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두 주일 전에 우리나라 프로야구 플레이오프가 시작되었는데 롯데자이언츠가 거기에 엉겁결에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롯데가 잘해서라기보다는 함께 4위 경합을 벌이고 있던 삼성 라이온스가 정규리그 막바지에 연패를 하는 바람에 거의 어부지리로 올라가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예상치 못했던 일이고 또 플레이오프전에서 그리 잘할 것이라고 기대도 되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저는 '팬으로서의 기본적인 의무'는 수행해야 마땅할 것으로 알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았습니다. 하지만 입장권은 이미 다 매진된 상태였기 때문에 그 대신에 대학부 S.F.C. 인터넷 카페에다 '샬롬 갈매기 긴급 소집 공고'를 올려서 준플레이오프가 열리는 첫날 저녁에 롯데 팬들과 두산 팬들은 다 저의 사택에 모여서 같이 응원을 하자고 초대했습니다. 또한 경향교회의 공식 롯데 응원단장인 석기신 목사님과 경향교회의 비공식 두산 응원단장인 석기성 장로님 역시 정식으로 초대를 했으며, 저는 이 행사에 소용되는 모든 식사와 간식을 총책임지는 스폰서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경기 당일에 약 열 네댓 명이 제 집에 모였는데, 물론 롯데 팬과 두산 팬은 앉는 자리부터 철저히 구분시켰습니다. 압도적인 다수의 롯데 팬들은 소파의 중앙자리를 중심으로 제 거실의 로열박스에 해당되는 위치를 점거하도록 했고, 반면에 몇 안 되는 두산 팬들은 '기역' 자 소파에서 옆으로 삐딱하게 앉는 쪽 즉 텔레비전 화면을 보려면 내내 고개를 90도로 꺾고 있어야 되는 쪽에 앉혔습니다. 그렇게 두어 시간 동안 롯데 팬들과 두산 팬들은 서로에 대하여 '비방, 조소, 멸시, 천대'를 퍼붓고 자기 팀에 대해서는 '격려, 위로, 칭찬, 찬양'으로 열렬히 응원했는데, 다행히도 이들 사이에 난투극이나 유혈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또한 롯데가 압승을 거두었기 때문에 두산 팬들도 자기네들의 신변에 아무 위협을 느끼지 않고 안전하게 귀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다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날 제 집에 왔던 어느 두산 팬인 대학부 자매께서 그 다음날 샬롬 게시판에 소위 '감사의 글'을 올렸는데, 그 댓글들을 통해서 롯데 팬들과 두산 팬들의 '온 라인' 전투가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어떤 두산 팬 자매는 자칭 '샬롬의 김태희'라고 하면서 "목사님, 오늘은 두산이 이겼습니다. 6:0"이라고 하면서 '약 올리는 웃음'을 상징하는 이모티콘들을 달아놓았습니다. 그래서 저도 부아가 나서 그 밑에다 "니가(적나라한 표현을 용서바람) '샬롬의 김태희'면 나는 '목양실의 장동건'이다."라고, 사실 스스로도 매우 쑥스러운 말이기는 했지만, 댓글을 달아서 응수를 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지나서 롯데가 부산의 홈에서 전패하면서 시리즈를 3:1로 지고 난 후에 또 다른 두산 팬 자매가 댓글을 달았는데, "롯데, 내년에는 Korean Series에서 다시 만나요!"라고 해 놓고는 그 뒤에 "호호호"라고 달아놓았는데, 그 비웃음(?)소리가 마치 제 귀에 대고 하는 것처럼 쟁쟁하게 울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두 명의 두산 팬 자매들은 제가 실명을 밝힐 수는 없지만 둘 다 이름에 '혜' 자가 들어가고 둘 다 스스로 '미모가 출중한 여인'이라는 '자뻑(?)'에 빠져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여튼 그 바람에 저는 완전히 분기탱천하여 자제력을 상실하게 되었고 당장 댓글을 달았는데 "'악하고'(롯데를 홈에서 무참히 짓밟았음) '패역한'(단군신화의 주인공이었음) 곰들에게 영원한(야구장에서만) 저주(?)가 있을지어다!"라는 글이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밑에 롯데 팬인 '허성'이라는 형제가 "아멘!" 하는 댓글로 화답을 했는데, 조금 있으니까 두산 팬인 김대희 목사님이 "허성~!~ 헛된 소리!! ㅋㅋ"라고 댓글을 올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김대희 목사님의 그 "헛된 소리"라는 말이 겉으로는 '허성'이라는 형제의 이름을 가지고 농담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저의 댓글에 대하여 간접적으로 비난하는 것인 줄을 알아채고 제 마음에 깊이 새겨(?) 두었습니다. 김대희 목사님은 언젠가는 제가 얼마나 뒤끝(?)이 있는 사람인지를 뼈저리게 맛보고 크게 후회할(?) 때가 올 것입니다.
