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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게 말하기, ‘알레고리’의 힘
- 이효석, 엄혹한 일제말 '메밀꽃'만 탐닉했을까 -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1. 개요
알레고리(allegory) 또는 우의(寓意)는 어떠한 주제를 표현하기 위해 다른 주제를 사용하여 그 유사성을 넌지시 드러내는 방법으로, 풍유법의 발전이다.
2. 특징
알레고리에서는 주어진 내용의 글을 여러 개의 보다 작은 단위의 내용들로 구성하고, 이때의 내용들을 같은 맥락(context)으로 재구성한다. 알레고리를 사용하는 화자는 임의의 어떤 주제 A를 다루기 위해 다른 형태의 주제 B, C, D등을 배경지식, 연관정보, 근거, 사건 등으로 제시하거나 의도적으로 배열함으로써 주제 A의 타당성이나 당위성을 보장하는 효과를 누린다. 규모면에서는 단어나 문장과 같은 작은 단위에서 구현되는 표현 기교라기보다 이야기 전체가 하나의 총체적인 맥락(context)을 가지고 제시되는, 상대적으로 큰 규모로 구현되며, 알레고리를 통해 상호 유기적인 연관성을 가진 공통의 핵심 주제를 보여줄 수 있다.
3. 텍스트 예시
추상적인 개념을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그것과 유사한 구체적인 이미지로 표현하는 문학 형식이다.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는 근면성을 칭송하는 알레고리이며 조지 오웰(George Owell)의 〈동물농장〉은 전체주의를 비유한 알레고리다. 일반적으로 우화(遇話)로 봐도 무방하지만 대체로 우화보다는 길고 중층적이라는 특징이 있다. 가치, 정신 등 무형의 이념을 전달하는 광고에서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와 유사한 표현 형식을 사용하기도 한다.
알레고리는 그리스어 알레고리아(allegoria)에서 온 말이다. 우리말로 하자면 '우의'라고 할 수 있다.. 쉽게 설명하자면 우화를 떠올리면 되겠다. 즉, 알레고리는 인물, 사건, 생각 등 어떤 메시지를 표현하기 위해 마치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꾸며 그 안에 본 메시지를 숨기는 것이다. 알레고리는 어떤 메시지를 직접 전달하는 대신 '상징'이나 '은유'를 사용하여 이야기를 구성하는데, 등장인물이나 사건은 실제 상황이나 추상적 개념을 반영하는 경우가 많다.
우화에서 등장인물들은 보편적인 미덕 또는 악덕을 나타내며, 그들의 행동과 갈등은 더 넓은 개념이나 주제를 보여준다. 줄거리는 숨겨진 의미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전개된다. 그래서 독자들은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사건, 갈등 전개를 읽고 각각의 상징적 의미를 해석하면서 진짜 메시지가 무엇인지 찾아낸다. 그래서 알레고리는 상징과 은유, 생생한 묘사를 사용한다.
작가나 예술가들은 우화를 사용하여 복잡하고 민감한 아이디어를 간접적으로 전달할 수 있으며, 더 깊은 탐구와 이해를 추구하는데, 조지 오웰의 '동물 농장'이 바로 유명한 우화다. 표면적으로는 인간 농부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는 한 무리의 농장 동물들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이 이야기의 이면에는 러시아 혁명과 그에 따른 공산주의의 부상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겨 있다. '동물 농장'에서 각각의 동물들 역시 역사적 인물을 상징한다.
알레고리는 문학, 영화, 예술, 그리고 심지어 노래에서도 발견될 수 있는데, 이러한 장치는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분석하고, 숨겨진 의미를 해석할 수 있도록 해준다. 어떤 이야기에 표면적 의미가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면, 이 이야기의 등장인물들, 그리고 사건들이 상징하는 바를 생각해 봐야 한다. 그리고 이것들이 표면적인 모습을 넘어서 무엇을 나타낼지 고민하다보면 완전히 새로운 관점에서 이야기를 감상해 볼 수 있다.
