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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제물에 뺄 것과 넣을 것 (레 2:11-13)
성경의 말씀은 영의 양식이라고 합니다. 성경에는 쉽게 소화할 수 있는 양식도 있지만 단단한 양식도 있습니다. 우유도 있고 고기도 있습니다. 단단한 음식은 먹기는 어려워도 먹으면 맛도 있고 영양도 좋습니다. 어렸을 때에는 우유를 먹고 자라지만 신앙이 장성하면 단단한 음식도 먹고 고기도 먹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레위기의 말씀은 소화하기 쉬운 그런 음식은 아닙니다. 그러나 꼭꼭 씹어 먹으면 감칠맛 있는 책이 바로 레위기입니다. 우리가 지난주에는 다섯 가지 제사 가운데에서 번제에 관해서 생각을 했습니다. 번제는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흠이 없는 제물을 가지고 와서 자기의 죄를 고하며 그 위에 안수해서 기도하서 자기의 죄를 그 제물에게 전가시킨 다음 그 제물을 잡아서 피를 흘립니다. 그런 후에 제사장은 그 피를 단의 사면에 뿌리거나 아니면 뿔에 바릅니다.
오늘은 소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소제는 ‘Grain offering’ 혹은 ‘cereal offering' 이라고 합니다. 소제는 무엇으로 드리는 제사입니까? 곡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런데 영어를 하는 사람들은 잘못하면 실수할 수도 있습니다. 이 소제는 Grain offering이라고도 하지만 ‘Meat offering’ 이라고도 말하기 때문입니다. ‘Meat’는 고기라는 뜻이 아닙니까? 잘못 번역하면 고기제물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meat’는 고기라는 뜻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곡물 중에서 먹을 수 없는 부분을 뺀 먹을 수 있는 부분을 ‘meat’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Meat offering’은 ‘Grain offering’과 같은 말입니다.
지난주에 생각한 번제와 오늘 생각할 소제는 우선 외형적으로 네 가지 점에서 명백한 차이가 있습니다.
번제 소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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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이 제물 곡물이 제물
피 있는 제사 피 없는 제사
전체를 태움 일부만 태움
죄를 속죄함 속죄받은 것을 감사함
번제는 짐승이 제물입니다. 그러나 소제는 곡물이 제물입니다. 번제는 피가 있는 제사입니다. 그러나 소제는 피가 없는 제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소제라고 할 때에 이 ‘소(素)’자는 한자로 희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피가 없기 때문에 흰 제사가 되는 것입니다. 번제의 경우에는 가죽을 뺀 나머지는 제물 전체를 다 태워서 여호와께 향기를 올려 드립니다. 전체를 태웁니다. 그러나 소제는 일부분만 취하여 태우고 나머지는 제사장이 갖게 됩니다. 번제의 경우는 그 효과가 사람의 죄를 속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제는 번제를 드려서 죄를 속함 받은 사람이 감사와 헌신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이런 점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또 번제와 소제는 외형적인 면에서도 차이가 있습니다만 그 신학적인 의미에서도 두 가지 면에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번제 소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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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제사로 칭의 얻음 칭의를 얻은 사람의 성화와 관련
제물에 안수 ⇒ 회개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은 사람이 헌신, 감사, 충성을 표함
번제는 속죄제사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아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칭의(justification)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소제는 이미 예수 믿어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의 성화(sanctification)와 관련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구원의 두 가지 측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칭의’와 ‘성화’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죽으면 영화(glorification)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번제는 칭의와 관련이 있고 소제는 성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또 번제의 경우에는 제물을 드리는 사람이 제물에 손을 얹어서 안수합니다. 그 안수는 회개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소제는 안수하는
과정이 없습니다. 이것은 회개를 통해 죄사함을 받은 사람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헌신하고 충성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외형적인 면이나 신학적인 면에서 번제와 소제는 분명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번제는 기본제사이고 소제는 부수제사인 것입니다. 번제는 밥이요 소제는 반찬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밥을 먹을 때 반찬이 같이 가야합니다. 밥만 먹는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번제와 소제는 병행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번제의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반드시 소제의 제물도 가져가서 제사를 드려야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출애굽기 29장 39-40절을 보면 제사장들이 해야 할 일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매일 해야 할 일은 아침과 저녁으로 1년 된 어린양을 한 마리씩 잡아서 번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번제를 드릴 때에는 아울러 고운 밀가루 에바 십분의 일을 소제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에바는 22ℓ입니다. 