하여튼 이처럼 사람들은 프로야구 경기를 보면서도 자기가 응원하는 팀을 따라서 그 편이 확실히 갈리게 됩니다. 롯데와 두산이 시합을 하게 되면 관중은 그 둘 중에 어느 한쪽 편을 들게 되지 양쪽 편을 다 들 수는 없는 것이며, 그렇게 나누어진 팬들은 당연히 자기와 같은 팀을 응원하는 같은 편의 사람들끼리 더욱 친해지고 결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처럼 프로경기에서 팬으로 나누어진 사이는 일단 경기만 끝나면 서로 웃고 다시 화목할 수 있는 것이지만, 영적인 세계에서 나누어진 '편'들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선'과 '악'이 서로 대적하는 상황이며 '진리'와 '비진리'가 목숨을 걸고 싸우는 전투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프로 시합처럼 어느 쪽이 이겨도 상관없다고 중간에 있을 수 없는 전투이며, 이긴 자와 진 자는 영원히 천당과 지옥으로 나누어지는, 실로 엄격하고 첨예한 '편 가름'인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 경향의 청년부흥회 마지막 날 밤 예배를 드리면서, 저와 여러분이 이 영전의 치열한 현장에서 과연 어떤 편에 어떻게 함께 서야 마땅한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사람끼리만 서로 좋아서 모인 무리는 '금송아지의 편에 있는 자'들이 됩니다.
그것이 바로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질렀던 일이었습니다. 본문 21절로 25절에 "21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 백성이 네게 어떻게 하였기에 네가 그들로 중죄에 빠지게 하였느뇨 22아론이 가로되 내 주여 노하지 마소서 이 백성의 악함을 당신이 아나이다 23그들이 내게 말하기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 수 없노라 하기에 24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금이 있는 자는 빼어내라 한즉 그들이 그것을 내게로 가져왔기로 내가 불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나이다 25모세가 본즉 백성이 방자하니 이는 아론이 그들로 방자하게 하여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음이라"고 기록했습니다.
본문 1절부터 3절에 보면 모세가 십계명의 돌판을 받기 위하여 시내 산에 올라가 있는 기간이 오래 지체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론에게 가서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고 압력을 가했었습니다. 그러자 아론은 별 저항도 하지 않고 그들에게 "귀의 금고리"들을 빼내 가져오라고 한 후에 그것을 부어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모세가 산에서 내려온 후에 아론에게 "이 백성이 네게 어떻게 하였기에 네가 그들로 중죄에 빠지게 하였느뇨"라고 추궁하자 그는 자기 변명하기에 바빴습니다. 앞서 4절에 보면 아론이 그 금고리들을 가지고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들었다"고 그 금송아지 제작 과정이 구체적으로 나와 있는데도, 여기 24절 하반절에서는 "내가 (금고리들을) 불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나이다"라고, 마치 금송아지 우상이 저절로 생겨났다는 듯이 둘러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의 상황은 어떠했습니까? 백성들이 우상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해 왔을 때, 아론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인 줄은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저 그 '사람들의 원하는 대로' 따라가 주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사람의 종'이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또한 어쩌면 아론도 모세가 아주 내려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즉 이번 기회에 백성들의 인기를 얻어서 자기가 모세 대신에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을 가망성도 충분히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조금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알 수 있는 명백한 우상숭배에 그처럼 선뜻 나설 수는 없지 않았겠습니까? 