■ <개미와 배짱이>, <토끼와 거북이> 등의 이솝 우화의 세례를 받지 않고 자라난 어린이가 있을까. 그리고 그 이야기들이 정말 개미와 배짱이 사이에서, 토끼와 거북이 사이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믿는 사람이 있을까. 동물의 이야기인 ‘척’하면서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려는 이야기들을 우리는 ‘우화’라고 배웠고, 더 나아가 주제 A를 통해 주제 B를 추구하는 방법을 우리는 ‘알레고리(Allegory))’라 부른다. 알레고리는 ‘말할 수 있는 것’을 통해 ‘말할 수 없는 것’을 드러내는 이야기 방식이다. 알레고리 기법은 이야기의 흥미와 새로움을 위해서도 쓰이지만 ‘직접적으로’ 작가의 의도를 전하기가 매우 어려운 상황일 때, 특히 정치적 억압이나 검열이 심각할 때 사회를 향한 ‘은밀한 풍자’를 위해 쓰이기도 한다. 암흑시대에 역사소설이 유난히 많이 창작되는 이유도 바로 알레고리의 힘 때문이다. 알레고리는 ‘말할 수 없는 소재’를 ‘말할 수 있는 이야기’로 만드는 문학의 마술적 에너지인 셈이다.
■ 동물들이 모두 편히 좌정하고 연설을 들을 준비가 된 것을 보자 늙은 수퇘지 메이저는 목청을 다듬어 말하기 시작했다. (……)
자, 동무들, 동물들의 삶이 어떤 겁니까? 우리 똑바로 봅시다. 우리의 삶은 비참하고 고달프고, 그리고 짧소. 우리는 태어나 몸뚱이에 숨 떨어지지 않을 정도의 먹이만을 얻어먹고, 숨 쉴 수 있는 자들은 마지막 힘이 붙어 있는 순간까지 일을 해야 하오. 그러다가 이제 아무 쓸모도 없다고 여겨지면 그날로 우리는 아주 참혹하게 도살당합니다. 영국의 모든 동물들은 나이 한 살 이후로는 행복이니 여가니 하는 것의 의미를 알지 못합니다. 영국의 어느 동물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비참과 노예상태, 그게 우리 동물의 삶입니다. (……) 그런데 우리는 왜 계속 이 비참한 조건 속에 살아야 하는 겁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가 노동해서 생산한 것을 인간들이 몽땅 도둑질해 가기 때문입니다. 동무들, 우리 문제에 대한 해답은 바로 거기 있소. 한마디로 문제의 핵심은 ‘인간’이오. 인간은 우리의 진정한 적이자 유일한 적입니다. 인간을 몰아내기만 하면 우리의 굶주림과 고된 노동의 원인은 영원히 제거될 것이오.
-조지 오웰, <동물농장> 10~11쪽.
■ 이 이야기가 단지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으로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마치 우리 일상의 한 장면처럼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상황으로 보인다면 여러분은 알레고리의 의미를 성공적으로 이해한 셈이다. ‘동물들의 공동생활과 정치’라는 알레고리를 통해 조지 조웰은 ‘인간사’의 근원적인 갈등, 즉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의 끝나지 않는 싸움이라는 문제를 꼬집어낸 것이다. 알레고리는 독자의 ‘해석’의 문제이기도 하다. 저자가 한사코 ‘이것은 알레고리가 아니다.’라고 주장해도 독자가 자신의 상황에 맞게 그 작품을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말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정치적 알레고리는 시대적 특수성을 의뭉스럽게 표현하면서도 시뻘겋게 날선 검열장치를 미끄러져가는 교묘한 회피 전략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동시에 알레고리는 단지 특수한 시대상황을 넘어 어디서나 적용될 수 있는 시대적 보편성을 추구하기도 한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은 당대의 파시즘을 비판하는 것이라는 지배적인 해석을 받았지만, 오늘날 우리의 일상 곳곳에 둥지를 튼 전체주의의 흔적들을 동물들의 생생한 표정과 몸짓, 언어를 통해 변함없이 보여주고 있다. 고전 문학에 등장하는 <국선생전>이나 <장끼전>, <별주부전> 등도 알레고리의 원형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며 시대를 초월하여 인간사회의 갈등을 다루고 있지 않은가.