그러므로 십분의 일은 2.2ℓ입니다. 또 민수기 15장 6절의 말씀을 보아도 수양을 번제로 드리는 경우에는 고운 가루 한 에바의 십분지 2에다가 기름 한 힌의 삼분지 1을 드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번제에는 반드시 소제가 따라가야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번제는 모든 제사의 기본이요 소제는 따라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의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나중문제입니다. 예수 믿고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 먼저입니다. 먼저 번제를 통과해야 소제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번제가 출발이요 기본입니다. 그 위에 감사와 헌신과 의로운 삶이 첨가가 되는 것입니다. 고로 칭의 없이는 성화가 없습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거룩한 삶, 의로운 삶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기본자격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창세기 4장을 보면 아벨은 양의 첫 새끼를 가지고 기름으로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무엇으로 드렸습니까? 번제 없이 땅의 소산으로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지만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소제는 잘못된 제사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도 바른 제사입니다. 그러나 번제 없는 소제를 드린 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번제 없는 소제는 잘못된 것입니다. 먼저 번제제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위에 안수함으로 회개하고 그 피의 효력으로 죄사함을 받은 사람만이 감사와 충성과 헌신과 의로운 삶의 소제를 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서적으로도 바른 길이요, 우리의 체험을 통해 볼 때에도 바른 길입니다. 여러분이 의로운 삶을 살고 싶으시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는 예수 믿지 않고도 윤리 도덕을 가지고 의롭게 살 수 있다.’ 그것은 꿈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번제 없는 소제는 받지 않으십니다.
1. 소제의 재료
그렇다면 이 소제의 재료는 무엇입니까? 2장 1절을 읽겠습니다.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 소제는 한 마디로 말해서 고운 가루입니다. 이것은 밀가루도 되고 보리가루도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첫 이삭을 소제로 드리는 경우에는 14절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너는 첫 이삭의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거든 첫 이삭을 볶아 찧은 것으로 너의 소제를 삼되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위에 유향을 더할지니 이는 소제니라.” 첫 이삭을 드릴 때에는 볶아서 찧어야 합니다. 소제의 재료는 고운 가루가 되어
야 하는 것입니다. 고운 가루에 기름을 넣어야 하는 것이고 그 기름 위에 유향을 넣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받으시는 향기로운 제사가 된다는 말입니다. 고운 가루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곱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 하나님께 감사와 헌신을 드리는 사람은 가장 최고의 것을 드려서 감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데 거칠고 값싸고 맛없는 것을 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쓰고 남은 것으로 하나님께 감사하지 마시고 쓰기 전에 가장 최고의 것으로 감사를 하나님께 드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가 1986-91년도까지 미국에서 목회를 했습니다. 목회를 할 때 가끔 “교회에 TV가 없으니 헌물하실 분은 가져오시기 바랍니다.”하면 사람들이 쓰다가 못 쓰는 것을 가지고 옵니다. 여러분, 그런 것은 거친 가루입니다. 고운 가루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드릴 때에는 먼저 드리고 나머지 것을 써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먼저 최고의 것을 드리
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소제의 재료는 가루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헌신하는 사람은 가루가 되어야 합니다. 자아가 없어져야 합니다. 자아가 깨지고 부서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100% 헌신하려는 마음으로 일을 해야 합니다. 깨어지지 아니하고 부서지지 아니하고 자기 고집을 가지고 하게 되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도 그것입니다. 예수님도 인성을 가지고 계시고 자신의 뜻이 있으셨지만 언제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 38-39절에도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라.” 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22장 42절에도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으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완전히 고운 가루가 되어서 하나님께 드리는 소제의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고운 가루가 되어 하나님께 헌신하고 감사하고 충성하는 삶을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것이 바르게 사는 삶이요, 옳게 사는 삶인 것입니다. 고운 가루가 되지 않고 “나는 내 멋대로 살겠다.”고 하면 나중에 삶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후회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망하게 하시려고 고운 가루가 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그것이 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른 인생길이요 그것이 영혼을 지향하는 인생길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2. 소제에 첨가해서는 안 되는 두 가지