즉 아론이나 이스라엘 백성이나 양쪽 다 소위 '서로 좋은 것이 좋은' 관계를 형성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 아론은 백성들을 "중죄"에 빠지게 했고,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방자하게" 행하도록 했으며, 전 이스라엘이 "원수들에게 조롱거리"가 되도록 만들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처럼 아론은 우상숭배의 죄에 방조했을 뿐 아니라, 나중에 가서는 그 책임을 전부 백성들에게만 돌리는 못난 꼴까지 보였습니다. 22절에서 그는 자신에게 매섭게 책임 추궁을 하는 모세에게 말하기를 "이 백성의 악함을 당신이 아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즉 '원래 악한 백성이니 내가 어떻게 하겠습니까?'라는 지극히 무책임한 변명으로 자기가 저지른 죄를 합리화하려 했던 것이었습니다. 아론이 진정한 지도자였다면 악한 백성이니 자기가 선한 길로 인도해야 하겠다는 책임감을 발휘했어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정말 그들이 악한 백성인 줄을 알았다면 그런 백성들이 좋아하는 대로만 해 주는 것은 분명히 악한 일이 될 수밖에 없다는 뻔한 사실을 왜 그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겠습니까? 그런 아론의 죄는 더 이상 변명의 여지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신명기 9장 20절의 말씀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때 아론에게 진노하사 그를 멸하려 하셨지만, 모세가 그를 위하여 기도해 줌으로써 겨우 용서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본성이 악하다는 사실 때문에 지레 겁을 먹고 힘을 쓰지 못하는 목사라면 결코 제대로 된 목사일 수가 없습니다. 교인들이 하나님 말씀대로 잘 살지 않고 목사가 이끄는 대로 잘 따라와 주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을 두고 속상하다고 일찌감치 낙심하는 목사는 결코 하나님의 참된 종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다 선하고 다 착하면 누가 목사 일을 못하겠습니까? 아니 모든 교구 성도들이 다 신앙 바르고 아무 문제없는 모범 교인들뿐이라면 전도사라는 직분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니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않는' 목사가 진짜 필요한 것이고, 그렇지 않으니 '양떼의 영혼을 자기 생명보다 더 귀중히 아껴 주는' 교역자들이 절실히 필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래 전에 제 여동생이 이가 좋지 않아서 치과를 자주 다녔는데, 그때 제 여동생은 자기의 치과 의사가 아주 솜씨가 좋다고 극찬을 했었습니다. 그 치과 의사는 스케일링을 하든지 혹은 이를 때우든지, 하여튼 무슨 치료를 하든지 간에 절대로 아프지 않게 해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제 동생이 조금만 아프다고 해도 더 이상 치료하지 않고 적당히 끝내 주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얼마만인가 시간이 흐르게 되자 제 동생은 자기 이를 때워 넣었던 부분이 하나씩 둘씩 망가지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다른 치과 의사를 찾아가 보았더니 그 의사 선생님은 씩 웃으시면서 제 동생보고 하는 말이 "이제 나머지 이들에 때워 넣었던 것들도 하나씩 차례대로 전부 다 떨어지게 될 터이니 그때마다 찾아오세요."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처음의 치과 의사는 제 동생을 아프지 않게 하려는 것만 너무 신경을 쓰다 보니 이를 때워 넣을 때에도 충분하게 깊숙이 때워 넣지 않고 표면만 살짝 덮이도록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환자가 아프지 않도록 치료하는 것만 신경을 썼던 그 의사는 결국 훌륭한 의사가 아니었음이 나중에야 드러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의 영혼을 치료하는 목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교인이 아프지 않게, 그저 교인이 좋아하는 것만 해 주려는 목사는 언뜻 느끼기에는 아주 훌륭한 목사처럼 여겨질 것입니다. 그 반면에, 교인을 제대로 치료하려 하고 고치려고 애를 쓰는 목사는 교인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처지가 되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나중에는 드러나게 됩니다. 과연 누가 제대로 교인의 영혼을 치료하여 건강한 생명으로 만들었는지는 시간이 흐르면 차차 드러날 것이며 주님 재림하시는 날에는 확연히 밝혀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악한 본성을 치료한다는 것은 의사에게나 환자에게나 공히 힘든 일인 것입니다. 