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창을 모두 내리고 세 명의 여자가 목청껏 노래를 따라 부르며 20분 넘게 국도를 달렸다. 카누를 타겠다고 중학생 딸 둘과 처음 떠나보는 1박2일 홍천 여행이었다. 태풍이 한바탕 지나간 뒤라 구름도 없고 바람도 딱 적당히 부는 그런 날이라서였는지 좀 더 설레고 모든 게 행복하게 느껴졌다. 한참을 달리다가 퍼뜩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른 지 20분이 지나도록 차 한 대가 안 지나갔잖아! 도로를 전세 내고 블록버스터급 영화를 한 편 찍어야 한다면 꼭 다시 이곳을 찾아야겠다는 얼토당토않는 생각을 잠시 했다.
그나저나 이건 ‘한적하다’는 표현으론 부족했다. 반경 수킬로미터 내외에 마운틴 빼고는 인간이라곤 우리 셋뿐이었다. 지구가 멸망해 우주 한 가운데 오직 나 하나뿐인 기분이랄 것이 들었다. 그래, 딱 한 번 느껴본 적 있는 기분이었다. 가도가도 언덕과 양떼만 보이는 뉴질랜드에서 어학공부를 한답시고 몇 달 머물렀을 스물 대여섯 시절이었다. 홈스테이로 가는 길이 아직은 서툴렀을 때 버스에서 잠깐 졸다가 모르는 곳에서 내린 나는 세상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이국땅에 오후 5시만 되면 사람 한 명 길가에 없는 한적한 크라이스트처치라는 동네에서 심지어 영어도 아직 잘 못하는 부끄럼쟁이 이십대로 어쩔 줄 모르고 그 자리에 붙박인 채 우주 한 가운데 오직 나 하나뿐인 것만 같은 경험을 했다. 잠시 무서웠지만 나란 존재가 한없이 비대해지는 느낌이 들면서 조금 황홀해졌고 그 후론 완벽한 고요함에 잠시 넋을 뺏겼다. 나쁘지만은 않은 경험이었다. 또 언제 이런 일이 있을까 싶었는데, 대한민국 홍천에서 뉴질랜드를 만날 줄이야.
카누는 타지 못했다. 태풍 때문에 댐을 열어놓은 상태라 카누가 뒤집어질지도 모른다고 했다. 홍천 여행 책자를 보면서 다른 체험에는 영 흥미를 못 느끼다가 그나마 눈에 띈 체험이 카누였는데 오는 날이 장날이었다니. 대신 산악용 골프카를 타고 산을 올라갔다오는 한 시간짜리 체험을 했다. 사장님이 직접 운전을 해주시는데 역시나 한 시간 코스 내내 사람 코빼기 하나 볼 수 없었다. 그때부터 우리는 진짜 홍천의 매력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딸 둘과 나는 서로에게 온전히 집중하며 옷에 붙은 나비 한 마리에도 수다스러워지고 깔깔대며 웃었고 대단한 걸 하지 않아도 기분이 좋아지고 몸이 편안해지는 중이었다.
금상첨화로 펜션에도 손님은 우리뿐이었다. 아무리 학교에 체험학습을 신청하고 평일에 온 여행이라지만 사람 구경이 점점 힘들어지니 우연의 일치가 필연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번 여행은 그동안 파이팅 넘치는 김관장과 사느라 시끌벅적했던 내 가슴 속이 싹 비워지는 치유의 여행이 되겠구나. 마침 김관장도 집에 두고 온 터라 안성맞춤이었다. 어차피 파이팅 넘치는 김관장에게 홍천 여행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을지도 모르니 잘된 일이었다. 사장님 내외분은 홍천의 슈퍼호스트로 유명하신데 그 친절을 독점할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었다. 저녁으로 간단하게 짜파게티를 먹기로 하고 마트를 찾아 펜션을 나섰다. 사람이 안 보이는 건 이제 어느 정도 적응이 됐는데 반경 수킬로미터 이내에 마트도 찾기가 어려웠다. 길치인 나는 동네 마트는 찾아볼 생각도 못하고 ‘하나로마트’를 내비에 치고는 차도 거의 없는 도로를 산 하나를 건널 정도로 멀리 다녀왔다. 돌아오는 길에 해가 지니 무섭기도 해서 우리 셋은 또 목청껏 노래를 따라 불렀다.
다음 날, 숯불닭갈비 맛집을 가도 막국수 막집을 가도 여기가 맛집이 맞나 싶을 정도로 가게를 전세 낸 듯 우리끼리 밥을 먹었다. 음식 맛만 보면 맛집이 분명했다. 그렇게 홍천에서 지낸 모든 순간이 사람을 떠나 자연 속에서 쉬어가는 시간이었다. 혼자였다면 조금은 외로웠을까? 하지만 사랑하는 딸들과 함께였기에 우리만 있을 수 있는 이 거대한 자연의 품이 참으로 고맙고 감사했다. 워낙 바다를 좋아하는 우리 식구들이었지만 바다는 워낙 탁 트인 시원함을 선사해줬기에 가족이 함께여도 바다를 바라보기 바쁘지 서로를 바라볼 시간은 많이 없다. 산으로 둘러싸인 홍천에 가보니 바깥을 바라보기보다는 가족들의 눈을 바라보게 되고 사람이 없으니 서로를 의지하게 되는 것 같았다. 싫어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다음번엔 김관장과 함께 오고 싶어졌다. 이번 여행이 로또 같은 기적이었는지 언제 와도 이렇게 쉬어가는 시간을 선사해줄지 정말정말 궁금해졌다.
첫댓글 아, 상상만 해도 행복해지는 풍경이에요. 이 글 읽고 나니 저도 당장 떠나고 싶어요!