■ 우리가 <반지의 제왕>을 읽으며 현실 속에서 정말 간달프나 프로도 같은 인물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 <걸리버 여행기>의 소인국에 가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 소인국의 정치적 현실이 우리의 상황과도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인간의 ‘알레고리적 욕망’을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들이다. 우리는 현실을 사진처럼 재현하거나 논리적인 보고서의 형태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현실과 연관을 가지면서도 현실을 ‘낯설게’ 만드는 참신한 표현 방법을 원한다. 알레고리는 우리가 처한 상황을 일상과 다른 차원에서 비유적으로 바라보게 만듦으로써, 이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상상력을 작동시키라고 속삭인다. <별주부전>의 토끼처럼, <반지의 제왕>의 프로도처럼, <걸리버 여행기>의 걸리버처럼, 우리의 현실을 뛰어넘는 새로운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를 원하는 것이다.
■ 우선 지난 70개월 전부터 이 나라에는 두 개의 당파가 서로 논쟁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시길 바랍니다. 그들은 구두의 높은 굽과 낮은 굽에서 유래한 트라멕산과 슬라멕산이라는 이름으로 당파를 구별하고 있습니다. 높은 굽이 지금까지의 제도에 가장 잘 부합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국왕은 행정부나 왕궁에 관련된 모든 직책에 오직 낮은 굽을 신은 사람만을 등용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당신도 보셨겠지만 국왕이 신고 있는 구두의 굽은 다른 사람들이 신고 있는 신발보다 1 드러르(약 1.8밀리미터) 정도는 낮은 것입니다.
-조너선 스위프트, 박용수 옮김, 문예출판사, 2008, 55쪽
■ 인어공주는 날마다 바닷가에 나가 보았지만, 왕자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어요.
“할머니, 저도 사람들과 함께 살고 싶어요.”
할머니는 인어공주를 걱정스레 바라보았어요.
“얘야, 인어는 바다 속에서 살 때 가장 행복한 거란다.”
-안데르센, <인어공주> 중에서
■ <걸리버 여행기>의 풍자정신은 알레고리의 힘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구두굽 높이로 ‘정파’를 가리는 소인국의 세계는, ‘신기한 소인국의 세계’는 뭔가 우리 인간 세계와 다를 거라는 기대감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대목이다. 소인국 사람들 또한 우리처럼 사소한 문제로 어리석은 논쟁을 벌이며 자신의 사사로운 욕심을 거창한 도덕적 명분으로 포장한다. 조선의 붕당정치나 현대의 정치판처럼 말이다. 영국의 독자들은 당연히 토리당과 휘그당과의 오랜 갈등을, 미국의 독자들이라면 공화당과 민주당의 오랜 갈등을 떠올렸을 것이다. 이렇듯 알레고리는 언뜻 불가능해 보이는 판타지나 황당한 상상력을 동원해 현실에서 직접 언급하기 어려운 대상을 풍자한다.
■ 알레고리의 존재 이유 중 하나는 사회의 금기와 검열 때문이다. 어떤 사회가 대놓고 마음껏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것, 예를 들면 지배세력이 쉽게 용납하지 못하는 정치권력에 대한 비판이 흔히 알레고리적 상상력의 풍자 대상이 되는 것이다. 성적인 금기나 혁명적 이데올로기도 알레고리의 프리즘을 통과하면 얼마든지 문학적 소재가 될 수 있다. 1970년대 한국사회에서 그토록 ‘금서’와 ‘금지곡’과 ‘상영금지처분’이 많았던 것도 그 모든 자유로운 예술적 상상력이 ‘독재에 대한 저항의 알레고리’로 비춰졌기 때문이다. <아침이슬>이나 <동백아가씨> 같은 지극히 서정적인 노래들조차 금지곡이 된 것은 알레고리의 화살표가 굳이 독재를 가리키지 않아도 ‘도둑이 제 발 저린’ 격의 독재 권력이 지레 겁을 먹고 예술가들의 표현의 자유를 금지하려 했기 때문이다.