환자는 환자대로 아프다고 소리를 지를 것이고 의사는 또 의사대로 땀을 뻘뻘 흘리게 되는, 피차 힘든 과정이 따를 수밖에 없는 까닭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치료를 간단하게 하거나 아예 치료를 포기하는 의사라면, 당장은 환자가 느끼기에 아프지 않고 편하기야 하겠지만 결국 더 큰 중병에 빠뜨리는 일일 뿐 아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자기를 절대로 아프지 않게 하는 그런 목사를 훌륭한 목사라고 생각하는 교인은 바로 그 목사와 함께 더욱 큰 중죄에 빠져 들어가게 될 따름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실제로는 바로 그런 목사와 교인들이 모인 교회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교인들이 듣기 싫어할 만한 설교는 절대로 하지 않고 교회 운영도 소위 '민주적'으로 한다고 하면서 순전히 교인들이 원하는 대로만 해나가는 현대판 '아론'과 같은 목사들이 수두룩합니다. 교인들 역시 성경 말씀을 가지고 '이것이 옳다, 저것은 저렇게 해야 한다.'라고 귀찮게 하지 않고 그저 자기네들 원하는 대로 고분고분 들어 주는 목사를 '사람 좋은 목사님' '자상하고 이해심 많은 목사님' 운운하면서 추켜세워 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처럼 하나님을 제쳐놓고 목사와 교인들 저희들끼리만 좋다고 '짝짜꿍'하는 것은 결코 참된 교회가 할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제쳐놓는, 하나님을 '왕따'시켜 버리는 악한 무리가 되고 말 뿐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목사들이 '화해, 이해, 벽을 깨뜨리는 진정한 사랑'이니 하는 미명들을 내세우면서 이단 교단과도 통합을 하고 우상 종교들과도 합치려 하고 있지만, 그것도 사실상 '하나님은 제쳐놓고 사람들끼리만 좋다고 뭉치는' 이 시대의 '금송아지 놀음'일 뿐인 것입니다. 사람이 좋아하는 대로 사람을 기쁘게 해 주는 목사와 그런 목사를 훌륭한 지도자라고 떠받드는 교인들이 함께 모인 무리는 바로 '하나님의 반대편에 있는 금송아지 숭배자'가 되고 마는 것을 똑바로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께 헌신하는 일을 위해 모인 성도는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가 됩니다.
모세와 레위 지파 사람들은 바로 그렇게 한 편으로 모이게 되었습니다. 본문 26절로 29절에 "26이에 모세가 진 문에 서서 가로되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하매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로 오는지라 27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그 친구를, 각 사람이 그 이웃을 도륙하라 하셨느니라 28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인 바 된지라 29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그 아들과 그 형제를 쳤으니 오늘날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날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고 기록했습니다.
앞서 15절로 20절에 보면, 십계명 돌판을 받은 후에 시내 산에서 내려온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 앞에서 절하고 먹고 마시고 춤추며 노는 모습을 보게 되자 "대노"했습니다. 얼마나 성이 났던지 그는 그의 손에 있던 십계명이 기록된 증거의 돌판을 던져 깨뜨려 버리기까지 했습니다. 그 돌판은 하나님이 만드시고 그 글자는 하나님이 쓰셔서 판에 새기신 것이었으니 사실 매우 귀중하기 짝이 없는 물건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그것을 던져 깨뜨려 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숭배함으로써 이미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가 파기된 마당에 그 언약이 기록된 돌판 자체는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또 그 금송아지를 불살라 만든 가루를 물에 뿌리고 백성들로 하여금 마시게 했는데, 이는 백성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우상 숭배의 죄를 상기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돌판을 깨뜨린 것이나 금송아지 가루 물을 마시게 한 것 모두가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이 지금 저지른 죄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죄인지를 깨닫도록 해 주기 위한 상징적 행위였던 것이었습니다.
