파고의 쓰나미처럼 대한민국의 사회적 생태계를 덮쳐 버렸다. 4대강 사업으로 20조 원을 들여 자연과 인간의 고리를 끊어 버리고 419억 원을 들여 광화문 앞을 문화가 아니라 놀이터로 바꾸고 의사소통의 문화적 도구인 방송언론을 장악해 인간과 문화의 고리를 차단시키더니, 이명박 정부의 쓰나미는 급기야 인간과 인간의 고리, 인간과 사회의 고리마저 무섭게 삼켜 버렸다. 이명박 정권이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나타나더니 2년이 다 되 가도록 경찰력을 동원해 사람을 패고 때리고 피 터지게 하고 죽이는 일이 백주대낮에 벌어지고 있다. 인간이고자 한 철거민들을 그저 나부랭이 흉물로 간주하고 경찰특공대를 투입하여 목숨까지 앗아갔다. 국가 권력의 몽둥이에 의해 몸이 으스러지고 피를 흘리는 것은 다반사였고 택배 노동자의 목숨이고 평택 쌍용차 노조원 간부의 아내의 목숨이고 용산 철거민들의 목숨이고 간에 이명박 정부는 자연이고 문화고 인간이고 생명 있는 것은 다 죽이자는 심산인지 대한민국 전체를 초토화시키고 있다. 인권의 퇴보, 민주주의의 퇴보 정도가 아니다. 대한민국 몸뚱아리 전체가 성한 곳이 없을 정도로 피멍이 들었고 모든 고리들이 박살나 있는 마당에 무슨 민주주의와 인권의 퇴보란 말인가. 인간이 죽어서나 사후의 생을 살도록 하자는 것인지 대한민국 전체가 좀비들의 지옥을 방불케 하고 있다. 산 인간을 때려잡아 관 속에 처넣고 장례도 치르지 못하게 하는 순간에 설상가상으로 산 노동을 모조리 좀비로 만들어 죽은 자본 앞에 굴복시키고자 하는 국가와 자본의 약탈 행위가 평택 쌍용차 도장 공장 지붕에서 벌어지고 있다. 무협영화처럼 검객들이 장대한 기와지붕 위에서 하늘로 치솟으며 칼싸움을 하는 것도 아닐진대, 헬기로 경찰특공대를 도장 공장 지붕 위로 투입시키고 정당한 파업 투쟁을 하는 노동자들을 고무총탄으로 위협하며 2700명 정리해고에 동의하지 않는 노동자들을 무조건 무릎 꿇리려 하고 있다. 고도를 기다리며 살아 온 노동자들에게, 고도를 기다리며 인간답게 살고자 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대통령의 사과와 생존대책을 요구하는 철거민들에게 노동자의 삶과, 비정규직의 삶과, 철거민의 삶을 그대로 유예시키면서 죽어서나 인간다운 삶을 찾으라는, 도저히 인간이 아니고서는 내뱉을 수 없는 망언을 칼처럼 아니 총처럼 휘둘러대고 있는 것이다.
대마도에서 발원한 메가 쓰나미가 해운대 고층 빌딩을 집어 삼키고 초토화시키듯이 노동자 민중들의 삶과 생명을 싹쓸이해가는 이 사태 앞에 우리는 언제까지 고도를 기다릴 것인가. 고도는 영원히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지 내 앞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나는 영원히 실업자일 수만은 없고 영원히 비정규직 노동자일 수만은 없으며 영원히 자본 앞에 굴복하고 폐기되는 노동자일 수만은 없지 않은가. 전 지구적으로 노동력의 피말리는 하층경쟁이 저 멀리서 평택으로 쓰나미 효과를 발휘하고 있기 때문인가?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설령 그것 때문에 내가 영원히 ‘대기자 리스트’에 올라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도장 공장 옥상 지붕에서 노동과, 국가 및 자본이 벌이는 전쟁 아닌 전쟁의 상황을 지켜보면서 저것은 해운대를 덮친 쓰나미하고 무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년 12월부터 시작된 쌍용차 사태에서 이미 자본은 올해 3월 9일 비정규직 노동자부터 정리해고 하면서 노동자 대부분을 잘라낸 후 쌍용차를 매각 처분하려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었다. 정태인 씨가 말하듯이 정부는 FTA로 미국 자동차를 사 줘야 할 마당에 쌍용차에 5천억 원의 공적 자금을 투입할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고 노동자들을 무조건 처분하는 것, 산 노동을 좀비로 만드는 것만이 국가와 자본의 애시 당초 속셈이었다. 29년 전 우리는 광주민중항쟁에서 우리들의 권력을 군부독재 정권에 강탈당했다. 그리고 다시 29년이 흘러 우리는 평택 쌍용노동자 계급투쟁에서 자본이 노동자계급의 권력을 침탈하는 사태를 지켜보고 있다. 쓰나미가 해운대 고층 빌딩을 집어 삼키듯이 자본이 노동을 집어 삼키는 현실을 제3자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 작년 촛불들이 외쳤던 민주공화국의 촛불은 꺼졌다. 대한민국의 권력은 국민이 아니라 국가와 자본에서, 강부자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이 여실히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광주에서 대추리에서 용산에서 다시 평택에서 우리는 늘 쓰나미 앞의 고층 빌딩 마냥, <해운대>의 박중훈과 엄정화의 두려운 눈빛처럼 어찌할 줄 모르고 있다. 29년 전 우리는 왜 광주를 우리의 코뮨, ‘광주 코뮨’으로 만들지 못했던가. 다시 29년 후 우리는 용산을, 그 전에 대추리를, 그리고 평택을 왜 우리의 코뮨으로 만들지 못했던가. 내가 제3자로, 평택 쌍용차 자동차 공장 정문 옆에 관찰자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우리 모두 도장 공장 안으로 들어가 노동자들과 함께 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투쟁 지원 농성도 그 자체로 중요하지만 그토록 주체 세우기가 중요하다고 하면서 우리는 정작 천막 치고 관찰자로서 투쟁 지원만 한 것 아닌가.
불이 꺼지고 물도 차단된 평택 쌍용자동차 도장 공장에서 ‘해고는 살인이다’를 외치면서 처절한 계급투쟁을 벌이고 있는 노동자들의 싸움이 패배로 끝날지라도 우리는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다시는 국가와 자본에게 우리들의 권력을 강탈당하지 않도록 장기적인 준비를 해야 한다. 그것만이 내가, 노동자가, 민중이, 비정규직 노동자가, 비정규직 교수가, 실업자가, 여성노동자가, 여성비정규노동자가, 철거민이 인간다운 삶의 대기자 목록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탈출하는 길이다. 고도를 기다린다. 오지 않을 줄 알면서도 가슴을 찢어 놓고 기다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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