■ 알레고리의 또 다른 힘은, 시대를 초월하는 보편적 감동의 원천으로 기능한다는 점이다. <홍길동>과 <임꺽정>은 어느 시대에 읽어도 빈부격차로 인한 계급갈등의 알레고리로 읽힌다. <홍길동>과 <임꺽정>이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그토록 수없이 리메이크 되는 까닭도 바로 그 강력한 알레고리의 힘 때문이다. 계급 갈등과 신분 갈등으로 인한 고통은 시대를 초월하여 인간의 보편적인 고통이고 이런 이야기는 어떤 시대든 그 시대에 맞게 ‘각색’되어 강력한 정치적 알레고리로 확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 얼마 후, 빨간 망토 소녀가 할머니 집에 도착했어요.
하지만 할머니의 모습이 많이 달라 보였어요.
“할머니 귀는 왜 이렇게 커요?”
“귀가 커야 네 말을 잘 들을 수 있으니까.”
“할머니 손은 왜 이렇게 커요?”
“손이 커야 너를 잘 잡을 수 있으니까.”
“할머니 입은 왜 이렇게 커요?”
“입이 커야 너를 잡아먹을 수 있으니까 그렇지!”
할머니로 변장하고 있던 늑대는 벌떡 일어나 빨간 망토 소녀를 꿀꺽 삼켜버렸어요.
배를 채운 늑대는 코를 드르렁드르렁 골며 잠이 들었어요.
-그림 형제, <빨간 망토> 중에서
■ 우리가 어린 시절 읽었던 수많은 동화들도 저마다 특유의 알레고리적 상상력을 보여준다. 동화의 알레고리는 흔히 아이들에게 어른들의 세계를 ‘직접’ 그대로 재현해주기 어렵기 때문에 탄생한다. 빨간 망토 소녀를 잡아 먹으려는 늑대는 소녀들을 노리는 ‘치한’의 알레고리이며, <인어공주> 또한 ‘사람’과 ‘인어’만큼이나 커다란 신분의 격차를 가리키는 알레고리가 아닐까. 동화의 알레고리는 ‘어른의 세계’와 ‘어린이의 세계’ 사이에 놓인 금기와 규칙의 장벽을 넘어서기 위한 문학적 장치였던 셈이다. 로베르토 베니니의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 했던 ‘하얀 거짓말’도 바로 알레고리적 상상력의 사례다. 아버지는 수용소의 감금생활을 흥미로운 ‘게임’의 알레고리로 설명해주며 아들이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결코 용기를 잃지 않도록, 아버지를 눈앞에서 잃어버리는 공포에 떨지 않도록 죽는 순간까지 ‘게임’이라는 슬픈 알레고리를 실현했던 것이다.
■ 알레고리는 ‘다르게 말하기’를 통해 시대의 환부를 건드리면서 동시에 그 풍자와 비난의 책임을 완화시키는 측면도 있다. 그러나 알레고리는 단지 작가가 풍자의 대상에 대하여 직접 말하기 껄끄러울 때 그 파장과 책임을 완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알레고리로 인해 삶의 진실이 더욱 아름답고 풍요롭게 드러날 수 있을 때, 알레고리로 인해 문학과 삶이 좀 더 풍부한 은유와 상징으로 빛날 수 있을 때 그 힘을 발휘한다.