참된 주의 종이 가져야 할 기본적 자세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죄를 볼 때 목사는 당연히 분노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좋아서 하는 일일지라도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일이라면, 참된 하나님의 종이라면 분노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것이 곧 죄'라는 사실을 목사는 교인들에게 엄히 가르치고 책망하고 경계해 주어야 마땅합니다. 사람의 생각과 행위를 오직 말씀의 기준을 따라 정확하게 진단하고 고쳐 주는 것이 목사의 직분이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후에 모세는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고 외쳤습니다. 모세는 정말 절박한 심정으로 외쳤을 것입니다.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연 모두 다 금송아지 편으로 넘어가 버린 것인가? 이 백성들 중에 과연 여호와의 편에 서 있는 사람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는 말인가?' 하는 애타는 마음으로 "누구든지 금송아지 편이 아니라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이쪽으로 모여라."고 소집명령을 내렸던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외침에 즉각 응답한 무리가 있었습니다. 바로 "레위 자손"이었습니다. 열두 지파 중에 한 지파였으니 겨우 12분의 1이라는 소수이기는 했지만 철저히 '여호와의 편'에만 있는 영적 골수분자들이 모세를 중심으로 모여서 '금송아지 편'에 있는 백성들과 나누어졌던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모세는 그 '레위 자손'들에게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그 친구를, 각 사람이 그 이웃을 도륙하라"는 하나님의 추상같은 명령을 하달했습니다. 그러자 그 레위 자손들은 그 명령을 따라 백성 중에 금송아지 우상 숭배에 앞장 선 사람들 "삼천 명" 가량을 가차 없이 처단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레위 자손들은 자기 백성 가운데서 죄를 없이하고 죄를 무찌르는 일에 열심을 내고 앞장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결과 29절에 보면, 그들은 "여호와께 헌신"된 사람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레위 사람들이 나중에 제사장과 성막을 풀타임으로 수종드는, 아주 특별한 지파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29절 하반절에서 모세가 밝히고 있듯이 그 레위 지파에게 하나님께서 내려 주신 "복"이었습니다. 사실 레위 지파는 창세기 49장 5절부터 7절에 기록된 야곱의 유언에 따르면 거의 저주를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지파였습니다. 그때 야곱은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라고 그들이 옛날 세겜 사람들을 대량 살상했던 끔찍한 죄악을 가차 없이 책망했던 것입니다. 그랬던 레위 지파가 이 금송아지 사건을 계기로 이제는 오히려 그들의 전 생애를 철저하게 '여호와께 헌신'하는 지파로 세워지는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된 것이었습니다.
목사가 교인에게 자꾸 죄에 대하여 상기시키면 교인들이 싫어하고 다 교회를 떠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큰 착각입니다. 죄를 전혀 가르치지 않는 목사, 죄란 말로 교인들에게 전혀 부담을 주지 않는 목사의 교회에는 사람들이 모이게 될지는 몰라도 그런 교인들이란 영원히 죄에서 고침 받지 못하는 영적 불치병 환자만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반면에 목사가 어찌하든지 하나님 말씀만을 기준으로 하여 죄를 지적하고 죄를 책망하고 죄에 대하여 권징하면 바로 그 죄를 극복하고 그 죄를 이겨내는 진짜 성도, 정말 철저히 '여호와의 편에 서 있는 신자'가 교회에 모이게 되기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목사가 교회에서 자꾸 일을 만들어 내고 교인들로 하여금 죽도록 봉사하고 헌금하게 만들면 그런 교회에는 교인들이 모이지 않을 것이라고 오늘날의 소위 현대적인 목회를 한다고 하는 목사들은 흔히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인 동시에 엄청난 불충입니다. 사도 바울의 저 유명한 고백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10)는 말은 이 시대의 목사들의 양심 속에서는 아주 사라져 버린 것입니까?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을 사람들이 좋아하는 편으로 끌어오는' 것이 결코 아니라 오직 '사람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편으로 이끌어 가야'만 하는 직분인 것입니다. 