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른거리는 봄빛을 간직하고 피어났던 산수유는 노을이 스러지듯이 개나리에게 자리를 내주었고 꼿꼿한 존재감을 자랑하며 피어났던 목련이 남루하고 참혹하게 떨어져 내리는 동안까지도 그는 봄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개나리꽃에 파란 싹이 듬성듬성 생겨나면서 철쭉은 꽃망울에 잔뜩 힘을 모으며 자신의 다음차례를 기다렸고, 하늘에선 때 아닌 봄눈이 우수수 흩날렸다. 벚꽃이다. 벚꽃은 군집으로 피어나 군집으로 떨어져 내리며 몽롱한 봄을 장식한다.
도심 한복판에서 이렇게 대형 봄 뮤지컬이 부산스럽게 공연되고 있는 동안 산 속에선 진달래가 누가 보던 말든 저 혼자 고독하고 청초하게 피어났다. 이름 모를 산새가 울고 지나간 그 여백이 아련하였지만 그래도 진달래는 따라 울지 않았다.
안성 소현리 들판은 온통 배꽃 천지였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 나오는 허생원이 달밤에 본 메밀밭을 ‘소금을 뿌린 듯이 흐붓한 달밤에 숨이 막힐 듯’ 이란 표현을 사용했는데 난 벌건 대낮에 소금을 뿌린 염전을 바라보고 있는 착각에 빠져든다.
이제 막 터져 나오기 시작한 배꽃은 팽팽한 민낯 피부를 드러내며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나는 흥분되는 가슴을 애써 억누르며 여기저기를 쏘다니고만 있을 뿐 쉽게 자리를 잡지 못했다. 오십년은 족히 넘었을 배나무 자태에서 뿜어 나오는 아우라에 감당될 만한 뱃장이 자랐을 즈음에야 이젤을 폈다. 오늘을 위해 겨울을 나며 기다려온 변형 캔버스(117x38cm)를 이젤에 걸었다.
(흥분하지 말자! 흥분하지 말자!)
애써 마음을 이렇게 진정시키려 했지만 붓을 잡은 손은 하얀 캔버스 앞에서 사정없이 요동치며 난리법석을 떨기 시작했다. 온통 좌 우 전 후 배꽃 천지 속에서 혼자 이 봄의 클라이막스를 만끽하며 스케치하고 있다는 그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다. 주위는 온통 적막 그 자체였다. 오즈의 마법사 세상에 뚝 떨어져있는 신비감. 장담컨대 앞으로도 오늘 같은 날과 장소를 받아 배꽃 그리러 나오기는 쉽지 않으리란 생각에 감사한 마음 또 감사한 마음일 수밖에 없었다.
점심 식사하러 나오며 배 밭에서 일하는 아주머니에게 말을 붙였다. 벌을 대신해서 벌의 일을 하고 계시 단다. 인공수정을 하고 계신 거였다. 이상 기온과 환경 공해로 나날이 벌의 수는 줄고 있는데 야속한 배꽃은 지금부터 채 3일을 못 버티고 우수수 바람에 다 떨어져 버리고 마는 거라 하니 어찌하랴 사람이라도 나서 저들의 혼인을 속히 성사시킬 수밖에.
오전에 잡아둔 구도로 오후에 색상을 입혔다. 캔버스가 크다고 그림 그리기가 어려운 거 아니고 캔버스가 작다고 그림 그리기가 쉬운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란 생각이다. 그림은 3시 30분에 끝났다. 물론 끝이란 말이 예술엔 없지만 서도. 오늘의 봄날이 끝이고 오늘의 사생이 끝이란 뜻이겠지.
2013. 4. 28
첫댓글 ㅎㅎ 동영상 재미있어요. 꿀벌이 되어 배꽂 물결 위를 비행하는 기분이었습니다.^^
꿀벌의 시선!
우와 역시 시인다운 발상의 전환이셨어요.
난 그냥 중경삼림의 왕가위 감독 흉내좀 내본 거뿐입니다.
동영상 사진 성큼 성큼 발걸음 만큼 흔들리네요.^^
사진과 또 다른,생생한 현장감이 느껴집니다.
누군 흥분하지 말아야지 하고도
요동치며 난리법석하는데
난 제발 '니 맘대로~ 미친년 널 뛰듯 그려봐'하는데도
영~ 아쉬움만 남습니다.
어린아이처럼 그린는것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닌데....
참 어렵네요.
캔버스 사이즈 맘에 들어요?맞춤인가요?
배꽃 그리기 딱 좋아 보여요.
정형화 된 사이즈 보다 신선해요.
윈디 박 그림 안 보고 온 날은 이 사이트에 들어 올땐 설레입니다
이번엔 어떤 그림을 어떻게 그렸을까하고....
나도 이렇게 그리고 싶었는데....하며
앞으로도 멋진 그림 위해~ 홧팅!!!!
변형된 사이즈
특히 긴 사이즈만 보면 웬지 흥분됩니다.
오늘 이거 들고 나오며 제발 흥분하지 말자고 얼마나 다짐했는지 모른답니다.
전 놀부가 되고 싶었거든요.
나름 자신의 주관이 확실하고 경제력있는 놀부.
오늘은 놀부들이 제일 싫어하는 근로자의 날.
오늘만은 흥분해서 살아볼까요?
난 그림 그릴땐 흥부ㄴ 되고 싶고 그외 모든일엔 놀부하고 싶은데...어렵겠지요...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