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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30일(성령강림절 후 여섯 번째 주일)
열왕기상 22:24~28
고생의 떡과 물을 먹을지라도
하늘사랑교회 주일 오전 예배 설교 문
본문 접맥 적 주제설교 형식
김규태 목사
어느 날, 이스라엘 아합왕은 유다의 여호사밧 왕을 만났습니다. 아합왕은 이스라엘과 유다 두 나라가 힘을 합쳐 아람에게 빼앗겼던 길르앗 라못을 되찾자고 제안했습니다.
길르앗 라못은 원래 이스라엘 땅이었는데, 예전에 아람에게 빼앗겼던 군사적 요충지였습니다. 3년 전 이스라엘과 아람 사이에 전쟁이 있었을 때, 아합왕은 아람 왕을 살려주는 조건으로 이 땅을 돌려받기로 했었습니다. 그러나 3년이 지나도록 땅을 돌려받지 못하자, 아합왕은 전쟁을 일으켜 아람을 치려고 마음먹게 되었습니다.
유다의 여호사밧 왕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여호사밧 왕은 전쟁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여호사밧 왕은 아합왕에게 선지자를 불러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자고 제안했습니다.
이에 아합왕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사백 명의 선지자들을 궁으로 불러들였습니다. 사백 명의 선지자들은 아람과 전쟁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 성읍을 왕에 손에 넘기실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사밧 왕은 그들의 예언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왕에게 속한 예언자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호사밧 왕은 이들 외에 하나님의 뜻을 물어볼 또 다른 선지자가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아합왕은 당황하며 미가야라고 하는 선지자가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아합왕은 그가 늘 자신에 대하여 흉한 예언만 말하는 사람이라며 탐탁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여호사밧 왕은 그런 말씀을 말라며 단호하게 대답했습니다. 결국, 아합왕은 한 내시를 불러 미가야를 속히 궁으로 데려오게 하였습니다.
미가야를 부르러 간 사신은 미가야 선지자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했습니다. “선지자여! 다른 선지자들의 말이 하나 같이 왕에게 길하게 하니 청하건대 당신의 말도 그들 중 한 사람의 말처럼 길하게 하소서!”
이에 미가야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
왕 앞에 선 미가야 선지자는 흉한 예언을 말했습니다.
“내가 보니 온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 같이 산에 흩어졌는데 여호와의 말씀이 이 무리에게 주인이 없으니 각각 평안히 자기의 집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셨나이다(17절).”
미가야 선지자의 예언에는 목자인 아합왕의 죽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리고 왕을 잃은 백성이 뿔뿔이 흩어져 자기 집으로 돌아갈 내용이 예언되었습니다. 미가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왕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아합왕은 단단히 화가 났습니다. “뭐라고? 내가 전쟁에서 죽게 될 것이라고? 여보시오! 여호사밧 왕! 내가 저 사람이 나에 대하여 흉한 것만 예언할 것이라고 내가 미리 이야기하지 않았소!”
미가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모든 선지자의 입에 넣어 왕에 대하여 화를 말씀하셨다고 예언했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아합왕을 길르앗 라못으로 올려보내 그곳에서 죽게 하실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할 때 아합왕의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과연 우리가 아합왕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신앙적 교훈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우리는 중요한 일을 앞두고서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구하려 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아합왕처럼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합왕은 아람과 전쟁하는 중요한 문제를 두고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유다의 여호사밧 왕이 중요한 일을 앞두고 하나님의 뜻을 구했던 것과는 달리, 아합왕은 중요한 일을 앞두고서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아합왕은 평소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욕심을 더 중요하게 여겼던 사람이었습니다. 아합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길르앗 라못을 되찾는 일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열왕기상 21장에는 ‘나봇의 포도원’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합의 왕궁 옆에 좋은 포도원이 있었습니다. 그 포도원 주인은 나봇이었습니다. 아합왕은 나봇의 포도원을 탐내어 그 포도원을 자신에게 달라고 나봇에게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나봇은 왕의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그 이유는 나봇이 ‘기업을 파는 것은 하나님이 금지하신 일’이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봇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였습니다. 그리고 나봇은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아합왕은 자기 아내 이세벨을 통해 나봇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웠습니다. 왕의 아내 이세벨은 거짓 증인을 세워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다고 거짓말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왕의 도장을 찍은 편지를 그 지역의 장로들에게 보내 나봇을 돌로 쳐서 죽게 했습니다.
결국, 나봇이 죽자 그의 포도원은 왕에게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아합왕은 땅에 대한 욕심으로 나봇을 억울하게 죽였고, 하나님의 계명을 어겼습니다.