그리고 목사가 그런 자세로 섬기면 반드시 따라오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비록 소수이기는 하겠지만 그처럼 '여호와 편에 있는' '여호와께 헌신하는' 성도들이 그런 목사와 같은 편에 서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특히 우리 경향의 청년들이 바로 이편에 확실히 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은 '모이기를 폐하는 자'들의 편에 서지 말고 부지런히 주일예배뿐 아니라 밤예배와 새벽기도회와 구역예배에 '모이기를 힘쓰는' 편에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십일조조차 드리지 않는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쪽'에 결코 서지 말고 생애 첫 월급을 전부 다 감사의 예물로 드리는 것부터 시작하여 헌당헌금이나 교육관헌금을 위하여 생애 '최고와 전부'를 다 드리는 쪽에 서야 합니다. 여러분은 소위 '청년들의 기분을 잘 이해해 주는 목사' 쪽에 모여 저희들끼리 희희낙락하는 인본주의 종교의 집단이 아니라, 여러분의 시간을, 힘을, 물질을, 눈물을, 땀을, 피를 하나님의 단 위에 쪼개어진 제물처럼 올려놓고 하나님께 온전한 번제로 태워지게 만드는, 어찌하든지 오로지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하려는 종'을 진정 사랑하고 존경하고 따르는 쪽에 똘똘 뭉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신앙생활을 모두 편하게만, 부담 없게만 하려 하고, 목사는 그런 교인들의 비위에 맞추어 그저 '사람들 좋아하는' 목회를 하면, 그 교회는 목사나 교인들이나 모두 다 '사람 편에 서 있는' 아니 '금송아지 편에 모인' 교회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참된 교회는 목사나 성도들이나 다 같이 확실하게 여호와의 편에만 서서 함께 죽도록 충성하고 헌신하는 것이 바로 자신이 받은 복인 줄을 아는 교회입니다. 교인들은 좀 쓰기도 하고 아프기도 할지라도 말씀의 약과 말씀의 칼로 진행되는 치료 앞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며, 목사는 뜨거운 눈물의 기도와 함께 그 말씀으로 각 성도의 영혼과 생활을 정확하게 이끌어 나갈 때, 그 목사와 그 교인들은 양자가 함께 '여호와의 편'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을 그저 편하게 내버려 두지 않고 아프게 고쳐 주려는 교역자들을 귀히 여기는 성도들과 또 그처럼 교인들을 헌신의 제물로 만드는 것을 자기 사명으로 아는 주의 종들이 이 교회에 계속 세워짐으로써 주님 다시 오실 그날까지 오직 철저하게 '여호와의 편에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편'은 원래가 '갈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잠실야구장에서 롯데 팬들은 롯데 팀이 있는 3루 쪽 관중석에 모이고 두산 팬들은 두산 팀이 있는 1루 쪽 관중석에 모이게 됩니다. 그래서 같은 '석' 씨 삼형제라도 '맏형' 목사와 '셋째' 목사는 롯데 쪽에, '둘째'인 장로는 두산 쪽에 나누어져 앉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렇게 나누어진 편들은 일단 야구만 끝나면 다시 의좋은 형제로 돌아오게 됩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편에 있는 성도'는 '불신자와 이단'과는 금세와 내세에 걸쳐서 영원히 갈라설 수밖에 없습니다. 편이 분명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그 때문에 자기 '형제' '친구' '이웃'과도 영적으로는 서로 대적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께서도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 사람이리로다"(미 7:6)라고 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왜냐하면 원수관계는 원래 '편을 갈라지게 만드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은 '원수가 되리라'고 선포하신 이래로 그 적대관계는 세상 종말 때까지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처럼 적대관계에서는 이쪽 편이든지 저쪽 편이든지 둘 중에 하나이지 그 중간이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짐승'과 '새'들이 전쟁을 할 때 그 중간에서 이쪽에 붙었다가 저쪽에 붙었다가 하던 우화 속의 '박쥐'일 뿐인 것입니다.
하지만 확실히 '한편'이 되어 주는 사람은 그 얼마나 반갑고 고마운 것이겠습니까? 특별히 자기편이 중과부적일 때, 자기편의 전세가 불리하여 악전고투하고 있을 때에 의리를 저버리지 않고 끝까지 같은 편에서 싸워주는 동지나 전우는 피차 그 얼마나 끈끈하고도 뜨거운 관계가 되겠습니까?
실제 역사를 배경으로 하여 만든 '알라모 요새'라는 유명한 영화에 이런 감동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텍사스에 있는 알라모라는 요새를 지키고 있던 트레비스 대령과 그의 휘하에 있는 2백여 명의 의용군들은 멕시코의 사령관 산타아나가 이끄는 6천 명의 대군에게 포위를 당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트레비스 대령은 미국의 최고 사령관 샘 휴스턴 장군이 이끄는 텍사스 민병대가 재조직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서 최대한으로 시간을 벌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압도적인 적군을 대항하여 그 적은 숫자로 그 보잘것없는 요새를 지킨다는 것은 사실상 자살행위나 다름없다는 것은 누구의 눈에도 자명한 일이었습니다.