■ 저의 팔자 무상하여 홍 아무개 천비의 배를 빌려 태어났사오나 아비와 형을 마음대로 부르지 못하옵고, 아울러 집안에 시기하는 자가 있어 목숨을 보전할 길이 없사와 산속에 들어가 초목과 함께 늙자 하였으나 하늘이 밉게 여기사 적당에 빠졌사옵니다. 하오나 일찍이 백성의 재물은 추호도 취한 바 없고, 수령의 뇌물과 불의한 놈의 재물을 앗아 먹고 간혹 나라 곡식을 도적하였사오나, 군부가 일체이오니 자식이 아버지의 것을 먹기로 도적이라 하오리까? 어린 자식이 어미젖을 먹는 일과 같사옵니다. 이는 도무지 조정 소인이 임금님의 총명을 가려 모함한 죄요, 신의 죄는 아니로소이다.
-허균, <홍길동전> 중에서
엄혹한 일제말 '메밀꽃'만 탐닉했을까..이효석 작품 곳곳엔 '反日 매운꽃' 가득
방민호
서울대 교수
일제강점 매서운 시대에 대놓고 말못한 反日·反戰 희곡 '역사'엔 내면적 고뇌 예수의 가르침에 빗대어 운명적 선택의 길 암시 2차대전 당시 쓴 '하얼빈' 먹고 먹히는 전쟁의 참극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려내 자전적 소설 '풀잎'에서는 등화관제에 저항함으로써 일본의 전쟁정책 비판한셈
◆ 매경 포커스 / 우리가 몰랐던 작가 이효석 (上) ◆
지나간 작가에게 한 번 부여된 이미지는 여간해서는 잘 바뀌지 않는다. 작가 이상이 금홍과의 스캔들성 이슈와 '날개'(잡지 '조광' 1936년 9월호) 한 편으로 세간에 알려져 있듯이 이효석(1907년 4월 5일~1942년 5월 25일)은 '메밀꽃 필 무렵'('조광' 1936년 10월호)의 작가로 간략하게 압축된다. 이 작품에 나타난 달밤 산길의 눈부신 묘사와 이 서정적 풍경에 어우러진 아름다운 사연이 작가 이효석의 이름을 단단히 부여잡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이유로 말미암아 그가 진정한 문학의 길을 묻고, 탐구하고, 일제강점기의 어둠을 헤치며 자신만의 매운 꽃을 피워 올린 작가라는 사실은 자주 잊히곤 한다. 해마다 가을에 열리는 봉평 메밀꽃 축제가 더욱 풍요로워질수록 이효석의 이미지는 한국을 대표하는 서정적인 작가라는 하나로 고정되는 것이다. 그의 사거(死去) 80주년이 되는 올해 독자들이 잘 알지 못하는 이효석 문학의 진면목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려면 일제 말기에 이효석이 어떤 작품들을 남겼는지부터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 희곡 '역사'가 말하려 한 것
1939년은 일제가 중일전쟁에서 태평양전쟁으로 나아가는 길목이었다. 그들은 한국인들의 신문과 잡지를 폐간하기로 했고, 머지않아 잡지들마저 폐간될 운명이었다. '문장'은 가람 이병기와 이태준, 정지용이 주도한 한국어 문학의 심장과도 같은 잡지였다. 이 '문장' 1939년 12월호에 이효석은 '역사'라는 이름의 희곡 한 편을 발표한다. 이 의미심장한 제목을 가진 희곡은 깊은 어둠을 향해 나아가는 한국인들의 운명에 대한 천착의 산물이었다. 여기서 이효석은 시공간적으로 당시의 한국 사회에서 멀리 떨어진 예수의 시대로 독자들을 이끈다.