그런데 여기 소제에는 절대로 첨가해서는 안 될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과 무엇입니까? 11절을 읽겠습니다. “무릇 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소제물에는 모두 누룩을 넣지 말지니 너희가 누룩이나 꿀을 여호와께 화제로 드려 사르지 못할지니라.” 하나는 누룩이고 또 하나는 꿀입니다. 누룩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째로 누룩의 의미는 부패입니다. 누룩이 들어가면 부패시키고 곰팡이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룩의 의미는 교리적인 부패, 윤리적인 부패입니다. 모든 부패는 다 누룩으로 상징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물질의 복이든 영의 복이든 받으려면 삶에 누룩이 없어야 합니다. 똑같은 자본을 가지고 출발을 해도 누룩이 있는 사람은 망합니다. 그러나 삶이 정결한 사람은 자꾸 복을 받고 잘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가복음 8장 15절에 “예수께서 경계하여 가라사대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에 주의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로 첫째로 누룩은 부패입니다. 둘째로 누룩의 의미는 교만입니다. 누룩이 들어가면 밀가루가 부풀어 올라서 큰 빵 덩어리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영혼에 누룩이 들어오게 되면 사람의 마음이 부풀어 올라서 자기가 거물이 된 것처럼 여기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교만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누룩은 악독함의 의미가 있습니다. 누룩은 언제나 악하고 독한 것의 상징입니다. 고린도전서 5장 8절에도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헌신하는 사람은 그 삶에서 부패와 교만과 악독을 제거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거되지 않고서는 하나님이 그 사람의 헌신과 감사를 받으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섞여 있으면 여호와께 화제로 드려 사르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삶에서 누룩을 제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섞지 말아야 할 것은 꿀입니다. 꿀은 혀에 얼마나 달콤합니까? 그러나 많이 먹으면 건강을 해치게 되는 것입니다. 잠언 25장 27절에 “꿀을 많이 먹는 것이 좋지 못하고 자기의 영예를 구하는 것이 헛되니라.” 이 꿀을 많이 먹는다는 것은 자기의 영예를 구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육신의 정욕이나, 안목의 정욕이나, 이생의 자랑을 구하는 것이 꿀을 먹는 것입니다. 사람이 꿀을 너무 많이 먹게 되면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빠지게 됩니다. 그것들은 모든 인간이 좋아하고 추구하는 것이지만 바로 죄악의 3대 근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믿고 헌신해서 사는 사람들은 지나친 육신의 정욕이나 탐욕이나 사욕이나 이런 것을 좇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꿀입니다. 그러므로 꿀이 섞인 소제는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3. 소제에 첨가할 세 가지
그런데 소제에는 반드시 섞어야 할 것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기름입니다. 기름은 거룩한 기름이요 하나님이 만들라고 하는 방식대로 감람유를 가지고 만든 것입니다. 기름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명백합니다. 기름의 상징은 성령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헌신하고 감사하는 사람은 자기의 노력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반드시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의로운 삶, 바른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고 성령충만을 주시고 바른길로 인도하실 때에 성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께 뜨겁게 부르짖는 기도의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임하게 되고 성령의 보호하심 가운데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아니고는 의로운 삶을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 의지로 살겠습니다!” 어림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자기 자신은 믿을 게 못됩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이 있을 때 우리는 바르게 살 수 있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는 유향(Frankincense)입니다. 유향나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나무에 흠을 내면 진액이 나오게 됩니다. 그 진액을 받아서 가루로 말리게 되면 그것이 유향입니다. 이 유향은 가나안 땅에서도 많이 나고 아라비아에서도 많이 나는데 특별히 이것은 피부병에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유향 가운데는 길르앗에서 나는 길르앗의 유향이 가장 피부병에 효력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너희가 길르앗 유향으로 치료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하고 탄식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 유향은 불에 태우거나 가열을 하면 향기로운 냄새가 납니다. 그리고 그것을 태우면 하얀 연기가 나는데 이 연기가 여호와께 향기로운 제사가 되는 것입니다. 유향은 기름처럼 가루와 혼합이 안 되기 때문에 고운 가루와 기름을 섞어놓고 그 위에 얹어놓고 태우는 것입니다.