자기 부하들이 동요하고 있는 것을 알아챈 트레비스 대령은 모든 군인들을 요새 입구에 있는 광장에 집결시켰습니다. 그리고 칼을 뽑아서 자신과 그 부하들 사이의 땅바닥에 긴 선을 하나 그었습니다. 그리고는 누구든지 자기와 함께 알라모 요새를 끝까지 사수할 사람은 그 선을 넘어서 자기 쪽으로 오고, 반대로 지금 멕시코 군이 마지막으로 기회를 줄 때에 여자와 아이들과 함께 요새를 떠나고 싶은 사람은 그 자리에 남아 있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잠시 동안 서로 얼굴만 쳐다보던 군인들 중에서 짐 보이라는 사람이 그 선을 건너옵니다. 그 짐 보이는 원래 트레비스 대령과 가장 사이가 좋지 않고 매사에 서로 고집을 부리는 알력 관계에 있던 사람이었지만, 오히려 제일 먼저 그 선을 넘어와서 트레비스 대령 곁에 섰던 것입니다. 그러자 다들 뒤따라서 한 명 한 명 그 선을 넘어오고 처음에는 요새를 떠나려고 했던 크로켓이라는 사람과 그의 부하들 역시 한 명도 빠짐없이 트레비스 대령 쪽에 와서 나란히 서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 2백 명의 사람들은 그 트레비스 대령 쪽에 선다는 것이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임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같이 싸우는 것이 그들에게는 행복이었고, 그러다가 같이 죽는 것이 그들에게는 최고의 명예로운 일이었기 때문에 그들 모두는 끝까지 한편이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참된 진리운동, 진정한 교회운동이란 바로 그처럼 생사고락을 같이 하여 싸우는 쪽에 함께 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원로목사님께서는 지금 'WCC 제10차 총회 한국 개최 반대 투쟁위원회'를 결성하시고 이 외롭고 어려운 싸움을 시작하셨습니다. 물론 우리 교단 교회들이 함께 하고 이 대한민국의 진실한 목사와 성도들이 동참하게 되겠지만 그 누구보다도 바로 우리 경향의 성도들이 이 원로목사님 쪽에 단 한 명도 빠짐없이 함께 서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지난 주일에 했던 '섞인 무리를 분리케 하였느니라'는 제목의 설교가 이미 기독교 언론계에 비판 기사와 함께 실리고 찬반 양쪽으로 나누어진 많은 댓글들이 올라오고 있지만, 우리 경향의 성도들이, 특히 경향의 청년들이 단 한 명도 빠짐없이 같은 편의 전우가 되어 준다면 저 역시 결코 낙심하거나 후퇴하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싸움 자체는 힘든 것이지만 그렇게 같은 편에 설 때에 우리에게는 오히려 행복한 일이 될 것이며, 다수로부터 비난과 핍박을 받을 것이 뻔한 일이지만 그래도 우리 경향의 성도만이라도 끝까지 사선을 같이 넘는 각오로 싸운다면 저와 여러분에게는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가장 명예로운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도대체 어떻게 '엘리야'와 '바알의 선지자들'이 같은 편에 서 있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레위 족속'들이 '우상숭배자'들과 섞일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참된 교회일치운동은 그처럼 사람끼리 서로 좋아해 주고 사랑해 주고 이해해 준답시고 하나가 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런 '무조건 통합운동'이라는 것은 결국 금송아지 혼합종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교회와 성도가 하나가 될 수 있는 길은 그저 다들 '여호와의 편'에 서기만 하면 됩니다. 비록 지상에 여러 교단들이 나누어져 있고 한 교단 안에서도 지교회들이 다 흩어져 있지만, 그들 모두가 다 '여호와의 편'에 확실히 서기만 하면 절로 다 같은 편이 될 것이 틀림없는 일이며, 그것이 바로 예나 지금이나 주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하나의 우주적 교회'로 통일시키시는 유일한 방법인 것입니다. 사람끼리 서로 기쁘게 해 주고 사람끼리 서로를 칭찬해 주는 '금송아지 종교의 편'에 현혹되거나 끌려가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하고 그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사명에 죽도록 충성 헌신함으로써 이 '여호와의 편'에 끝까지 함께 있는 경향의 성도들과 청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