바야흐로 예수와 나사로와 그의 자매들 마리아와 마르다, 나중에 예수를 배신하게 되는 유다 그리고 마리아를 사랑하는 토마스 등이 무대에 등장하게 된다. 가난한 베다니 동네의 나사로를 나흘 만에 죽음에서 소생케 한 후 예수는 그의 누이들의 초대를 받는다. 마리아는 예수의 가르침을 깊이 따르며 예수의 발등에 값비싼 향유를 부어 드린 여인이다. 토마스는 그녀를 열렬히 사랑하지만 당시에 '열심당'(젤롯당)이라고 불리던 무력 투쟁 집단의 일원이다. 열심당은 수탈을 일삼는 로마제국과 헤롯 왕의 압제에 희생적인 투쟁으로 항거하고자 했다. 세 개의 길이 이 작품 속에서 제시된다. 하나는 토마스의 길을 따라 무력 투쟁의 길을 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의 길을 따라 사랑과 용서의 삶을 사는 것이며, 마지막 하나는 유다처럼 물질적 이욕에 사로잡혀 숭고한 길을 저버리는 것이다. 과연 어떤 길이 올바르며 가야 할 길인가?
1939년은 당시 문학인들에게 하나의 갈림길이었다. 춘원 이광수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피검되었다 병보석으로 풀려난 후 '본격적인' 대일 협력의 길에 접어들었다. 자하문 너머 세검정에 있던 별장을 파는 이야기 '육장기'('문장' 1939년 9월호)에서 이광수는 장편소설 '사랑'이 보여준 종교 통합적인 사랑의 길 대신에 당면한 전쟁을 승인하는 길을 선택했다. 채만식은 '냉동어'(잡지 '인문평론' 1940년 4~5월호)를 통하여 엄혹한 감시와 억압의 시대의 '냉동어'처럼 꽁꽁 얼어붙은 지식인의 초상을 생생하게 그려냈지만 이 작품을 계기로 그가 나중에 '민족의 죄인'(잡지 '백민' 1948년 10월호)에서 명명한 '대일 협력'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러한 것들은 '유다'가 되는 길일 수밖에 없었다. 그와는 다른 무력 항쟁의 길이 있을 수 있었다. 도쿄제대에서 독문학을 공부하고 아쿠타가와상 후보작가로까지 올랐던 김사량(1914년 3월 3일~1950년 10월?)은 중국에 파견된 기회를 틈타 탈출하여 실제로 무력 항쟁의 길로 나아갔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저 옛날 예수의 가르침처럼 세속적 항거나 투항 그 어느 쪽도 아닌 종교적 승화의 길을 선택할 수는 없는가? 이 길은 너무나 좁고 앞에 제시된 두 개의 길보다도 이해받기 어려운 길이었다. 희곡 '역사'를 통하여 이효석은 당시의 한국인들, 문학인들 앞에 펼쳐진 운명적 선택의 길을 보여주고 그 자신 또한 그와 같은 내면적 고뇌를 겪고 있음을 암시하고자 했다. 이 희곡은 그러니까 일종의 알레고리, 당시 한국인들의 운명적 선택의 문제를 예수의 시대 그것에 빗대어 이야기하고자 한 것이었다.
◆ 이효석이 꿈꾼 '다른 우연'
이효석의 호는 가산(可山)으로 1907년 강원도 평창군 진부에서 태어났다. 이 무렵 이효석은 평양숭실전문의 교수에서 대동공업전문의 영어 및 독일어 촉탁 교수로 자리를 옮기고 있다. '촉탁'이라 함은 일종의 비정규직을 의미할 것이다. 숭실전문이 신사 참배를 거부하면서 1938년 3월 폐교된 후 1939년에 다시 그렇게라도 취직한 것이다. 1940년 2월에는 아내 이경원이 세상을 떠나고 갓난아기였던 차남 영주까지 잃는다.
이 시기에 이효석의 삶은 가족사적 차원에서나 공적인 측면에서나 커다란 위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이 무렵을 전후로 하여 이효석은 자주 중국 하얼빈을 여행한 것으로 나타난다. 장편소설 '화분'(1939년 9월 인문사 펴냄), 단편소설 '하얼빈'('문장' 1940년 10월호), 다시 장편소설 '벽공무한'(1941년 8월 박문서관 펴냄) 등은 그러한 여행의 산물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어째서 그는 이 엄혹한 시기에 그렇듯 '한가한' 여행을 떠나곤 했던 것일까?
