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글 본문내용
|
다음검색
은빛 자작나무 허 열 웅 자작나무는 이른 봄 연둣빛으로 잎이 상큼하다. 여름엔 쭉쭉 뻗어 오르는 기품으로 하얀 제복을 입은 해군의장대 열병식을 보는 것 같아 흐뭇하다. 계절마다 바뀌는 빛깔은 하늘 높이와 기온 차가 클수록 선명해진다. 가을이 총천연색으로 발라드 곡을 연주하며 다가온다. 가을엔 노랗게 물든 잎이 떨어지면 추위와 함께 본격적으로 은빛을 발한다. 겨울 눈밭에 희디흰 나목裸木으로 군락을 이루어 서 있는 설경은 흰 물감으로 그어댄 펜화의 한 폭이다. 파스테르나크의 소설에서 ‘닥터 지바고’가 달빛을 틈타 볼세비키 혁명군을 등진 것도 울창한 자작나무 숲이었다. 서양에서는 자작나무를 숲속의 여왕이라 부른다. 우리나라 옛 양반들이 정원에 능소화나 배롱나무(일명 목백일홍)를 심었듯이 서양 귀족들은 넓은 장원莊園에 자작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우리는 흔히 결혼을 화혼이나 화촉華燭을 밝힌다고도 하는 데 이 단어에 들어 있는 화(樺)자가 바로 자작나무를 가리키는 것이다. 자작나무로 초야를 밝혔기 때문이다. 자작나무는 우리나라 북한지방에서 만주, 시베리아를 거쳐 북반구의 추운 지방에서 자라는 나무다. 남한에서는 자연에서 자라는 자작나무 숲은 없었다. 그러다가 1986년 한 제지회사가 펄프용으로 처음 조성하였다. 강원도 인제 매봉에 600ha에 100여만 그루가 자라서 광대한 숲이 형성되어 있다. 그 뒤 산림청에서도 자작나무 숲을 조성하였다. 자작나무란 이름은 껍질이 탈 때 ‘자작자작’ 하는 소리가 나는데서 따온 의성어로 붙여졌다. 나무껍질은 하얗다 해서 화피樺皮라고 한다. 나목이라는 표현이 가장 어울리는 나무, 겨울로 갈수록 수피樹皮가 하얗다 못해 은빛을 발하는 나무, 추위 속에서 더욱 맑아지는 인고와 침묵의 자작나무다. 아름다운 여인의 속살 닮은 자작나무가 어느 날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자작나무 숲을 처음 본 건 20여 년 전 백두산 관광에서였다. 정상에 오르는 길은 그리 험하지 않아 관광버스가 완만한 경사를 따라 구불구불 자작나무 숲을 지나며 산 능선의 주차장에 도착하였다. 다시 4륜 구동의 지프차에 바꿔 타고 천지 가까이 도착하여 걸어서 10분 쯤 오르니 꿈에도 그리던 백두산 천지가 눈 아래 펼쳐졌다. 넓고 푸른 호수, 쩡하고 청명한 하늘, 맑은 공기와 끝없이 펼쳐진 구름송이꽃 등 야생화 무리는 언어의 무력함을 절감케 하는 형용할 수 없는 풍광이었다. 일 년 중 두 달 정도만 안개가 없다는데 마침 행운의 맑은 날씨 덕분에 오래 머물며 가슴과 사진에 흠뻑 담아올 수 있었다. 중국을 통해서 입산한 산은 우리나라 백두산이 아니었다. 거의 모든 표기들이 장백長白이란 글자가 앞머리에 붙어 있었다. 장백산, 장백폭포, 등은 물론 여관이나 점포의 상호조차 장백이란 표기가 많았다. 애국가에 나오는 거룩한 이름의 백두산을 보지 못하고 중국의 장백산 천지를 보고 있다는 느낌에 분하고 아픈 마음을 꾹꾹 참아야 했다. 장백폭포로 걸어가는 길가에도 자작나무가 소실점까지 이어지는 숲을 지나자 장엄하게 물줄기를 쏟아내는 폭포가 나타났다. 자작나무는 껍질이 물에 젖어있어도 불이 잘 붙어 불쏘시개로 중요하게 사용해왔다. 야영을 하거나 어두울 때 불을 밝히기도 하고, 빗물이 스며들지 않고 보온효과도 뛰어나 지붕을 이는 데 애용되어왔다. 몽골 사람들은 자작나무를 신목神木이라 부른다. 하늘과 사람의 세상을 이어주는 나무라 생각하여 신성시 한다. 그래서인지 이 나무엔 벼락을 치지 않는다고 전해온다. 우리가 약용으로 복용하는 영지버섯이나 상황버섯은 고목에서 자라지만 '차가버섯은 살아있는 자작나무에서 기생한다. 미네랄이 풍부한 수액을 먹고 자라서 성인병 치료에 그 효능이 크다고 하여 신이 내린 나무라고 한다. 신라의 대릉원 천마총에서 출토된 천마도天馬圖가 그려진 재료가 자작나무 껍질이었다. 말안장에 그려진 이 그림은 1천년이 훨씬 지났어도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고 있다. 국보 32호인 팔만대장경의 일부도 자작나무로 만들어졌다. 잘 썩지 않고 오래 보존할 수 있어서 북부지방의 서민들은 사람이 죽으면 시신도 화피로 싸서 묻기도 하는 등 다양하게 활용되어 왔다. 시인 프로스트는 시원하게 활활 타오르는 자작나무 에 반해 <나는 자작나무 타듯 살아가고 싶다>라고 표현했다. 천재 시인 백석도 자작나무를 주제로 한 시와 산문을 발표했다. 산골 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 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산도 자작나무다 그 맛있는 메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 그리고 감로 같이 단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 산 너머는 평안도 땅도 뵈인다는 이 산골은 온통 자작나무다. (백화白樺-백석) 자작나무는 외롭게 한 그루 씩이 아니라 여러 나무가 함께 모여 숲을 이루어 자라기를 좋아 한다. 여인의 매끄러운 속살 닮은 자작나무가 길게 늘어선 숲길을 걸으며 사색에 잠겨본다. 순백 살결의 소리 없는 합창도 들려온다. 사색은 생각의 균형을 잡아주는 것이고 그 균형은 이런 길을 걷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것 같다. 숲은 세상살이에 때 묻은 채 와서 온갖 투정 다 부려도 오랜 친구처럼 귀를 기울인다. 눈이 시리도록 하얀 자작나무껍질에 편지를 쓰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있다. 젊은 시절 파랑새처럼 날아간 여인에게 자작나무 껍질에 편지를 써 보냈으면 사랑이 이루어졌을 지도 모른다는 아쉬운 생각도 해본다. 그 첫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아 지금도 숨겨놓은 보석처럼 아무도 몰래 빛나고 있다. |
댓글0추천해요0
|
첫댓글
허열웅 작가님
“눈이 시리도록 하얀 자작나무껍질에 편지를 쓰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있다.”
이 대목에 와서 오래 머물다 갑니다.
허열웅(시인, 수필가)선생님 창작의 열정에 큰 갈채를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