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어느 탁구선수의 성공기
堂井 김장수
◆일장기를 단 한국인 선수의 금메달"요시(よし,
일본어로 좋다는 뜻)! 요시!"
한 한국인 선수가 이렇게 외쳤다. 한국인 선수가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2026 아시안게임에서 탁구 남자 개인
종목에 참가했다.
아시안게임이 열려서 조국 선수들과 붙을 때 쓰는 일본말이다. 상대는 한국 선수였다. 다른 경기와는 다르게 긴장감이 높아졌고,
일장기를 단 한국인 선수는 득점할 때마다 "요시(よし)!" 라는 일본어 감탄사로 기쁨을 표현했다. 결국 금메달은
일장기를 단
한국인 선수에게 돌아갔고, 한국 대표팀은 큰 충격에 빠졌다. 그러나 이 두 선수는 한때
같은 팀이었고
한솥밥을 먹으며 훈련했던 대한민국 탁구 국가대표팀 동료 사이였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한국인 선수의 한(恨)(1)
2026 나고야 아시안게임에서 일장기를 달고 출전한 한국인 선수 장영수(張永壽).
1993년 5월 23일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에서 태어난 그는 어렸을 때부터 탁구를 잘 했고,
초등학교 때부터 탁구에서 1위를 할 정도로 주변에서 소문난 탁구 신동이었다.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고 학교에서도 많았다.
2003년부터 각종 세계선수권대회를
석권했고, 심지어 2005 상하이 세계탁구선수권 대회에서 금메달을 딴 탁구 천재였다.
하지만 선생님들과 부모님에게는 장영수의 금메달이 의문거리였고 골칫거리였다. 그 때문에 추천서를 써 주지 않아
2006 아시안게임에 출전하지 못했다. 심지어 탁구 감독님은,
"너 공부 못 하는 거 티내냐? 공부나 해라, 공부를!"
이라고 지껄이면서 장영수에게 상처를 주었다. 선생님과 부모님의 설득에 시달려 가며 탁구를 하던 5학년 때,
선생님이 호출을 한다. 그것도 아주 작심한 듯.
"영수야, 너 지금 탁구라는 운동에 얽매여서 그렇게 살 거니?"
"그럼 선생님은 제게 어떤 대답을 원하세요?"
"'잘못했습니다. 탁구 따위 그만 두고 공부 열심히 하겠습니다.'라는 대답이 듣고 싶어."
"그럼 평생을 직장 면접장소나 기웃거리며 그렇게 살란 얘기인가요?"
"그럼 어떡하니? 남들 다 가는 길 너도 가버릇 해야지. 영수야, 우리 다시 시작해보자. 다시 시작하는 거야.
네가 원하는 공부, 공부 열심히 해서 대학 가서 좋은 직장에 취직해서 효성스러운 아들이 되어 주렴. 도와줄게.
부탁이야, 소원이야, 응? 응?"
애교를 떨며 괴롭히는 선생님, 듣고 있는 장영수도 고역이다.
"선생님은 제가 꿈을 잃고 방황하기를 바라시나요?"
"다른 애들도 다 똑같이 하고 있잖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영수야, 이렇게 빌게. 제발 탁구 그만두렴.
부모님께 가서 잘못했습니다 그렇게 하렴. 응? 화이팅! 화이팅! 넌 다시 시작할 수 있어.
선생님은 네가 대학에 가서 취직하는 것이 소원이야. 부탁해. 영수야, 이렇게 간절히 부탁할게. 탁구 그만둬. 응?
제발……."
눈물을 흘리며 애원하는 선생님, 결국 영수는,
"네. 탁구 포기할게요. 이제 선생님 소원대로 됐네요?"
"잘 생각했어, 우리 영수……."
말끝을 잇지 못하고 우는 선생님, 그것을 보는 영수도 울고 만다.
"저는 탁구가 하고 싶었는데, 선생님 때문에…."
"영수야, 우리 대학 가자. 대학 가서 취직하자! 화이팅! 너는 할 수 있어. 사랑해,
영수야…."
영수는 주변의 권고 때문에 탁구라는 큰 꿈을 포기해야 했다. 그렇게 라켓을 놓으며 집에 가는 내내 엉엉 울며 가는
영수.
집에 와서는 울음을 삼키며 이렇게 말했다.
"잘못했습니다. 탁구 따위 그만 두고 공부 열심히 하겠습니다."
리고 울면서 말한다. 그런 영수를 어머니께서는,
"울지 마라, 영수야. 너도 이제는 공부 열심히 해서 대학 가서 취직해야지. 탁구 그만 하고 공부하자! 넌 할 수
있어."
영수는 울면서
"저는 이제 평생 꿈을 잃고 방황하며 살게요. 이제 속 후련하시죠?"
라고 말하며 엉엉 운다. 영수 아버지의 한 말씀,
"영수야, 너는 탁구에 매달려 학교 생활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띨띨하게 사는 것, 보고
싶지 않다.
널 믿는다. 공부 열심히 해서 꼭 대학에 가자! 화이팅!"
부모님의 소원은 영수의 대학 진학과 취직이었다. 그것 이외에는 출세의 길이 없는 한국 사회에서
억지로라도
적응시키고 싶었던 것이 영수 부모님의 마음이었다. 그 소원이 이루어졌으니, 부모님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기뻤으나, 영수에게는 고통의 시간이었다. 하루빨리 취직해서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이
지금 영수의 소원이 되었다.
◆한국인 선수의 한(恨)(2)
영수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탁구를 그만두고 공부에 열중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탁구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었다.
대학에 졸업하면 꼭 탁구를 다시 하리라 마음먹었다. 중고등학교 때는 술과 담배를 일절 하지 않은 채 전교 1등을 했고,
부모님의 뜻대로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잡은 탁구에 대한 미련은 아직도 남아 있었다.