오늘날 우리에게 이효석의 이미지는 '메밀꽃 필 무렵' 같은 서정적 소설을 쓰고 수필 '낙엽을 태우면서'(1938년 12월 조선문학독본으로 발행) 같은 데서 볼 수 있듯이 사람들이 헐벗고 굶주릴 때 아궁이에 불을 때며 인생을 음미하는 고고한 취미에나 사로잡혔던 것으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효석이 서울을 떠나 한국 사회 '변두리'로 떠돌고 그곳에서의 삶을 고수한 것과 만주국 도시 하얼빈을 오간 것은 당시 한국 사회의 중심 지향성, 폐쇄성을 향한 말 없는 저항 같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바로 그와 같은 의미에서 단편소설 '하얼빈'은 바야흐로 유럽에서 전개되고 있던 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머지않아 닥칠 태평양전쟁에 대한 작가의 태도를 읽을 수 있게 한다.
여기서 주인공 '나'는 독일에 의해 파리가 함락된 이후의 하얼빈으로 여행을 간다.
그 사이에 하얼빈의 도시 풍경은 몰라보게 달라졌다. 이 도시에 설치되어 있던 프랑스와 네덜란드 영사관도 철거되다시피 했다.
주인공이 만난 러시아 여자 유우라는 이 도시도 벌써 "식민지"가 되어 버렸다고 한다. 원래 하얼빈은 러시아가 동쪽으로 진출하고자 하면서 개척한 도시였으나 러일전쟁 이후 서양 각국이 다투어 진출하면서 동서양의 문화가 합류하는 독특한 세계 문화의 접경지대를 이루고 있었다. 여기서 주인공 '나'는 전체주의 국가 독일이 승승장구하는 세계사의 현실을 향해 "우연한 결정"일 뿐이라고 하면서 그렇다면 이 "현재와 다른 우연의 결정"을 생각해 볼수도 있다고 독백한다. 이것은 이효석이 이 전쟁에 대해 결코 좋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현대사는 당시 독일과 일본이 동맹 관계를 맺으면서 2차 대전을 확전 쪽으로 밀어붙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1940년 9월 27일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삼국동맹을 맺으면서 '추축국'을 형성해 영·프·미 중심의 연합국 측과 대결하고자 한 것이다. 이효석 소설 '하얼빈'이 발표된 시기가 1940년 10월이라는 사실은 이효석이 당시 세계사의 흐름을 아주 날카롭게 지켜보고 있었음을 예증한다.
◆ 일제의 전쟁을 반대한 작가
이 연장선상에서 또 다른 문제작 '풀잎'(잡지 '춘추' 1942년 1월호)의 존재가 각별히 부각된다. 이 소설의 주인공 준보는 아내를 잃어버린 실의의 시기를 딛고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고 있다. 여기 등장하는 주인공 '준보'라는 이름은 그 작품이 자전적 소설임을 시사하는 징표 가운데 하나다.
이효석은 작품 속의 자기를 가리키기 위해 준보 또는 학보, 현보 등의 이름을 썼다. '풀잎'은 이효석과 기생 출신 가수 왕수복의 실제 사랑을 소설로 '옮긴' 것이어서 작중 준보와 옥실은 등화관제가 실시된 평양의 뒷골목을 함께 산보한다. 등화관제란 적기의 내습에 대비하여 도시의 불빛을 모두 꺼버리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산책을 함께한다는 것은 자칫 국책에 저항하는 것으로 처벌될 수도 있다. 그러나 준보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의 내적 논리는 이러하다.
