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탄생 100년을 맞는 시조시인 최재호(2)
아천 최재호의 호는 아천(我川)이다. 스스로 이 호를 ‘내내’라 풀었다. 나의 냇물이기도 하고 내가 내라는 뜻이기도 하다. 자아의 각성일까, 자기 주체성일까, 어쨌든 스스로 ‘내내’라 하면서 늘 웃었다. 아천은 인성이 부드러워 만나는 사람이면 다 그 영내에 머물기를 좋아했다. 필자는 아천의 두 아드님을 매우 가까이 지내는 편이다. 장남은 최문석 현 삼현학원 이사장이고 차남 최무석은 경상대 교육학과 명예교수인데, 필자와는 중고등학교를 같이 다닌 벗이다. 최문석 이사장은 수필가로서 경상대 물리교육과 부교수까지 지내다가 삼현학원을 책임지고 운영하기 위해 교수를 사퇴했다. 학교 경영 1세대와 2세대가 문인이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있다. 전통이라든가 설립 정신이라든가 경영의 마인드라든가 하는 점에서의 일체감이 필요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최재호 시조시인은 자연히 문인을 가까이하고 지냈다. 고 동기(東騎) 이경순 원로 시인을 삼현여자고등학교 한문 선생으로 초빙한 일이라든가, 통영출신 시조시인 초정(草丁) 김상옥을 교빈(校賓)이라 부르고 정기적으로 학교에 모시고 학생들에게 문학강연을 하게 한 것 등이 이를 말해준다. 동기 선생은 진주 봉곡동에서 상평동 삼현여중고까지 두루마기를 입고 걸어다녔다. 학생들은 할아버지 선생님이라 부르고 좋아했다. 학생들은 이 동기 선생께서 젊을 때 무정부주의 운동을 하며 일제에 저항한 분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광복후 젊은 시절 진주농업학교 위생과목 선생으로 있을 때 부산 교육위원회에서 감독차 온 장학사를 린치를 했다는 갈갈한 선생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아직 체계가 잡히지 않은 때 일제와 간섭이 많은 교육청과의 구분이 잘 되지 않아서 그런 불상사가 생겼을 것이다.
김상옥 시조시인은 삼현학원이 생길 그 무렵 우리나라 문단의 큰 별이었다. 교과서에 <백자부>나 <옥저> 같은 시조작품이 실려 있었다. 매번 학교를 방문하는 교빈 김상옥 선생은 전체 학생들에게 문학 특강을 했다. 그리고 학교의 설립 정신을 잘 살린 교가를 지어 부르게 했다. 김상옥 시인이 진주에 오면 틀림없이 그날 저녁에는 진양호 삼락식당으로 갔다, 그 집은 진주검무의 성계옥여사가 운영했던 집이었다. 아천 최재호 시조시인이 그 집에서 술이 한 잔 되면 김상옥 시인에게 서정주의 <무등을 보며>를 낭송하자고 요청했다. 낭송 대결을 하자는 것이었다. 지난 번에는 아무도 보지 않고 둘이서만 대결해서 객관적 평가를 내릴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강희근이 임석하여 엄정히 평결하리라는 믿음으로 리턴매치를 합시다.”는 것이었다. 두 낭송 선수는 물론 <무등을 보며> 전문을 외웠다. 김상옥 선수는 고개를 흔들며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산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를 안으로 잦아드는 소리로 낭송해 갔고 아천 최재호는 기교가 좀 떨어지는 대신 평음조로 설렁 설렁 발자죽 떼놓듯이 낭송해 갔다. 신명을 잣듯이 읽어내는 것에 방점을 칠 것인가, 의연한 남성의 목소리를 우선해 볼 것인가가 쟁점이 되었다. 필자는 이때 낭송은 왕도가 없으므로 스스로 최선인가, 아닌가를 짚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평을 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