좋은 대학에 가서 취직해야 정상인 한국 사회에 대한 혐오감도 언젠가부터 품고 있었다. 평생 그렇게 살았다가는 미칠
것만 같아
눈물 흘리며 울던 날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영수 아버지께서는,
"영수야, 대학원에 가렴. 미국 대학원에 가서 박사 학위 따도록 하렴."
하지만, 영수는 이제 독립하고 싶은 때가 왔다 생각하고 용기 있게 말한다.
"저는 일본에 가고 싶습니다."
"무슨 일을 하려고?"
"거기서 박사 학위를 따고 싶습니다."
영수 아버지는,
"그래라. 차라리 일본에 가서 취직하는 것이 낫다면 그렇게 하렴."
그렇게 일본으로 떠난 영암(榮巖) 장영수는 메이지 대학에서 교비생으로 입학하여 일본어와 법학을 익혀 나간다.
그곳에서 석사 학위와 박사 학위를 손쉽게 취득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영수 아버지로부터 편지가 왔는데,
그 편지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너에게는 탁구에 대한 그리움이 남아 있구나. 아버지가 잘못했다. 널 믿는다. 꼭 탁구를 열심히 해서 성공하고
돌아오렴.
아버지로부터 온 한 장의 편지로 용기를 얻은 영암 장영수는 그 후 회사 생활 틈틈이 탁구 클럽에 가서 열심히
연습한다.
그렇게 조금씩 옛날의 기량을 찾아가고 있었다.
◆드디어 영광의 금메달
그 후로는 2022년 오사카 세계탁구선수권대회를 앞두고 일본에 귀화했다. 그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딴
장영수는
그 후 마쓰야마 쥰(松山俊)으로 창씨개명을 한다. 그후 한국 선수들을 보면 독기가 뿜어져
자신의 일본행을 가져온 한국 국민 앞에서 복수의 라켓을 마음껏 휘둘렀다. 특히 장영수는 "요시!" 등 일본식
감탄사를 연발하며
한국 선수들을 자극했다. 그렇게 한국 탁구의 기본 관행과 자존심을 여지 없이 짓밟았다. 이 경기 이후 한국에서는
장영수에 대해 동정여론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장영수를 짓밟은 한국 사회에 대한 경멸과
혐오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한 외국 기업가는 한국 대표에게,
"당신 나라에서는 한 사람의 인생을 짓밟아 놓고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는데,
그렇게 남 잘되는 것을 못 보는
이기적인 태도를 고집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렇게 질문했을 때, 한국 대표는,
"통일 한국이 달라지려면 아직 먼 것 같다. 정말로 그 친구에게 미안하다. 옛날 분단되었을 때 한국은 취직만이
정답이었다.
무한경쟁시대인데다 4차 산업혁명 때문이라서 그런지 사람들이 이기적으로 변한 것 같다."
그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아무튼 장영수는 2026년에 나고야 아시안게임, 2028년 LA 올림픽에서 영광의
금메달을 땄으나,
이미 그는 한국인 입장에서는 이방인이었다.
어느덧 장영수는 2028년 11월에 결혼을 했다. 신부는 재일 한국인으로 방직회사 사장의 딸이었다.
그 후 빙부의
권유로 은퇴한 그는 그 후 통일 한국의 평원군에 방직회사를 세웠다.
◆통일 한국에서
통일 한국에서 그는 처음에는 힘들었다. 하지만 장영수의 처지를 이해해 주는 사람이 더 많아
장영수는 그 후
일본인으로서 한국에서 주는 훈장을 받았다. 훈장 수여식에서는 장영수의 부모님이 와 계셨다. 영수 아버지께서는,
"참 잘 되었구나. 이제야 성공했구나. 잘 했다. 앞으로도 잘 살아라."
"정말 고맙습니다, 아버지."
"그래, 이 사람이 네 색시냐?"
"네."
"정말 예쁘구나. 잘 살아야 한다. 그리고, 얘가 네 아들이냐?"
"제 아들입니다. 정욱(貞昱)이라고 지었습니다."
"좋은 이름이구나. 애비는 이제 늙었다. 애비는 네가 법관이 되기를 바랐는데…. 이제 소원대로 성공했으니,
앞으로도 열심히 살아라."
그 후 통일 한국에서 방직회사 경영을 하며 여생을 보낸 영암(榮巖) 장영수. 일본인 마쓰야마 쥰은 그 후
평원군뿐만 아니라
카자흐스탄에도 사업을 확장한다. 하지만 장영수는 착실하게 기업을 이끌면서 '부실기업'이라는 불명예를
아예 얻지 않도록 노력했다. 자서전 《여명과 꿈》에서 그는 이렇게
밝혔다.
"탁구를 하고 싶어 일본으로 갔지만, 나는 조금만 더 노력해서 탁구선수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착실한
성격이라서,
공부를 하라고 했을 때 시키는 대로 했다. 통일 전 한국에서는 취직 이외의 길을 찾으려면 목숨을 걸어야 했지만,
통일 한국에서는 취직 없이도 꿈을 이룰 수
있어 행복하다."
그 후 세월이 흘러 영암 장영수도 노인이 되었다. 60세에 부친을, 67세에 모친을 여읜 그는 몸도 마음도 쇠약한
상태였다.
둘째 손주가 탁구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
"참 잘 되었구나."
하며, 회상에 젖었다. 그 후 영암 장영수는 71세에 세상을 떠났다. 생전에 영암탁구재단을 만든 그는
탁구를 하고
싶다는 소원을 이룬 셈이 되었다. 소원을 이룬 후 묘비명은 다음과 같다.
'꿈을 포기하지 말라. 그대는 할 수 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