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장. 초원의 새질서
1. 초원통일
며칠 후,
이중부는 우문 무특 소왕을 찾아 뵙고 정중히 인사 드렸다.
막사 안에는 마침 청아도 같이 있었다.
우문 소왕과 중부는 사실 옹서지간 翁婿之間이다.
중부가 우문무특 소왕의 사위(壻)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 정식으로 혼인식을 올리지 못하였으니,
서로 간에 불러야 할 호칭이나 관계가 어색 語塞하기만 하다.
오 년 전,
울란바토르 제1차 전투에서 대패하여 구사일생으로 도주하였던,
우문 청아는 얼마 후 애비도 모르는 아이를 낳았으니, 감히 부모님을 뵐 면목 面目이 없다.
아버지도 별말이 없다.
어여쁜 딸이 말하지 않아도, 사생아 私生兒의 그 애비를
나름, 속으로 짐작은 하고 있는 터였다.
당시 ‘중군과 선봉대 모두 전멸했다’라는 보고를 두 차례나 받았으니,
정황상 아군 我軍의 선봉장을 맡았던 아이의 애비는 전사했다는 것이
이미, 기정사실화 旣定 事實化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무남독녀 딸이 받았을 마음의 생채기가 도질까 염려되어,
더 이상 추궁하지 아니하고 모른척하고 지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죽었다던 아이의 애비가 멀쩡하게 살아있었으며, 아이의 아버지라는 작자 作者는
천 부장의 직위에서 이미 정식으로 혼례식을 올려 처자식까지 있다니,
아무리 초원에서 야외생활을 하며, 세속 世俗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대범한 여장부 우문 청아라도 어쩔 수 없다.
그러니 이중부가 을지 미앙과 결혼한 사실을 감히 부친에게 아뢰지 못한 모양이다.
혼인 이야기가 나오면 분위기는 더욱 곤란해질 것이다.
중부는 공손하게 우문 소왕에게 인사드린 후, 거두절미 去頭截尾하고 얼른 본론부터 꺼집어 낸다.
우선, 이 자리가 사적 私的인 만남의 공간이 아니라, 공식적 公式的인 자리임을 알리듯이
넌지시, 사무적인 호칭으로 예를 갖추었다.
“소왕야, 호한야 선우 측은 막남 漠南으로 도주하였으니, 이제 초원의 친구들을 결집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거 좋은 생각이네, 이제 자네의 명성이 초원 곳곳에 펴져, 자네를 모르는 우리 흉노인 들이 없으니
묵황야차 자네가 앞장서서 초원의 단결을 도모 圖謀해 보게”
“네, 좋습니다. 기꺼이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럼, 소왕야 분들을 찾아뵙고,
백 부장들을 각각 3명씩 차출하여 초원을 한 바퀴 돌아보겠습니다.”
“흠, 좋은 생각이네. 그러면 남 흉노의 잔재 殘滓들을 몰아내는 효과도 상당할 걸로 여겨지네.”
“그렇겠죠, 소왕야.”
“우리 측에서 차출 差出할 백 부장은 사로 어미와 의논해 보게”
“네, 감사합니다.”
‘사로 어미’란 단어가 나오자, 다음에 전개될 이야기는 뻔하다.
다른 말이 나오기 전에 중부는 얼른 우문 소왕야의 면전 面前에서, 급히 소피를 봐야 할 것처럼,
사타구니와 허리춤을 번 갈아가며 부여잡으며 다급하다는 시늉을 하면서,
도망치듯이 재빨리 막사를 빠져나온다.
우문청아도 곧이어 뒤따라 나온다.
아버지의 엄한 눈길을 피하고자, 이중부를 따라 얼른 바깥으로 나온 것이다.
그 자리에 더 이상 혼자 있기가 청아도 곤혹 困惑스럽다.
곧 이어질 아버지의 신랄한 질문을 홀로 감당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우문 소왕 측에서는 청아 자신이 직접 따라가겠다고 한다.
청아 입장에서는 님도 보고 뽕도 따고, 일석이조 一石二鳥 아니, 일석삼조의 호기 好期다.
먼저,
표면적으로는 이번 초원순회 草原巡廻 기획 企劃에 적극 찬성한 아버지의 명을 받들어,
공손히 임무를 수행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심 內心은 부친의 엄한 추궁 追窮을
당분간 모면할 수 있는 좋은 구실 口實을 얻은 것이었다.
따라서 먼저, 아버지 우문 소왕의 명령을 받드는 행동이므로 부친의 체면과 명분을 세워준 것이며,
아들 사로에게는 그동안 그리워하던 아버지를 마음껏 보고, 아버지 품에 안겨
부자 父子 간의 피붙이의 정 情을 쌓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마련한 것이며,
또한, 자신은 첫사랑 낭군님과 당당하게 공식적으로 동행하며, 5년 만에
참으로 오랜만에 회포 懷抱를 풀 수 있는 여건을 만들 수 있는 등,
3대 三代가 화목 和睦해 보이고 각자가 즐거워할 수 있는, 이 절호 絶好의 기회를 어찌 놓칠 수 있겠느냐?
즉시, 송골매가 선명하게 그려진 우문가 于門家의 커다란 깃발을 청하 문도의 막내 격인
사림과 오남 백 부장에게 직접 들고나오도록 지시하였다.
이중부도 천 부장이 직접 나선다는데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
천 부장도 보통 인물이 아니다.
각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 戰功을 세운 천강선 天降仙으로 알려진,
유명한 초원의 홍일점 紅一點 우문청아 천 부장이다.
우문 사로는 혼자서도 말을 제법 탄다.
‘흉노인들은 아이들이 걸음마보다 말 타는 법을 먼저 배운다’라는 말도 있다.
다시 본 진영에 돌아온 중부는 호도이시도고 (이하, 호도로 칭함) 선우에게
우문 무특 소왕과의 회의 내용을 보고하니, 호도 선우도 적극적으로 찬성한다.
이어 걸걸추로 소왕과 의논한바, 사로국 출신 연락단 40명을 모두 초원 순회단 草原 巡廻團에 합류시키라고 한다.
초원의 지리와 풍습을 익혀야 한다는 논리 論理다.
원화제도 原花制度의 시초 始初다.
원화 原花란 ‘초원의 꽃’이란 뜻이다.
이참에 사로국과의 연락단을 ‘원화단 原花團’으로 호칭을 바꾸었다.
초원 순회단 草原 巡廻團을 구성하였다.
선두 先頭에는 호도 선우의 금실로 테를 두른 푸른 늑대 깃발이 앞서고, 다음은 금성부 金城府의 우현왕,
걸걸 乞乞소왕, 우문 宇門 소왕의 세 개의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며, 위풍당당 威風堂堂하게 뒤따르고 있었다.
다섯 번째 깃발에는 이중부의 표징 表徵인 묵황도가 커다랗게 그려져 있다.
묵황도 깃발 옆에는 늘 천강선과 우문사로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대열의 후미 後尾에는 하얀 민들레큰 꽃에 벌과 나비가 장식된 원화 原花의 깃발을 든
원화단 40여 명이 뒤를 따르고 있었다.
깃발에 새겨진 하얀 민들레의 순백함이 초원을 아름답게 수 繡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