헐어진 가정을, 싸어서 새로운 생활을 설계해야 하고, 고독을 다스려서 보다 높은 사업을, 이루워야 함이, 인간 경영에 주어진, 영원한 과제인 까닭이다. 자멸의 길을 버리고, 창조의 길을, 찾어야 함이, 인류의 행복을, 가져오는 까닭이다.
여기서 이효석은 일제가 추진하는 이른바 '대동아전쟁'의 논리와 인간의 고도의 창조 행위로서의 사랑을 선명히 대비시킨다. 인간은 "자멸의 길을 버리고" "창조의 길"을 찾아야 한다. 그것만이 "인류의 행복"을 가져올 수 있다.
이로써 이효석의 반전적 태도가 선명히 드러난다. 그는 비록 겉으로는 자전적 소설을 쓰고 있는 것 같지만 그 행간에서 일제의 전쟁정책에 대한 반대의 뜻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소설의 제목이 '풀잎'이라 함은 무슨 뜻인가? 이는 미국의 현대시인 월트 휘트먼의 시집 'Leaves of Grass'를 인유한 것이다. 휘트먼은 사랑과 평화, 인류애를 고창한 미국의 가장 중요한 시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일제강점기의 한국 문학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일찍이 미국에 유학한 평양 출신 문학인으로 흑인문학을 소개하기도 한 한흑구 역시 휘트먼의 방랑적 삶에서 자기 문학의 지향점의 하나를 찾기도 했다. 작중에서 준보는 옥실에게 휘트먼의 시구절을 낭송해준다.
나는, 여성의 시인이며, 동시에, 남성의 시인이니라.
나는 말하노라, 여자됨은, 남자됨과 같이, 위대한 것이라고.
또, 말하노라, 남자의 어머니됨같이, 위대한 것은, 없노라고.
여기서 준보는 휘트먼의 시구절을 빌려 "여자됨"은 "남자됨"같이 "위대한 것"이며, 나아가 "남자의 어머니됨같이" "위대한 것은" "없노라"고 말한다. 남성적 폭력과 투쟁이 지고한 미덕으로 여겨지던 시기에 이효석은 '여성성'의 미덕을 고창한 휘트먼을 통하여 일제가 추구한 전쟁의 허망함을 날카롭게 비판했던 것이다.
◆ 소설 '은은한 빛'과 고구려 도검
이효석에 대해 미심쩍어 하는 시선 가운데에는 그가 일제 말기에 몇 편의 일본어 소설을 발표한 것을 염두에 둔 것도 있다. 한국어가 억압당하던 그 시기에 일본어 소설을 쓴 것 자체만으로도 문제를 삼을 수 있다는 분위기가 지금 팽대해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어 단편소설로 아쿠타가와상 후보에까지 오른 김사량이 끝내 망명 무력 저항의 길을 걸었던 사실이 시사하듯이 '일본어 소설=대일 협력'이라고 등식화하는 것이 반드시 타당하지만은 않다.
이효석의 일본어 소설 몇 편은 국책적인 소재를 다룰 때도 그것이 노골적인 대일 협력적 태도로 귀결되지 않도록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며, 무엇보다 'ほのかな ひかり(호노카나 히카리, 은은한 빛)'(잡지 '문예' 1940년 4월호)의 주인공인 조선인 골동품상 '욱'은 일본인 박물관장 '호리'가 탐내는 고구려 도검을 결코 그에게 넘기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여기서 빛나는 고구려 도검이 일종의 상징적 암시를 담고 있음은 물론이다. 일본의 일본어 잡지에 일본어로 소설을 발표하면서 그 독자들을 향하여 빛나는 고구려 도검을 결코 일본인 손에 넘기지 않겠다고 하는 조선인 청년의 형상을 그린 것은 이효석의 정신적 태도를 강하게 내비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필자는 이 글에서 일제 말기라는 험난한 시대를 살아간 이효석의 작가적 태도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를 가능케 했으며, 또 그렇다면 '메밀꽃 필 무렵' 같은 작품은 무엇을 말하고자 한 것일까? 다음 글에서 이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해가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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