이처럼 탐욕에 눈이 어두워진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구하기보다 세상이 주는 기쁨을 구합니다. 이런 사람은 결국 세상 적이요, 정욕 적이요, 마귀 적이 되고 맙니다.
은 30냥에 예수님을 팔았던 가룟 유다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딤전 6:10).
사랑하는 여러분, 중요한 일을 앞두고 탐심을 경계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십시오.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사 55:3)”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 나아와 그분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이 영혼이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어떤 분이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지인들을 위한 선물을 준비하면서 선물 수준 때문에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약속한 선물을 했다가 창피를 당하지 않을까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순수하게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려 했는데, 선물을 고르다 보니 좀 더 비싼 선물을 해서 사람들의 인정과 도움을 받는 기회로 삼고자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제 부족함을 하나님께 아뢰고 하나님의 도움과 지혜를 구하기보다는 선물로 사람들에게 환심을 사서 제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 했음을 회개합니다. 순수함을 잃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과 상관없이 인간적인 마음을 따랐음을 회개합니다.
지인들에게 잘 보이려고 비싼 선물을 하려던 마음을 내려놓습니다. 사람들의 관심과 칭찬을 갈구하는 끈질긴 인본주의 모습이 제게서 사라지기를 소망합니다.
인간은 사랑할 대상이지, 의지할 대상이 아님을 늘 기억하기 원합니다. 완전한 지혜와 모든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을 믿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 가는 일에 집중하게 하소서.
제가 아는 한 집사님은 직장에서 사장에게 인정받기 위해 밤마다 늦게까지 야근을 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이 모습을 보다 못한 여동생이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오빠, 내가 보기에 오빠는 지나치게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일을 하거나, 아니면 일 중독에 걸려 일하는 사람처럼 보여. 제발 일하는 동기를 바로 세울 수 없을까?”
이 집사님은 여동생의 이야기를 듣고는 자신이 일하는 동기를 스스로 점검해 보았다고 합니다. 이 집사님은 상사에게 인정받아 회사의 경영권을 물려받으려는 동기가 자기 안에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다고 고백했던 청년 시절의 약속을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였다고 합니다.
이 일을 계기로, 이 집사님은 틈틈이 시간을 내어 자신에게 주어진 달란트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분에게는 청년 시절부터 드럼을 잘 치는 달란트가 있었는데, 주변을 살펴보니 드럼이 망가져 있어서 수리가 필요하거나, 드럼은 있는데 드럼 연주자가 없는 교회들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집사님은 그런 교회들 찾아가 무료로 드럼을 고쳐 주거나, 무료로 드럼 레슨을 시키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물론 예전처럼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고는 있지만, 직장 일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려는 이기적인 마음을 내려놓으니까 훨씬 더 즐겁게 일을 하게 되었다고 간증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일에 대한 탐심을 버리십시오. 또한, 지나치게 많은 물질을 소유하려는 마음이나 사람들에게 지나친 인정을 받으려는 탐심을 버리십시오. 이와 같은 탐심은 여러분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결국 여러분의 삶과 건강과 가정을 무너뜨리게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물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오십시오.
둘째로, 우리는 내가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는 마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아합왕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합왕은 유다의 여호사밧 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다고 말하자, 미리 준비해 두었던 400명의 선지자를 왕궁으로 불렀습니다. 그러나 평소 자신에게 좋지 않던 예언을 했던 미가야 선지자는 부르지 않았습니다.
과연 400명의 선지자가 누구였습니까? 비록 이들이 겉으로는 선지자였으나, 실제로는 아합왕이 듣고 싶어 했던 말만 전했던 거짓 선지자들이 아니었습니까?
심지어 시드기야 같은 선지자는 철로 뿔을 만들어 놓고, 하나님께서 이것으로 아람 사람을 찔러 진멸하라고 말씀하셨다고 예언하였습니다. 이에 기회를 잡은 다른 선지자들도 속히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 승리를 얻으라고 왕을 부추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들의 예언은 하나님을 위한 예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예언은 거짓 예언이었습니다. 사람의 숫자가 많다고 해서 그것이 꼭 진리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진리는 사람의 숫자와 상관이 없습니다. 아무리 400명의 선지자가 예언하였어도, 하나님 앞에 바로 선 미가야 한 사람의 예언만이 하나님께 받은 예언이었습니다.
과연 말씀을 듣는 여러분의 자세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설교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진지하게 그 말씀을 받아들이십니까? 여러분은 성경을 읽거나 묵상할 때, 여러분이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는 유혹에 넘어가지는 않습니까?
혹 여러분의 마음에 찔림이 되고, 걸림이 되는 말씀이 들려오더라도, 여러분은 그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취사선택하려는 ‘영적 편식증’을 경계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세에 나타나게 될 징조로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않고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둘 것이라고 말했습니다(딤후 4:3).
