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재(盆栽)
오래간만에 청주시를 벗어나 근교인 강내면 절골로 차를 몰았다.
시계(市界)를 벗어난 시골길이 항요 그렇듯이 그 길도 풀어놓은 새끼줄처럼 누워있다.
테성교회 옆을 지나 몇차례 S자형 길을 돌아 예정대로 이풍호씨 댁에 이르렀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대문에 걸린 문패를 통하여 확인한 이름이다.
대문 앞에서 작달막한 황견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며 반긴다.
오래전에 헤어졌던 친구를 다시 만난 듯 반가워하는 것이 여간 귀여운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대문을 들어섰을 때 그 무엇보다도 가지런히 정돈해 놓은 분재들이 활짝 반겨준다.
분재를 보기 위하여 그 집을 방문한 참이었기 때문에, 그 분재들을 보게 되는 반가움은 누렁이의 환대에 비길 바가 아니다.
어찌도 그리 잘 가꾸어 놓았는지!
단풍나무, 소사나무, 금송, 진백을 비롯하여 이름도 모르는 수많은 나무들이
각기 독특한 자태로 모양을 뽐내고 있었다. 40여평 정도의 좁은 마당 한 가운데는
자그마한 연못을 파서 이중삼중으로 정수된 물이 흘러들어오게 만들어 놓았고
그 연못 주변으로 가지가지 분재들이 즐비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데,
거울같이 맑은 연못 속에는 오색으로 얼룩진 십수 년 된 비단잉어들이 한가롭게 노닐고 있었다.
주인은 동구 밖에 있는 밭에 나갔노라 며 안주인이 환하게 맞아준다.
수하고 인심 좋은 시골아낙네임을 금새 알아볼 만했다.
소나무가 널려있는 야산 아랫밭에도 분재를 가꾸고 있다는 이야기에 따라 댓바람에 밭으로 달려갔다.
비탈진 밭 아래로 4~ 50년생 소나무 한 무리가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내는 그 한편에 원두막이 서너 채 세워져 있고
몇 개의 들마루가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더위를 몰아내는 솔바람이 솔가지 사이로 시원하게 불어온다.
여름을 몰아내는 시원함을 찾아 많은 사람이 들러볼 만한 곳이다.
초대면의 이씨가 밭고랑에서 삽자락을 든 채 활짝 웃으며 마주 내려온다.
부부는 닮는다더니 어쩌면 인상이 그렇게도 부인과 닮았는가. 우리를 반기던 개가 영락없이 주인을 닮은 게로구나!
그는 선하고 부지런하고 법 없이도 살 것만 같은, 맘씨 좋은 이웃 아저씨처럼 푸근한 인상이다.
소문대로 밭고랑 구석구석에도 여러 가지 나무들을 식재해 놓고 분재감으로 가꾸고 있었다.
분명 취미를 넘어선 관심과 애착의 나무들이 형형색색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그는 우리를 안내한 송도용 장로의 처남으로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농사를 짓는 한편으로
일찍이 분재에 관심을 기울여 왔단다.
설명하는 품이 문외한이 듣기에도 제법 조예가 깊은, 분재기술을 남에게 가르칠 만한 기능인이라 할만하겠다.
실제로 여러 사람이 드나들며 분재에 대한 일가견을 듣고 간다고도 했다.
함께 집으로 돌아와 그가 손수 가꾸고 있는 분재에 대한 설명을 들어보았다.
그가 중학생 때 삽목해서 심었다는 재래종 향나무 한 그루는 처마에 닿을 듯 말 듯 반달 모양으로 계속 자라고 있었는데,
무려 34년이나 정성을 쏟고 있단다. 금송 한 그루는 30년이나 되었고...
그를 통하여 분재에 대한 상식을 여러 가지로 알게 되었다.
분재를 통하여 배울 것이 많다는 것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제주도에 있는 ‘분재예술원’에 들렀을 때, 다음과 같은 글이 돌판에 새겨진 것을 보았다.
‘분재를 통하여’ 라는 ‘분재십덕(盆栽十德)’이다.
분재를 통하여 자연과 친숙해지는 마음을 기를 수 있다.
1. 분재를 통하여 주는 마음을 기를 수 있다.
1. 분재를 통하여 희망찬 인생을 보낼 수 있다.
1. 분재를 통하여 모두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
1. 분재를 통하여 친목의 폭을 폭넓게 할 수 있다.
1. 분재를 통하여 마음을 평안하게 만들 수 있다.
1. 분재를 통하여 자연에 몰입하는 인생을 보낼 수 있다.
1. 분재를 통하여 인생을 즐겁고 풍요롭게 할 수 있다.
1. 분재를 통하여 건강한 몸과 마음을 기를 수 있다.
1. 분재를 통하여 기다림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분재(盆栽)! 참으로 값나가고 귀한 나무들! 기기묘묘하게 비틀리고 꼬아진 나무들!
적당한 크기와 굵기로 나름대로 균형미를 갖추고 있는 나무들, 그러면서도 그 나무의 개성이나 특성을 잃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나무들이 분재다.
그런 모습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숙고해 보면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선택의 과정이 특이하다고 볼 수 있다.
식재가(植栽家)의 마음에 드는 나무는 아예 씨를 뿌릴 때부터 선택된 나무들이다.
그리고 기성의 나무라면 최악의 생존조건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비바람을 견디며
뿌리를 내리고 잎과 꽃을 피우며 모진 풍상을 견뎌온 나무들이어야 한다.
바위틈에서 혹은 자갈밭에서 북풍한설을 견디며 자라온 나무들이 이식했을 때 살 가능성이 더 많다는 것이다.
올곧게 크지 못하고 어쩌면 비정상적으로 커왔던 나무이면서도 나름대로 그 특성을 잘 간직한 나무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선 그런 환경을 버틸 수 있어야 선택되는 것이다. 그 무엇보다도 강인한 생명력이 필요한 것이다.
또한, 이식을 하려면 불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가지나 뿌리는 가차 없이 잘려 나가야 한다.
또한 채워야 할 부분은 과감히 저미거나 구멍을 파서 다른 가지나 뿌리로 접목하게 된다.
또한 분재로서의 기품과 기상을 좀 더 멋지게 보여주기 위해서,
가지들을 철사로 감아 비틀거나 구부려서 모양새를 만들어 준다.
그 고통과 아픔의 과정을 잘 견딜 수 있는 나무들, 또한 잘 견딘 나무들이야말로 더 값나가는 분재가 되는 것이다.
그런 나무들만이 산에서 아무렇게나 자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사랑받는 나무가 되어지는 것이다.
삶이 힘들고 어렵다고 느껴질 때, 좀 더 가치 있는 인생을 가꾸고 싶어질 때
새삼스럽게 분재를 통하여 많은 것을 숙고(熟考)하게 되는 것은 어찜일까? -觀 -
덧글: 어느해였는지는 기억에서 사라졌다.
다만 무녀도 사역중에 김영선 목사가 선물로 준 워드프로세서로 겨우겨우 타자해서 활천에 응모했던 글이다.
장원 없는 차석으로 입선되었다는 통지를 받고, 시상식에도 참석했었던 기억은 희미하게 남아있다.
마침 출력해서 보관했던 글을 찾아서 몇 자 수정하고 다시 포스팅해 본다. 자신을 돌아보면설랑... -觀-
이미 오래전에 포스팅 했던 글을 다시 끄집어낸 글이다.
1997년 8월 응모작이었다는 기록도 있엇다. 출간을 위한 정리를 하던 중에 몇자 정정도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