유향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그 보좌 우편에 앉히시고 그리스도의 간구를 들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유향은 그리스도의 중보기도를 의미합니다. 베드로전서 3장 22절은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8장 34절에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시다고 했습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유향이란 바로 그리스도의 중보기도의 향이 하나님께 올라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하게 살고 의롭게 살고 싶지만 자꾸 실패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원히 넘어지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넘어져 계신 분은 다시 일어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중보기도 해주시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향기로운 냄새로 받으시고 우리를 넘어진 자 가운데서 다시 일으켜 주시는 것입니다. 신앙에 넘어지고 기도에 넘어지고 윤리에 넘어진 분들은 다시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의인은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고 싶다고 할 때에는 성령의 도우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기도의 두 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만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지 않고 의로운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이 소제물에 첨가되어야 할 제일 중요한 것은 13절에 나와 있습니다. “내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제일 중요한 것은 소금입니다. 소금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소금은 첫째로 불변성을 의미합니다. 소금의 맛이 오늘은 짜다가 내일은 달게 변한다면 그것은 소금이 아닙니다. 소금은 맛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옛날 이스라엘의 산에서 나는 암염은 소금기가 다 빠지게 되면 맛 잃은 소금이 됩니다. 그러나 진짜 소금은 맛이 변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소금을 ‘언약의 소금’이라고 했습니다. 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연약을 맺을 때 언제나 ‘소금언약’이라고 말했습니다. 민수기 18장 19절에도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변하지 않은 소금언약(covenant of salt)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언약을 맺을 때 이 언약은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소금언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소금은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변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의 평강으로 지키신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로 소금은 친밀한 교제(close fellowship)를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할 때에 “내가 너희 소금을 먹겠다.” 하면 이것은 내가 너와 친밀하게 지내겠다는 뜻입니다. 교제성, 친밀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친밀하게 지낼 때에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소금은 진지성, 성실성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4장 6절에 보면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 소금으로 고르게 함과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말은 소금처럼 성실하고 진지하다고 느껴져야 합니다. 사람의 말에 꿀을 타서, 말은 달콤한데 말대로 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하면 그 사람은 믿을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말 한마디를 해도 성실하고 진지하게 해야 하고 신앙생활의 봉사를 해도 성실하고 진지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즘 인기 있는 개그맨의 말처럼 “그까이꺼 대충!” 해서는 안 됩니다. 네 번째로 소금은 부패 방지성이 있습니다. 소금이 들
어가면 세균이 죽고 썩는 것을 방지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소제에는 반드시 소금을 치라고 했습니다.
결론
우리는 이런 말씀을 볼 때에 ‘천지를 창조하신 광대하신 하나님이 이렇게 작은 규정들을 일일이 세세하고 섬세하게 말씀하신 것이 얼마나 놀라우냐?’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쫀쫀한 시아버지 같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 믿고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들이 살아야할 원리를 지금 그림자처럼 그림책으로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고운 가루가 되어 살아야 합니다. 고운 가루가 되어 하나님께 헌신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누룩같이 부패한 것은 제거하고 꿀처럼 세상의 달콤함도 제거하고 그런 것에 탐닉해서 살지 말아야 합니다. 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기름같은 성령의 도우심과 유향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기도에 힘입어서 세상의 소금처럼 살아야 합니다. 변함없는 신앙을 가지고 성실하고 진지하게 하나님과 교제하며 부패하고 썩어가는 세상에서 소금처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사회도 대단히 부패했습니다. 교회도 같이 부패해서 썩으면 우리에겐 희망이 없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소금처럼 살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름과 유향과 소금을 친 소제물이 되시기를 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피 영 민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