과연 바울이 ‘귀가 가렵다’라고 표현했던 말이 어떤 현상을 일컫겠습니까?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아합왕처럼 자기에게 흉한 예언은 들으려 하지 않고, 자신에게 길한 예언만 들으려는 잘못된 자세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바울은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서,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네 가지 유익을 설명하면서, 그중에 하나가 ‘책망’이라고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책망의 말씀’은 우리가 즐겨 듣는 말씀이 아닙니다. ‘책망의 말씀’은 우리가 회피하고 싶거나, 들었어도 못 들은 척하고 싶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책망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는 성경이 주는 유익을 얻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일 여러분이 설교를 듣거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는 중에 여러분의 마음에 찔림이 생기고, 심기가 불편해진다면 “지금 성령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고 계시는구나!”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의 책망을 듣고 회개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미가야 선지자에게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없겠습니까?
미가야 선지자가 아합왕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하자, 거짓 선지자 시드기야가 미가야의 뺨을 때리며 말했습니다. “여호와의 영이 나를 떠나 어디로 가서 네게 말씀하시더냐.”
그다음에는 아합왕이 미가야 선지자를 핍박했습니다. 아합왕은 미가야를 옥에 가두고, 자신이 전쟁을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을 먹이라고 부하들에게 명령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는 핍박을 받아야 합니다. 미가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거짓 선지자에게 뺨을 맞고, 왕의 미움을 받아 옥에 갇히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는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로 알라(요 15:18).”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미움을 받는 이유는 우리가 주님의 택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러시아에서 선교사역을 하시던 한 선교사님이 계셨습니다. 이분은 러시아인을 향한 불붙는 사랑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가족까지 이끌고 러시아로 들어갔습니다.
어느 날 선교사님은 러시아인의 테러를 당해 죽을 뻔한 사건을 만났습니다. 이름 모를 러시아인들이 선교사님을 흠씬 두들겨 패서 길바닥에 시체처럼 갖다 버린 것입니다.
더구나 사모님과 어린 자녀들까지 똑같은 일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위협적이고 두려운 일입니까? 더구나 선교사님은 재정 후원을 충분히 받지 못해 경제적인 어려움마저 겪어야만 했습니다.
참으로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으나 선교사님은 러시아를 떠나지 않고 2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포기하지 않고 선교했습니다. 이 선교사님은 어떻게 그토록 오랜 시간을 선교사로서 헌신할 수 있었을까요?
선교사님은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았습니다. 생명의 위협을 받고 경제적인 기근과 어려움을 겪는 중에도, 선교사님은 자신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본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본 그 가정에 하나님은 은혜의 단비를 내려 주셨습니다.
두 자녀는 미국 명문대학에서 4년간 전액 장학금과 생활비를 받고 공부하는 복을 누리게 되었고, 사모님은 청소하다 발견한 말라비틀어진 물감으로 그림을 그려 러시아 공모전에서 1등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극심한 기근 중에도 만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개입해 주십니다. 그래서 고난을 이길 힘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출처: 이승희, 「하나님을 알아 가는 행복」(두란노, 2016); 「생명의 삶 플러스」(두란노, 2024년 6월호), 239쪽에서 재인용.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섬겨나가는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고난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이 미가야 선지자처럼 담대하게 고난을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왕이 주는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을 먹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명을 끝까지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과연 이 이야기의 결말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고 전쟁터에 나갔던 아합왕은 전쟁터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놀라운 점은 아람 군사 중에 한 사람이 무심코 활을 당겨 이스라엘 왕의 갑옷 솔기를 맞춘 점입니다.
이 아람 군사가 이스라엘 왕을 알아보고 일부러 활을 당긴 것도 아니었습니다. 한 군사가 무심코 당긴 활이 어떻게 기가 막히게 이스라엘 왕의 ‘갑옷 솔기’를 맞추게 되었을까요?
여러분, ‘갑옷 솔기’가 무엇입니까? 갑옷조각과 갑옷 조각을 연결한 연약한 부위가 아니겠습니까? 아마 이 부분은 누군가 작정하고 맞추려고 해도 맞추기 어려운 부분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우연처럼 보이는 이 일을 통해서도 약속하신 대로 아합왕을 심판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중요한 일을 앞두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에 승리의 길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되, 여러분이 듣고 싶은 말씀만 들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영적인 편식증을 경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말씀을 주시든지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라는 자세로 말씀을 들으십시오.
아울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십시오! 혹 여러분이 말씀 때문에 끌려가 옥에 갇히고,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을 마시더라도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고난을 견디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당하는 고난은 훗날 큰 칭찬과 상급으로 우리에게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이 귀한 축복이 여러분과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